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제3권 제 20장 기도

PARTⅡ
칼빈의 기독교강요(최종판, 1559)
제3권 제20장 기도
“기도는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Ⅰ. 기도의 본질과 가치

1. 믿음과 기도

지금까지 논의를 통한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인간에게는 선이란 것은 전혀 없고 구원에 도움이 될 것도 전혀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곤란에 빠진 자기를 구해낼 힘은 자기 밖에서 구해야만 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이 계시는 기꺼이 또 거저 주신 것이라는 설명이 후에 있었다.
여호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불행한 우리에게 행복주시며 궁핍한 우리에게 모든 부를 주시겠다고 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보고를 우리에게 열어 보이시고 우리의 믿음이 전적으로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우러러보며, 우리의 모든 기대가 그를 의지하며, 우리의 소망이 전적으로 아들에게 밀착하여 안식을 얻게 하신다.

이것은 삼단 논법으로 이끌어낼 수 없는 저 은밀한 숨은 철학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눈을 뜨게 하여 그 빛을 보게 하신 사람들만이 이 철학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다.(시 36:9)

그러나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교훈을 받은 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우리에게 없는 것이 모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풍성하심이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있게 하셔서(골 1:19, 요 1:16 참조) 마치 우리가 넘쳐흐르는 샘물에서 물을 퍼내듯 은혜를 그리스도께로부터 얼마든지 얻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을 찾으며 또 기도로 그에게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모든 좋은 것의 주인이시며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신 것과 그에게 구하라고 상기시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의 앞에 가서 달라고 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땅 속에 감추인 보화가 어디 묻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어도 그 보화를 무시하는 사람처럼 아무런 유익이 없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등한히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순서를 정하였다.

믿음이 복음에서 나는 것과 같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훈련을 받는다.(롬 10:14-17) 바울은 앞에서도 꼭 같은 뜻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마음속에 복음의 증거를 인치는 영, 즉 양자의 영이(롬 8:16) 우리의 정신을 고무시켜 감히 하나님 앞에 우리의 소원을 아뢰게 하며, 말로 다할 수 없는 탄식으로(롬 8:26), 아무 의심 없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다.”(롬 8:15)

그런데 이 마지막에 언급한 점을 우리는 앞에서 이미 간단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이제 더 자세히 논해야 되겠다.

2. 기도의 필요성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 곁에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보물에 우리의 손이 닿으려면 기도의 힘을 빌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교통이 있으며 또 하나님께서는 말씀만으로 약속하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믿었고 필요한 때에는 또 약속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체험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서 직접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대해도 좋다고 약속하신 것은 또한 기도를 통해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셨다. 주의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고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본 보화를 기도로 파낸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가? 그리고 기도를 드리면 그것이 얼마나 많은 면에 유익한가? 이는 말로 이루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유일한 안전한 요새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데 있다고(욜 2:32 참조) 하신 하늘 아버지의 말씀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의 일들을 지켜보시며 보호하시는 그의 섭리와 약하고 거의 쓰러지려고 하는 우리를 지탱하는 그의 힘과 비참하게 죄에 눌려 있는 우리를 받아들여 은혜를 입혀주시는 그의 인자하심이 우리와 함께 있기를 기원한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서 전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으로서 우리가 기도함으로써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원한다. 또한 우리의 양심에는 특별한 평화와 안식이 온다. 우리는 긴급히 필요한 일을 주 앞에 알리고 나서 우리의 어려운 일들을 주께서 샅샅이 아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또 주께서는 우리를 가장 잘 돌보아 주실 의지와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확신하고 완전히 안심한다.

3. 반대 의견
“기도는 없어도 되지 않는가?”

우리가 기도해야만 하는 여섯 가지 이유

그러나 어떤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께 아뢰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운 것과 어떤 곤란을 당하고 있으며 그런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한지를 아시고 있지 않느냐고 말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마치 우리의 목소리로 깨우시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졸고 계시거나 심지어 주무시고 계시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무슨 목적으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명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 때문이 아니고 우리 때문이다. 자기들이 원하는 것과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며 이 인정을 기도로 증명할 것을 하나님은 당연히 자신이 받을 것으로 여기시는데 하나님의 이 입장은 정당하다.

우리가 또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 하나님을 경배할 때에도 그 유익도 우리에게 돌아온다. 따라서 거룩한 믿음의 조상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 있게 찬양하면 할수록 그 은혜를 받기 위하여 기도하겠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엘리야의 예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아합 왕에게 분명히 비를 약속한 후에 하나님의 뜻을 확신했지만 그래도 무릎 사이에 머리를 넣고 애써 기도하며 사환을 일곱 번 보내서 확인하게 했다.(왕상 18:42) 이는 자기가 한 예언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이 약해지거나 태만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소원을 계속 아뢰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불행에 대해 감각이 무디고 마비되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지켜보시는데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도와주시는 때도 있지만 우리가 기로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가 기도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을 항상 찾으며 사랑하며 섬기겠다는 소원과 열의가 우리 마음속에 불 일듯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되려면 내게 곤란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거룩한 구원의 닻으로 믿고 그에게 달려가서 피난하는 습관이 되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께 아뢰지 못할 부끄러운 욕망이나 소원이 우리 마음에 침 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되려면 하나님 앞에 우 리의 모든 소원을 내놓고 우리의 속마음을 토로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이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실 때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받기 위해서이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은혜가 하나님의 손으로 부터 온다는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게 한다.(시 145:15-16 참조)

넷째, 우리가 구하던 것을 얻고 하나님이 나의 기도에 응답해주셨다는 확신으로 그의 인자하심을 더욱 열심히 명상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다섯째,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얻었다고 인정하는 것들을 더욱 큰 기 쁨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이다.

여섯째, 우리의 연약한 정도에 따라서 습관과 경험으로 그의 섭리를 확 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하나님이 우리를 결코 버 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며, 우리가 곤란한 때에 그에게 빌 길을 친히 열어주신다는 것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을 언제나 도와주시며, 말로 우리를 달래시는 것이 아니고 즉각 적인 도움으로 지켜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지극히 자비하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결코 졸거나 게으르신 일이 없다. 그러나 때로는 게으른 우리를 훈련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주무시며 게으르신 것 같은 인상을 주시는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훈련시켜 우리가 그 분을 찾으며 그분께 간구해서 큰 유익을 얻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을 기도에서 떠나게 하려고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모든 일을 해결 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귀찮게 하나님께 간청하는 것은 무익한 짓이라고
떠들고 있다. 그러니 이런 행동은 너무도 미련한 짓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도다.”라고(시 145:18) 주의 말씀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말로 떠들어대며 주께서 언제나 기꺼이 주시려고 하는 것들을 우리가 간구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짓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님이 기꺼이 주시려는 것들도 우리가 기도로 주님께 얻어야 된다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가 인정하기를 원하신다.

이 점에 대해서 시편에 있는 인상적인 말씀들이 증거하며 이에 해당하는 구절들이 많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벧전 3:12, 시 34:15) 이 성경 구절은 경건한 이들의 구원을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구하는 일에 나태한 경향을 깨끗이 씻어버릴 믿음의 훈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곤란하고 눈먼 자들을 돕기 위해 지켜보고 계시지만 우리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더 확실히 증명하시기 위해 우리의 신음(기도) 소리를 들으려 하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는 것과(시 121:4) 우리가 게으름을 피우고 기도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을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잊어버리신 듯이 활동이 없으시다는 것 이 두 가지가 다 사실이다.

Ⅱ. 올바른 기도의 법칙

첫째 법칙 : 경외

(1) 하나님과의 대화에는 경건한 초월성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정당하고 합당한 기도를 드리기 위한 첫째 법칙은 하나님과 대화(기도)하려는
사람은 그에 합당한 심령(心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합당한 기도자로 하나님 앞에 우리 심령이 바로 서려면 하나님을 바르고 순수하게 주시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 육신의 근심과 생각을 버리고 전심전력(全心全力)으로 기도해야할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이 세상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초월해야 한다는 나의 이 말은 우리가 이 세상을 초월하여 우리 심령이 어떤 근심이나 괴로움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큰 근심으로 인해 우리가 기도할 열심을 더 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옛날 하나님의 거룩한 종들이 깊은 구덩이 같은 죽음에 직면할지라도 낙심하지 않지만 그러나 주를 향해 부르짖었던 것을 볼 수 있다.(시 130:1 참조)
다시 말해 하나님과 대화(기도)하려는 사람은 흔들리기 쉬운 우리의 심령이 외부의 세상 염려 때문에 이리저리 휘둘리거나 땅에 얽매이는 일이 없도록 모든 세상 염려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심령은 이 세상을 초월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눈멀고 미련한 우리 인간의 이성(理性)이 고안 해내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우리 심령은 그 허무한 인간 본성의 한계에 얽매여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순결한 상태를 목표로 영적으로 높이 날아올라야 한다.

(2) 무례하며 불경건한 기도를 하지 말라.

우리는 기도자로서 두 가지 일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사람은 자기의 능력과 노력을 기도에 바쳐 야 하고 산만한 생각으로 주의가 흩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도자로서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전혀 없는 경박한 언행(言行)은 하나님께 대한 공경(恭敬)에 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기도에 정신을 집중하기 어려울수록 우리는 더욱 노력해야 한다.

사람은 아무리 기도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도 어느새 쓸데없는 생각들이 스며들어 기도의 진행을 막거나 굴곡이 많은 곁길로 빠져 앞으로 나감을 더디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과의 친밀한 대화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는데 우리가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혼합함으로써 그분의 크신 인자하심을 모독하는 것이 얼마나 합당치 못한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마치 보통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같이 기도 중에 하나님을 소홀히 하고 이리저리 뛰어 다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엄(尊嚴)을 깊이 생각하며 세상적인 걱정과 애착을 일체 버리고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들만이 충분하고 합당한 기도준비를 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두 손을 높이 드는 형식이 생긴 것은 생각을 높이 비약시키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다고 사람들이 느꼈기 때문이다. 시편에도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라고 하였다.(시 25:1)
성경에는 ‘기도하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사 37:4 등) 이는 하나님께서 기도들어주시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찌끼(unworried) 위에 주저앉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렘 48:11, 습 1:12 참조)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그럽게 대하시고 우리의 근심 걱정을 자신의 가슴에 털어놓으라고 친절하게 권할수록 하나님의 비할 데 없이 무한한 이 은혜를 무시하는 우리의 죄는 더욱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은혜를 더 귀히 여겨 하나님 앞에 나가며 온 정성 노력을 기도에 바쳐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의 심령이 이 세상 여러 가지 장해물과 굳세게 싸워서 이기고 초월해야 한다.

둘째, 언제나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시는 것 이상의 것을 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을 그의 앞에 쏟아놓으라고 하셨지만(시 62:8, 시 145:19 참조), 우매하고 사악한 감정까지 날뛰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으나 그러나 방자(放恣)한 자들에게 양보하시기까지 인자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점에서 중대한 죄를 짓는 것이 보통이다. 경솔하고 몰염치하고 무례한 태도로 합당치 못한 일을 하나님께 감히 조르며 어떤 인간적인 망상이든 닥치는 대로 뻔뻔스럽게 하나님 앞에 내미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우둔하고 우매해서 사람들에게 조차 말하기 부끄러운 추악한 욕망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다.

이런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행동은 세속 문인들도 희롱하며 미워하기까지 하는 것이지만 이 죄악의 세력은 언제나 강력했다. 그래서 야심가들은 쥬피터(Jupiter)를 수호신으로 택하고 인색한 자들은 머규리(Mercury)를 지식을 탐하는 자들은 아폴로(Apollo)와 미네르바(Minerva)를, 군인들은 마르스(Mars)를, 음탕한 자들은 비너스(Venus)를 택하였다.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지금도 친구끼리 농담과 잡담을 할 때보다 기도 중에 불법한 욕망을 더 관대하게 버려두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자비를 이렇게 조롱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시며 우리의 소원을 그의 권력에 굴복시키며 억제시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이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고 한 ‘그의 뜻대로’라는 말을 잘 깨닫고 굳게 지켜야 한다.

(3) 성령님은 올바른 기도를 도우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기에는 너무도 능력이 부족하다. 따라서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집중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간절히 거기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둘 다 훨씬 못 미치는 곳에 서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의 마음과 열심 둘이 다 기력이 없어 낙망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반대 방향으로 끌려간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도우시려고 우리 기도의 교사와 돕는 자로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바른 기도가 어떤 것임을 알려 주시며 또 우리의 감정을 조절해 주신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께서 직접 기도하시거나 탄식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확신과 소원과 탄식을 일으키시고 우리의 타고난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게 만드신다. 또 성도가 성령의 지도로
하는 탄식을 ‘말할 수 없는’것이라고 바울이 형용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참으로 기도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기도 중에 맹목적인 불안으로 마음에 혼란이 일어나며 가슴이 답답하여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를 모르게 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말하려 해도 그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주저하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특별한 은혜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태만을 감싸고 기도하는 일을 성령님께 떠맡기고 자신은 본래 빠지기 쉬운 무관심 상태에 머물라는 것이 아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맡아 주실 때까지 우리는 졸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그런 불경건한 말을 하는 사람들의 말도 아니다.
우리의 기도에 있어 무기력하고 침체된 자기를 혐오하며 성령의 도움을 구하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권하면서도(고전 14:15) 동시에 깨어 있으라고 우리게 권고한다.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뜻은 성령님은 우리를 고무하여 기도를 이루도록 힘주시지만 그러나 우리 자신의 노력을 방해하거나 정지시키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도에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가를 시험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둘째 법칙 : 회개
진심으로 자기의 부족을 느끼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

(1)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면 모든 비현실성이 제거 된다.

올바른 기도의 둘째 법칙은 기도할 때 언제나 자신의 무력을 느끼며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진심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얻고자 하는 진실한 아니 강렬한 소원을 기도에 첨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를 드릴 때에 마치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이행하듯 일정한 형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중얼거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간구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기도가 그들의 곤란을 벗어나는 필요 대책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 마음이 냉담해서 여전히 습관적으로 이 기도의 의무를 이행하며 자기가 구하는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막연하고 몽롱하게 자기의 부족을 느껴서 기도를 하게 되지만 그 느낌이 현실적인 절실한 문제가 되지 못하고 그 기도가 자기에게 부족한 것에서 해방되겠다는 열의를 일으키지 못한다.

또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또는 적어도 자기가 죄인이란 생각이 없으면서 자기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사람의 거짓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보다 더 가증하고 저주스러운 일이 있겠는가?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희롱하는 것이다.

그러나 방금 말한 것 같이 인류는 너무나 부패하고 타락해서 기도라는 형식적인 행동 자체만을 위해 여러 가지 것을 기원하는 때가 많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라도 다른 데서 오리라고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미 가졌다고 믿고 있다.

이것보다는 덜한듯하면서도 역시 허용할 수 없는 기도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주술처럼 기도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야겠다는 것이 습관이 되어 하나님에 대한 아무 명상도 없이 그저 중얼거린다. 진정으로 갈망하지 않으며 동시에 하나님께 얻기를 간절히 원치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하는 것은 경건한 사람들이 특히 삼가야 할 일이다.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구하는 일들이 얼핏 보기에는 우리 자신의 필요를 위한 것이 아닌 듯 하지만 우리에게 절실한 그에 못지않은 열의와 성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컨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때(마 6:9, 눅 11:2) 우리는 그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일을 위해서 주리고 목마른 사람같이 정성껏 기도해야 한다.

(2) 기도가 일시적 기분에 좌우되는 때가 있는가?

우리는 항상 똑같은 절박감을 품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그것을 인정한다. 야고보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 지니라.”(약 5:13)고 구별해 말했다. 그러므로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너무나 게으른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도록 필요한 때에는 하나님께서 더 아픈 자극을 우리에게 주셔야 한다.

다윗은 이것을 ‘주를 만날 기회’라고 부른다.(시 32:6) 그가 다른 데서도 자주 가르치는 것 같이(시 94:19 등) 곤란과 불안과 공포와 시련이 우리를 가혹하게 압박할수록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오라 부르시는 듯 우리는 더욱 자유롭게 그에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바울이 우리는 ‘무시(無時)’로 기도해야 한다(엡 6:18, 살전 5:17)고 한 것도 옳은 말이다. 아무리 일이 원하는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기뻐할 일들만 주위에 가득하더라도 우리가 기도해야 할 필요성이 없는 순간은 없다.

포도주와 곡식이 풍부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되지 않는다면 그는 떡 한 조각이라도 맛볼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지하실과 창고들도 그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위험이 순간마다 우리를 노리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공포심 때문에도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 않는 때가 없어야 할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일에서 이 사실을 더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자기의 많은 죄를 알고 있는데 언제까지 그 죄와 벌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태연하게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급히 도움을 받지 않아도 좋도록 시험이 우리에게 휴전을 제의하는 때가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생각하는 열성이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점령해서 같은 기회가 항상 우리에게 있도록 해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한 것은 이유가 없이 그렇게 명하신 것이 아니다. 나는 이 견인(堅忍) 교리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하지 않고 뒤로 미룰 것이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살전 5:17) 권고하며 우리의 태만을 책망하는데 그것은 이 끊임없는 주의(注意)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이 법칙은 하나님께 대한 위선과 교활한 거짓을 기도에서 배제하며 멀리 추방한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하신다.”(시 145:18)고 약속하셨고 전심으로 찾는 자는 하나님을 만나리라고 말씀하셨다.(렘 29:13,14) 그러나 자기의 추악한 것을 즐기는 자들은 기도에 전혀 노력하지 않는다.

따라서 바른 기도에는 회개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경에 하나님이 죄인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다고 하며(요 9:31) 그들의 기도는(잠 28:9, 사 1:15 참조) 그들의 제물과 같이(잠 15:8, 21:27 참조)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마음에 빗장을 지른 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귀가 닫혀있고 마음이 냉혹하여 하나님의 엄한 처사를 도발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관용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사야서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말씀이 있다.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5) 또한 예레미야서에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렘 11:7, 8:11)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일평생 더럽히는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자랑하는 것을 하나님은 그들의 최고의 수치로 여기신다. 따라서 이사야서에 이런 유대인들에게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중략)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사 29:13)라고 책망하셨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도에만 국한시키시지 않고 그 분께 대한 경배의 모든 부분에 거짓은 가증한 일이라고 선언하신다. 야고보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고 한 말은 이에 적용된다.

곧 다음 글에서 알게 될 일이지만
경건한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는 그들의 가치 유무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요한 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고 경고한 것은 무용한 말씀이 아니다. 악한 양심은 우리 앞에 열려져 있는 하나님과의 대화의 문을 닫히게 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배하는 사람들만이 올바르게 기도하게 되며 그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하려고 준비할 때에는 자기의 악한 행실을 혐오하고 거지와 같은 처지와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회개가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셋째 법칙 : 겸손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겸손하게 용서를 빌라.

(1)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자비를 빌기 위해 기도한다.

여기 우리는 셋째 법칙을 첨가한다. 즉 기도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은 겸손히 전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기의 영광을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자기의 가치를 일체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곧 조금이라도 자기를 믿는 것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가치를 티끌만큼이라도 주장하며 허영과 교만에 부풀어 있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멸망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 순종하여 모든 교만을 버린 예를 여러 번 말한바 있는데 그들 모두는 거룩할수록 주 앞에 나갈 때에 더욱 겸손했다. 하나님께서 위대한 칭호를 그에게 주셔서 칭찬하신 다니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義)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矜恤)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중략)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城)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8,19)

다니엘은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 같이 정도를 벗어난 말을 하면서 대중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들 가운데 섞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한 개인으로서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빌면서 그에게 피난처를 구한다. 그는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自服)하고”(단 9:20)라고 감동적인 말을 했다. 다윗도 자기를 예로 들어 겸손한 태도를 가르친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이사야도 기도도 우리에게 겸손의 본이 된다. “우리가 범죄 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사 64:5-9)

그들이 끝까지 붙든 확신은 한 가지밖에 없었던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자기들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돌보아 주시리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예레미야도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 할 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렘 14:7)라고 했다.

예언자 바룩의 말도 참되다. “자기의 악이 큰 것을 슬퍼하여 고독하고 머리를 숙이고 기운이 없는 영혼 굶주린 영혼 그리고 힘없는 눈이 주여! 당신에게 영광을 돌리나이다. 오! 주 우리 하나님 당신 앞에 우리 기도를 쏟아놓으며 당신 앞에서 자비를 비옵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의로웠기 때문이 아니옵나이다.”(바룩 2:18,19) “그렇지 않고 당신께서 자비하시므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당신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바룩 3:2)

(2) 죄 용서를 비는 것이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간단히 말하면 올바른 기도의 시작과 그 준비는 겸손하고 성실하게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간구하는 것이다. 아무리 거룩하다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너그러운 화해를 얻기까지는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얻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가 용서하시지 않은 사람들에게 호의를 보이실 수 없다.

그러므로 시편의 여러 곳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믿는 자들이 이 열쇠로 기도의 문을 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윗은 죄의 용서를 빌지 않는 때에도 “여호와여! 내 소시(小時)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시 25:7)라고 기도했다. 또 “나의 곤고(困苦)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시 25:18)라고 기도했다. 이것을 보면 우리는 매일 최근의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잊고 있은 듯한 죄까지도 고백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다윗은 다른 곳에서 자기의 중대한 죄 한 가지를 고백하고 나서 자기가 그 죄에 감염된 곳이 곧 모태(母胎)라고 말한다.(시 51:5) 이것은 타고난 부패성을 근거로 자기의 죄책을 경감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전 생애의 죄들을 더욱더 엄격하게 정죄함으로써 하나님의 더 큰 자비를 받고자 한 것이다.

우리는 성자들이 많은 말로써 죄의 용서를 빈 것은 아니나 성경이 전하는 그들의 기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 기도할 생각을 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언제든지 우선적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고자 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누구든지 자기 양심을 살피면 하나님 앞에 자기의 근심 걱정을 솔직하게 토로할 용기가 생길 수 없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갈 때마다 무서워 떨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기 기원할 때 하는 고백이 하나 더 있다. 즉 하나님의 자비와 함께 죄 용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원인은 그대로 두고 결과만을 제거하려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병든 사람이 나타난 증세만 치료하고 병의 원인 자체는 등한시하는 미련한 짓을 따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이 외적인 표징으로 우리에 대한 호의를 나타내시는 것보다 우선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호의를 가지시고 계신가 하는 것을 최대의 관심사로 삼아야 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순서를 따르는 것이 그의 뜻이며 만일 우리의 양심이 그와의 완전한 화해를 느끼며 그를 전적으로 ‘사랑스럽게’(아 5:16) 여기지 않는다면 그가 우리에게 선을 행하시더라도 그것은 그다지 유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대답도 우리에게 이 일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기로 작정하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고 말씀하셨다. 이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특히 소원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셔서 그의 은혜 가운데 두시기를 원하시고 그 다음에 우리와의 화해의 열매로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원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셨다.

그러나 현재의 죄를 고백하며 모든 죄와 벌이 용서되기를 간구하는 동시에 기도가 용납되도록 하는 이 같은 일반적인 전제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기도는 값없이 주시는 자비를 근거로 삼지 않으면 하나님께 결코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한이 한 말은 여기에 적용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러므로 율법 하에서도 우리의 드리는 기도가 용납되게 하기 위해 죄의 대속으로 기도를 성별했다.(창 12:8, 26:25, 33:20, 삼상 7:9 참조)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먼저 그들의 부정한 것을 깨끗이 씻어버린 다음에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 기도를 드리지 않는 다면 그들은 이 큰 특권과 영예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경고하려는 것이었다.

(3) 자기의 의(義)를 말할 것인가?

그런데 성도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빌 때에 간혹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듯하다. 예컨대 다윗은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시 86:2)라고 했고 히스기야는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했다.(왕하 20:3, 사 38:3 참조) 그들이 이런 말로 표현하려고 한 뜻은 자기들이 중생(重生)하여 하나님의 종과 자녀인 것이 증명되었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해서 “그의 눈이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신다.”(시 34:15)는 것을 가르치신다. 또 사도 요한을 통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고 가르치신다.

이 여러 구절에서 보면 하나님은 행위의 공로에 따라서 기도의 가치를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진실하며 정직하며 무죄하다는 것을 바르게 의식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신자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이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눈을 뜨게 된 장님이 하나님은 죄인을 듣지 아니하신다고 한 말은(요 9:31)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온 것이다. 성경에서 ‘죄인(罪人)’이란 말이 보통은 의(義)에 대한 아무 욕망도 없이 자기의 죄(罪) 가운데서 안주하며 잠자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으면서 동시에 경건(敬虔)에 대한 갈망이 없으는 사람은 그 누구도 하나님께 뜨겁고 진지한 기도를 드릴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들은 성도들의 증거와 일치되고 있는데 그 성도들이 자신들의 순결과 무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종들이 소망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나타나게 되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또 성도들이 하나님의 힘으로 원수들의 불의에서 구제되기를 원할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원수들과 자기들을 비교하면서 보통 이런 종류의 기도를 드린다. 이런 비교에서 그들이 자기들의 의로움과 순진함을 내세움으로써 문제의 공정성을 보아서도 도움을 주시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움직이시게 했다고 해서 그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경건한 자가 하나님 앞에 청결한 양심을 가짐으로 이런 자들을 위로하시며 붙들어 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확인하고자 할 때에 내가 경건한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주님의 이 복을 그들의 마음에서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고 믿는 그들의 확신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를 근거로 한 것이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공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넷째 법칙 : 확신
확신 있는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라.

(1) 소망과 믿음은 두려움을 극복한다.

올바른 기도의 넷째 법칙은 이 같이 진실로 겸손한 마음에 정복되고 압도되더라도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있으리라는 확고한 소망을 품고 기도하도록 용기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는 것과 그의 공정한 벌을 느끼는 것은 외형적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일이다. 그러나 자기 악행(惡行)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두 가지는 서로 잘 조화된다. 우리가 이미 주장한 바와 같이 회개와 믿음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 되어 있다. 이 둘 중 하나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고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이처럼 기도에도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한다. 이것을 다윗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시 5:7) 그는 하나님의 인자에 믿음을 포함시키면서 한편으로는 경외를 빼놓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엄위(嚴威)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공경하지 않을 수 없게 할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모든 교만과 자기 신뢰를 버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신(確信)’이 모든 불안에서 우리가 해방되어 감미롭고 완전한 평안으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평화로운 평안을 느끼는 것은 모든 일이 소원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그들에게는 아무 근심도 없고 어떤 욕망도 타오르지 않고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성도들을 자극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드는 것은 자기의 부족을 느껴 마음이 괴로운 때이다. 이런 때에 성도는 극도의 불안을 느껴 거의 미칠 듯 하다가 이런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들 위에 비쳐 마침내는 믿음으로 불안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성도는 현재의 곤고한 처지에 눌려 신음하며 장래의 더 큰 고난이 두려워 고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고난을 참을 수 있게 되며 위로를 얻으며 앞으로 고난도 벗어나게 되리라고 기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의 기도는 두려움과 확신 이 두 가지 감정에서 시작하며 그 두 가지를 내포한다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즉 그는 현재의 곤경에서 신음하며 앞으로 다가올 곤란을 두려워하여 불안해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피난처를 얻으며 언제든지 그가 도와주실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어떤 은혜를 간구하면서 그것을 받으리라는 확신이 없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이 같은 설익은 믿음에 극도로 노여워하실 것이다.

(2) 기도와 믿음

그러므로 기도는 우연히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인도를 따라 믿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기도를 위한 한 법칙이며 이 법칙을 확립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과 가장 잘 조화(調和)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 원칙에 유의하도록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다른 곳에서도 같은 말을 확인하신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 야고보의 말도 이와 일치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중략)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약 1:5,6) 야고보는 여기서 믿음을 의심에 대치시킴으로써 믿음의 힘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의심과 혼란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에 응답이 있을는지 없을는지 확신이 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리라고 야고보가 첨부한 말도 주목할 만하다.(약 1:7 참조) 그는 이런 사람들을 바람에 밀려 이리저리 요동하는 바다 물결에 비유한다.(약 1:6).
그래서 다른 구절에서 올바른 기도를 ‘믿음의 기도’라고 부른다.(약 5:15)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의 믿음대로 주신다고 자주 말씀하셨는데(마 8:13, 9:29, 막 11:24), 이 말씀은 믿음이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주님께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약하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얻는 것은 모두 믿음으로 인한 것이다. 지혜 없는 사람들은 그다지 주의하지 않으나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 10:14)라는 말씀의 의미도 바로 그런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는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기도가 믿음에서 시작하는 것임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부르는 것은 오직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알게 되고 그것이 깊이 계시된 사람들에 한(限) 한다고 주장한다.

(3) 기도 응답의 확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박

기도 응답의 확신을 반대하는 자들은 기도 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고 자비를 베푸신다는 확신을 가지라고 우리가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가장 불합리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진정한 기도를 드려본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믿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부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믿음의 힘을 마음 깊이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이런 사람들은 공상 밖에는 해본 일이 없는 것이 분명하므로 그들을 상대로 논할 가치가 사실은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요구하는 확신의 가치와 필요성은 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데서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양심이 아주 무디어진 사람이므로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무시하고 바울이 한 말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그 자비가 자기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들이 아니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없다.(롬 10:14)

그러면 예컨대 이런 기도를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오 주여! 저는 당신이 저의 기도를 들으실지 의심이 됩니다. 그러나 불안에 견딜 수 없어 당신께 피합니다. 제게 무슨 가치가 있다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성도들의 기도와 다르다.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도 그렇지 않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고 했다. 또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간다고 가르치고 있다.(엡 3:12)

그러므로 우리 기도가 응답되기 바란다면 우리는 주께 구한 것은 꼭 받으리라는 것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이 점은 주님이 친히 명하시고 모든 성도들이 모범으로 보여주었다. 만일 굳건한 믿음이란 말을 쓸 수 있다면 그런 믿음에서 생겨난 기도는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소망에 뿌리내린 기도며 이런 기도만이 하나님께 열납(悅納) 된다.

그런데 사도는 믿음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겠으나 확신뿐 아니라 담대하게 또는 자유롭게라는 말까지 첨가한다. 이런 말들로 사도는 우리와 불신자들을 구별하려고 한다. 불신자들도 우리와 섞여 하나님께 기도드리지만 그것은 우연한 일이다. 우리는 시편에 있는 대로 기도한다.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시 33:22) 또 다른 데서 예언자는 같은 기도의 조건을 설정한다. “내가 아뢰는 날에 (중략)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시 56:9)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이런 말씀들을 보면 소망이 없이 드리는 기도는 허공에 던져진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망은 망대와 같아서 우리는 거기서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본다. 바울이 주는 권고도 여기 부합한다. 그는 성도들에게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고(엡 6:18) 권하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명하기를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중략)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한다.(엡 6:16,17)

여기서 독자들은 내가 앞서 말한 것을 회상하기 바란다. 즉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불행과 궁핍과 부정과 결합된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는다.
성도가 아무리 무거운 죄의 짐에 심히 눌리고 고민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두려워 할 죄과가 아무리 많을 지라도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는 여전히 하나님 앞으로 나간다. 이런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리는 것은 이 길 외에는 우리에게 달리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명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만하게 굴거나 우리에게 있는 어떤 것을 높이 평가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죄를 고백한 후에 자녀가 곤란한 문제들을 부모에게 털어놓듯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고통을 호소하라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우리의 죄는 당연히 우리가 기도하도록 견딜 수 없는 아픈 자극을 줄 것이다. 예언자는 자기의 체험으로 이 점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내가 주께 범죄 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시 41:4)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로서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이런 청은 우리에게 치명상을 입힐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극히 은혜로우신 아버지께서는 비할 데 없는 자비로써 이런 경우에 적합한 치료제를 첨부하셔서 우리의 모든 혼란을 진정시키시며 근심을 덜며 공포심을 없애주신다. 그리고 장애물은 물론이고 평탄하지 못한 곳까지도 없이 하여 스스로 길을 준비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친절히 이끄신다.

(4)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 우리 기도의 동기이다.

하나님은 우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심으로써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 경우에 주께서는 우리의 불경한 완고함을 책망하신다.
시편에 있는 말씀 보다 더 정확한 명령은 생각할 수 없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시 50:15) 그러나 경건생활의 의무 중에서 기도처럼 성경에서 자주 명령하는 것이 없으므로 나는 이 점을 자세히 논할 필요가 없다. 주께서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신다.(마 7:7)

그러나 이 명령에는 약속이 첨가되었다. 이것은 필요한 일이다. 이 명령에 순종해야할 것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쉽게 받아 주시며 우리가 가까이 가는 것을 환영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할 것이다.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이 두 가지를 확인한고도 하나님 앞으로 직접 나가는 것을 피하려고 애쓰는 자들은 반역자이며 완고할 뿐만 아니라 약속을 불신하기 때문에 불신앙의 선고를 받게 된다. 위선자들의 행동을 보면 이 점이 더욱 뚜렷하다. 그들은 겸손하고 온유한 모양을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교만하게 무시하며 하나님의 친절한 초청을 의심하여 하나님께 드릴 예배의 주요 부분을 빼앗는다.

구약의 옛 사람들이 모든 거룩한 일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데 있다고 생각했을 때에 하나님은 이런 제물을 거절하시고(시 50:7-13)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의 때에 자신을 부르며 찾는 것이 가장 고귀한 일이라고 말씀하셨다.(시 50:15)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의 것을 요구하시며 즐거이 순종할 것을 명하실 때 의심의 깃발이 아무리 우리를 유혹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할 구실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부르라는 명령의 말씀들은 모두 우리에게 확신을 불어넣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 앞에 세운 깃발들이다. 만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가 오는 것을 기대하시지 않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타난다면 그것은 비할 데 없는 경솔한 짓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친히 우리의 길을 열어 주셨다.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9)

우리는 하나님이 그를 경배하는 사람들 보다 앞서 가시며 그들이 따라오기를 원하시며 그가 친히 명령하시는 아름다운 곡조에 감화되어 그들에게 두려움이 없어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안다. 특히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 돌리는 찬미이다. 우리는 이 찬미의 내용을 믿고 모든 장애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시 65:1,2)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런 찬미를 받으셨다는 것처럼 기쁘고 반가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찬미는 간구하는 자들의 기도를 허락하시는 것이 그의 성품에 가장 잘 맞는 일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준다. 이것을 근거로 삼아 예언자는 소수의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문이 열려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시 50:15)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을 상대로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법칙에 따라서 다윗은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약속을 이행하실 것을 주장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중략) 하신 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삼하 7:27) 이 말을 보아서 우리는 이 약속이 다윗에게 용기를 주지 않았다면 그는 두려워했으리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곳에서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라는(시 145:19) 일반론으로 무장한다.

사실 우리는 시편에서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즉 계속되던 기도의 문맥이 중단되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혹은 그의 선하심으로 혹은 그의 신실한 약속으로 그 기도의 문맥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얼른 보기에 다윗이 이런 말들을 부적당한 곳에 삽입시켜 기도의 흐름을 단절하여 기형으로 만든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새로운 힘을 공급하지 않으면 열성이 식는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명상하는 것은 반드시 함께 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을 본받아 시들어 가는 우리의 심령에 새로운 생기(生氣)를 불어넣도록 적당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이 일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5) 두려워하지 말고 경외심을 가지고 확신 있게 기도하라.

심히 아름다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우리가 냉담한 태도를 취하거나 전혀 느낌이 없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이런 많은 사람들이 미로를 헤매게 되며,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물 없는 웅덩이를 파며(렘 2:13),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운 은혜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고(잠 18:10) 솔로몬은 말한다.

요엘은 장차 올 무서운 파멸을 예언한 다음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2, 롬 10:13)라는 은혜의 말씀을 첨가했다. 이것이 사실은 복음의 진행 과정에 대한 말씀인 것을 우리는 안다.(행 2:21) 백 명에서 한 명도
하나님께 접근할 생각을 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 65:24)라고 친히 선포하셨다. 다른 데서 하나님은 꼭 같은 영예를 전 교회와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에 주신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시 91:15)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나는 모든 구절을 인용하지 않고 다만 두드러진 것들을 택하려 한다. 이 구절들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친절하게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지를 맛볼 수 있으며, 이렇게 우리에게 예리한 자극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태만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기를 머뭇거릴 때에 우리의 배은망덕이 얼마나 완고한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도다.”(시 145:18)라는 말씀을 항상 귀에 쟁쟁하게 들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사야와 요엘에서 인용한 말씀과 같다. 거기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겠다고 확약하시며 우리가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는’ 것을(벧전 5:7, 시 55:22) 향기로운 제물같이 기뻐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아무 주저함이나 두려움 없이 기도를 드릴 때에 우리는 이 약속의 특별한 열매를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존엄하심을 생각하면 우리는 떨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이 약속의 말씀이 있으므로 이 말씀을 믿고 감히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가장 다정스러운 이름을 황송하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사(示唆) 하신다.

그 다음으로 이렇게 많은 권유를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즉 우리의 기도와 의지할 것은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며 기도의 가치와 기도가 실현되리라는 소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었고 또 그 약속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다른 데서 지지를 받을 필요가 없고 이리저리 돌아볼 필요도 없다. 그리고 거룩한 조상들과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거룩하였다고 해서 칭찬을 받았으나 우리에게는 거룩한 점이 없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기도하라는 공통된 명령을 받았고 공통된 믿음을 가졌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한다면 이 점에서 당연히 그들의 동료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청하여 친절하시겠다고 선포하심으로써 극도로 가련한 사람에게도 그의 구한 것을 하나님께 얻으리라는 소망을 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일반적인 표현 양식에 유의해야 한다. 일반적이므로 한 사람도 제외되지 않는다. 조건은 하나뿐이다. 즉 우리의 마음이 성실하며,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않고 겸손하며, 믿음을 가지고 거짓말로 하나님을 부르는 위선이 그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지극히 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온갖 방법을 다해서라도 우리를 자신에게로 오도록 권하실 뿐 아니라 그에게 오는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다윗의 기도 태도도 이로 인한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삼하 7:27-29)

또 다른 데서는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시 119:76)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함으로써 마음의 무장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므로 두려워하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그들은 조상들을 특히 야곱을 본받는다.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를 감당할 자가 못 된다고 고백한 다음에(창 32:10)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더 큰 일을 구할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창 32:11,12 참조)

그러나 불신자들은 구실이 무엇이든 간에 곤란한 때에도 하나님께 피하여 그를 찾으며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음으로써 마치 새로운 신이나 우상을 만드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이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빼앗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태도로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의 근원이심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근심 걱정에서 해방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며 하나님께 나아감에 조금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이 같은 순종보다 더 기뻐하시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앞에서 담대한 기도 정신은 두려움, 경외, 염려 등과 잘 조화되며, 하나님이 그 앞에 나아와 엎드린 자를 일으키시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 이 같이 조화되지 않는 듯한 표현들이 서로 훌륭하게 조화된다. 예레미야와 다니엘은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린다고 한다.(렘 42:9, 단 9:18) 다른 곳에서도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탄원을 듣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렘 42:2)라고 말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주 “기도를 올린다.”고 하기도 한다. 히스기야가 자기를 위하여 예언자의 중보 기도를 청하면서 한 말도 같은 것이다.(왕하 19:4) 다윗은 자기의 기도가 ‘향과 같이’ 올라가기를 갈망한다.(시 141:2) 바꿔 말하면 그들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보호에 몸을 맡기며, 그가 약속하신 도움을 서슴지 않고 간구하지만 수치감을 버린 듯이 경솔한 자신감으로 의기양양해 지지는 않는다. 도리어 약속의 계단을 올라갈 때에 여전히 자기를 낮추어 하나님 앞에 기도자의 태도를 견지한다.(*) 출처 /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3권 20장 기도 52항 중 1항-14항

< 미 주 >
1) 이 장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기도론 중에서도 특출한 것으로 사려가 깊고 내용이 풍부하며 논조에 경건한 열기가 있다. 유명한 기도론으로는 Tertullian, De oratione(CCL Tertullian I.
257-274; tr. ANCL XI. 178-204); Origen,(MPG 11. 415-562; tr. LCC III. 238-287; ACW XIX. 3-140); Gregory of Nyssa, On the Lord’s Prayer(MPG 44. 119-1194); Augistine(MPL 47. 1113-1127)과 Hugh of St. Victor(MPG 176. 977-988)의 소논문 들이다. R.S.S. Wallace는 기도 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에 제1장을 할애하고, 칼빈의 많은 저서들로부터 인용한다.: Calvin’s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 pp. 271-295.
2) 기독교 철학에 대한 주와(제1권, p.6, note 8; III.vii.1, note 1), 한 계급으로서의 철학자 들에 대한 언급을(I.v.12; I.xv.6; III.vii.2; III.vi.1,3; III.viii.9)참조
3) 참조, 양자에 대한 언급(II.vii.15; II.xix.5-7; III.i.3; III.ii.11,22; III.xi.6; III.xiv.18; III.xvii.6; III.xxviii.2)
4) “Nec lactare eos verbis,” 참조, VG; “Et qu’il ne les allaite point de vaines parolles.”
5) 참조, Sencea, Epistles xxxi. 5(LCL. Seneca, I. 222 f.)
6) 칼빈이 기도를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라고(Colloquium; 5절에서 familiare alloquium 이라고)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의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Augustine(Letters, cxxx; MPL 33. 502-509); Cassian(MPL 49. 769), Benedit(MPL 66. 329). the Vitae Patrum, Story of Balaam and Josaphat xx(MPL 73. 520), 어떤 의미에서는 Aquinas(Contra gentes iv. 22). 칼빈은 이 관념에 일체의 불경, 준비 없음, 경솔 등의 요소가 섞이지 않도록 특히 주의하였다. 본장 16절의 처음 문장들을 참조하라.
7) 참조, Horace, Satires I.viii.1-3(LCL edition, pp.96ff.); 이사야 44:10-17; Erasmus, Colloquies, “The Shipwreck”(tr. C.R. Thompson, Ten Colloquies of Erasmus, pp.6ff).
8) “Duce Spiritu,”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성경을 이해하는 것과 같이(I.vii4,5), 성령의 자극 으로 기도에서 지도를 받는다.
9) 기도를 단순히 외우는 것과 구별하여 실존성을 역설하는 점은 Origen, On Prayer xii(LCC II.261
f.)와 같다. 참조; Aquinas, Summa theol.I.IIae. xxxiii.13(주의는 기도를 공로 있게 만든다
); Luther, Larger Catechism, part 3(주기도문 서론)(Bekenntnisschriften der Evangelisch
­Lutherischen Kirche, p.668). Treatise of Good Works, Third Commandment, sec, iv(Werke WA VI.232; tr. Works of Martin Luther I.225f.)
10) 본장 51절을 보라. 제 7절은 1551-1557년 프랑스어판과 상당히 다르다. 프랑스어판에 대해 서는 Benoit, Institition III. 483f., 30 주(a)를 보라.
11) 본장 8절을 보라.
12) 본장 3절.
13) III. iii. 1-5.
14) 참조, Luther, Enchiridion piarum precationum(Werke WA X.ii.395); Treatise of Good Works, loc. cit.
15) 참조, Luther, Enchiridion piarum precationum(Werke WA X. ii. 396).
16) III. ii. 22-26.
17) 1536년판과 1539년판의 해당 장소에는 12-15절에 있는 논술보다 다소 길다. 여기에서 1539 년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우리의 불행한 상태를 의식하는 것이 가시같이 우리를 끊임없이 찌르지만, 동시에 지극히 은혜로우신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두 가지 것을 첨가하 셨다. 그것은 기도하라는 명령과, 우리가 구하는 것은 얻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참조, Luther, Enchiridion Piarum Precationum(Werk WAX.ii.395)
18) 참조, I.iv.1; I.v.8; III.xxiv.12.
19) “Clamavit ad me.” 시편 91:15에 대한 주해에서 칼빈은 “invocavit me”(“저가 내게 간구하 였다”, 현재 완료)을 사용; 라틴역은 “clamabit ad me”(“저가 내게 간구하라”, 미래형); 현대어 번역들도 미래형을 쓴다.
20) 본장 13절.
21) Luther, Enchiridion piarum Precationum(Werke WA X.ii.395).
22) 본장 1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