개혁주의 설교의 특징

Peter’s Preaching(Acts 2:14-41)

PARTⅠ
개혁주의 설교의 특징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37-41)

서 언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도 베드로의 첫 설교는 오늘날 우리가 모본으로 삼아야 할 매우 단순하고도 중요한 설교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개혁주의 설교의 관점에서 볼 때 사도행전 2:14절 이하의 내용에서 우리는 개혁주의 설교 원리에 대한 몇 가지를 주목해 볼 수 있다.
(1) 성령의 강한 역사

첫째로 성령의 사역은 궁극적으로 아둔한 자를 믿음을 일으키시고 의지를 새롭게 하심으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며 그를 구주로 믿고 삶으로 주와 구주이심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성령의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놀라운 결과를 발견하게 된다. 성령은 지력이 부족하고 다혈질인 한 인간 베드로를 변화시키시며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듣고 배운 모든 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속을 확실히 알고 믿게 하였다.

(2) 설교를 통한 회개의 역사

두 번째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성령께서 베드로의 설교를 사용하여 3,000명의 회심자가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성경의 모든 내용을 자세히 그리고 논리 정연하게 그 뜻을 강설(講說)하였다. 그 강설을 끝까지 듣는 가운데 사람들은 양심의 큰 찔림을 받았으며 “이제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구원의 길을 찾게 되었다.

성령께서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빛을 비추시고 그 조명하심을 인하여 그들의 의지와 양심은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하셨다. 베드로역시 그리스도의 가르침 가운데 비추신 성령의 조명으로 성령께서 성경의 모든 일들을 기억나게 하시며 깨닫게 하시며 굳은 신뢰 가운데 설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3) 명확한 복음의 선포와 부흥

세 번째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의 내용과 그 결과를 주목해야 한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오해하고 있으며 무엇이 필요한지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말과 철학으로 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구약의 모든 말씀들을 상세히 풀어 그들의 눈앞에 열어주되 그들의 모든 마음을 그 말씀들로 살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완악하였던 그들 마음의 변화와 회심이었다.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뒤를 잇는 모든 개혁교회의 설교자들은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온 베드로의 설교와 같은 전통적인 설교방식과 능력을 신뢰하였고 거기서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거기서 멀리 떠났던 교회를 다시 말씀의 능력에로 돌이켰던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깊이 염려스러운 사실은 현 시대의 복음주의 교회 내에 이러한 설교에 대한 모순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쯤을 강력하게 수호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가 교회를 성장시키는 통로로서 별로 호평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자’로 인식되기보다도 오히려 양떼들에게 ‘비전을 제시하는 자’나 ‘용기를 주는 자’ 또는 ‘위로를 주는 자’로 인식되기를 원한다. 커뮤니케이션 장비의 발전과 커뮤니케이션 기법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성경공부나 소그룹을 통해서 신자들끼리 말씀을 나누는 활동이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수단으로 점점 활발해지는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강단의 역할에 대한 믿음이 점점 식어지고 희미해져가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 말씀의 메시지 자체보다도 방법론을 더 많이 강조하는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현실 가운데서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오직 성경’(sola Scriptura) 그리고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자들의 기치가 필요함을 절감하게 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그의 몸’일 뿐 아니라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오직 성경’은 교회를 교회답게 만든 중요한 모토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때문에 설교를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뒤를 잇는 모든 개혁교회들이 어떻게 그 강단을 지켜왔는지를 살피는 것은 오늘날 우리 개혁교회가 든든히 설 기초를 다지는 중요한 일이라 할 것이다.

I. 설교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이해

(1)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설교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啓示)해 주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되 다양한 방법으로 계시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계시하신 것을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라는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 일반계시

일반계시는 자연계시라고도 하는데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만물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시 19:1 이하), 양심(혹은 도덕적 감각)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롬 1:19-32) 그리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일컫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 같은 일반계시를 통해서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

– 특별계시

일반계시와는 달리 특별계시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직접 그리고 간접적으로 알리시는 방법을 말한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삼중적인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1)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예수 그리스도), 2)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성경), 3)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설교)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세 번째 형태가 바로 설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은 인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설교에 큰 비중을 두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 즉 계시를 증거 하는 중차대하고 엄숙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히 선포했다. 우리가 개혁자들의 설교에서 어떤 중요한 요소들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오늘날 종종 예배 속에 만연되고 있는 피상적인 설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루터와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청중들에게 들려지도록 계시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Preaching’ New Dictionary of Theology, IVP, 1990)

불링거(Heinnch Bullinger)에 의해 기록된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 제1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계시)이다.”(the preaching of the word of God is the word of God)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설교에 대한 개혁주의 견해의 표준이 되었다. 이러한 명제는 모든 종교개혁자들과 개혁교회 가운데서 예배 중심에 설교가 자리하게 된 중요한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2) 하나님의 영광을 재현한 칼빈의 설교

칼빈에 의하면 신학자의 우선적 과제는 성경에서 새로운 의미를 개발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성경의 기존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성경을 아주 진지하게 다루었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신학 작업은 성경의 진리를 명료하게 하고 그것을 적용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로마 가톨릭이 성경으로부터 멀리 떠나있었던 반면 칼빈은 ‘오직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에 먼저 강조점을 두었다. 그는 그의 책 ‘기독교강요’에서 “우리는 생각하거나 말하는 데서 성경을 유일한 지침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고 따라서 그는 자신의 전 신학체계를 성경에 근거하여 세웠다.

칼빈에게는 이처럼 성경이 모든 기독교 교리를 시험하는 변함없는 시금석이므로 그는 어떤 교리가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거나 인정하는 범위를 벗어나는 것에 대하여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성경의 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그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성경 이해와 함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우리의 경험적 이해도 더불어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의 신학의 목표는 정확한 논리로 사람들을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계시를 그들의 영혼 속에 경험적으로 되살아나게 하는 데 있었다. 칼빈은 설교를 예배의 중심으로 생각했고 진정한 설교를 통해 회중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설교자들에게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을 정확히 해석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라고 요구했다.

칼빈의 견해에 따르면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충실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경은 설교자의 사역에 권위와 내용과 능력을 공급해 주는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구원 사역을 위해 하나님이 설교에 현재적으로 임재하신다고 믿었다. 이런 점에서 설교란 복음에 대한 단순한 진술이 아니며 복음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일 뿐 아니라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전달하는 것이다.

기독론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성경이 정말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설교되고 들려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즉각적인 임재를 통해 성육하신 말씀이신 그분을 만나게 된다. 이럴 때 청중에게 그리스도의 인격을 정말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교는 그 자체가 하나님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설교자를 ‘하나님의 입’으로 확신했고(이사야 주석, 사 55:11)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는 다른 무엇보다도 설교라는 수단에 의해서 우리에게 현실화될 수 있다.

말씀을 듣는 자에게 신적(神的) 실재(實在)를 전달하는 설교의 이러한 기능 때문에 회중은 설교자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성경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증거 할 때 우리의 더럽고 추악함에 몸서리치게 되며,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두려워 떨고, 그의 한없는 자비와 용서를 들음으로 위로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설교에 관한 칼빈의 믿음은 설교의 효과는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 특별히 제삼위 하나님이신 성령에게 달려있다는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칼빈은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에 관하여 성령께서 내적인 조명을 통해 설교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각인되도록 역사하신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성령께서 하늘의 빛을 그들 안에 비추실 때 설교되는 말씀을 비로소 맛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칼빈은 다른 종교개혁자들처럼 성령께서 설교의 효과를 위해 두 가지 다른 방법을 사용하셔서 역동적으로 역사하신다고 생각했다. 이른바 성령의 ‘이중 역사’(double operation)라고 불리는 것이다.

즉 성령께서 설교자의 말을 통해 효과적으로 성경을 여신다. 동시에 같은 성령께서 또한 듣는 자들의 마음을 여시어 그들이 들었던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신다. 설교에서 이처럼 성령은 설교자가 말할 때와 청중의 듣는 행위 양쪽 다에 친히 역사하시는데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결과를 효과적으로 만들어내신다.

칼빈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말씀 공동체이며 모든 교회 사역자는 말씀의 사역자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성경만이 설교의 유일한 원천이요 내용이었다. 이 점에서 설교자들이 만일 교회의 기초가 되는 이 성경의 원천으로부터 멀어진다면 그들의 임무 역시 로마 가톨릭의 붕괴와 함께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아무리 귀중한 것이라고 하여도 설교의 기능이 단순히 객관적이고 교리적인 성경의 명제들을 전달하는 것에 그친다면 그 때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못한다. 설교의 우선적 임무는 회중들로 하여금 성경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살아있는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성경의 닫힌 문을 여는 것이요, 그 말씀을 경험함으로 회중의 정서로부터 반응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성령께서 오셔서 설교자와 회중 모두에게 능력과 빛을 더해주실 때만 이런 일이 발생한다.

II. 종교개혁자들의 뒤를 이은 청교도 목사들

문체에 있어서 애매모호하지 않고 명백한 것이 청교도 설교의 진수였다. 강조점에 있어서 교리와 실제가 놀랍게도 균형을 이루었으며, 설교 특성을 보면 그들이 사랑한 성경말씀을 문자적으로나 영적으로 강해하는 일에 충성스럽게 헌신하였다. 그들은 성경 이외의 어떤 것으로 설교한 적이 없다. 그들은 하나같이 충성스런 강해설교자들이었다.

청교도의 설교는 매우 명료하며 쉽게 이해되었다. 이 말은 그만큼 강단 전용의 교리나 신학들로 머무르거나 과시와 신비로움을 추구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청교도 목사들이 항상 성경을 충실하게 강해하는 목적은 그 해석한 말씀이 청중들의 지성과 정서에 영향을 비쳐 실제적으로 그 말씀에 의한 깨달음을 통해 청중들이 말씀을 만나고 느껴 삶의 변화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었다.

청중의 입장에서 그들이 설교를 잘 소화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으며 항상 그 말씀 그대로 지성과 정서에서 경험되도록 힘썼다. 만일 청교도 설교자들이 끊임없이 라틴어 풀이에만 열중했다거나 문장이 어디서 끝나는지도 모르는 식의 설교나 또 이중(二重)의 뜻이 들어있는 애매모호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설교하였다면 그와 같은 명성은 결코 얻지 못했을 것이다. 로저스 아스캄(Rogers Ascham) 목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설교자들인 우리는 위대한 사람처럼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처럼 말해야 하는 것이다.”

청교도 목사들의 설교에서 우리는 위대하고 황금 같은 사상들을 만나게 된다. 오늘날의 우리의 설교 내용과 비교할 때 감히 비교되어질 수 없는 숭고함과 고결함과 높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즉 그들의 설교 내용은 깊고 심오하며 영혼의 모들 것을 터치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지만 결코 청중들에게 전달되어져야 하고 가르쳐져야 하고 변화되어져야 한다는 한결같은 의도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죤 플라벨(John Flavel)은 다음과 같이 청교도 목사들의 설교의 중심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르게 전하는 것은 설교자들에게 맡겨진 최고의 책무고 영광인 것입니다. 신중함은 미사여구보다 진실한 말들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한 장사꾼이 겉보기에는 그럴 듯하게 페인트칠을 한 중고 배를 사기보다는 견고하고 튼튼하여 오래 쓸 수 있고 많은 물건을 적재(積載) 할 수 있는 좋은 배를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잠겨 진 자물쇠통에 맞는 구리 열쇠는 보물들이 들어 있는 금고를 열지 못하는 황금 열쇠보다 훨씬 유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신중한 용어 선택이나 행동에 있어서의 세심한 주의는 사람의 양심과 심령을 노크하여 천박한 미사여구와 달콤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주해하면서 제임스 더함(James Durham) 목사는 설교마다 주로 사용하였던 ‘적용’ (Application)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적용은 설교의 생명입니다. 성도들의 양심에 문제의 핵심을 적용시킴에 있어서 필요한 연구, 기술, 지혜, 권위 및 명백성이 있어야 하듯이 어떤 심오한 진리를 드러내는 데에도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이것저것을 공부해야 합니다. 청중들은 때로는 가장 특별한 말들에 의하여 기꺼이 요동되어집니다. 그러나 짧고 평범한 말들이 그들의 가슴에 닿을 때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설득하는 것이요, 증거 하는 것이며, 간청하는 것이요, 탄원하는 것이며 또는 훈계 및 요청하는 것입니다. 설교란 그러한 모든 것들을 종합한 것이라야 합니다. 그것은 문제들을 매우 특별하게 해결해 줄 뿐 아니라 청중들의 양심에 숨겨져 있던 문제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설교에는 설교자의 신실함과 지혜와 기민함 그리고 설교 사역의 은사의 권능과 효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정서에 호소하고 특별히 정서를 자극하고자 노력했다. 지성에 정보전달에만 중점을 두는 설교는 정서들을 자극하는 일에는 실패한다. 따라서 그의 청중들은 성화를 추구해 감에 있어서 등한시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반드시 정교하게 다듬어져서 그리스도를 향한 정서 안에서 더 사랑하도록 격려하는 측면으로 잘 전달되어야 한다.

그러나 청교도 목사들은 단지 정서를 자극하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 정서들의 기질(器質)들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성공적인 설교는 정서를 자극하는 설교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 속에서 하늘 나라적인 의향들을 배양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개개인의 영적 성향이나 아직도 남아있는 옛사람의 기질을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을 정하는 정서와 기억력의 의향들이다. 거기에는 효과적인 언어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설교가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영혼에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단순한 말들 그 이상이 필요하다.

때문에 당시 많은 영적각성을 일으켰던 청교도 목사들의 가장 큰 특징은 그들의 경건성이었다. 경건한 삶과 실천의 모범이었던 청교도 목사들의 설교는 사람들의 정서를 높은 곳으로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가 ‘참 목자상’(The Reformed Paster)이라는 책에서 이것을 설교자들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형제들아!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먼저 여러분의 마음을 깨우라. 그리할 때 죄인들의 심령을 깨우기에 적합한 설교가 될 것이다. 그들이 깨어나든지 아니면 정죄 받든지 둘 중의 하나뿐임을 기억하라. 깨어 있지 않는 설교자는 청중들을 결코 깨울 수 없다. 비록 당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것들을 다 준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말로서 최고의 찬사를 한다 할지라도 깨어 있는 목사의 설교가 되지 못한다면 당신의 설교는 오히려 청중의 마음에 역효과로 전달 될 것이다.”

청교도들에게 ‘마음’이란 영적 실체이며 또한 종교적 감정의 자리였다. 마음에 관한 바울의 생각을 따르면서 청교도들은 이 단어가 성경에 나타난 ‘영혼’이란 표현과 가장 가깝게 부응하는 내면의 사람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이성의 기관인 머리 이외에 마음은 신자의 영적생활에 결정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려면 이 마음을 포함한 인격 전체가 요구된다. 청교도들은 사변적 지식을 결코 무시하진 않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지적수준에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인간의 심령을 깨뜨리기에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머리만이 아닌 마음의 문제라고 보았다. 리차드 십스(Richard Sibbes)는 감정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는데 종교란 우리의 모든 행위의 결과나 효과에 있다고 하기보다는 우리 영혼의 감정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청교도 신학에서 이러한 신적인 감정은(거룩한 정서) 본질적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신 결과로 이해되었다.

루터와 칼빈을 따르면서 청교도들은 비록 무식한 사람이라 해도 인간의 이성이 아닌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 거룩한 성경책을 제대로 이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용을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강단에서의 ‘강설’(講說)이었다. 성령께서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이해하도록 먼저 우리의 지성을 조명하시고 다음에 순종하고자 하는 열심을 마음에 불어 넣으신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65문답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믿음에 대해 말할 때 ‘거룩한 복음의 강설(講說)’을 사용하신다고 말한다.

제65문 :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恩德)에 참여할 수 있는데 이 믿음은 어디에서 옵니까?

대 답 : 성신에게서 옵니다. 그분은 거룩한 복음의 강설로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며 성례의 시행(施行)으로 믿음을 굳세게 하십니다.
요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무시한 채 감추어져 있는 신비스러운 의미를 추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성경이 자증적(自證的, self-authenticating)이며 자기 계시적(self-revealing)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의 생각에 성경 본문은 자연스러운 의미를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성경이 성령의 조명으로 분명해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들에 대한 보다 깊은 의미를 나타낸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 때문에 그는 자신의 생애 동안 성경의 충만한 의미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신자들 안에 적절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면 보다 확실한 성경지식을 갖게 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이러한 지식은 합리적일뿐 아니라 경험적이며 실천적인 지식이다. 그의 생각에 신자들은 말씀을 통해 감미로운 경험과 더불어 하나님을 지각하게 되는데 이는 마치 그들 스스로 꿀의 달콤함을 맞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영적인 것들을 마음에 각인시키기 위해 그 무엇보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론적 지식을 제공하려고 끊임없이 애썼다는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에드워즈에게는 설교의 두 기능 즉 이성적이고 감정적인 기능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둘은 실제로 머리와 가슴 둘 다를 가지고 있는 청중들의 전체 인격에 줄 유익을 고려한다면 상호보완적인 것이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영적 은혜를 받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이런 믿음 때문에 그는 청중들이 모쪼록 설교를 통하여 거룩한 성경 말씀을 경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또 청교도 목사들은 이해하도록 설교하는 자들이었다. 그 목적을 위하여 그들은 자연스러운 재치나 습득한 기술을 돕는 모든 합법적인 것들을 고용하였다. 일화나 비유 은유나 직유 등을 사용하여 청중들의 주위를 집중시켰고 그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하여 청중들의 마음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 모든 것을 동원하였다. 그들은 선언하기를 설교의 제일 되는 목적은 인생들의 영혼과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킴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죤 오웬(John Owen) 목사는 설교의 주된 목적으로 성도들에게 있어서 ‘빛과 지식과 경건함과 엄격성 및 대화의 신실함’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또한 토마스 맨튼(Thomas Manton) 목사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씀을 행하는 자가 말씀을 가장 잘 듣는 자입니다.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을 들으며 들은 것을 행할 때가 유익한 것입니다. 실행으로 연결되는 또는 실행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은 최상의 것입니다.(시 119:105, 마 7:2) 회중들의 경건 된 삶은 설교자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입니다.”(고후 3:2)

선포된 말씀이 실천적인 삶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소망은 필립 굿윈(Philip Goodwin) 목사의 ‘복음적인 성도’라는 책에 잘 묘사되어 있다. “한 착한 목사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그가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오자 한 성도가 그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목사님의 설교대로 행했습니까?’ 그러자 그 목사는 깊은 한숨을 쉬며 대답하기를 ‘설교는 했지만 행하지는 못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한 경건 된 삶을 통하여 모범을 보였으며 모든 선한 행동들도 건전한 교리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교리적인 논쟁에 있어 탁월한 신학자들이었지만 그 내용을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경건한 순종자들이었다. 그들의 신학은 신앙이며 바로 삶이었다. 그러므로 청교도 설교는 성경에 대한 이해를 도울 뿐만 아니라 의지에 영향을 주며 정서를 불러일으켜 삶을 개혁하게 하는 데 목표를 두었음이 분명하다.

Ⅲ. 청교도 목사들의 설교에 대한 고찰

청교도들의 설교는 시대와 개인적 차이에 의해 약간씩의 다른 면은 있지만 거의 대부분 하나의 전통적인 설교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설교를 보통 세 부분 즉 ‘본문’(the Text)과 ‘교리’(the Doctrine)와 ‘적용’(the Application)으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이 세 부분은 마치 톱니바퀴처럼 서로 조화롭게 어울리도록 조직되었다. 설교의 초점은 본문 안에 담겨있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교리에 들어있는 개념을 설명하는 것으로 옮겨가고 마지막부분에서는 적용을 위해 현실 생활의 경험으로 옮겨가는 흐름을 따랐다.

‘본문’은 항상 어떤 중요한 신학적 주제에 대해 열쇠가 되는 몇 가지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는 데 이는 뒤에 등장하는 ‘교리’ 부분에서 자세히 분석되고 더 충분하게 설명되었다. ‘교리’에 있어서 청교도의 관심은 항상 그리스도와 그의 자비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은혜였다. 그리하여 설교의 초점은 성경 본문으로부터 추출된 이와 같은 교리가 진리이며 확고부동한 것임을 증명하고 이어서 그것을 청중에게 지속적으로 적용하는 데 있었다.

‘적용’에 있어서 그들은 항상 모범적이었다. 성경의 모들 예증들을 그들은 조화롭게 성령의 빛을 따라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설교는 항상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고 듣는 청중들로 하여금 때로는 두려움에 떨게 하고 때로는 은혜의 전율로 인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기도 하였으며 그러한 설교의 효과는 삶으로 이어졌다.

칼빈을 비롯하여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들과 에드워즈에 이르기까지 이들 모든 개혁교회의 신실한 설교자들은 신약교회가 탄생한 이후 계속되어 온 말씀 중심의 경험적 설교의 원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이들은 개혁교회의 설교를 위한 확고한 신학적 기초를 놓았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설교를 통해 이런 설교 원리의 실례들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성경의 권위와 인간의 변화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철저히 신뢰하며 의지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사변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들의 가슴과 감정까지도 포함한 인간성 전체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 이를 위해 설교자 자신이 경건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언제나 설교의 바탕이 되었고 실제로 그것은 교회에서 설교가 더욱 힘 있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제프리 토마스(Geoffrey Thomas)는 “적응이 결여된 설교는 현대 개혁교회 강단의 해악이다.”라고 했다. 개혁교회에서의 적용이 결여되는 것은 단순히 부주의와 무관심의 소산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이루어지는 원칙의 결과일 수도 있다. 무관심의 소산이든 원칙의 결과이든 적용의 결여는 설교자에게 항상 심각한 결함과 실패를 가져온다. 전통적으로 개혁신학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의 해설과 적용’(explicatio er applicatio verbi Dei)으로 정의해 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해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말씀의 해설은 말씀의 적용에 의하여 보완되어야 하고 보충되어야 하는 것이다. 로버트 답니(Robert L. Dabney) 박사가 “설교의 위대한 목표와 목적은 청중들에게 있어서 분명한 실천의 결단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은 참으로 옳았다. 설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행하게 하는 것이다.(to make men do)

해설과 적용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다시 말해서 진리의 객관적인 면과 주관적인 면을 균형 있게 다루려는 설교학의 이상(理想)은 성경에 비추어 보아도 지극히 타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설교나 바울 서신서의 바울의 설교에 의해 이런 면을 잘 보게 된다. 사도들은 언제나 직설법에서부터 명령법으로 옮겨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항상 교리로부터 실천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 박사는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라는 책에서 기독교와 자유주의라는 두 체계의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체계가 각각 사용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법적 차원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는 동경(憧憬, aspiration)이 아니라 사실들(facts)에 입 각 한 종교이다. 여기에 자유주의와 기독교 사이에 가장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자유주의가 전부 명령문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에 반해 기독교는 승리의 평서문(平敍文, triumphant indicative)으로 더불어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자유주의는 죄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함으로 시작하지만 기독교는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됐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선포이며, 위대한 선언이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공표이다. 또 다른 선언을 들어보자. “그리스도께서 우리 최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됐다가 성경대로 사출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 설교자는 우리에게 권면을 줄 뿐이다.”라고 메이첸 박사는 말했다. “참된 복음전도자는 권면이 아니라 복음을 주는 자들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승리의 평서문으로 시작한다 할지라도 평서문으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복음은 언제나 평서문에서 명령문으로 옮겨간다.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B. Ferguson)은 “직설법이 명령법을 이끈다.”라고 표현했다. 그는 성경의 패턴(혹은 구조)뿐만 아니라 우리 설교의 패턴과 구조 역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따라서 설교에 있어서 직설법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설교에 있어서는 직설법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불완전한 것이 됨을 의미한다. 평서문은 명령문에 의해 보완되고 보충되어야만 한다. 선포(宣布, Proclamation)는 촉구(促求, appeal)에 의하여 보완되고 보충되어야 하며, 말씀의 해설(解說, Explicatio verbi Dei)은 말씀의 적용(適用, applicatio verbi Dei)에 의하여 보완되고 보충되어야 한다. 즉 개혁주의 전통이 말하고 있는 참된 설교는 항상 이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해설과 적용을 포함하는 설교이다.

그러므로 개혁교회의 전통은 강해 설교를 지지한다. 또한 강해 설교가 성경의 직설법과 명령법의 균형을 잘 반영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할 지에 대해서 분명히 가르칠 수 있음을 굳게 믿고 있다. 우리는 신약성경이 직설법 – 명령법의 패턴(또는 구조)을 가진다는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의 설교에도 직설법 – 명령법의 패턴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실히 및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그 도(道)를 밝히 드러내는 일과 그 드러난 도(道)에 경험되어지는 듣는 모든 이들의 정서와 행동에 강한 순종의 의지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여야 한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여 본다면 개혁교회의 설교를 아래와 같이 일곱 가지의 특징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개혁주의 설교는 성경의 권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종교개혁 이전에 성경은 일반 신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해 주는 성직자가 없이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개혁자들은 이 잘못된 인식을 바꾼 것이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의 언어로 번역되어 읽혀져야 할 것과 성경의 명료성(明瞭性)과 충족성(充足性)을 주장했다. 그래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개혁자들은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했다. 선지자들은 그들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을 말했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선포하도록 위탁받은 것만을 말했던 것이다. 개혁자들의 설교관은 이 같은 그들의 성경관에서 나왔다. 그들은 성경에 깊이 빠져들었고 성경에 근거하여 설교했으며 글을 썼다. 그들의 신학연구 방법이나 설교준비는 성경의 권위에 그들 자신을 맡기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성경이 말하는 것만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이처럼 종교개혁자들의 설교 이해는 그들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하고 있었음을 인정할 때에만 가능하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어보면 그가 모든 주제(主題)에 대해 얼마나 성경 말씀을 의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둘째, 개혁주의 설교는 강해적이다.

강해설교는 성경의 본문과 함께 시작하는 설교이며 본문을 해석하고 설명하고 적용하는 설교다. 개혁자들의 설교는 그 형태에 있어서 주해(註解) 설교였다. 주해는 성경의 원어인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연구하여 본문 주해를 발전시키기 위한 건전한 기초 작업을 필요로 한다. 개혁자들은 성경 본문 해석의 기초 작업을 위해 원문을 연구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 점에 있어서 인문주의는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는 “칼빈이 부데(Bude)로부터 유능한 언어학자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본문을 직접 적용하여 문맥의 언어적이고 역사적인 한계 내에서 그것을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많은 것을 배웠다.”라고 이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이처럼 인문주의 학자들의 언어훈련과 고전연구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 신학에 중요한 동기를 제공했다. 라틴어에 대한 연구로 라틴어로 번역되어 당시 교회가 사용했던 라틴어 성경(Vulgate)에 나타난 번역상의 오류들과 성경 원문의 오역들에 근거한 잘못된 교리들과 실천을 발견할 수 있게 했다.

그래서 주의 깊은 성경 본문의 연구는 비성경적인 교리와 실천을 개혁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던 것이다. 또한 인문주의자들의 원문(ad fontes)으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은 교회로 하여금 성경으로 돌아가며 성경 원문 안에서 연구된 교부들의 글과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의지한 성경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또한 종교개혁자들의 설교가 강해적이라는 것은 그들의 설교가 성경 해석에 성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 해석에 성실했다는 말은 성경 구절들을 어떤 교리나 신학사상 체계나 어떤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문맥을 무시하고 억지로 짜 맞추는 식으로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어떤 교리를 위해 성경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해석하는 성경 해석의 기초 위에서 그들의 신학체계를 발전시켰으며 교리를 말하고 설교했음을 의미한다.

셋째, 개혁주의 설교는 조직적이다.

개혁자들은 신구약 성경 66권의 각 책을 가지고 한 절 한 절 한 장 한 장 가르쳤다. 종교개혁 초기에 쯔빙글리(Huldrych Zwingli)는 이 방법을 따랐다. 쯔빙글리, 마틴 부서(Martin Bucer), 칼빈 등은 모두 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교부였던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쯔빙글리의 설교는 매우 힘이 있었고 매우 감동적이었으며 조직적이었다. 그는 성경말씀을 통해서만 증거 했다. 그는 쥬리히 교회의 설교자로 사역할 때 마태복음을 일 년 동안 날마다 한절 한절씩 설교했다. 마틴 부서(Martin Bucer)도 스트라스버그에서 같은 방법을 따랐다. 이처럼 종교개혁자들은 조직적인 성경 강해설교를 정착시켜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 좋은 전통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칼빈 또한 거의 모든 성경을 설교했고 성경 한권 한권을 여유를 가지고 설교했다. 통상적으로 그는 한 번에 세절에서 여섯 절을 본문으로 택하여 설교했다. 이렇게 연속적이면서 조직적으로 창세기를 123회, 신명기를 200회, 욥기를 159회, 고린도후서를 176회, 갈라디아서를 43회 에 나누어 설교했다. 제네바에서 20년 이상 칼빈은 거의 모든 성경을 설교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의 이러한 설교형태가 개혁교회 안에서조차도 점차적으로 약해져 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우리는 개혁자들의 설교방법을 재발견하고 계승해 나갈 필요가 있다.

넷째, 개혁주의 설교는 교리적이며 동시에 경험적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을 위대한 신앙교리를 강해하는데 깊은 관심을 가졌다. 루터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연구하다가 발견한 이신칭의(以信稱義, 以信得義) 교리를 그의 설교와 강의를 통해 가르쳤다. 성경 교리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가장 우선되는 수단이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성경 교리들을 신실하게 열심히 강해했다. 그러나 개혁자들의 설교가 교리적이라 하여 청중에게 딱딱하거나 무의미한 강연이 아니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설교를 통해 드러나는 교리는 곧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되었고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경건의 원동력이 되었다. 많은 청교도 목사들은 강해를 통해 발견되어지는 성경 교리를 삶에 적용하기 위해 끝없는 묵상과 실천의 삶을 살았다. 이것은 개혁주의 설교자들의 경건성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개혁주의 설교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한다.

성경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깨달으며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심을 굳게 신뢰하였다.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시지 많으면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도 사람을 구원하거나 성화시키는 효과를 산출할 수 없다. 개혁자들은 성령께서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진리로 사람들의 심령과 삶을 변화시키는 일에 성경적 설교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기다리고 간구하면서 설교를 준비하고 설교를 행했던 것이다.

여섯째, 개혁주의 설교는 예배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의 예배는 성례가 예배의 중심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모든 신비스러운 것들로 예배를 가득 채웠다. 알 수 없는 말과 알 수 없는 행동들을 신자들은 참관만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설교(말씀)를 예배의 중심에 두었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이는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가 중심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강대상을 강단 중앙에 배치하고 있는 개혁교회 강단 구조에도 나타나 있다.

설교(말씀)를 예배의 중앙에 둠으로 인해 신자들은 예배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되 모르고 의문에 싸인 상태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의 강설을 통해 밝혀지고 알려진 그리고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조명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은 은혜의 빛 가운데서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 설교(말씀) 대신에 여러 가지 화려하고 재미있는 볼거리로 대체하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는 이러한 중요한 종교개혁의 부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일곱째, 개혁주의 설교는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다.

설교(말씀)가 예배의 중심이 된 이후로 설교는 목사직의 본질적 사역이 된 것이다. 설교 사역을 위해 설교자의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개혁교회 목사들에게는 높은 학문적인 기준과 탁월한 영성의 기준이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 설교자들은 설교자로서 요구되는 지성, 도덕성, 영성을 갖추도록 부단한 노력이 요구되어진다. 무지하고 게으른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무지하고 게으르며 어두운 자가 어찌 성경을 열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경험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설교를 통하여 들어나게 될 하나님의 영광은 그 강단에서 사장(死藏)되는 것이다.

결 언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라 개혁교회의 설교의 전통에 서있는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이상에서 거론한 뛰어난 설교자들로부터 배울 것이 참으로 많다. 칼빈을 비롯한 개혁주의 설교자들은 무엇보다 성경의 객관적인 절대 권위와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영감 되었다는 것을 확고히 믿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성경의 진리를 강해하는 일에 헌신했다.

그들에게 설교란 설교자가 다루고자하는 특별한 주제에 관한 논리적인 강연이 아니었다. 그들은 본문이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강해했다. 또한 적용에서도 적용하고자 하는 성경 본문의 메시지에 엄격하게 자신들을 제한시켰다. 칼빈주의적 전통을 따르는 오늘날의 개혁주의 설교자 역시 설교를 위해 같은 기초를 가지고 있다. 즉 성경만이 설교의 중심이고 근원이며 설교자의 우선적 임무는 성경말씀을 있는 그대로 강해하는 것이다.

이 원리는 지금과 같은 진리의 절대성(絶對性)이 약화되고 혼란스러운 상대성(相對性)과 다양성(多樣性)의 시대 가운데서도 결코 포기될 수 없으며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강단의 부족을 대체할 다양한 유혹이 교회에 밀려들어올 때마다 위대한 직설법 승리의 평서문은 오늘도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모든 죽은 영혼과 시들어진 영혼에 능력을 부여함을 믿고 성경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철저히 성경의 복음 진리에 착념(着念)하며 그 진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을 의지하라. 사람의 전인적인 변화에 주목하여 그들의 마음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붙들리도록 하는 데에 착념(着念)하여 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복음 진리를 진리 그대로 밝히 드러내는 실력 있는 강해자요 성경 주해자(註解者)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것은 개혁교회를 개혁교회답게 만드는 강단의 역할일 뿐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일으킬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복음 진리를 정서적으로 설교할 수 있고 그리하여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자비와 엄위와 위대함을 청중들로 하여금 경험하게 만드는 설교자들이 필요하다. 단지 설교의 기술을 아는 것만 아니라 마치 샘물에서 물이 솟아나듯 그들로부터 흘러넘치는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온전히 불타버린 설교자들이 필요하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교회에 미치는 파문을 보게 될 것이다. 교회 안은 말씀을 경험하는 생동감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며 보다 나은 현시대의 종교개혁과 부흥을 보게 될 것이다.(*) 글쓴 이 / 조경진 목사(서울 양의문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