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과연 교회개혁을 외칠 자격이 있는가?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 종교 재판소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 종교 재판소

PARTⅢ

반론 / 그는 과연 교회개혁을 외칠 자격이 있는가?
칼빈에 의한 학살설 논쟁

지면상의 논쟁으로 대충 마무리 할 수 있는 일을 신성남이라는 한 개인의 실명까지 거론하면서 그를 지적하는 것은 더 이상 이런 무책임한 글들이 남발되지 못하도록 경종을 울리기 위함입니다. 신성남 집사는 ‘어쩔까나 한국교회’의 저자이며 현재 감리교 목사님이 운영하는 당당 뉴스에 교회 개혁을 위한 칼럼이 계속 연재되고 있습니다.
1. 여러 차례의 권면

“학문적(?)인 토론에서 웬 이런 인신공격 의 상황으로 바뀌었는가?” 라고 당황하실 분들 이 계실 것 같아 그 동안의 상황을 먼저 설명 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성남 집사님은 카스텔리 옹(Sebastian Castellion, 1515-1563)의 글을 근거로 ‘칼뱅의 학살’은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확신 할 뿐 아니라, 그 확신을 근거로 칼뱅을 ‘살인 자’라고 단정하고 정죄하는 글을 당당 뉴스에  ‘신학은 ‘정통’, 사역은 ‘밥통’, ‘칼뱅’의 제네바 학살과 종교개혁사의 그늘’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리셨습니다.

권현익 목사
권현익 목사

그 글을 접한 저는 역사를 공부하는 늦깎이 학생의 신분으로 카스텔리옹의 주장이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없는 ‘쓰레기 자료’에 불가함을 조목조목 1차 사료를 근거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상식적으로 논쟁이 계속 이어지려면 저의 글을 반박하여 카스텔리옹의 주장이 객관적 사실일 수밖에 없는 새로운 근거를 제시하여야 집사님이 주장한 ‘칼뱅의 살상’은 역사적 사실 혹은 객관적인 글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사님은 저에게 다음과 같은 메일로 이 논쟁을 마무리 하려고 하였습니다. “결론은… 저는 제네바 학살이 ‘사실’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사실이라는 카스텔로의 주장을 다양하게 비평은 하되 그냥 묵살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최종 해석은 학계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본인의 메일에서 자신의 주장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스스로 시인하였음에도 카스텔리옹의 주장은 묵살하지 말자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입니다. 카스텔리옹의 주장이 사실인데 칼뱅의 학살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은 카스텔리옹의 주장이 별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는 자기 고백인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이 최종 해석은 학계에 맡기자는 제안은 본인 스스로를 새로운 사료라도 발표한 학자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려면 역사 전공자도 아닌 분이 애초부터 이 문제를 논할 것이 아니라 학자들의 몫으 로 남겨두어야 했던 부분이 아닐는지요?

2. 누가 교만하단 말인가?

Sebastian Castellion(1515-1563)
Sebastian Castellion(1515-1563)

제 글을 반박할 학술적인 능력이나 역 사 사료(史料)를 갖고 있지 않다면 제한된 자료 속에 너무 성급하게 역사적 사실인양 감정적인 글을 올려 죄송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지성인이요, 학자다운 자세요, 교회 개혁을 외치는 개혁자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저의 이 같은 수차례의 권면에도 집사님은 저를 교만하다고 지적하는 메일을 보내주셨는데 교만의 근거가 “카스텔로가 사실무근이라는 그 용감한 확신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요? 자신의 주장만 옳고 다른 사람의 주장은 틀리거나 악의적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또한 무슨 경우인지요.”라고 하셨는데 이를 두고 “도둑이 도리어 몽둥이를 든다.”는 뜻인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본인의 글이야 말로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자료를 근거로 칼뱅의 학살에 대하여 확신을 넘어 마치 그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처럼 살인자로 몰았던 그의 용감 무식한 확신을 두고 교만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3. 그의 주장인 ‘개혁’은 개혁이 아니라 ‘개 가죽’

집사님이 주창하는 교회개혁은 구혁(狗革) 즉 개 가죽에 지나지 않는 무의미한 공허한 외침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개혁자는 내 몸을 살리겠다는 일사 각오의 자세로 자기 몸의 일부분을 잘라내는 것이 개혁자의 진정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신 집사님은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교회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날카로운 비수로 집요하게 난도질하고 까발리면서 정작 자신의 실수와 잘못에 대하여 무한히 너그러운 것은 진정한 개혁자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제 글을 보신 어느 분의 댓글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로서 자기 개혁이 없는 사람이 외치는 교회개혁은 꼭 이렇더라고요. ‘제가 잘 몰랐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이 말도 안하는 사람들이 한국교회가 어쩌고저쩌고…”

4. 그에게서 세르베투스의 비열함이

제네바 시(市) 재판 중에 자기 논리의 정당성을 밝혀내려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1511-1553)는 “삼위일체는 초대교회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우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겠다.”며 교부 유스티누스(Justinus, 100-165)의 권위로 확고히 무장하여 정당성을 펼쳐 나갔습니다. 그 때 칼빈은 토론을 중단하고 유스티누스의 책을 갖고 올 것을 요청하였고 그 책을 펼쳐 유스티누스가 삼위일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명백히 인정하는 마치 유스티누스가 개혁자들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몇몇 문장들을 손가락으로 지적하면서 증명해 보였던 것입니다.

당시 세르베투스는 언어에 출중한 면도 있었지만 겸손하지 못하고 자신은 특별한 언어의 은사를 받은 것 마냥 떠들고 다녔음에도 헬라어를 겨우 읽어낼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헬라어 원전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 드러나자 세르베투스는 크게 화를 내면서 자신이 잘 읽지도 못하는 헬라어 원전이 아닌 자신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 역본을 가져 다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자 칼뱅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라틴어 역본은 없어요! 왜냐하면 그 누구도 그 책을 번역하지 않았거든요.”라고 대답을 합니다.

결국 세르베투스는 그 책을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음에도 마치 유스티누스의 책에 매우 익숙한 학자인 것처럼 큰 소리만 쳤던 것이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책을 갖고 오라고 한 행동은 오늘날 말로 사료(史料)를 근거로 토론하겠다는 것입니다. 저의 두 번에 걸쳐 올린 반박한 글들은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으로 제가 읽은 책을 근거로 학적으로 문제가 없는 글입니다. 그러므로 왜 신성남 집사에게서 세르베투스가 보이는지 그 이유를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5. 엉터리 자료를 근거로 한 그의 글 비판

이제 신성남 집사님이 올리신 “신학 은 ‘정통’, 사역은 ‘밥통’ 칼빈의 제네바 학살과 종교개혁사의 그늘”에 대하여 이것이 얼마나 부정직하고 불명예 스러 운 글인지를 밝히려고 합니다.

(1) 칼뱅주의자들은 국정 교과서를
고집하는 현 정부와 같다?

Michael Servetus(1511-1553)
Michael Servetus(1511-1553)

신 집사님은 국정교과서 문제까지 언급하면서 이렇게 글을 시작합니다. “국사 교과서를 가지고 장난치려는 자들이 적지 않은데 앞으로 교회도 그런 발칙한 꼴을 보지 않으려면 종교개혁사를 조금이라도 왜곡하거나 미화하지 말고 진상을 사실대로 알리고 바르게 가르쳐야 옳다고 본다.”

마치 자신은 역사 전문가며 칼빈주의자들은 역사를 숨기고 왜곡하고 미화하려는 현 정부처럼(사실 그렇지 않은데) 그는 아주 자신만만하고 확신에 찬 글로 시작합니다. 과연 어떤 글이 계속되는지 기대해 보도록 하죠.

(2) 그는 오정현 목사의 논문표절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그에게서 세르베테스의 비열함이 보인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신 집사님이 인용하였다는 책들은 사실 집사님이 본 적도 읽은 적도 없으며 남의 글을 도둑질한 것들로 분명한 정황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카스텔로(Sebastian Castellio, 1515-1563)의 글과 나중에 이를 인용한 전기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의 글을 참조하여 정리한 내용이다.”

위의 내용들은 여러 사람들이 글의 출처를 요구하는 댓글들이 올려 지자 슬그머니 그의 글에 추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제가 처음에 출처를 추가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저의 잘못입니다.”라고 겸손스럽게 잘못이라는 표현까지 하셨는데 과연 실수였을까요? 아뇨 아예 제시할 자료가 없었던 것입니다.

집사님은 자신의 글이 두 저자의 글을 읽고 인용한 것처럼 말하지만, 이는 완전한 빨간 거짓말입니다. 역사 전공자도 아닌 그가 어떻게 카스텔리옹의 글을 직접 접할 수 있었단 말인지? 한글로 번역된 책이 없는 것으로 추정되는 글을 어떻게 읽었다는 것이며 신 집사님의 글 어디에도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문구를 제외한 카스텔리옹의 글에서 직접 인용했다는 흔적이 단 하나도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츠바이크의 글만 읽고 인용했다는 것인데 과연 츠바이크의 책도 읽었을까요? 단언하건데 읽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제시한 제목의 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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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한국어로 번역된 츠바이크의 책들입니다. 그 어디에도 그가 말한 출처: ‘양심의 자유’(세르베투스 사건을 중심으로)에서 발췌를 증명할 책 이름은 없습니다. 이는 자신이 인용했다는 책을 처음부터 갖고 있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읽지도 않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게서 세르베테스의 비열함이 보인다고 단정할 수 있지 않을는지요?

(3) 글 도둑질(도용)의 증거

댓글에서 신 집사님은 칼뱅의 학살을 증명이라도 하듯 “칼빈의 글을 직접 인용해보자…”라고 인용문을 적은 후에 출처: ‘양심의 자유’(세르베투스 사건을 중심으로)에서 발췌했다고 밝혔습니다. 책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그는 어떻게 이런 자료를 갖고 왔을까요? 당연히 그가 즐기는 인터넷에서 훔쳐왔지요.

신 집사님은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글을 퍼왔음에도 마치 자신이 실제로 읽고 인용한 것처럼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이 없이 출처를 올린 비양심적인 증거는 바로 아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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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부분은 신 집사님이 밝힌 출처: ‘양심의 자유’(세르베투스 사건을 중심으로)에서 발췌이며, 아랫부분은 어느 세미나의 글을 인터넷에 올려놓은 출처인데 두 곳의 글자체나 글자 위치나 따옴표나 심지어 괄호 안에 적힌 글의 내용까지 모두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제목의 책이 없음에도 이 두 자료는 어떻게 이리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일까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글을 인터넷에서 단지 <ctrl+v> 했다는 증거이지요. 그러면서도 그는 아주 뻔뻔스럽고도 저질스럽게 이렇게 말합니다. “칼뱅의 원전 자료는 직접 확인 못 했습니다. 혹시 본 내용에 오류가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지 않고서야 어찌 이처럼 훔쳐온 글을 마치 츠바이크의 글을 읽고 직접 인용한 것처럼 어떻게 이런 거짓된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이런 비 양심가의 글이 과연 칼뱅의 학살을 주장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글이 될 수 있을까요? 그는 누구나 쉽게 인터넷에서 ‘칼뱅의 학살’이라고 치면 언제든지 찾아낼 수 있는 글을 마치 자신이 읽고 확인한 것처럼 이런 글을 올리고 있음에도 과연 오정현 목사의 논문 표절을 욕할 자격이 있을까요?

집사님은 처음부터 출처를 올리지 못한 자신의 실수라는 겸허한 변명에 그 스스로가 자신의 얼굴에 거짓이라는 똥칠을 하신 것입니다. 책 한 권 읽지 않고 어떻게 500년 전의 역사를 인터넷 글로만 감히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인지 정말 ‘무식이 용감’이라고 말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런 무책임한 글에 1차 자료를 갖고 반박할 아무런 가치도 없지만 저라도 나서지 않으면 이런 주장이 훗날 역사적 사실 혹은 정설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정확한 자료를 근거로 서술하였던 것입니다. 한쪽은 본인이 읽은 책과 1차적 사료를 근거로 서술하는데 한쪽에는 인터넷에서 <ctrl+c, ctrl+v>로 들이대는 무(無) 논리를 넘어 상대는 조총으로 싸움에 임하는데 용감 무식하게 칼만 들고 전쟁에 나간다는 무댓뽀(無鐵砲) 정신으로 논쟁에 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는 무책임하게 아닐 수도 있다는 ‘카더라’ 통신의 대표적 행태인 ‘아니면 말고…’

(4) 신 집사님의 유일한 학적인 출처는 오직 인터넷?

집사님의 글 가운데 ‘목회자의 학력 세탁’에서 “한 기독 매체의 기사(www.lawnchurch.com 원문보기)에 따르면 개신교는 약 90% 이상이 대학을 나오지 못한 저학력 목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런 사이트는 열어 볼 수도 없는 정보였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것들을 근거로 황당무계한 주장에 대하여 어느 목사님께서 이렇게 반박해 놓으셨더군요.

“검색해보니 2008년 전국 교회 수가 58,000개라고 한다. 아마 거기서 크게 변동은 없을 것 같다. 현재 감리교회 수가 6,474개, 감리교 목사 수는 11,017명.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현역 감리교 목회자들 중 4년제 대학을 안 나온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개신교 목사들 수가 10만 명이라 하더라도 감리교 목사만 따져도 90%라는 수치가 나올 수는 없다. 게다가 장신, 총신, 한신, 고신, 서울신, 성공회, 침신 등 4년제 신학교가 교단별로 얼마나 많은가? 사실 예수님도 대학 안 나오셨는데 학력이 무슨 소용이냐는 말도 맞고 기초적인 학문 소양이 없는 비인가 신학교 출신의 목사들의 자질 문제도 심각하지만 무슨 주장을 하건 간에 사실 확인은 좀 하고 써야 한다.”

(5) 그에게서 조찬선 목사의 모습이!

조찬선 목사는 ‘기독교 죄악사’라는 책을 통하여 없는 죄악도 만들어 내어 역사적 사실인양 거기에다 마치 자신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짓 십자가를 매고 ‘기독교를 대표’하여 과거 죄악사를 밝히고 사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그런 악한 부류와 다른 보다 정직하며 고결한 존재인 것처럼 부각시키고 싶었겠지만 그의 글 자체가 천주교의 자료에서 훔쳐 온 천주교의 대변인 노릇을 하였음을 첫 번째 글을 통하여 밝혔습니다.

신성남 집사 역시 조찬선 목사 못지않게 칼뱅에 대한 자기 원한을 단 한권의 책, 그것도 인터넷의 부정확한 자료를 의존하여 또 다른 소설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신 집사님은 “저는 제네바 학살이 사실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음에도 칼뱅을 살인자로 어떻게 몰아가고 있는지 칼뱅의 명예를 어떻게 훼손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신 집사(1) / 칼빈의 무고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독자들의 보다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 여기에 그대로 옮긴다. 칼빈과 그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과 4년 동안 적어도 58명을 처형하고 76명을 시외로 강제 추방했다고 한다. 그 중에 10명은 참수형이었고 35명은 마녀사냥처럼 처참한 화형이었다. 그들은 “이 부패한 도시에 실질적인 도덕과 기율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칠팔백 명을 처형할 교수대가 필요하다.”고까지 말했다.

반박 / 위의 내용은 일고의 가치가 없음을 저의 글을 통하여 밝혔기 때문에 상식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위의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글임을 금방 알아차릴 것입니다.

신 집사(2) / 심지어 칼뱅은 “이단을 처형한다는 일은 결코 그리스교도적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 신자가 이단의 거짓 가르침에 물드는 것을 막아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목적을 위해서는 한 도시의 주민 전부를 없앨 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엄청난 주장이다.

반박 / 위의 내용은 츠바이크가 칼뱅의 글에서 인용한 것처럼 말하였지만 츠바이크 역시 역사학자가 아니라 극작가이기에 별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혹시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수차례 읽었지만 그의 글에서 이런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칼뱅은 이 책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매우 합당한 말을 했다. 아무리 이단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가르치지 않은 채 무섭게(위협, 혹은 고문)을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지배가 될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 책에서 “교황체제의 압도적인 야만성은 가증스러우며 하나님의 끔찍한 보복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박해 받는 이들이 준비된 변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허용되기는커녕 거부되었기 때문이다. 박해를 받는 이들은 소송의 시작부터 어떤 변호도 주어지지 않고 어떤 논쟁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련한 자들을 고문하여 사지를 절단하며 이들이 말을 못하도록 혀를 잘라버리고는 천천히 괴롭혀 죽였다.”라고 자신의 책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칼빈을 비난하는 이들은 왜 지금 제가 펼쳐 놓은 이 책에 없는 내용이 있다고 주장하는지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목적을 위해서는 한 도시의 주민 전부를 없앨 수도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고 했는데 칼뱅의 책에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전 도시를 그들의 주민들과 더불어 동일한 처벌 속에 가두신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거주하게 하시는 한 성읍에 대하여 네게 소문이 들리기를 너희 가운데서 어떤 불량배가 일어나서 그 성읍 주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너는 마땅히 그 성읍 주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가운데에 거주하는 모든 것과 그 가축을 칼날로 진멸하고(신 13:12 이하)’”

그런데 슈테판 츠바이크는 성경 본문 중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칼빈을 대입시켜 마치 칼빈이 이런 말을 한 것처럼 조작하고 있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런 악한 의도가 드러난 것으로 보아 과연 그의 글이 객관적인지를 신 집사님께 묻고 싶습니다.

신 집사(3) / 한 출판업자는 칼빈을 비난했다고 해서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혀를 잘렸다. 어떤 사람은 예정설을 반대하는 말을 했다고 해서 가혹한 고문을 받고 광장에서 화형을 당했다. 게다가 자크 그뤼에란 사람은 단지 칼뱅의 정책을 반대하고 그를 위선자라고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극한 고문을 받은 후 처형되었다.

반박 / 예정설을 반대한 죄로 화형을 시켰다는 말이 허황된 것은 카스텔리옹이 이런 사건들이 칼뱅의 초기 5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밝혔고 그도 칼뱅과 함께 사역했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카스텔리옹이 침묵하였다는 것은 그런 사건이 없었거나 그런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 하더라도 카스텔리옹 역시 교장의 위치에 있었기에 그 역시 살인에 동조한 죄가 있습니다. 카스텔리옹의 주장에는 단 한 사람의 이름도 거명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런 화형이 없었던 확실한 근거가 미확인되는 어떤 사람을 화형 할 것이 아니라 볼섹이라는 사람을 화형 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임에도 그를 죽이지 않고 추방하였다는 것입니다. 칼뱅과 칼뱅의 예정설을 따르는 이들을 우상숭배자라고 비난한 죄명으로 볼섹은 시의회로 부터 추방을 당하였다는 기록은 역사가들이 기록하고 있는데 카스텔리옹의 말하는 화형에 대해서는 그 어떤 역사 기록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 썰전에서 제가 강조하는 역사는 사료(史料)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방송하였습니다. 김무성 대표가 “우리 아버지는 일본이 죽이려고 했던 제 1순위였다고 주장하지만 역사 사료는 없고 고작 자기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전부라면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없다”이었습니다.

이렇듯 칼빈의 학살을 주장하는 자들이 “칼빈이 학살한 것이 명백한 사실인 것은 이것을 증명할 사료는 마땅히 없지만 우리 아버지 카스텔리옹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은 꼴이다.”라고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칼뱅에게 억하심정과 원한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닌 객관성을 지닌 증언이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 지나 가다가 본 사람의 증언이라도 역사에 남아 있어야 하는데 화형이라는 공개적인 처형에 그 어떤 누구도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지어낸 소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신 집사(4) / 또한 칼뱅과 그의 종교국은 80세 노인과 그녀의 딸을 무참하게 처형했다. 헌데 그 유일한 사유는 자녀들에게 유아세례 주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반박 / 이 주장이 거짓인 것은 칼뱅이 사역할 시작할 당시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아나밥티스들을 단 한 명도 죽이지 않고 두 차례에 걸쳐 추방한 기록이 있습니다. 칼뱅의 아내 역시 아나밥티스 출신인데 그의 아내가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자들의 화형을 그냥 보고만 있었겠습니까? 볼테르의 역사 서술에서도 증명하였듯이 화형이나 사형이 실제로 있었다면 그들의 이름이 거론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카스텔리옹의 책 어디에도 자신의 이름을 숨겼듯이 처형된 사람들의 이름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당시 어떤 역사책에서도 “어떤 사람이 80세 된 노인이… ” 이런 식의 역사 서술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즉 이 말은 카스텔리옹은 자신의 이름도 숨긴 채 그의 책에서조차 어떤 사람이라는 막연한 역사 서술은 당시의 일반적 역사 서술에서 결코 용납되지 않는 서술 방법으로 역사적 사실이 아닌 개인적인 사견에 불과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어떤 누가 죽었는데 언제 죽었는지 그 사람의 이름도 그 사람이 죽은 날짜도 모르는 진술을 어느 누가 올바른 진술이라고 수용하겠습니까?

신 집사(5) / 특히 칼뱅 신학의 후계자로 자처하는 한국 장로교의 소위 개혁주의 정통 보수 교단들인 합동, 고신 그리고 합신 등 대부분이 사실상의 성직매매인 중세적 교회 세습을 노골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이 한심한 꼬락서니를 보았다면 그의 심정은 어떨까? 과연 그런 북한 공산당식 부자 세습이 “성경만을 따르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개혁교회 목사들이 할 짓인가? 정말 표리가 부동하고 양심머리 없는 작자들이다.

반박 / 정말 지나가는 개가 웃을 판입니다. 이런 표현은 신 집사님 자신에게 해야 할 말인 것 같습니다. 그 많은 목사들 가운데 교회 세습을 한 목사가 과연 몇 명이나 된다고 다른 목사들까지 마치 북한 공산당인 것처럼 이렇게 매도해도 되는지요? 그래 일부분은 사실이니 인정하자. 그런데 감리교와 다른 교단들은 이런 세습이 전혀 없는 것일까요? 그의 논리라면 그런 교단은 신학도 목회도 모두 밥통이라 논할 가치도 없는 교단이라는 말인지…

신 집사(6) / 과거 칼빈의 제네바 학살 못지않게 더욱 더 무서운 것은 현재 교인들의 영혼을 조용히 말살하고 있는 유사 교회들의 타락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반박 / 신성남 집사는 제네바 학살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본인 스스로 말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기정사실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학살이 사실이든 아니든 내 글의 정당성을 위해서라도 사실처럼 믿고 싶다는 자기 고집인 것입니다. 신 집사님 본인이 출석하시는 교회는 영혼 말살과 거리가 먼 교회에 출석하고 계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결국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교회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일부의 목사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해야지 왜 칼뱅과 그 후손들의 교회를 싸잡아 매도하는지…

(6) 그는 뒤 늦은 비리를 알리는 재방송 전문가인가?

37019그의 글 소재들의 많은 부분은 이미 미디어를 통해 다 알려져 있 는 ‘교회의 비리’나 ‘목사들의 일탈’ 을 무슨 대단한 특종 뉴스라도 되 는 듯 늘 뒤늦은 방송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개혁이 이 분에게는 비 리 폭로 정도라 생각되는지 열심히 사명처럼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분이 댓글을 통해 신 집사님 에게 이런 당부를 하셨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나쁜 기독교 인이 누구라는 것 이러한 매체에 대고 굳이 꼬집지 않아도 세상 사 람들은 다 알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의 비아냥을 마치 새로 운 개념의 기독교인 비판내지 새로 운 글 제목의 아이템인양 그 아이 템에 충실한 글을 써대면…. 참 답답해지더군요. 진정한 글은 제목과 시류흐름에 돌을 던져 파문을 보고자하는 그 심성으로 쓰는 것이 아니고, 전체적인 아우름으로 바라보아야 진정한 글이 됩니다.”

이분의 지적처럼 글의 많은 부분은 부정적 내용뿐입니다. 주 메뉴가 목사 비판과 헌금 이야기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걸 건드려야 신 집사처럼 교회를 부정적으로 보는 세력들을 규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 집사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형편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그래서 교회가 개혁이 되든가요? 신 집사는 배울만한 종교개혁자들도 없으니 종교개혁자들은 어떤 자세로 개혁을 했는지 공부하라고 말할 수도 없고…

결 론

신 집사님의 글들 가운데 근거가 확실하지 않는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자료를 부풀리거나 확대 해석한 그런 자료들을 기초하여 전부가 사실인 것처럼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파장을 일으키려는 선동가의 대표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모든 목사와 모든 교회가 비리의 한 가운데 있는 것처럼 오해하며 곡해하도록 만드는 그런 전략을 펼치고 있습니다. 물론 그분이 지적하는 내용 전부가 거짓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부를 전체로 싸잡아 비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늘 공격의 대상인 목사님들 가운데 자신의 생애를 드려 애써 수고하는 이름 모를 수많은 목사님들까지 포함하여 비난한다면 과연 그가 무슨 자격으로 그럴 수 있단 말인지? 당신이 한번 목사를 해 보라고 말하고 싶지만 욕하며 자란 사람은 욕한 당사자를 닮는 법이라 그만둡니다. 진정한 개혁자는 자신을 포함하여 비판할 뿐 아니라 그 비판에서 열외 되는 정말 귀하고 소중한 분들을 보호하려는 따뜻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남을 향한 비난의 손가락을 이젠 자신을 향하여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신 집사와 같은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없어 교회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 비난의 내용을 삶으로 실천하려는 자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부터 먼저 돌이키며 나부터 정직하게 살 뿐 아니라 나부터 헌신하면서도 어렵게 꺼져갈 듯 작은 신앙의 불을 유지하고 있는 분들의 불을 꺼뜨릴 것이 아니라 격려하고 소망을 갖게 하며 복음의 능력을 전해야 할 때가 바로 이때인 것입니다. 그리고 신성남 집사님은 자신이 올린 거짓된 글에 깊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손을 얹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개혁은 자기 자신에게서 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집사님이 아무리 핏대를 높여 소리를 외칠지라도 그 자신이 잘못을 인정하며 회개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닮아 개혁의 길을 가겠습니까? 그것은 개혁이 아니라 개 가죽에 불과한 헛소리 일 뿐입니다.(*) 글쓴 이 / 권현익 목사(GMS 선교사, hdherald@daum.net) 출처 / 합동헤럴드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 모독한 이단자 세르베투스의 화형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 모독한 이단자 세르베투스의 화형

주장과 반론 / 칼빈의 제네바 학살설
열 가지 주장에 대한 반박

다음의 글은 신성남 집사의 글에 대한 권현익 목사의 반박에 대한 두 번째 신성남 집사의 주장과 이에 대한 권현익 목사의 반박의 글이다. <편집자>

신성남 집사 / 권현익 목사님의 반박 글에 원인을 제공한 사람으로서 저의 입장을 추가로 밝히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해서 여기에 글을 올립니다.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칼빈이 제네바의 종교적 학살에 대해 책임을 면하기 힘든 이유:

신 집사(1) / 칼빈의 명예는 물론 소중합니다. 다만 마찬가지로 카스텔로의 명예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반박 / 집사님은 카스텔리옹의 명예 역시 칼뱅의 명예만큼 중요하다고 하셨지만 집사님의 글들 어디에도 그의 명예를 지키려는 중립적인 자세가 전혀 없이 “칼뱅이 제네바의 ‘종교적 학살’에 대해 책임을 면하기 힘든 이유”라고 단정하신 것으로 보아 집사님에게서는 여전히 칼뱅의 명예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듯합니다. 저는 지금 칼뱅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카스텔리옹을 모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ctrl+c, ctrl+v로 들이대는 무논리’가 아닌 사료들을 통하여 역사적 사실에 바르게 접근해 해보자는 것입니다.

집사님이 주장하시는 ‘칼빈 학살’의 유일한 근거 제공자인 카스텔리옹의 증언이 허구임을 증명했음에도 여전히 그에 대한 신뢰를 굽히지 않으시니 좀 더 자세히 그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이며 거짓 증언임을 증명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집사님은 논쟁의 방향을 흐트려 놓지 마시고 지키고 싶으신 카스텔리옹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저의 논증이 어떤 면에서 또 어떤 자료에 의해 잘못된 것임을 제시하셔야만 합니다.

신 집사(2) / 카스텔로는 무명인이 아닙니다. 그는 칼뱅의 동료로서 제네바신학교의 교장이었으며 당대에 이미 베스트셀러 책을 내기도 한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따라서 칼뱅에 대한 글을 허위 조작하여 공상소설을 쓸 정도로 몰지각한 사람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할 근거가 없다고 봅니다. 즉 그가 신학 이론이나 논조에 있어서는 적대적이고 감정적으로 서술할 수는 있으나 칼뱅과 관련한 여러 사실(Fact)들을 실명까지 동원하며 전체 내용을 소설처럼 조작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오히려 그게 더 무리한 주장입니다.

반박 / 저는 카스텔리옹의 신학적 자질에 대해 평가한 적이 없고 단지 칼빈에 대한 그의 역사적 언급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개인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공상 소설일 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럼에도 집사님은 여전히 카스텔리옹을 무한 신뢰하시는 근거가 “그가 무명인도 아니고 베스트셀러 저자이기에 그런 황당한 역사 언급을 할 사람이 못된다.”는 논지는 별 정당성이 없어 보입니다. 신학자 베스트셀러 작가는 거짓을 말 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에 못지않은 신학자요 베스트셀러 작가인 칼빈은 왜 전혀 신뢰를 하지 않는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네바신학교의 교장이라는 글은 어디서 갖고 오셨나요? 혹시 카스텔리옹이 당대에 얼마나 인정받는 신학자였는지를 증명이라도 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거짓이요 포장된 왜곡이지요. 그는 오늘날 중고등학교에 해당되는 콜레쥬 드 리브(Collège de Rive)라는 학교의 교장이었습니다. 쥬네브의 신학교는 쥬네브 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1559년에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제발 이런 거짓된 자료를 사실인 것처럼 확인 절차도 없이 ctrl+v를 하시는 일은 제발하시지 마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집사님께서 아무리 그를 보호하고 싶어 하셔도 그의 증언이 사실임을 증명할 사료(史料)나 정황을 제시하지 않은 채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만 주장하시는 것은 개인적 심정으로 칼뱅보다 카스텔리옹을 더 신뢰하고 싶고 칼뱅은 살인자라고 믿고 싶은 비논리적인 자기 확신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집사님의 주장에는 그 어떤 사료 제시도 없이 개인적인 추측과 카스텔리옹에 대한 무한 신뢰를 근거로 제 글에 논박하고 있기에 더 이상 학적인 논쟁을 기대할 수 없음에도 다시 한 번 그의 역사적 증언이 거짓과 조작이었음을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1640년에 프랑스 왕국에서 명목상으로 왕국의 서열 제 2인자였지만 말년에는 실제적으로 왕국의 모든 권력을 휘둘렸던 리셀리유 추기경(1585-1642)은 위그노들을 완전히 말살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박해를 가하였습니다.

나아가 칼빈을 신뢰하는 위그노들에게 더 이상 칼빈을 따르지 못하도록 칼빈 개인의 사생활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꼬투리를 잡아내기 위해 칼빈의 고향인 느와용의 역사 자료와 프랑스가 갖고 있는 모든 기록들을 다 동원하여 찾아 낼 것을 지시했습니다. 아마도 리셀리유는 털어 먼지 안 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자신감이 있었겠지요. 그 역시 모략 가와 이간자요 종교인이면서 엄청난 재산을 횡령한 사람으로 프랑스 역사가 평가하는 그런 인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의 이런 깊은 관심과 기대와는 달리 놀랍게도 칼빈에 관하여 그 어떤 혐의(불어 역사 원문에 rien n’est ressorti : 아주 강한 부정문으로 그 어떤 것도 나온 것이 결코 없었다는 뜻)도 찾아 내지 못했습니다.(이 역사 기록의 본문은 증거 자료로 이 신문의 이전 글에 올려놓았음)
그리고 리셀리유 추기경이 죽은 후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저서(Œuvres théologiques , 1647)에서 칼빈에 대한 언급을 하였는데 다름 아닌 칼빈 당시 쥬네브에서 함께 살았던 볼섹이 남긴 유언비어인 칼빈이 동성 연애자였다는 주장만 살짝 실어 놓았을 뿐입니다. 칼빈이 동성연애자일 수 없다는 증거는 이 신문의 이전 글에 잘 설명해 두었습니다.

이처럼 칼빈을 중상 모략하기 위하여 국가와 종교의 권력을 다 동원하였지만 별 먼지가 나오지 않자 리셀리유 측은 카스텔리옹처럼 저급한 거짓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볼섹의 주장을 언급해 놓았습니다. 리셀리유가 그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인 카스텔리옹의 글을 접하지 못해서 그의 주장을 책에 실지 않았을까요? 칼빈이 죽은 지 백년이 채 안된 시기로 이런 거짓된 주장을 출판할 경우 그가 말살하려는 위그노들로부터 오히려 역공격을 받을 수 있기에 이 허무맹랑한 주장을 제쳐 놓았던 것입니다.

둘째,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고요? 카스텔리옹의 증언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또 다른 중요한 증거는 1766년에 출간되는 철학자 볼테르(1694-1778)의 ‘범죄와 형벌에 대한 해설’(Commentaire sur le livre Des Délits et des Peines, 1766)이라는 책입니다. 볼테르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그 동안의 수많은 학살을 고발하기 위하여 그 동안 교회가 저질렀던 박해들 그것이 천주교 측이든 개신교 측이든 모든 자료들을 추적 수집하여 그의 책에 게재합니다. 이 책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수많은 학살에 대하여 자세하게 서술해 놓았으며 당연히 칼빈에 관해서도 언급을 합니다.

“칼빈은 의사 세르베투스를 서서히 불에 타 죽게 했고 칼라브로아 장틸리스의 목을 자르는데 힘을 보탰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았다. 그리고 칼빈의 계승자들은 1632년에 앙트완을 화형 시켰다. 과연 이성이 신앙심이 정의가 이 모든 살해 행위들을 저질렀다는 말인가?” 카스텔리옹보다 훨씬 이후의 사람인 볼테르는 카스텔리옹처럼 도매금으로 칼빈이 수십 명을 화형에 처했다고 말하지 않고 사람들의 이름까지 제시하면서 잘못을 공격합니다.

볼테르는 프랑스 사람으로 쥬네브 근교로 망명하여 살았기 때문에 쥬네브에 관하여서는 당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칼빈의 사후에 발생한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화형 사건인 앙트완의 화형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앙트완의 생애와 그가 죽기까지의 행적들을 소소하게 잘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건 역시 마치 칼빈으로 인하여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칼뱅을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카스텔리옹이 주장하는 수십 명을 학살했으며 유아 세례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집행했다는 그런 사실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서술 하지 않았던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리셀리유는 당시 권력으로 최고였다면 볼테르는 계몽주의 철학자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그런 학자임에도 이 두 사람이 베스트셀러 작가인 카스텔리옹의 주장을 지지하는 단 한 마디만 남겼더라도 지금의 우리는 카스텔리옹의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다고 고려를 해 볼 것입니다만, 애석하게도 이 두 사람의 책에서는 그 어떤 것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셋째, 칼빈이 학살을 자행하지 않았다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데오토르 베즈가 세르베 사건으로 유럽의 다른 지역(루터교를 포함)에서 ‘쥬네브는 관용이 없는 잔악한 도시’라고 공격을 해 오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종교적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한 당신들이 세르베 사건 외에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은 쥬네브를 과연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라고 반박을 합니다.

베즈의 주장이 거짓이라면 카스텔리옹을 비롯한 살상을 목격한 사람들이 베즈의 말에 반박하고 나서야 했겠지만 반박은커녕 비관용에 대한 공격을 멈추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처럼 수많은 역사 사료들이 전혀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카스텔리옹의 주장이 20세기로 넘어와 전기 작가이며 극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가 언급한 카스텔리옹에 대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밑도 끝도 없이 주장한다고 해서 거짓 주장이 진실로 바뀌어 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넷째, 쥬네브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역사가들의 진술들이 카스텔리오의 주장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집사님은 츠바이크의 글을 인용하여 “칼뱅은 4년 동안 적어도 58명을 처형하고, 76명을 시외로 강제 추방했다고 한다. 그 중에 10명은 참수형이었고, 35명은 마녀사냥처럼 처참한 화형이었다. 그들은 이 부패한 도시에 실질적인 도덕과 기율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칠팔백 명을 처형할 교수대가 필요하다.”고까지 말했다고 기술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주장들이 나올 때마다 혹시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오래 전부터 쥬네브의 역사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의 말씀처럼 쥬네브에서 (실제로) 화형 및 학살 사건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더군요.

‘프랑스의 마녀 사냥’(La magie et la sorcellerie en France)이라는 책과 ‘사모니 계곡에서 발생한 마녀 사냥’(Des montagnards endiablés. Chasse aux sorciers dans la vallée de Chamonix, 1458-1462)이라는 두 권의 책에서 쥬네브에서 일어났던 학살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이 책의 한 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458년에서 1462년 사이에 샤모니 계곡에서 쥬네브의 종교 재판소(Inquisition)에 의한 수 많은 마녀 사냥이 있었다. 13명의 수도사 그들 중에는 4명의 남자와 9명의 여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극심한 고문을 가한 이후에 이단 혐의로 화형을 선고했다.”

다음은 불어 원문입니다.

Entre 1458 et 1462, la vallée de Chamonix vit plusieurs chasses aux sorciersmenées par le tribunal d’<inquisition de Genève>. Treize personnes au moins, parmi lesquelles quatre hommes et neuf femmes, sontcondamnées au bûcher pour hérésie après avoir reçu, pour certaines, des peines exemplaires – une particularité toute chamoniarde.

제가 제시한 프랑스 원문의 이 부분을 복사하셔서 인터넷에 치시면 책 이름과 저술가, 출판 연도를 비롯한 모든 내용이 나올 것입니다.

이처럼 분명히 쥬네브의 종교 재판소(inquisition de Genève)에 의해 자행된 사건의 발생 년도를 보게 되면 천주교가 쥬네브를 지배하였던 오래 이전 시절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 놀라운 또 다른 기록 하나는 셀더르하위스라는 학자가 “1495년 마녀 사냥으로 한 사람을 화형 시키고, 1531년까지 12명의 사람들이 마녀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칼빈이 살았던 16세기를 언급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애석하게도 1531년에까지 쥬네브에서 화형이 행하여지고 있을 때 깔뱅은 아직도 학생으로서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쥬네브가 1536년 5월 21일에 개혁주의 노선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에 일어났던 학살은 개혁주의 진영이나 깔뱅과는 전혀 무관한 천주교 종교 재판소에 의해 저질렀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책 Simon Sophie, ‘Si je le veux, il mourra!’(Maléfices et sorcellerie dans la campagne <genevoise> (1497-1530), Lausanne 2007 (CLHM, 42)라는 책인데 제목을 번역하면 ‘만약 내가 그를 본다면 그를 죽일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1530년까지 쥬네브 종교재판소가 저질렀던 학살의 악행은 이렇게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칼뱅을 악의적으로 공격하는 사람들이 강조하며 주장하는 칼뱅이 사역을 다시 시작한 1541년부터 있었다는 그 중요한 학살에 대하여 증언해 놓은 책은 단 한권도 없는 것일까요? 마지막 날에 공개될 계시록이라서 그럴까요?

지금이라도 인터넷에서 ‘쥬네브의 콩시스투아르’(Consistoire de Genève), 아니면 칼뱅을 공격하기를 즐겨하는 자들이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단어인 ‘쥬네브의 종교재판소’(l’inquisition de Genève)라는 이 단어를 넣어 보시면 어떤 내용들이 검색되는지를 잘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검색 결과는 천주교회가 행한 학살들은 너무나 많이 그리고 자세하게 언급되는데 유독 칼뱅 시대의 세르베 화형 사건을 제외한 그 어떤 증언도 나오질 않습니다. 꼭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왜 역사가들은 쥬네브에서 일어났던 천주교회에 의해 자행되었던 다른 학살들에 대해서는 방대한 책을 통하여 자세하게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어찌되었는지 칼뱅 시대에 있었다는 학살에 대해서는 왜 모두가 침묵을 하는 것일까요? 이러함에도 카스텔리옹의 역사 서술이 진실이라고 주장을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카스텔리옹에 대하여 이런 의혹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칼뱅이 통치한 처음 5년 동안에 비교적 작은 이 도시(제네바)에서 13명이 교수대에 매달리고(Stefan Zweig. op.cit. p.128)라고 하였는데 제가 위에서 제시한 두 화형 사건에서 죽은 사람들의 숫자가 우연의 일치인지 13명이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자는 너무 오래된 사건이기 때문에 카스텔리옹이 1531년까지 있었던 학살 사건 기록에 3자를 4자로 바꾸지 않는 이상 어떻게 13명이라는 숫자가 어떤 근거로 제시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시 칼빈의 이전에 있었던 화형사건을 숫자를 바꾸어 칼뱅의 시대에 있었다고 조작 한 것은 아닌지? 분명 이런 의혹도 있지만 그의 마음을 알아 낼 수 없기에 역사자료를 임의로 조작하였다고는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이 정도로 상세하게 카스텔리옹의 주장이 그 자신의 상상에서 나온 공상 소설일 수밖에 없다는 증거들을 제시하였다면 집사님께서는 인터넷에서 찾아내시든 정확한 역사가가 단 한 명이라도 칼빈의 학살을 주장할만한 사료를 제시하셔야만 그토록 보호하시고 싶은 카스텔리옹의 명예가 지켜질 것이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그는 절대로 보호 받을 수 없는 싸구려 거짓 저술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칼빈 시대에 칼빈의 명예를 먹칠하기 위해 칼빈을 공격하였던 두 사람이 있었는데 카스텔리옹과 볼섹(Jerome Bolsec, ?-1584)이라는 사람입니다. 볼섹이라는 인물을 잘 모르실 것 같아 소개하자면 그는 프랑스인으로 천주교 수도사로 활동하다가 개신교로 개종한 후 쥬네브로 건너와 살다가 ‘칼뱅과 칼뱅의 견해를 따르는 이들은 우상숭배자’라고 비난한 죄명으로 시의회로 부터 추방 받게 됩니다. 그 이후 프랑스로 넘어 와 그는 다시 천주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이 정도의 그의 전력이라면 그가 어떤 역사를 기록할 것인지 이미 추측이 가능합니다.

이 두 사람은 여러모로 서로 닮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두 사람 다 프랑스 사람이며 칼뱅 시대에 쥬네브에서 살았던 인물이며 두 사람 다 지식인에 걸맞지 않는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쥬네브 시의회로부터 추방당하였다는 점과 두 사람 모두 칼뱅에 관한 악의적 중상모략과 없었던 사실을 역사적 사실인 냥 거짓 주장들을 책으로 출판하였는데 두 사람 다 쥬네브에 머물고 있을 동안이 아닌 한 사람은 쥬네브를 떠난 지 10년 뒤 가명으로 볼섹은 칼뱅이 죽고 난 다음에 ‘칼뱅 전기’라는 책을 저술합니다.

이 두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뒷 담화 즉 비겁함입니다. 마지막으로 더 놀라운 공통점은 그들이 그토록 애써 칼빈을 공격했지만 그 어떤 역사가도 그들의 말을 사실로 인정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어떤 역사가도 인정하지 않는 카스텔리옹의 증언들을 무슨 근거로 사실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며 어떤 이유로 그의 명예는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하시는지 정말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칼빈을 싫어하는 이들은 카스텔리옹의 능력을 과대시하는 경향과 본능적으로 패배자를 옹호하려는 자들은 항상 그를 순교자로 평가하려 하였다.”(로날드 윌레스) 계속해서 그는 “볼섹 역시 칼뱅 사후에 칼뱅의 전기를 저술하였는데 칼뱅에게 불리한 무엇인가를 찾고 싶어 하는 로마 천주교 신학자들은 종종 볼섹의 말을 곧이들었는데 이는 유감스럽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칼빈의 신학과 칼빈 자체를 싫어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당시 뿐 아니라 오늘날 까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칼빈을 살인자나 동성연애자라고 말하는 저급한 사람들은 이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신 집사(3) / 물론 유럽에 많은 기념 비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로마 가톨릭에 의한 수많은 박해자에 대한 비석이 별로 없는 이유와도 맥락을 같이 합니다. 대부분의 역사는 승자들이 주도합니다. 그리고 종교 개혁 당시 개신교에 의해 죽은 사람들보다 로마 가톨릭에 의해 죽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아예 비교조차 안 되지요. 그래도 이를 애도하는 비석이 별로 없는 이유는 학살 당시 가능한 증거를 인멸하고, 설사 증거가 있더라도 후대에 이에 대한 기록 전승을 최대한 방해하거나 숨기려 했기 때문입니다. 로마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반대자 학살이 뭐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이를 널리 알리고 홍보했을까요?

반박 : 과거에 한 시골 사람이 남대문에는 남대문이라고 적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막상 갔더니 자신의 생각과 달리 숭례문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서 이 놀라운 사실을 고향 친구들에게 숭례문이라 적혀 있다고 전해줍니다. 그런데 그 중 친구 한 녀석이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세로 방향으로 남.. 대.. 문이라고 적혀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이 옳다며 우겼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이 이 친구처럼 보이는 것은 계속해서 사실이나 사료를 근거하지 않고 개인적인 추측 내지는 억지를 사실처럼 주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유럽에서 23년째 살고 있으며 교회사와 관련된 역사의 현장은 거의 빠뜨리지 않고 다녀왔던 사람으로 수많은 기념비나 동상 기념 판을 사진으로 갖고 있습니다. 파리만 해도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기념하는 기념 판, 비석, 동 상은 길거리에 널려 있습니다.

사진설명 / 세느강 곁 어느 한 곳에는1915년 터키에 의해 자행된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사건을 폭로하기 위해 당시 죽었던 한 신부의 거대한 동상을 세워놓았다.
사진설명 / 세느강 곁 어느 한 곳에는1915년 터키에 의해 자행된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사건을 폭로하기 위해 당시 죽었던 한 신부의 거대한 동상을 세워놓았다.

옳으신 말씀도 있습니다. 천주교가 주도한 박해에 대해서는 천주교회는 지금 이 날까지 단 한 번도 자신들의 잘못된 역사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고 그 당시 국가가 학살을 자행했다고 당시 국가들에 잘못을 떠넘기기고 있 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 행했던 박해의 현장에는 박해받은 후 손들이 세워 놓은 수많은 기념비나 추 모비가 남겨져 있습니다.

집사님은 추모비가 없는 이유가 대 부분의 역사는 승자들이 주도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역사는 승 자가 잠시 주도하였을지 몰라도 그 역사의 사실은 약자들과 그 후예들의 증언과 저술을 통해 역사적 사실로 남겨 지기 때문에 역사의 승자는 강자가 아니라 약자라는 사실입니다.

그 증거가 세르베테스의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신학을 여전히 따르는 유니테리언들이 세워 놓은 세르베테스의 동상이 남아 있고 세르베테스를 죽게 하였던 가해자의 후손들이 그 사건을 사죄하기 위하여 개신교 역사가와 목사들이 세운 세르베투스의 죽음에 사죄하는 사죄비와 그 외에도 곳곳에 칼뱅의 잔인함을 폭로하려는 의도로 세워진 반 칼빈파들이 세워 놓은 수많은 세르베투스의 동상들은 있습니다.

저는 이런 장소를 빠뜨리지 않고 다 찾아다녔지만 칼빈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억울한 죽음에 대해 호소하는 자손들이나 칼빈을 공격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기념비나 사죄비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역사의 기록도 없고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람들 이름도 없고 그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후손들의 호소도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세르베투스를 잔인하게 죽인 가해자들의 후손들이 세운 사죄비에는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 한번 살펴보도 록 하겠습니다. 1903년 세르베투스 화형 450주년에 쥬네브에 세워진 사죄비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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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위대한 종교 개혁자 칼빈을 존경하며 감사하는 후손들은 개혁과 복음의 참된 원칙에 따라 행하였지만 양심의 자유 를 단호하게 묶어 버린 그 시대에 행한 한 가지 실수를 정죄한다.”(위 사진)

이 사죄비는 칼빈의 후예들 중 역사학자들과 목사들이 세운 것이기에 거짓을 기록해 놓았다면 두고두고 욕을 먹을 것이고 또 다른 학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르베투스에 대한 사죄비 하나만 달랑 세워 두었다면 그들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사죄비들을 세워야 함에도 칼뱅 시대의 사죄비는 단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 비석에는 세르베투스의 죽음이 칼빈이 행한 실수가 아니라 그 시대적 가치관에 따른 그 시대의 실수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죽인 것이 아니라 천주교를 비롯한 당시 모든 기독교적 가치관이 그를 죽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르베투스가 첫 판결 때 추방 명령을 받았지만 그가 거절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첫 판결 때에 추방 명령을 받지만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세르베투스가 쥬네브를 떠나는 순간 로마 가톨릭 지역으로 들어가야 하고 들어감과 동시에 죽임 당하는 것이 뻔한 사실이었기에 이 제안을 거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 집사(4) / 저는 칼뱅의 학살 여부가 장로교 존립의 관건이라고까지 보지는 않습니다. 그의 기여도가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 후에 장로교의 신학은 더욱 연구되고 보강되어 온 것이니까요. 이는 마치 영국성공회의 설립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현재 성공회를 비하하지 않는 것과 유사합니다.

반박 / 여전히 학살이라고 주장하시며 제가 제시한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칼뱅의 명예를 지켜 주시려는 자세는 전혀 보이질 않군요.

신 집사(5) / 칼빈에게 사형을 내릴 권한이 없다는 주장은 피상적으로만 맞는 사실입니다. 종교재판소(장로법원, 치리회의)은 유죄를 판단만 하고 실제 사형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은 시당국이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정직하지 못한 핑계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두 기관이 서로 반목과 협력을 반복하며 힘겨루기를 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단자 처형에 있어서는 거의 공조를 했습니다. 세르베투스 사형이 그 대표적인 실제 예입니다. 칼빈은 그의 사형을 결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반박 1 / 이런 주장을 하시면 할수록 쥬네브의 역사를 전혀 모르시는 분으로 그저 상상력에 의존한 비역사적 주장만을 하시고 계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제가 이제부터 위의 주장이 사실이 아닌 것을 증명하는 자료들을 제시하겠습니다.

칼빈은 그의 글과 설교를 통해서 ‘목사가 공직을 겸할 수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기에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일은 평신도에게 맡겨야 한다’고 분명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칼빈을 따르는 프랑스 개신교 역시 이 원리를 따랐습니다. 당회, 노회, 총회는 종교적인 문제만을 다루었고 국가와 상대해야 할 정치적 사건이나, 전쟁을 결정할 경우 위그노 귀족들이 주도 한 ‘정치회의’(assemblée politique)라는 회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칼빈이 정치적인 활동을 했다면 프랑스의 모든 교회 역시 칼빈의 행동을 따라 목사들이 정치가로서 활동했어야 했지만 프랑스 개신교회사 속에 목사가 정치를 겸직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칼빈은 또한 권징(징계)를 ‘교회의 권징’과 ‘사회적 권징’으로 구분하면서 교회는 국가가 당연히 할 일을 떠맡지 않아야 하며 국가 역시 교회가 행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의 권징인 치리회에서는 어디까지나 목회적으로 성도들을 신앙으로 바로 세우는 일만 하였던 것입니다.

이를 가장 잘 증명해주는 것이 시의회를 통해 결정된 쥬네브 교회법에 ‘목사들에게는 시에 대한 사법권이 없으며 오직 신령한 검인 하나님의 말씀만을 사용하여야 한다.”라고 명문화 해놓고 있으며 이를 근거로 시의회는 목사들을 그들의 영역인 사법권에서 배제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쥬네브 교회법은 오늘날까지 잘 보관되어 남아 있으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반박 2 / 칼빈은 그의 사형을 결코 반대 하지 않았다? 칼빈 자신의 글 ‘세르베투스 논박’에서 칼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실 내가 이 가련한 악인을 옳은 길로 이끌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나는 공개적으로 소문을 내지 않은 채 은밀히 이 일에 전념했다. 나는 편지들을 통해 관대하게 그를 권면했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끝까지 모든 인간미를 활용하되 그가 나의 선하고 거룩한 권면에 기분이 상해서 내게 화를 냈다기보다는 차라리 뭔가 모를 격노를 발했을 때까지 그렇게 했다.(자신만만하던 세르베투스가 의외의 판결인 화형이 선고되자 세르베투스는 칼빈을 만나고 싶다고 제의하여 시법정은 칼빈에게 증인이 될 동행자들과 함께 세르베투스를 만날 것을 권고 했습니다. 칼빈은 곧 죽게 될 세르베투스를 만나 마지막까지 돌이키기 위해 그를 찾아갔을 때 세르베투스는 칼빈에게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애원하는 그에게 칼빈의 대답은 이것은 내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기에 나에게 용서를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 필자)

그가 그토록 비열하게 모독한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할 것을 부탁했을 때 세르베투스는 나에게 자비를 탄원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떤 개인적인 모욕 때문에 그를 고소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이점에 대해서 나는 16여 년 전에 내가 열심히 그를 우리 주님께로 이끌었던 것처럼 그를 부드럽게 타일렀다. 내 자신의 목숨을 내걸기까지 말이다. 그가 죄수가 된 것이 나의 기소 때문임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소송 사건으로 들어가자면 도시의 법에 따라서 누군가가 상대편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그를 기소한 사람이 내 동의에 의해서 그렇게 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이단성이 입증된 후 모두가 알거니와 나는 그를 사형에 처하도록 그 어떤 탄원도 하지 않았다.”

세르베투스를 그의 오류에서 벗어나 진리에 이르도록 목숨을 걸고 세르베투스를 도우며 칼빈이 오랜 세월동안 베풀었던 지극한 정성은 세르베투스가 스스로 소신적 죽음을 선택하므로 그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만 끝난 것이 아니라 칼빈은 살인자로 세르베투스는 그의 이단성은 숨겨진 채 영웅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칼빈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칼빈의 이런 무수한 노력들은 애써 지워 버리고 오로지 세르베투스의 억울한 죽음으로만 몰고 가 칼빈이 그를 기소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살인자 혹은 살인 공모자로 몰아서야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르베투스는 이미 두 번이나 화형 선고를 받은 범죄자의 몸이었기에 자신을 늘 숨기고 다녀야 했던 존재였습니다. 그 증거는 칼빈이 프랑스에 머물고 있는 동안 칼빈 역시 천주교로부터 쫓겨 다니는 몸임에도 세르베투스가 파리 어느 곳에서 만나자고 제의를 해오자 체포될 경우 최고형을 받을 수 있는 위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그의 요청을 받아 들여 그곳으로 가 기다렸지만 끝끝내 세르베투스가 나타나지 않았음을 통해서도 세르베투스가 갖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왜 칼빈이 살고 있는 쥬네브를 찾아 갔으며 당시 여러 곳에서 예배가 있었음에도 굳이 칼빈이 설교하고 있는 그 장소를 찾아 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쥬네브의 방종 파들이 그를 옹호하고 있다는 점과 칼빈이 그 자신의 얼굴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 뿐 아니라 칼빈의 성품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칼빈이 그 자신을 죽이려는 마음만 있었다면 이미 주고받은 편지들이 그 증거가 될 것임에도 그 편지를 폭로하지 않았다는 점과 세르베투스가 쥬네브로 갈 뜻을 밝혔을 때 내가 쥬네브에서 아무런 권력이 없어 최소한의 권력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세르베투스를 절대로 살려 보낼 수 없는 세르베투스의 신학사상의 치명적인 잘못이 있음을 분명히 밝히며 내 의지가 이러하니 쥬네브로 절대로 와서는 안 되는 뜻을 담긴 답장을 보냈던 것으로 보아 세르베투스는 칼빈이 자신을 죽이려는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쥬네브가 아니면 더 이상 숨어 다닐 수 없는 절박함이 있었던 것인지 쥬네브가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쥬네브를 거쳐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탈리아의 어떤 한 곳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칼빈이 설교하고 있는 생 피에르 성당을 찾아간 것에서 문제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세르베투스 자신은 그 누구도 자신을 절대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고 당당하게 그곳을 찾아갔지만 가슴 아프게도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한 행정관이 그곳에 있었고 그 행정관에 의해 그는 체포가 되었으며 그 행정관에 의해 기소되었던 것입니다. 이단으로부터 도시를 지켜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었던 행정관이 시를 대표하여 세르베투스를 기소를 했지만 유식한 세르베투스의 신학을 비판할만한 신학적 자질을 갖고 있지 않아 칼빈에게 대신 기소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신학이 잘못된 것임을 증명해야 하는 신학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재판에 뛰어 들었던 것입니다.

세르베투스를 기소하게 되면 살인자라는 누명을 받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칼빈을 비판하려는 사람들은 쥬네브는 이단의 중심지이며 화형 선고를 받은 천인공로 할 이단을 보호하는 이단 옹호자일 뿐 아니라 이단자 칼빈으로 낙인자라고 공격해 올 것을 그는 이미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신학자로서 또한 이단으로부터 이 도시를 보호해야 할 목회자로서 세르베투스의 삼위일체 부정이 옳지 않음을 증명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자신의 신학을 무시한 것에 대한 개인적 보복이나 세르베투스를 죽이려는 악한 감정을 갖고 이 재판에 임하지 않았음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르베투스의 죽음은 그의 신학적 신념으로 기인한 것이었지만, 분명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가치관과 관점에서는 분명 억울한 죽음이며 잘못된 결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랜 세월 동안 세르베투스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를 향하여 애틋한 애정을 부었던 칼뱅의 그 수고와 노력은 무시한 채 살인자라고 낙인을 찍어야 할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 집사(6) / 천주교 신자가 쓴 책들이 칼뱅의 학살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자신들의 교회는 칼뱅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는데 무슨 염치로 이를 언급할까요. 반대자에 대한 부끄러운 학살은 양측 모두가 숨기도 싶은 역사일 뿐입니다.

반 박 / 제 글의 요지를 제대로 파악을 하시지 못하신 듯합니다. 천주교가 자체적으로 발간한 역사책에서 개신교를 공격하는 수많은 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책이 아닌, 일반 역사가들도 이런 학살에 대한 기록이 전무후무할 뿐 아니라, 역사학자 가운데 천주교 신자들이 서술한 역사책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미 없었다는 것을 위의 글에서 잘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발도파(Waldenser)는 700년 동안 천주교로부터 핍박을 받았고 그 700년에 걸쳐 죽은 순교자들의 이름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위그노들 역시 발도파 보다는 훨씬 짧은 기간이지만 순교자들의 이름을 가족이나 동료, 교회를 통해서 대부분 그 명단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들을 역사를 서술할 때마다 다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쥬네브에서 이렇게 많은 살상이 있었는데 어찌되어 그 가족들이나 동료들은 그들의 이름 하나를 남기지 않았을까요?

그 당시 학살자 가운데 단 한 사람의 이름이라도 제시할 수 있다면 학살이 있었다는 증명 자료가 될 수 있겠지만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당연히 피해자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쥬네브 역사는 물론 고문서에서도 이런 학살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고 말하면, 칼뱅의 영향력으로 모든 사료들을 소각했다고 대답할지 몰라도 사료는 소각될지 몰라도 그 증인과 증언들은 남아 반드시 역사로 다시 기록될 것이기 때문에 이 상상 역시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신 집사(7) / 종교재판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1542년 2월 16일자 장로법원의 회의록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이러합니다. “한 여인은 로마 가톨릭의 책 ‘성자들의 생애’라는 책자를 소지하고 있다가 적발되어서 출두했고 어느 이발사는 사제에게 삭발식을 해 주었다고 고소되었다. 어느 금속공은 미사에 쓸 잔을 만들어 주었다고 적발되었고 어떤 이는 교황을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가 적발되었으며 이러한 사소한 것들까지도 모두 재판을 하였다.” – 정수영, ‘새 교회사’ 이런 사소한 것들까지 기소되었으니 당시 제네바의 교회가 얼마나 신정정치, 탄압정치, 그리고 공포정치를 행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요즘 교회의 당회나 노회가 이런 종류의 심사를 했다면, 아마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반박 / 이런 사소한 것까지 다루는 것을 보니 당시 제네바의 교회가 얼마나 신정정치, 탄압정치 그리고 공포정치를 행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을 하셨는데 그래서 그 기소를 받고 사형 언도를 받았다고 하든가요? 말씀하신대로 콩시스투아르는 이러한 사소한 것만 다루는 곳입니다. 그런데 ‘새 교회사’라는 책에서 이런 사소한 것 외에 집사님이 주장하시는 잔악한 결정들을 내렸다고 언급을 하고 있든가요?

사람들은 칼뱅을 엄격한 독재자라고 비판하는데 이는 그 당시의 상황을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쥬네브의 정치가 다른 도시보다 엄격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정이 칼뱅이 만든 것이 아니라 칼뱅이 오기 훨씬 이전 로마 천주교 시절부터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황제의 법’이라 하여 이단을 사형시키는 것을 포함한 법이 채택되어 있었습니다.

1459년 로마 가톨릭 성당 참사회가 만든 법규에 의하면 “매춘부들은 격리되어 통제를 받는다. 도박의 금지되고 특히 카드와 주사위 놀이도 금지한다.”고 규정해 놓았습니다. 1534년에는 방탕함과 혼인 관계를 끊는 것들에 대해 법으로 금지하고 또 수호성인 축제도 반대하였는데 그 이유는 싸움과 술판과 난잡함 즉 젊은이들이 수도원에서도 성적인 문제를 비롯한 여러 문제들이 발생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칼빈도 엄격한 사람이기는 하였지만 쥬네브라는 자체가 로마 가톨릭 시절 때부터 이런 엄격한 법규를 갖고 있었음에도 주교를 비롯한 사제들은 이 법규들 지키지 않고 권력만 행사하였기에 결국 시민들에 의해 쫓겨났던 것입니다.

정말 사소한 것만 다루는 콩시스투와르(Consitoir)라는 정식 명칭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칼빈을 모함하려는 사람들이 한글 번역상의 문제가 아닌 꼭 종교재판소(Inquisition)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콩시스투와르가 마치 천주교의 종교재판소와 대등한 권력과 판결 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부풀리고 포장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유니테리언들이 세운 세르베투스 동상에 갔더니 동상 아래 이런 기록이 있었습니다.

BRULE EN EFFIGIE A VIENNE PAR L’INQUISITION CATHOLIQUE LE 17 JUIN 1553(1553년 6월 17일 가톨릭 종교 재판소에 의해 비엔느에서 모형 화형을 당함)

종교 재판소에서 화형(火刑)을 선고하 지만 당사자가 없이 재판한 궐석 재판의 경우나 아주 특별한 유일무이하며 전무후 무한 세르베투스의 경우처럼 로마 가톨릭 백고사전에 의하면 프랑스의 비엔느에서 천주교의 아주 친절한 도움을 받아 탈출하 였던 이런 경우에는 그의 모습을 한 인 형으로 화형을 집행시켰습니다.

사진 설명 / 세르베투스 후예들인 유니테리언들이 세운 세르베투스 동상 아래의 비문(사진)
사진 설명 / 세르베투스 후예들인 유니테리언들이 세운 세르베투스 동상 아래의 비문(사진)

ET BRULE VIF A GENEVE LE 27 OCTOBRE 1553 A L’INSTIGATION DE CALVIN(그리고 1553년 10월 27일 칼빈의 종교 재판소에서 그를 산 채로 화형 시킴)

왜 이 사람들이 종교재판소(Inquisition)라는 단어를 고집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번역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칼빈이 운영하는 종교재판소가 있었던 것처럼 말하기 위해서 그리고 칼빈에게 살인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이 단어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신 집사(8) /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살리기 위해 애쓴 것보다는 그의 주장을 취소시키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형에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반박 /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세르베투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삼위일체 부정을 취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석방하여 다른 나라로 보낸다 할지라도 그는 그 곳에서 반드시 화형을 당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집사님 역시 칼빈을 존경한다고 하셨으면 이런 식으로 너무 칼빈을 살인자로 몰고 가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세르베투스의 몸은 쥬네브에서 죽임 받았을지 몰라도 그는 이미 두 권의 이단 서적으로 인해 두 번의 화형 선고를 받고 두 번다 인형 화형을 통해 그의 영혼은 천주교회가 죽였던 점을 애써 부인하시지 말았으면 합니다.

신 집사(9) / 카스텔로가 굳이 가명으로 책을 낸 당시의 절박한 이유는 저도 잘 모릅니다. 이를 변호하고픈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나 권 목사님이 본문에 지적하신 대로 “하지만 그의 책이 출간되었을 때 칼뱅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그 책의 저자가 카스텔리옹이라는 사실을 다 알았다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으로 볼 때, 그 자신이 끝까지 저자를 숨기려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그 책의 저자를 몰랐을 것이니까요. … 저는 “칼뱅을 논함에 있어 사료적 가치도 없는 심상용, 조찬선 목사는 말할 것도 없고 억하심정으로 없었던 일도 있었던 것처럼 악의적으로 왜곡한 카스텔리옹과 그의 책을 편역 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은 반드시 제외되어야 할 비 역사서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단정하신 권 목사님의 최종 결론에는 동의하기가 힘듭니다.

반박 / 눈 가리고 아옹 하는 식으로 가명을 사용하면 자신의 신분이 철저히 숨겨 질 수 있다고 카스텔리옹은 생각한 것이지요. 그가 저자임을 밝혀졌음에도 그 누구도 그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테러는 물론 그가 죽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쥬네브가 살인 집단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말씀하신 4명의 진술에 동의할 수 없는 정당한 근거도 없이 저의 최종 결론에 동의하기가 힘들다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믿고 싶은 것을 끝까지 믿겠다.”는 자세로 현명한 지성인의 모습은 아닌 듯합니다.

설교 시간에 칼빈을 살인자라고 공격했던 김병삼 목사도 이런 자세는 아니었습니다. “좋은 지식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새겨두도록 하지요.”라고 상대의 근거 있는 주장을 인정할 줄은 아셨습니다.

역사는 고집이나 윽박지름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사료(史料)라고 했습니다. 제가 제시한 이런 확실한 자료에도 여전히 카스텔리옹만을 수용하시겠다면 집사님의 개인적 성향이 그러할 뿐이지 집사님의 주장은 논리적이지 못한 것으로 결론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신 집사(10) / 마지막으로 칼뱅의 글을 직접 인용해보자. 칼빈은 세르베투스 화형 이듬해인 1554년 초에 ‘정통신앙 옹호론’이라는 책을 간행했는데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종교적 탄압의 정당성을 밝힌 대목이 있다. “이단을 처형한다는 일은 결코 그리스교도적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된다. 일반 신자가 이단의 거짓 가르침에 물드는 것을 막아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선한)목적을 위해서 는 한 도시의 주민 전부를 없앨 수도 있는 것이다.”

반박 / 저는 이런 책을 본 적이 없는데 이런 비슷한 내용의 글은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언급한 2차 자료의 책 제목과 출판사를 제시해주시면 이런 내용이 있는지를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 주장의 출처가 반 칼빈주의자인 슈테판 츠바이크의 저작 ‘양심의 자유(세르베투스 사건을 중심으로)’에서 발췌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책 이름은 ‘정통신앙 옹호(미셀 세르베투스의 삼위일체 오류에 대한 반박)’이라는 책이며 이 책을 몇 차례 자세히 읽었지만 “한 도시의 주민 전부를 없앨 수도 있는 것이다.”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칼뱅은 이 책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매우 합당한 말을 했다. 아무리 사람들이 이단이라 하더라도 만일 그들을 가르치지 않은 채 무섭게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지배가 될 것이다.”
칼빈은 그의 책에서 두 가지 상반된 주장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터넷을 찾아 봤더니 칼빈을 공격하려는 자들이 늘 인용하는 문구인데 원문에 나오지 않는 내용입니다. 이 문구의 정확한 출처를 제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와 같은 기독교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이단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칼빈의 이러한 소신이 수십 명의 사람을 죽였다는 증거는 될 수 없지요. 그리고 이 확신 때문에 죽은 사람은 세르베투스 외에 그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를 역사가들의 역사 자료로 증명하지 않고서는 이것은 말꼬리를 잡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칼빈이 설상 이단자들을 죽일 마음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가 죽인 사람이 없다면 그가 갖고 있는 마음으로 인해 살인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두 논쟁을 다 읽은 어느 분의 댓글을 단 다음 고백은 잘못된 지식이 진실을 만나게 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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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카스텔리옹의 주장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단 한번이라도 그의 주장을 인용했던 역사문헌이 그의 당대나 아니면 최소 200년 이내의 사료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주장은 무가치한 독백과 공상 소설일 수밖에 없음을 다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리 내 직감이나 내 상식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할지라라도 사료와 사실이 이를 부정하고 있다면, 자신의 주장을 굽힐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용기가 아닌가하고 반문해 봅니다.(*) 글쓴 이 / 권현익 목사(GMS 선교사) 출처 / 합동헤럴드, 권현익 목사 전자우편 주소: hdherald@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