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요약 :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세계관
제1장 기독교 세계관의 정의(正義)

1. 세계관의 의미

“세계관(世界觀, worldview)이란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서 갖고 있는 기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이다.”(Walter Wink, 1935–2012)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이란 그리스도인이 가진 세계관을 뜻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통해 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그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이해한 내용 둘 다를 포함한다.
2. 왜 기독교 세계관의 이해가 중요한가?

(1)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존재뿐 아니라 이 세계와 그 과정에 대해 서도 깊이 생각하고 바르게 반응해야 하는 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이전에 어떤 존재였으며,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어떤 사람이 되었으며, 하나님과 세계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과 다른 피조물들에 대해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알고 드러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2) 이 세계는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활동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제대로 바로 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천을 위한 이론적 작업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명확히 드러내며 표현하려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사상의 영향력은 기업, 정치, 문학, 예술, 학문, 교육, 가정 등 우리의 삶 전체의 도덕적 성격과 그리고 온 세상의 모든 부분에까지 미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3) 기독교 세계관의 실천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문제투성이의 이 시대에 현대 정신의 혼란 상황(포스트모던)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그리고 이 혼란에 빠진 동료 인간들을 위해 참으로 종합적이고 바른 세계관을 제시해야 할 필요성과 사명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 세계관의 이해와 실천이 중요하다.

3. 기독교 세계관의 특징

(1) 거듭난 자의 하나님 중심 세계관

기독교 세계관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神本主義) 입장이나 반대로 세속 세계관은 자연주의(自然主義)나 무신론(無神論)의 입장을 지닌다. 진정한 신본주의(神本主義)는 그저 자연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을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고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인정하는 성경의 하나님과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는 것이다.

(2) 성경중심의 세계관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내적 증거가 있을 때 이 객관적 하나님의 말씀을 주체적으로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입장이다. 성경에 근거해서 세상을 보는 기독교 세계관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피조세계로 보며 일정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왔다고 본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피조세계의 타락과 구속이다. 결국 성경적 세계관의 관점은 인류에 대한 구속사적 관점이 된다.

(3) 하나님 나라 세계관

성경이 제시하는 구속사는 결국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고 있으며 그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치시며 메시아적 사역을 하실 때부터 임하여 왔고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극치(極致, 최고정점)에 이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제 모든 것을 이 같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4.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구조

(1) 창조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 시작된다. 역사적 창조를 받아들여야 성경적 의미의 창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시간과 함께하는’ 창조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창조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2) 타락

또한 인간의 역사적 타락을 믿지 않는 것은 실제적으로 인간의 타락을 믿지 않는 것이다. 온전한 의미의 타락은 창세기 3장의 역사성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성 전반의 타락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남아있는 힘으로 최선을 다하면 인간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기독교 세계관이 아니다.

(3) 구속(救贖)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성경의 기록대로 이 세상에 살다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부활 승천하셨다는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승천은 구속을 이루는 메시아적 사역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성경대로 믿는 것이 구속을 믿는 것이다. 또한 장차 있을 예수님의 가시적이고 인격적이며 물리적인 재림을 믿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출발점
제2장 중생과 중생자로서의 세계관

1. 중생이란 무엇인가?

중생(重生, born again)이란 타락한 존재가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영혼의 변화와 신분의 변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즉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가 이제 성령의 사역으로 영적으로 산 존재가 되는 일 그것이 중생이다. 이는 본성 전체의 갱신이요 영혼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중생하는 일은 성령께서 친히 영혼에 사역하여 일어나는 것이기에 우리의 의식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며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2. 중생에 따르는 영혼의 변화

(1) 지적 기능의 변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을 자신이 가진 지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려고 한다.

(2) 감정과 정서의 변화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분의 뜻을 알려하고 그 사랑을 표현하려고 애쓰게 된다. 이는 인간의 능력이나 부패한 인간성 안에 있는 사랑의 능력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부패한 인간의 모든 능력을 부인하는 위치에서 성령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사랑의 능력으로 하나님과과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3) 의지의 변화

하나님께 그렇게 움직여 나갈 수 있는 힘을 공급받아 사랑을 실천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중생한 사람은 모든 일을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업적에 대해서 전혀 자신이 이루었다는 공로 의식을 갖지 않는 특징이 있다.

3. 기독교 세계관의 성장

기독교 세계관의 성장은 지적 변화의 표현으로서 외현화(外現化) 된 것이다. 즉 중생한 자가 지적으로 변화한 그 내용을 객관적으로 세상에 나타내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중생한 사람의 의식이 성장할수록 그는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더욱 풍성해 지고 이 세상을 더욱 바르게 관찰하고 바르게 이해한다. 이런 측면은 또한 영적 성장인 성화의 한 측면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야 온전한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독교 세계관은 날마다 성숙해져 가고 완성되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까지는 그 누구도 온전(穩全)에 이르렀다고는 말할 수 없다.

기독교 세계관의 토대와 기초 하나님 나라
제3장 기독교 세계관의 하나님 나라 이해

1. 하나님 나라의 의미

하나님 나라(神國, kingdom of God)는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그의 주재권(主宰權)을 뜻하고 그 다스리심을 받는 존재들과 그 다스리심이 미치는 범위와 영역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2. 구약의 하나님 나라

(1) 온 우주에 미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하나님은 온 우주와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므로 온 세상이 다 그의 것이며 그의 주관(主管) 하에 있다.(시편)

(2) 선민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통치의 대상이나 그 온 땅의 거민이 다 타락하고 패역하여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기꺼이 받지 않았다. 이는 사단과 악한 영들도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으나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것을 전통적으로 권능의 왕국이라고 불러왔다. 이렇게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그와 그의 후손들과 언약을 맺으셔서 그들을 자신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다.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이다.(모세오경과 역사서)

(3) 하나님의 미래 통치

전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 또는 하나님 통치의 회복은 메시아 예언과 연관된다. 메시아는 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대리자이다.(예언서)

3.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 이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장차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지칭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 하나님의 나라가 과거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다스리셨던 이스라엘 나라와 동일하게 다시 회복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이 땅에 임하게 되는 가시적인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했다.
4. 신약의 하나님 나라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선포했다. 신약 성경의 ‘하늘’이라는 말은 첫째 우주론적인 하늘로 지칭한 경우, 둘째 하나님을 지칭하는 대신에 하늘이라고 돌려 표현한 경우, 셋째 하나님이 계신 곳 즉 장소를 지칭해 하늘이라고 한 예가 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 한 뜻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성육신 하여 이 땅에서 메시아로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왔음을 나타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메시아로서 사단의 권세를 멸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역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5.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

자신이 메시아로서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로 임하였음을 강조하며 가르치신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아직 오지 않은 측면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이후에 나타날 주님의 영광의 왕국 새 하늘과 새 땅 즉 극치(極値)의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임하지 않았다. 그것은 주님의 재림과 함께 미래에 우리에게로 임하여 올 실재이다.

6. ‘이미’와 ‘아직’의 속의 그리스도인의 삶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인과 그의 삶 은 어떤 것인가? 즉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가운데서 이미 이 땅으로 임하여 왔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고 주님의 재림과 함께 그 나라의 극치(極値)에 이를 때가 온다. 그러므로 중생한 자는 먼저 자신이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으로 임한 하나님 나라에 이미 들어와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런 천국과 관련하여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회개하는 일이다. 자신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 모두를 내어 맡겨야 한다. 회개는 지적인 요소, 감정적 요소, 의지적 요소를 포함하는 전인적이며 전 포괄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늘 부족함을 느끼며 순간순간 모든 삶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살되 왕 되신 하나님의의 뜻을 잘 받들어서 그 뜻을 이 땅 위에 실현해 나가고자 힘써야 한다.

7.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적 의미

본래 이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온전히 드러나는 곳이어야 했다. 즉 피조세계의 대표인 아담이 하나님의 듯을 깨닫고 그 뜻대로 이 세상을 통치하여 하나님의 통치하심의 실재를 드러냈어야 했었다.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타락해 버리므로 이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해야 하는 상황 가운데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은혜의 왕국을 이 세상에 도입시키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로 임하였다고 했을 때는 이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이 임했다는 뜻이다. 그 은혜의 왕국은 이 세상 안에서 진행하고 성장하다가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서 마지막에는 영광의 왕국 즉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화(化)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은 영광의 왕국의 도래 즉 은혜의 왕국의 극치(極致)가 이루어질 그 때를 소망하며 이 땅에 살아간다. 이를 전통적으로 ‘아주 특별한 섭리’라고 불렀다.

기독교 세계관의 존재론적 토대
제4장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

1.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계 창조 이전부터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충족적인 하나님이시다. 즉 기독교 세계관은 이 세상은 스스로 생긴 것이거나 우연히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만 계셨다. 이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홀로 계셔도 무엇이 부족한 것이 없는 그 스스로 충족하신 분이시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게 대해 원인이 되시는(causa sui) 분이시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존(至尊)하신 분이시며 필연적 존재이시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 어떤 증명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전제하고 선언하며 그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선포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근거해서 이 같은 하나님을 알 뿐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존재적으로 우리의 존재 근거가 되실 뿐 아니라 인식적으로도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 근거가 되신다.

2. 인간의 창조 인식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보고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창조 과정을 인간들이 발전시킨 설명의 틀인 과학으로 증명하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창조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유일한 인식 길을 다음 같이 선언하고 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와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만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1,2장의 창조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정보를 원천으로 여겨야만 한다. 이길 밖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없다.

3. 하나님의 창조 과정과 특성

(1) 무(無)로부터 창조

창세기 1:1은 1:2에 대하여 독립 절인가, 종속절인가? 종속절로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하실 때에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고” 등으로 번역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창세기 1:2는 창조 이전의 세상에 대한 묘사가 된다. 이런 해석은 창조 이전에 이미 무엇인가가 존재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문제점을 지닌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성경과 창세기 전체의 서론이고 표제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만드실 것에 대한 언급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가 하면 이를 원물질(原物質)을 만드신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혼돈과 공허라는 중언법(重言法)으로 묘사된 이 상황은 아직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황을 묘사하는 구약의 전형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혼돈하다는 것은 ‘모양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지 ‘모양이 왜곡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황을 오늘날 우리가 살 수 있는 상황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6일 동안의 일이다. 그리고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는 ‘무(無)로부터의 창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태초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즉 이 세상은 시간과 함께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여겨야만 한다.

(2) 말씀으로 창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창조는 ‘명령에 의한 창조’라는 말이 말해 주듯이 말씀에 의한 창조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빛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창조는 창조 사역에 있어서 성육신하시기 전의 로고스이신 성자 예수께서 그 창조의 주체요 창조의 중보자 역할을 감당하셨음을 말해준다.

(3)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한 창조

창세기 1장의 창조사역에서 하나님을 복수형으로 지칭한 것을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은 성령의 ‘보존하시며, 유지하시며, 통치하는 기능’을 시사해 준다. 성령은 일반적으로 피조(被造) 세계를 온전케 하시고 채우시며 생명을 주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자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4) 질서 있는 창조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되 어떤 법칙(자연법칙)하에 질서 있게 질서에 순응하도록 창조하셨고 피조물 간에 혼돈이 없이 구별되게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만물 창조 시 하나님이 세우신 이 질서를 깨뜨릴 때는 부조화 현상이 일어난다.

(5) 그 종류대로 창조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만물이 진화(進化)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이 지구상의 다양한 생물이 있게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각기 다른 다양한 생물들을 그 종류(種類)대로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만물이 같은 종(種) 내에서의 변화는 가능하나 종(種)의 경계를 뛰어넘는 진화(進化)는 불가능하다.

(6) 선하신 창조

인간의 타락에 의해서 이 피조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되었지만 그 모든 것이 본래는 매우 선했던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타락하고 죄에 빠진 것도 그 전체가 악해진 것이지 그 중 일부는 선하고 일부만 타락한 것도 아니다. 창조함을 받을 때 우리의 영(靈)과 물질인 몸 모두가 다 선했고 타락한 상황에서는 영(靈)과 물질 모두가 타락하여 다 더러워졌다. 그러나 구속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며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4,5)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모든 일과 관계에 대해서 구속의 빛을 적용시켜 보아야 한다.

4. 창조론의 기독교 세계관적 의미

(1) 피조 세계는 창조주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 절대 의존적 존재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경배와 존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고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결단코 하나님을 대신한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줄 때 우리는 먼저 그것을 존재할 수 있도록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2) 하나님은 이 세상을 자신과 구별되게 하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일부이거나 하나님의 한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과 구별 된 존재이다. 즉 피조물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창조 주 하나님을 대신 할 존재는 없다.

(3) 피조물은 창조주의 뜻을 구현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목적 없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사명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궁극적 뜻을 이루는 수단인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인간론적 토대
제5장 인간의 창조와 그 상태의 변화

1. 인간 창조의 독특성

(1) 인간은 창조의 극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준비하신 후에 인간을 가장 나중에 창조하셨다. 그리고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된 인간의 창조는 창조의 극치(極致, the summit of creation)라고 할 수 있다.

(2) 사명자로 창조 된 인간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먼저 인간을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 일정한 방식으로 창조하시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시고(창 1:26), 이 의지와 말씀에 따라 목적을 가지고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 1:27) 그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인간의 특성과 온 세상에 있는 것들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인간의 존재 이유를 담고 있는 매우 풍성한 선언이다. 이처럼 인간은 창조주의 사명자로 지음을 받았다.
(3) 특별한 방법으로 창조된 인간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실 계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지 않았다. 처음에 남자만 만드시고(창 2:7) 그로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하게 하여 일종의 심리적 준비와 필요를 가지게 한 후에 그를 잠재우시고 그의 몸의 일부를 사용해서 여자를 만드셨다. 이것은 피조물 가운데 아담에게 적합한 배필이 없음을 드러내시며 또한 아담으로 하여금 그 사실의 필요를 느끼게 하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 창조에는 하나님의 형상뿐 아니라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는 특별한 방법으로 하셨다.

2. 인간의 독특성

(1) 하나님의 형상

다른 것들을 창조하실 때는 ‘그 종류대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하나님의 모양(형상)대로’ 만드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의미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원형이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반영(reflecrion, image, 그림자)이라는 뜻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원형(原型)되심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반영해야 한다는 인간의 존재의 이유와 사명도 함의하고 있는 말이다. 무엇을 반영하고 나타내야 하는가?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피조물의 한도 내에서 반영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땅 위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반영해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상태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며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렇게 타락한 사람을 가리켜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라고 한다.(창 9:6, 약 2:9)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됨은 소멸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이 같은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피하여 도망할 수 없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나 그 형상은 형상 노릇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손상 된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개인에게 적용시켜 주실 때 이 형상의 회복이 일어난다. 이 형상의 회복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측면도 있고(중생, 즉각적 성화, 칭의),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측면도 있다.(점진적 성화) 온전케 된 하나님의 형상은 참된 진리에 대한 지식과 의와 거룩함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가지는 모든 특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인격성, 영성, 합리성, 도덕성, 권위 그리고 창조성 등이다. 그러므로 형상의 회복이란 원의의 회복과 함께하는 인간됨의 모든 측면이 새로워짐을 뜻한다.

(2)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모습은 함께하는 인간이며 더불어 사는 사회적 인간이다. 하나님이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여자가 그 남자의 일부로 만들어졌지만 성경의 본문은 남자와 여자의 동등성과 여자는 남자의 돕는 배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남자와 여자는 홀로 설 수 없고 반드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도와야 온전하게 되는 사회적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똑같이 중요하고 똑같이 귀하다. 이같이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동등한 존귀한 자들로서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인간이 상호 교제의 존재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각 사람의 남자 됨과 여자 됨에 대한 충실성과 이로부터 기인하는 혼인 관계를 시사한다. 혼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서로 돕도록 하신 그 뜻에 순종하는 일의 한 측면이다. 사람은 이렇게 전인적으로 함께 살도록 창조된 것이다. 영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관계 육체적 관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인간의 모든 관계성은 또한 창조주 하나님과의 교제를 염두에 두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관계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전제하며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에는 거룩하나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떠나면 추하고 더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교제의 존재요 함께하는 존재라는 것은 결국 모든 사람들에 대해 이웃이 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있는 존재들이고 이웃의 보호하는 자로 또 이웃과 함께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통치와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

그렇게 함께 하면서 사람은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제하며 함께 산 결과로 아이를 낳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의 일부분이고 그 결과로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과 온 땅에 가득 차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의 일부분이며 그리하여 그들이 땅을 정복하고 온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리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의 일부이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 앞에 인간이 행할 사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것이 하나님 형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함에서 하나님 형상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대로 생각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잘 다스려야 하는 사명을 가진 존재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다스린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 문화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문화가 되게 한다는 의미도 있다.

3. 하나님의 형상의 기독교 세계관적 의미

(1) 진화론 거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로부터 진화되었다는 모든 개념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이다.

(2) 하나님을 반영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을 세상에 잘 반영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자신의 몸을 사용함에 있어서, 교제 관계에 있어서, 피조 세계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다스리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됨은 인간의 큰 특권이면서 인간의 큰 의무요 과제이다.

(3) 하나님 의존적 존재

하나님의 형상은 또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마치 인간이 최고의 존재인 양 생각하는 인간 중심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는 것은 결국 자신의 근본을 저버리는 것이며 비(非) 인간화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인식론적 토대
제6장 기독교 진리의 이해

1. 일반적 진리관

(1) 상응설(相應設, 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개념이 세상에 실재하는 것과 일치하면 참된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것은 주로 경험론적 전통에서 강조되는 진리관이다. 그러나 상응설이 신뢰하는 인간의 감각은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 이 논리는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보지 않고서 이 세상 사태(事態) 일반에 대한 어떤 진리를 말하기 어렵다는 문제와 영혼의 존재나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2) 정합설(整合設, coherence theory of truth)

생각하는 관념과 명제들의 시작과 끝이 일관성을 가지고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그것은 진리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 같은 정합설은 결국 어떤 진리 체계나 출발점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전제된 진리는 과연 어디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가?

(3) 실천적 진리관

서로 다른 강조점을 지닌 두 가지 관점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이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별로 의미 없는 일이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진리관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실용주의적 진리관으로 진리는 신념의 기능이나 역할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즉 다른 것을 고려하지 않고 현실의 문제 사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그래서 인간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 진리라고 간주한다. 이들의 입장은 결국 인간은 결코 절대적 진리를 획득할 수 없으므로 그저 신념의 가장 유용한 기능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실존적 진리관

이들은 모든 진리 문제를 실존문제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진리 주장이 적용되는 영역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진리는 다른 영역에서의 진리와는 다른 것이 작용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즉 과학적으로 진리인 것이 실존적으로는 진리가 아닐 수 있으며 그런 때는 그것을 각기 서로 다른 영역에 대한 언급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이중 진리관)

2. 현대의 다양한 진리관

(1) 다중적인 진리관

여러 인간 집단이나 각 개인에 있어 각각의 영역에 대한 진리 주장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단일한 절대의 진리 체계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부추겼고 결국 상대주의적 진리를 허용하는 주장이다. 이 같은 주장은 하나님과 성경을 절대 진리로 믿는 기독교와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다.

(2) 의사소통적인 진리관

사회 속에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진리로 보고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3) 포스트모던의 진리 이해

세상에 절대 진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각기 진리라고 하는 모든 주장은 상대적일 뿐이며 늘 권력의 작용과 연관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상대적인 진리만 있기 때문에 결국 누구나 각자 생각하고 주장하는 그것이 바로 진리가 된다는 것이다.
2. 포스트모던 상황 속의 그리스도인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절대적인 주장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강조한다. 이것이 이전 세대의 사유보다 좀 더 겸손해 보일지는 몰라도 여기에 함정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가 자신을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계시하셨다는 그런 이해조차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진리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기독교적 전제는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하시는 바가 진리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이 어떻게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필요성이 대두 되며 하나님은 자연만물이라는 일반계시와 성경이라는 특별계시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생각을 인간들이 알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이 이 같이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한 계시를 주셨으므로 이에 근거해서 인간은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해서 피조물의 한도 내에서 비록 완벽하지는 않으나 바른 이해에 이를 수 있다.

(1) 타락 전 상태 인간의 진리 이해

창조에 깃들어 있는 일반 계시를 바르게 파악하여 사람이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한 피조물의 수준에서 바른 이해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한 진리를 소유하고 있었고 진리를 얻어 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아담이 동식물들의 이름을 지은 것에서 이를 추론할 수 있다.

(2) 타락 상태 인간의 진리 이해

타락한 상태의 인간은 진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비(非) 진리이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 자신이 진리에 반(反)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때때로 자신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생각하며 진리 추구에 평생을 바치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은 타락 된 자신의 의식과 활동으로 진리를 억누르고 있다.(롬 1:18 참조)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다.(롬 1:19) 칼빈은 이것을 신(神) 의식(意識)이라고 말했다. 신(神) 의식이 세상에 드러내신 하나님의 일반계시와 작용하면 바른 신(神) 지식이 나타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신(神) 의식과 자연 계시에도 불구하고 결코 바른 신(神) 지식을 형성할 수 없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못 아는 것은 아니고 이 세상의 어떤 부분은 제대로 관찰하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작용으로 비록 기형적인 것이 되기는 했으나 잔존하는 하나님의 형상됨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타락 후에도 자연법칙 등 창조 된 사물들의 변함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리 타락한 자라도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3) 구속받은 성도의 진리 이해

구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뜻하지만 인간의 모든 인격적 활동의 회복도 다 포함한다. 중생한 사람은 이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계시 내용을 옳고 바른 것으로 받아들인다. 중생한 이는 이제 하나님의 계시라는 시금석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경험과 활동을 통제해 나가려고 한다. 이들은 이제 모든 것을 바르게 파악하고 해석하기 시작한다. 이런 활동은 일차적으로 신(神) 인식(認識)과 신학(神學) 활동에서 나타난다. 즉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신학(神學)하는 것이다.(계시의존 사색)

그러므로 구속 받은 성도는 어떤 분야의 학문적 활동을 하든지 결국 성경이 계시 하는 바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그 토대 위에서 학문적 활동을 해야 한다. 이렇게 구속 받은 성도는 사고의 모든 분야에서 철저한 기독교적 사고를 하려고 해야만 한다.

이는 기독교인은 논리적 실수를 전혀 하지 않는다거나, 그 사유가 항상 바르다거나, 이 세상 전체에 대해서 항상 더 나은 이론을 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중생한 의식(意識)은 논리적으로는 타락 이전의 아담의 의식으로 회복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서서 하나님의 일반 계시인 온 세상과 그 현상을 제대로 관찰하며 철저하게 사유(思惟)하지 않으면 실수도 하고 잘못된 해석도 하며 따라서 엉뚱한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해를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서 부단히 고쳐 나가야 한다.

4. 인식 과정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그러면 진리를 어떻게 알게 되느냐고 할 때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 기독교 인식론(認識論)은 존재론에 근거한 인식론이므로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주신 계시(사물, 피조 세계 전체, 이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으로서의 하나님의 특별계시 성경)에 대해 중생한 의식이 작용하여 하나님이 의도하신 세상을 바르게 인식(認識)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 하나님이 모든 인식 활동의 존재의 원리이다.
–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주신 이 세상(일반계시)과 이 세상의 의미 와 방향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인 특별 계시(성경)가 우리의 객관적 인식의 원리이다.

– 성령의 능력으로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의식(意識)이 인식(認識) 활동의 주관적 원리가 된다.

이를 요약하면 기독교적 진리 이해는 하나님의 계시 즉 특별 계시와 특별 계시의 빛에서 해석된 일반 계시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 그리고 그의 계시와 부합하지 않는 세계이해는 참된 것이 아닌 것으로 여긴다.

기독교 세계관의 가치 토대
제7장 기독교의 가치 이해

1. 윤리적 가치 대한 기본적 논의

(1) 윤리적 가치 대한 고전적 이해

– 목적론적 윤리설 / 이는 인간이 마땅히 추구하고 지향해야 하는 목적에 도움이 되는 것이 윤리적으로 바른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설로 인간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며 이에 도움이 되는 것이 윤리적으로 선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 규범론적 윤리설 / 인간에게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행해야 할 행위의 의무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오직 의무 수행을 위한 의무의 수행을 강조한다. 보편적 인생의 목적이나 절대적 행운의 법칙의 존재를 전제하고 그것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느냐를 가지고 형이상학적 윤리설, 자연주의적 윤리설, 직각주의적 윤리설(직관론적)로 나누기도 한다. 이 같은 여러 윤리설은 지향하는 목적이나 행위의 의무가 있는데 인간이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있고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고전적 윤리설은 기본적으로 펠라기안적이라고 할 수 있다.

(2) 윤리적 가치 대한 현대적 정황

현대인들은 이 세상에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윤리적 가치가 있으며 윤리적으로 옳은 것을 판단해 가는 어떤 보편적 기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다양한 현대의 윤리적 가치 대한 이해는 윤리적 상대주의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주어진 집단 안에서만 통용 되는 윤리적 가치는 말할 수 있으나 포괄적으로 보편성을 가지고 모든 집단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화 된 윤리적 가치를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3) 윤리적 가치의 기독교적 의미와 출발점

윤리적 가치의 기독교적 의미와 출발점은 인간 스스로는 윤리적 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제시하는 여러 가지 윤리적 가치들이란 서로 대립하며 전체를 수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윤리의 가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는 인간의 타락을 드러내 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어떤 것을 윤리적 가치라고 판단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인간의 윤리적 위기 상황인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말씀 안에서 참 된 윤리의 가치를 찾으려고 애쓰게 되는 기회이기도 하다.

2. 기독교 윤리의 기초

(1) 절대 원리로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

기독교 가치관은 오늘날 절대가치관을 인정하지 않는 뉴에이지운동과 같은 상대주의적 가치관 가운데서도 절대적인 가치의 원천과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는데서 출발된다. 그러면 무엇이 절대적인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이 절대적이다. 여기서 가치의 절대적(絶對的)이라는 말은 변함이 없으며, 다른 것들과 비교되지 않고, 그것이 내적 정합성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 모든 판단의 근거와 척도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선악(善惡)과 정사(正邪, 바른 일과 사악한 일)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 기독교 윤리적 가치관의 근본이다.

그러면 그 가치에 대한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정통적 기독교회는 이에 대해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전체 성경(tota scriptura)를 말하는 성경적 원리를 주장해 왔다. 하나님의 뜻이 선지자들에 의해 여러 시대에 걸쳐서 여러 모양으로 계시되었고 그 중에 가장 요긴하고 필수적인 것들이 성경에 성문화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직접 교훈하는 것들과 그 각각의 교훈을 종합하여 그로부터 선하고 필연적인 귀결로 자연스럽고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으로 여길 수 있다.

(2) 인간의 실패와 절망

그렇다면 이 세상에 그런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성경의 대답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 앞에서 철저히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요구는 정상적인 인간의 책임을 훨씬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 보편적 절망에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셔서 우리 가운데 오신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희생의 죽음을 죽으실 수 있으셨고 그의 희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 죽으셔야만 할 정도로 인간은 부패하고 타락한 것이고 이 세상에는 그분 외에 그 어떤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

이렇게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해 절망이 기독교적 가치관의 한 기초라면 기독교 윤리란 있을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3) 성령께 의존하는 기독교 윤리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자력으로 수행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속은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을 담당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은혜가 인간에게 작용하여 인간을 새롭게 만든다고 성경은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요구 즉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힘으로나 자연적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행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 온전한 기독교 윤리는 결국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성령님께 의존하여 수행하는 윤리가 된다.

(4) 하나님 나라의 윤리

기독교 윤리는 무엇을 위한 것이고 무엇을 중심으로 한 것인가?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 나라가 중심이며 하나님 마라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산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그 나라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살피면서 그 나라의 역사적 진행 과정 가운데서 어떤 일을 수행해 가야 하는 지이 것에 온 마음과 뜻과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땅의 하나님 나라 백성인 그리스도인이 모든 일에 완벽하다거나 항상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잘 판단해서 그대로 살아간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항상 겸손하게 자신의 부족함과 허물을 직시하고 그것을 미워하며 버리고 자신과 모든 사람 앞에서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도록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항상 죄와 싸우며 나아가는 과정의 아직 완전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정병으로서 모습을 지닌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사단과 세상과 육체에 대항하여 싸우는 전투적 교회(church militant)의 한 지체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윤리는 성경을 객관적 원리로 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힘주심을 주관적 원리로 하는 이 세상 어두움의 세력과의 투쟁의 한 부분이다.

그리스도인의 직업관
제8장 기독교 세계관의 실천

그리스도인의 직업은 기독교 세계관의 한 실천 방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노동과 직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수행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떤 직업을 선호하여 선택하고 일단 직업을 선택한 후에는 어떤 태도로 그 직업을 수행해야 할까?

1. 문화 명령의 빛에서 본 직업

개혁신학에서는 오래 전부터 창세기 1:28 말씀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며 동시에 인간에게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규정해 주시는 명령이라는 뜻에서 ‘문화 명령’으로 이해해 왔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왕과 주인이 되시는 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인간을 대리 통치자로 세우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 세상 통치는 하나님의 형상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 형상됨의 결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일은 인간에게 맡겨진 사명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문화명령에 대해 후크마 교수는 “하나님을 위해서 땅을 통치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문화를 개발시키라는 명령이다.”고 요약했다.

또 하나님의 이 문화 명령은 모든 사람이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에 따라 분담하여 다 함께 수행하도록 한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의 은사와 능력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이 땅 위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문화를 이루어 나가는 데 힘써야만 한다. 그리고 노동과 그것의 구체화된 형태인 직업은 하나님의 이 문화 명령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 후에는 이 문화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일부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노동이 고되고 힘든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이 땅 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문화가 진전되도록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원칙적으로 노동 또한 구속(救贖)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문화 명령의 빛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의 직업과 직업 활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증진(增進)하는 문화를 이루기 위한 활동이다.

2. 대(大) 위임 명령의 빛에서 본 직업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19-21)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이 명하신 대(大) 위임 명령이다. 여기 나타난 ‘너희는 가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지키게 하라.’ 4가지 동사 가운데 주(主) 동사는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이고 나머지 3개의 분사는 이 주동사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족속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기 위해 모든 족속에게로 가야한다. 또한 세례 주는 일은 그 대상자가 이미 복음을 믿고 제자가 되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리고 가르치는 일도 제자 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치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제자 삼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뜻을 받들어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것에는 좁은 의미의 종교적인 일 즉 신앙생활만이 아니다. 넓은 의미로 그리스도인의 일상의 모든 일이 포함 된다. 따라서 예수님의 대위임령을 수행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들이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문화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주님의 제자는 단지 성경 읽고 기도하고 전도에 힘쓰는 사람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에 힘쓰면서 아울러 주어진 직업의 영역에서 일상의 삶을 통해 주님의 대(大) 위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기회와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3.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본 직업

신약 성경은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로서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으며 그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르게 되리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 즉 천국에 속한 천국 백성이다. 따라서 직업과 그와 관련된 활동은 그저 돈을 벌거나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잘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활동이다.

이런 의식이 충실한 가운데 성령에 의존하여 수행되는 직업 활동은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일이요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직업 활동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하는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어야만 한다는 논리가 성립 된다. 그리고 구속함 받은 그리스도인의 이런 태도는 일터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이 된다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 온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말은 창조주 하나님을 만유의 주재자로 무겁게 여긴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규범을 높이고 존중하며 그에 따라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일상적 영역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의 삶 전체를 주관해야만 한다. 직업을 이와 같이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은 직업 활동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는 사랑의 태도로 해야 한다.

구체적인 예로 에베소서 6:5-8에 종들이 하는 모든 일이 상전이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주님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육체의 상전을 섬기는 종일지라도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종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주님을 섬기는 성실한 마음으로 주어진 일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하여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적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직업과 연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한 태도로 직업을 선택하고 수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직업은 결국 하나님 나라 를 위한 일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 그리스도인은 될 수 있는 대로 생활수단이 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많이 도울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고 또한 다른 이들을 도 우려는 태도로 직업 활동을 해야 한다.

– 그리스도인은 가능한 한 피조 세계 전체를 돌아 볼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고 피조 세계를 돌아보는 태도로 직업 활동을 해야 한다.

–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피조 세계 전체를 돌아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아의 진정한 의미와 자아 의 실현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제대로 이해된 직업 활 동은 그리스도인의 자아실현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직업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돕고 이 피조 세계를 돌아봄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잘 드러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일을 증진(增進)해야만 한다. 이 수행 과정 가운데서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으로 주어진 나의 진정한 나 됨이 나타나고 실현된다. 이제 남은 문제는 과연 이런 올바른 생각을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드러내는 일이다.

영성과 성경적 접근
제9장 영성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의 접근

오늘 날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말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 중 하나가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을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말이 성경적인 의미로 바로 사용되기 보다는 성경과 다른 잘못 된 의미로 사용되어 그리스도인들을 현혹하거나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靈)이신 하나님 특히 성령 하나님과 연관 된 일을 말할 때 영성(靈性)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도 영성이라는 말을 쓴다. 예를 들어 인도의 요가나 달라이 라마 등을 말할 때 영성(靈性)이라는 말을 쓰며 심지어 영매(靈媒)인 미국의 실비아 브라운이라는 여자는 “지금 전례 없이 영성(靈性)이 세상에서 성장하고 있으며 인류가 점점 더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매우 모호한 의미로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틀인 창조, 타락, 구속, 극치라는 역사적인 틀을 적용해서 영성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이 같은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틀을 통해 영성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함으로 기독교적 영성(靈性)의 의미를 명확히 알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창조 받은 영성
1. 창조의 빛에서 본 영성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영혼(靈魂)과 몸(肉)을 지닌 전인(全人)으로 영혼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살아가도록 창조하셨다. 이같이 창조의 빛에서 보면 사람은 그 존재 전체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 즉 사람이라는 존재는 영적(靈的, spiritual)인 존재다. 여기서 우리는 잘못된 영육(靈肉) 이원론(二元論, dualism)을 극복할 수 있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즉 인간의 영혼만 영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의 빛에서 보면 몸과 영혼이 다 영적이라는 것이 성경의 중요한 교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영적(spiritual)이라는 말을 인간의 영혼만 연관시키는 것은 성경적이거나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고 희랍적인 것이다. 피타고라스로부터 플라톤까지 희랍의 사상가들은 인간의 영혼만 고귀하고 물질적인 몸은 필요악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의 몸을 더럽게 여겨 이 더러운 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고귀하게 여겼다.(영지주의 이원론)

그러나 기독교적 이해에 의하면 인간의 몸 그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과 영혼을 모두 선하게 창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존재 전체가 선하고 고귀하다고 가르치며 따라서 전인(全人)이 영적 존재라고 선언한다. 즉 인간은 영육(靈肉) 단일체(單一體, psychosomatic unity)인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인간이 몸으로 하는 것도 영적(spiritual)이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기독교적 사물에 대한 이해에서 인간의 몸은 매우 중요하다.

사도 바울 당시 사람들이 “너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롬 12:2)라는 사도바울의 말을 들었을 때 매우 놀랐을 것이다. 희랍적으로 사유하던 그들은 ‘영혼을 하나님께 드리라.”라는 말은 당연하다고 여겼겠지만 그러나 몸에 대해서는 “어떻게 더러운 인간의 몸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몸과 영혼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몸과 영혼이 다 거룩하다고 했고(고전 7:34), 하나님께 마음(영혼)뿐 아니라 헌신(獻身)할 것을 명했다.(롬 12:2)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인간의 영혼은 선하나 몸은 악하다고 하며 따라서 영혼이 몸을 떠나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주장한 영지주의(靈智主意, Gnosticism) 이단을 철저하게 배격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해 약간 비(非) 성경적이었던 오리겐과 달리 인간의 영육(靈肉) 모두를 강조하여 전인(全人)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모두 영적일 수 있음을 주장했다. 이렇게 우리의 전인(全人)이 하나님과 긍정적으로 관련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건전하고 바른 영성(靈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창조함을 받은 영성’이라고 할만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빛에서 보면 우리의 삶 전체가 영성으로 가득 차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처음 창조 받았을 때 삶의 어떤 부분도 하나님과 적극적 관계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혼이 몸을 사용하여 하는 모든 것에 전혀 죄가 물들어 있지 않았고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니 그 모든 것이 영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적인 올바른 영성이란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과 건강하게 연관시키는 것이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의 빛에서 보면 그야말로 인간의 삶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과 건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는 것이다.(딤전 4:4) 그러므로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그야말로 모든 활동이 영적이었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는(고전 10:31) 영성이 충만했다. 즉 그들의 삶에 영적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타락한 영성
2. 타락의 빛에서 본 영성

그러나 불행이도 아담과 하와는 이런 상태를 지속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신들의 의지(意志)를 주장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더 높은 상태로 나아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함을 받은 그 상태에서 떨어져 타락하여 죄악과 그 결과로 인한 비참함 가운데 있는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영성도 타락한 영성이 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영성은 결국 이와 같은 타락한 영성의 각기 다른 표현들인데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mis-relationship)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타락 전 온전한 사람이 하나님과 바르고 건강하게 관계하던 것과는 달리 타락 후에는 하나님과 관계가 뒤틀렸고 그 결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의 관계도 모두 뒤틀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은 때로는 일체의 신적(神的)인 것을 부인하고 이 세상과 자신들을 다 물질적인 것으로만 여기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완전한 세속적 해석을 하고 세상에 관련하여 세속적 관계를 유지해 가기도 한다.

또 때로는 이 세상의 어떤 피조물을 신격화하여 피조물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섬기며 살기도 한다. 그리하여 피조물을 섬기면서 그것에 헌신하여 자신을 희생하기도 하고 자신의 자녀들을 드리기도 하며 그런 우상에게 전적으로 노예처럼 복종하여 살기도 한다. “스스로 지혜 있다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 이렇게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은 뒤틀린 영성의 대표적 표현이다.
또 어떤 때는 우상들은 다 인간들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법(理法)이나 고귀한 원리를 자신과 세상의 해석의 원칙으로 높이며 살아가기도 한다. 스토아 사상을 서구의 그런 사상의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면 불교는 동양의 그런 사상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타락 때문에 나타나게 된 뒤틀린 영성(deformed spirituality)의 표현들이다.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뒤틀려지면서 그 한 부분인 영성에도 이와 같은 뒤틀림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이 어떤 때는 매우 세속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매우 신비한 형태로 또 어떤 때는 매우 종교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다 성경이 말하는 참되신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가 아니고 바른 하나님 관계의 뒤틀린 표현들이다. 이런 현상들은 소위 종교 현상학으로 이 세상의 종교를 해석하면 이와 같은 뒤틀린 영성이 때로는 매우 천박하게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매우 고상하게 표현되기도 한다.

오늘날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선불교(禪佛敎)나 인도 사상의 영성 추구에 관심을 보이거나 세속의 삶에 지쳐서 영성을 갈구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결국은 이 같은 것들은 모두 다 온전하지 못한 영성 추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회복 된 영성
3. 구속의 빛에서 본 영성

그러나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고 구원역사를 진행시켜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통해 구속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의 빛에서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잃어 버렸던 존재가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창조주요 구속 주이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관련하게 된 사람들은 이제 제대로 된 영성이 회복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과의 긍정적인 관계를 프란시스 쉐퍼의 말처럼 ‘진정한 영성’ ‘참된 영성’이라고 할 수 있고 청교도들의 말처럼 ‘성경적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적 영성이라고 하면서 과거의 인습(因習)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성경적 영성이 아니다. 참으로 성경적인 영성은 지난날 왜곡되고 뒤틀려진 영성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변개한 영성(converted spirituality)이라고 하는데 진정으로 영성이 회복 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변개하기 이전에 왜곡된 영성을 가지고 생각하며 표현했던 것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전에 자신이 생각하고 묵상하고 행한 바 전체를 버리고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사도 바울은 거듭나기 전 자신이 추구하던 모든 것이 전혀 옳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정 반대로 자신은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자주 언급했다. 이처럼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옛 사람은 벗어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가지고 살며 이 때 비로소 진정으로 영성이 회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옛 사람을 벗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영성을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를 드러내는 시금석의 하나이다.

이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이전의 모든 것을 온전히 버리게 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상반) 단순히 중립적이거나 부정적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역겨워하면서 완전히 버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점의 변화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관점으로(from a perspective in Christ) 세상을 보기에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자기의 모든 것은 새롭게 판단된다. 여기에 바울적인 모든 가치의 전도(Umwertung der Werte)가 표현된다. 전에는 유익으로 생각했으나 이제는 해로운 배설물로 여긴다는 바울의 6절과 9절의 표현에 비추어 볼 때 ‘율법의 의(義)로는 흠이 없는 것’이지만 이제는 그것이 의가 되지 못한다는 고백이다. 그렇다면 타종교 안에서의 인간의 영적 힘씀은 무가치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해로운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의 영적 추구에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이 있었고 그것이 오늘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이런 바울의 정신과 상당히 대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 된 우리들은 끊임없이 성령님께 의존하여 노력하면서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과 바르게 연관시키는 영성의 온전함을 추구해야 한다.

4. 극치의 빛에서 본 영성

우리 영성이 철저한 의미에서 온전해지는 것은 역시 하나님 나라가 극치(極致)에 이를 때이다. 물론 성도가 죽어 그 영혼이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서 주님 재림의 때를 기다리고 있을 때도 모든 것이 하나님과 연관 된 온전한 영성의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영혼 전체 전인(全人)이 온전한 영성을 지니게 되는 때는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를 우리 주님 재림의 때이다. 그때는 우리 몸도 게르할더스 보스의 말처럼 성령님이 쓰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변화 된 온전한 영적인 신령한 몸이 된다. 그래서 그런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이 영적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재의 모든 문화 활동도 하나님 나라 극치 상태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그 영적 삶을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의 영성도 극치에 이른 온전한 영성의 빛에서 평가하려고 해야 한다.

5. 부족하거나 심각하게 잘못된 영성에 대한 표현

(1) 영성에 대한 부족한 표현

인간의 표현은 항상 한계가 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 64:6)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헌신 없이는 온전한 영성을 표현할 수 없다. 즉 우리 영혼만 하나님 앞에 온전한 것으로 여겨 인간성의 다른 부분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참된 영성의 표현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창조주와 구속 주이신 주님과 연관시켜야 온전히 영적이 되고 온전히 영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나 찬양이나 예배시간만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원론적 영성은 성경과는 다른 상당히 왜곡된 영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영적인 시간을 따로 구별하고 그 외 시간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거나 조금 먼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영적인 것이 아니고 영성의 바른 표현도 아니다.

(2) 영성에 대한 심각하게 잘못 된 표현

그러나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 된 우리의 영성을 무색하게 하는 심각하게 왜곡된 표현들이 많다. 한 예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 된 하나님과 바른 관계라고 하면서도 그 관계성을 잘못 표현해 내는 천주교적 영성을 생각할 수 있다. 영성과 영적 훈련 방법뿐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려고 하는 모든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기본 이해에 부합하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거나 지속해 나가는 일에 인간이 기여하는 것은 전혀 없다. 홀로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믿고 온전히 의존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의 전부다.

그러나 천주교의 영성훈련(영신수련)은 1) 정화의 길을 거쳐, 2) 조명의 길을 지나, 3) 은혜의 주입에 의한 일치의 길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그 배후에는 천주교회의 반(半)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적 구원의 이해다. 이는 건전하고 바른 영성이기보다는 왜곡된 영성이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성 요셉 수도원(St. Joseph Abbey)의 트라피스트 수도자(Trappist monk)요 피정 지도자(retreat master)였던 월리엄 메닝거(Wlliam Menninger)는 1974년 ‘무지의 구름’(The Cloud Unknowing)이라는 14세기 때 쓰인 책을 읽고 그 책에 언급된 소위 관상(觀想, contemplation)을 자신의 수도원 피정에서 현대의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하나가 되는 영적 경험을 하도록 적용하는 일을 시작한다. 일 년 후 그 수도원 원장인 토머스 키팅(Thomas Keating)과 바실 페닝톤(M. Basil Penington)도 젊은 천주교인들이 동방 정교회의 명상에로 나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적극 가담해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헌신하게 된다.

후에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이나 바질 페닝톤 등이 향심 기도(Centering Prayer)라고 부른 이 관상기도(觀相祈禱)는 그들에 의하면 자신을 하나님 중심으로 집중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들은 향심 기도와 관상을 동일시하기도 하고 또 더 정확히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사람들은 향심 기도를 관상을 위한 준비라고 하기도 한다. 이들과 관련하여 영성을 강조하는 사람으로 오늘날 신구교를 막론하여 많은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사람이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신부다.

동양적 명상 방법과 천주교의 관상기도를 결합시킨 토마스 머튼은 관상적 의식(contemplative consciousness)을 “초문화적이고 초종교적이며 형태도 초월하는 의식이며 그것은 종교나 무종교를 망라하여 종교 체계 모두를 관통하여 비쳐 나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특히 뉴에이지 운동에 몸을 담았다가 천주교회로 개종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머튼 등이 제시하는 이런 관상이 자신들이 천주교도가 되기 전에 뉴에이지의 명상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강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개신교인들 중에도 제대로 된 영성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신사도운동 주도자인 피터 와그너(C. Peter Wegner)다. 풀러신학교에서 교회성장을 가르치다가 소위 선지자의 예언을 따라 신학교를 그만 두고 신사도운동에 몰두했다. 그는 사도들과 그의 사역은 1세기에만 있었다는 전통적 입장과 달리 오늘날도 성경적 의미의 사도가 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심지어 하나님의 성회보다 더 나아가고 있다. 피터 와그너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 정관(定款)에 예언자를 언급한 하나님의 성회가) 목사, 전도자, 박사, 교사라는 교회 지도자들의 명칭은 인정하면서 예언자, 사도라는 교회 지도자들의 명칭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결정은 성경적 해석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교권을 쥔 교회적 전통에서 유래한다.”

또 오늘날 예언을 한다고 하면서 예언 사역 위주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 것도 이와 비슷한 잘못된 영성의 표현이다. 치유사역 위주로 교회 사역이 진행되는 것도 우리는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교회가 모여 집회하고 기도하는 중에 자연스럽게 주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실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그것을 목적으로 집회를 한다든지 이것 위주로만 활동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건전한 영성의 발로라고보기 어렵다. 46

또 천주교의 영성훈련 방식이나 심지어 타 종교의 영성훈련 방식을 개신교도들이 도입하는 것은 결국 이와 같은 왜곡된 영성을 본받아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려는 꼴이다. 대개는 어떤 종교적 행위 배후에 있는 사상적 기조(基調)를 생각지 않고 외적인 것만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개신교적으로 변형하여 적용하려고 할 때 이와 같은 일들이 발생한다. 17세기 성경적 영성을 잘 대변한 청교도 존 오웬(John Owen)은 세레누스 크레시가 말하는 관상기도에 대해 이렇게 반박한다.

“그들은 지성(知性)이나 이성(理性)의 활동 없이도 의지나 감정만으로 기도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주장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과 은혜와 다른 탁월한 속성들에 대한 묵상 없이 예배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야만적이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기초한 합리적 예배이어야 합니다. 기도에 대해 그들이 제시한 주장은 단지 환상과 상상력의 결과이지 성령의 조명과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들은 복음이 세상에 전파된 뒤에 복음을 대적하기 위해 명상가들이 만든 개념을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오웬은 다음 같은 말로 관상기도의 주장이 정확히 무엇인지 성경적으로 바르게 평가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영혼을 중지시키고 이성의 활동을 중지시킨 채로 순전히 의지만을 집중시켜 기도하는 것이 가장 탁월한 기도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기도의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기도로 인정될 수 없습니다. 기도가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는 자연스러운 의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부응하지 않거나 이에 모순되거나 일치하지 않는 것은 기도로 인정될 수 없습니다. 크레시 같은 사람들이 말하는 관상기도에 대해 어떤 명령도 지침도 동기도 예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성경에도 근거가 없는 그리고 이성이나 지성이 무시되는 기도가 다른 어떤 성도가 해야 할 의무나 어떤 특권보다 더 탁월하며 고차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그러므로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며 몇몇 미혹된 사람들이 상상으로 만들어 낸 것일 뿐입니다.”

6.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이 하는가?

진정한 성경적인 영성의 회복이 절실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건이 결여 된 수도원적인 영성의 회복은 성경적이 아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회복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구속된 사람이라는 의식을 온전히 가지는 것을 의미하며 그 의미는 이렇다.

– 바른 영성의 출발점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의 힘으로 이루시는 구속과 구원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다.

– 구속은 삶의 일부뿐만이 아니라 삶 전체를 구속하는 것으로 여기고 ‘이미’ 구원 되었으나 ‘아직’ 아닌 삶의 전반과 온 세상을 하나님과 관련시킬 때 참된 영성을 드러낼 수 있다.

– 그렇게 삶 전반을 하나님과 연관시키면서 날마다 회개와 믿음을 가 지고 살기에 그의 삶에서 지속적인 성화가 일어나는 사람이 영성을 제대로 표현해 가는 사람이다.

– 그런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라는 것을 인정 하고 예배와 헌신 등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신약성경이 말하는 그런 모습으로 온전히 드러내는 일에 힘쓴다.

– 영적인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따라 교회와 이 웃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힘쓴다. 그리하여 하나님 이 원하시는 문화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영성을 잘 드러내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간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며 모든 일을 성령으로 행한다.(갈 6:25)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왜곡된 영성을 자신의 영성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므로 영성이라는 말을 ‘모든 일을 삼위일체 하나님과 건강하고 긍정적으로 연관시키는 것’으로 정의하여 생각하기까지는 영성이라는 말에 유보(留保, moratorium)를 선언하는 것이 좋겠다.

모든 사람이 창조된 영성, 타락한 영성, 구속된 영성, 구속 되었으나 바르게 표현되지 못한 영성, 제대로 표현된 진정한 영성 등을 제대로 이해하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서 흔동되어 사용하는 영성(靈性)이라는 말을 잠시 사용하지 말고 전통적으로 사용하여 온 성경적 의미의 경건(敬虔, pietas)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성경적인 의미에서 경건한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필자가 이 글에서 말한 참된 영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부디 모든 사람이 영성이라는 말을 이렇게 회복된 의미로 재대로 사용하는 날이 속히 을 수 있기를 원한다.

기독교 세계관의 실천
제10장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견해

1. 다양한 견해

(1)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 없다.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버리자는 말은 있을 수 있어도 기독교 세계관 내용을 없애라는 것은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 세계관의 내용이 곧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나타내야 할 소금과 빛의 삶이기 때문이다.

(2) 기독교 세계관을 바꾸어야 한다.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으로 제시되던 바가 비 성경적인 부분이 있는 것으로 드러난 경우라면 물론 그런 것은 반드시 성경적인 방향으로 바꾸어야만 한다. 개혁된 신학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일관 된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라고 생각해 왔던 바를 전반적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하는 것(수정주의)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의 내용에 대한 근본적 수정을 요구하는 것이 되며 결국 기독교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

(3) 기독교 세계관 표현과 제시 방식을 바꾸자.

이는 있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온 세상을 바라보고 그런 관점에서 실천하는 기독교 세계관의 내용이 담아지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어떤 형태의 기독교 세계관 제시라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2. 기독교 세계관의 진전 방향

(1) 성경적으로 일관성 있게 해야 한다.

지금까지 기독교 세계관이 여러 모양과 여러 형태로 제시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가장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철저한 일관성을 지닌 세계관으로 제시되는 일이 필요하다.

(2) 신국적, 교회적 토대 강화해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의 신국적 토대와 교회적 토대를 보다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게 드러내는 기관이 바로 교회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기독교 세계관에 가장 충실해야 한다. 먼저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성경이 말하는 교회다워야 한다. 또 교회 밖에서 교회를 돕는 기관들은 그런 성격을 분명히 하면서 교회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섬겨가도록 해야 한다.

2.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실천들

(1) 기독교 학문적 활동

학문을 하는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것일 때, 그 생각과 내용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일 때, 그 내용 제시에 내적인 모순(비일관성)이 없을 때 우리는 그런 신학을 기독교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원칙을 다른 모든 학문에도 적용하면 우리는 기독교 학문의 성격을 보다 쉽게 일반화할 수 있을 것이다.

– 그 학문을 하는 동기와 목적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인가?
– 일차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간접적으로라도 잘 반영하고 있는가? 성경의 가르침과 대립하는 것은 없는가? 성경적 관점에서 해석된 이 세상의 실재(일반 계시)를 잘 반영하고 있는가?

–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말하는가? 학문적 일관성이 있는가?
(2) 기독교인의 기업과 경제 활동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명확히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의 활동이 요구된다. 그가 기업을 운영하는 태도, 자세, 방향과 철학 그리고 그 구체적인 운영방법이 기독교적 원리와 기독교적 세계관에 일치해야 한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기도 기독교 세계관에 일치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 판단 우선순위를 이같이 생각할 수 있다.

– 이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며,
–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고,
– 이웃을 섬기며,
– 자아실현을 할 수 있고,
– 피조 세계를 잘 섬기면서,
– 여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3) 기독교적인 정치 참여와 시민운동

자신의 신분과 지위와 세대와 출신 지방 학력 등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닌 기독교 세계관에 따라 판단하는 일이 정치 영역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기독교 세계관 실천은 요원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일반 시민운동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열심히 참여하며 활동해야 한다. 그 동기와 방법이 가장 선하며 그러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 그런 방식으로 일을 해야만 한다.

(4) 기독교학교와 기독교교육 운동

교육 전반에 대해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며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학교 세우기 운동과 기독교 대안교육 기관을 세우는 일들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 대학을 세우는 일 등이다. 그러나 일반 학교와 그 제도 속에 들어가서 그것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변화시켜 가는 노력에도 상당한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방도를 취하든지 진정한 기독교 교사와 교수를 키우는 일에 기독교학 대학원이나 기독교교육 대학원 설립 등을 우리의 우선적인 노력이 되어야 한다.
(5) 다양한 현대 문제와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회 내에서의 철저한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의견의 형성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런 기독교적 입장을 모든 이들 앞에 가장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6) 문화 활동과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세계관은 오늘날 사회적으로 전 세계가 모든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문화 활동에 소극적이고 방관적인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도적 역할을 하도록 관심을 기우려야 한다.

마치는 말

이제까지 언급 한 내용들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우리 자신의 의식이 철저하게 성경적이고 하나님 나라적인 의식이 되어야만 한다.
– 그런 개개인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최 선을 다해야 한다.
– 하나님 나라의 개인과 공동체(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 하심을 그들의 삶과 존재와 활동으로 드러내어야만 한다.
– 동시에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여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와 그 나라를 증시하는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며, 그렇게 교회 안 에 들어온 이들의 온 세상을 보는 관점이 진정한 기독교적 관점이 되고, 그에 근거해서 사는 일을 하게끔 애써야 한다.
– 그렇게 기독교화 된 이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가는 것의 실재를 드러내야 한다.
–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 의식에 근거한 문화적 활동 을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

출처 /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저자 / 이승구, SFC출판부, 2014년 개정증보판, 요약 / 정은표 (주) 요약 과정에서 저자의 의도가 본의 아니게 잘못 전달 될 수도 있음을 저자에게 양해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