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체험한 6.25 사변

1950년 6월 25일(주일) 새벽 4:20
내가 체험한 6.25 사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오늘 모국(母國)에서 학교 교육이 잘못되어 6.25 사변(事變)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팽배한 것을 탄식하며 이를 바로 잡고 6.25사변의 실상을 후손들에게 사실대로 알리기 위함이다.

이 글을 쓰는 나는 6.25사변을 눈으로 본 살아있는 증인이며 거짓 없이 전쟁의 모든 것을 바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지금 모국의 어떤 정당 혹은 단체에서는 6.25사변 발발 일에 아무런 기념식도 없고 국가적 행사 때에 애국가도 안 부르고 태극기에 대한 배례도 안 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왜 우리의 모국이 이렇게 변모했을까?

과거에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반공(反共) 정신으로 뭉쳐서 합심하여 나라를 지켰고 북괴의 간첩을 잡았고 지리산의 공비를 토벌했었다. 나라를 공산당으로부터 보호하려는 투지가 대단했는데 왜 요즘은 나라를 해치려는 무리가 한국 사회 각층 심지어 교회에서도 준동하는지 모를 일이다. 무엇인가 단단히 나라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6.25사변에 대한 진실을 바로 알고 우리 자손들에게 그 사실을 바로 알려 주어 애국심을 고취해야 할 것이다.

6.25사변은 북한 괴뢰정권의 김일성이 지금으로부터 63년 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서 북괴군을 동원하여 선전포고도 없이 당시 남북한의 경계선이던 북위 38도 선을 넘어 일제히 대한민국을 무력 침범한 사건이다. 이 전쟁으로 200만 명 이상이 생명을 잃었고 가족이 생이별했으며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 나온 사람의 수가 500만, 2013년 현재 63년이 지난 오늘 그들의 자손을 합하면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이 천만 명을 넘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부모를 잃고, 형제를 잃고, 집을 잃었고, 나 홀로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보존하여 오늘에 이른다.
전쟁은 3년 1개월 2일 계속되다가 1953년 7월 27일 아침 10시에 종전이 아닌 휴전(休戰)으로 끝났다. 지금도 휴전상태이며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있다. 전쟁이 종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북괴가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고 떠드는 속셈은 대한민국을 북괴의 공산당식으로 통일하겠다는 생각이므로 참으로 위험하기 그지없는 발상이다.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마음대로 누리고 있는 국민은 공산당의 통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에 동조하고 있다. 저들이 북한에 가서 평양이 아닌 시골에 가서 한 달만 살아 보면 공산당의 실체를 실감하고 다시는 공산당 소리를 못할 것이다. 북한을 모르고 공산당을 모르기 때문에 꿈속에서 공산당을 그리워하며 지지하는 것이다.

1. 해방과 함께 찾아 온 또 다른 위기

1945년 8월 15일은 모두 기억하는대로 우리나라가 36년간 일본 제국주의 지배를 받다가 해방된 날이다. 제2차 대전이 1941년 12월 8일 (미국에서는 7일) 미명에 ‘토라’라는 말을 작전 암호로 사용하는 일본 해군이 미국 진주만을 폭격하여 미 태평양함대에 속해 있던 많은 군함을 폭격하고 많은 전사자를 내는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미국의 루즈벨트(F.D. Roosevelt) 대통령은 즉시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미국 국민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교회당에 매일 모여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미국 사람들은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모두 교회당에 모여 기도한다. 이 같이 시작 된 전쟁초기에는 일본이 남양군도에서 승리하는 듯했다. 1942년 봄에는 말레이시아를 점령하여 거기서 나오는 고무로 만든 공을 일본 본토와 한국에 있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선물로 주며 승리를 자축하기도 했으나 곧 전세는 역전되어 일본군은 도처에서 패배하여 옥쇄(玉碎, 부대전부가 동시 자살)했다. 특히 싸이판(Saipan)에서의 일본 군 옥쇄사건은 유명하다. 미군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싸이판 섬의 절벽에서 모두 물에 빠져 익사했다.

일본군은 한반도에서 젊은 청년들을 군(軍)으로 차출했고 나이든 남자는 징용(徵用)이나 보국대에 동원했고 젊은 여인들은 성노예로 끌고 갔다.

만주 하얼빈 근처에서는 관동군 이시이부대가 러시아, 중국, 한국 사람들을 납치하여 생체실험(生體實驗)을 했는데 기록에 보면 살아 있는 사람을 마취도 하지 않고 해부하여 필요한 장기를 떼어 냈다. 이것을 저들은 마루따(丸太)라고 했다. 마루따는 ‘통나무 토막’ 을 말한다. 일본은 이런 생체실험을 통해 세균(細菌)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악마 같은 일본군에게 무고히 죽임을 당했던가! 그렇기 때문에 실로 많은 기독교 성도들이 우리나라의 해방을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나라를 살려 주셨다. 저에게 목사 안수를 베풀어 주신 이인재 목사님은 신사참배 거부로 평양 감옥에 수감되어 8월 16일에 사형을 집행당하도록 저들이 계획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 바로 전날 일본이 항복하게 하여 이 목사님과 여타 구금되어 있던 옥중 성도들은 석방되어 목숨을 건졌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이렇게 나라가 해방되고 일본은 한반도에서 물러갔다. 그런데 일본이 물러가자 1945년 해방과 함께 9월초에 원산 항구를 통해서 당시 33세의 젊은 김일성(가명, 본명은 金成柱)이 소련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평양에 들어왔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연일 거리로 쏟아 나오던 군중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어느 새 붉은 완장을 찬 공산당 적위대로 변신했고 무서운 공산당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2. 폭풍전야(暴風前夜)

1946년 3월 5일에는 토지개혁(土地改革)이라는 명분으로 지주들로부터 땅을 빼앗아 농민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자본가, 지주, 소시민, 지식인, 종교인들은 모조리 체포되어 감옥에 보내졌거나 아니면 숙청(肅淸, 반대자를 없애버림)되었다. 숙청이란 말은 죽인다는 말이다. 강량욱은 김일성의 외삼촌인데 그가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이끌면서 얼마나 많은 목사 장로를 죽였던가! 내가 살던 마을의 그 작은 시골 교회 목사님도 어느 날 밤 자정이 좀 지난 시각에 체포되어 끌려간 후 내가 피난 나올 때까지 소식이 없었으니 아마도 숙청당했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공산당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쥐 잡듯 잡아 죽였다. 실로 많은 기독교 성도들이 순교했다. 학교에서 예수 믿는 학생은 늘 교양주임(학생들의 공상사상 주입 교육을 책임지는 교사)에게 매를 맞았고 어떤 때는 내무서(경찰서)로 넘기기도 했다. 내무서로 끌려가면 온갖 고문을 당한다. 대나무를 뾰족하게 깎아서 예리한 대나무로 손가락과 손톱 사이를 찌르면 얼마나 아픈지 상상하는가? 코를 젖은 종이로 막아놓고 입으로 물을 쏟아 부우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는가? 이런 고문을 가했다.

그리고 북한에 진주한 범죄자들로 구성 된 소련군은 미개하여 백성들로부터 많은 금품을 빼앗고 부녀자를 농락하고 집안의 물건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당시를 회고하면 북한에서는 소련군 병사가 자주 나쁜 짓을 많이 하므로 집집마다 서로 비밀리에 종을 매단 줄을 연결하여 소련 병사가 옆집에 들어오면 줄을 흔들어 옆의 집이 피신하도록 했던 일을 기억한다. 저들은 밤낮으로 약탈했다. 무엇이든 눈으로 보면 “다와이(달라)!”하며 강탈했다. 소련군 병사는 야만과 같아서 자동차에서 빵을 베개하고 낮잠을 자기도 했다.

또 북에는 동리마다 인민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백성들의 자유를 유린했고 밀고제(密告制)가 성행하여 학교에서도 학우들을 서로 믿지 못했다. 서로 밀고하기 때문이었다. 밀고하면 그만큼 공산당의 신임을 얻게 되고 학교에서도 교양주임에게 신임을 얻기 때문이다. 나도 밀고를 당해 몇 번이고 내무서(경찰서)에 끌려가서 매를 맞고 죽을 고비를 겪었다. 한국에서 과거 모 대통령 시절 호적제를 폐지한 것도 실상은 북을 모방한 것이다. 북에는 호적이 없다. 모두 말살했다. 호적이 있으면 밀고가 어렵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남한에서는 1945년 9월 6일 미군이 진주하여 핫지(John R. Hodge) 중장의 미군 군정(軍政)이 시작되었다. 그해 12월 미국, 영국, 소련 삼개 국 모스크바삼상회의가 모스크바에서 열려 한국의 신탁통치(信託統治)를 결의했는데 이를 북한에서는 지지했고 남한에서는 반대했다. 1946년 소련 주둔군 사령관 스티코프 중장과 미 군정청 대표 하지 중장이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 공동회담을 여러 번 열었으나 서로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어 아무 성과 없이 끝났다.

해방직후 남한에서는 북한과 달리 혼란이 꼬리를 물었다. 따지고 보면 민주주의가 아직 준비되지 못한 땅에서 민주주의를 지향한 미군의 군정방침 때문이었다. 자유대한에서 공산분자들은 자유를 악용하여 마음껏 준동했다. 박헌영 일파의 남로당이 나라를 어지럽혀 도처에서 파업이 일어나고 테러 사건들이 발생했다. 암살 사건도 빈번했다.

이런 와중에 1945년 10월 9일 미국에서 오래 동안 애국운동을 하던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여 서울 이화장에서 기거했다. 혼란스런 나라의 정세를 보고 이 박사는 미국과 유엔에 호소하여 남북한 동시 선거를 통해서 국회를 만들고 정부를 수립할 뜻을 미국에 제안했다. 미국은 유엔의 협조를 얻었고 유엔에서는 인도 사람 메논(Christina Mennon) 박사를 단장으로 하는 유엔 한국위원단을 서울에 파송하여 본격적으로 남북한 총선거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엔 한국위원단이 총선거를 위해서 입북을 요청했으나 북측의 거절로 할 수 없이 남한에서만 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는데 이때 북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 중심의 인물들이 제주도에서 사실상 반란인 단독정부 수립반대의 데모를 벌여 이를 진압하는 군경과 그 가족이 많은 희생을 당했고 또 데모에 참가했던 무리도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것이 이른바 제주도 4.3반란 사건이다.

이렇게 북한을 제외한 남한 전역에서 드디어 1948년 5월 10일 총선이 실시되어 국회가 조직되고 북한의 대의원들을 위해 국회에 100석은 공석으로 남겨두었다. 1948년 7월 17일 나라의 헌법이 제정되어 오늘도 우리는 7월 17일을 제헌절(制憲節)로 지킨다. 그 후 며칠 지나서 국회의원들은 이승만 박사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드디어 1948년 8월 15일 세계 여러 나라의 사절들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청(지금은 건물이 사라졌음)에서 역사적인 대한민국 정부수립 행사가 거행되었다.

당시 남한을 통치하던 미 군정청 핫지(John R. Hodge 중장, 군정장관) 과 그의 통역 이묘묵(李卯黙, 연희전문 교수, 미국 인디아나대학 졸) 그리고 정부 요인들과 각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뜻 깊은 건국행사가 거행되었다. 북한에서는 이 때만해도 북의 경찰 당국은 전파를 단속하기 전이므로 모두 HLKA 방송국을 통해서 흘러 들어오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행사 실황중계 방송을 들으며 환호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당시는 일본의 JODK 라는 호출부호를 사용하던 경성방송국울 해방 후 민재호, 문제안, 위진록, 이옥경, 호기수, 윤용로 씨 등과 같은 쟁쟁한 아나운서들이 ‘서울 중앙방송국’이라고 이름을 고쳤고 1947년 드디어 HLKA라는 호출 부호를 국제 전신 회의로부터 배당받아서 서울중앙방송은 HLKA, 부산방송국을 HLKB, 기독교 방송을 HKLZ 등으로 불렀다. 그 후 문화방송, 동양방송, 기독교 방송 등 여러 민간방송이 생겨나면서부터 예전 호출번호를 지양하고 KBS로 바꾸었다.
이들 아나운서들 중 위진록, 호기수 씨 등은 한국 전쟁기간 중 일본 도교로 건너가 유엔군 총사령부의 방송(VUNC, Voice of the United Nations Command)에서 일했고 나는 그 당시 그 기관의 부산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학비를 벌어 고학하며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특기할 것은 6.25사변 소식을 가장 먼저 국민에게 알린 사람은 HLKA에서 숙직하던 위진록 아나운서였다. 북한에서는 위진록 아나운서의 낭낭한 목소리로 이 방송을 들으면서 이제는 통일이 다 된 줄 알았다. 그 때 HLKA 에서는 늘 우리가 북진을 시작하면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압록강 기슭에서 먹는다고 하면 호언장담하고 있었고 공산당에게 날마다 시달리던 사과 빨갱이(빨갱이 인척하는 가짜 빨갱이를 일컫는 말, 반대는 도마도 빨갱이)들은 이 말을 그대로 믿고 있었다.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4개월 전인 1948년 4월 꽃피는 봄에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에 와서 이른바 ‘남북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라는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김구(金九)는 평양에 체재하면서 평양방송을 통해서 연설을 했는데 북한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남한을 비난하는 발언을 쏟아내는 바람에 북한에 거주하던 남한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실망과 분노를 자아내게 한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김일성은 김구(金九)를 열렬히 환영했다.

김일성은 그래서 김구(金九)를 음해하던 벽보들도 하루아침에 철거했다. 어쨌건 이런 불미스런 사건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법질서에 따라 수립되었고 신생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국가로 세계만방이 앞을 다투어 승인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시작이다. 같은 달 유엔에서는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는 대한민국뿐이라고 결의했다.

그러므로 북은 대한민국 땅을 강점하고 있으니 실지(失地)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서 건국 대통령 국부(國父) 이승만 박사는 ‘멸공, 북진, 실지회복’을 목이 터지도록 외쳤던 것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 특히 전교조 교사들은 분명히 알기 바란다. 학생들에게 거짓을 가르쳐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왜 학생들에게 거짓을 가르치는가? 아직도 6.25사변을 목격한 증인들이 살아 있지 않은가?

북한도 같은 해 1948년 9월 9일 나름대로의 국가를 세웠다. 그때까지 남한과 함께 부르던 애국가를 폐지하고 자기들만의 새로운 국가(國歌)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고 그때까지 남한과 함께 사용하던 태극기도 금지하고 새로운 인공기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으며 백성에 대한 감시와 압박이 더 심해 갔다. 나는 우리가 쓰던 대형 태극기를 종이와 보자기에 싸고 또 싸서 남이 볼 수 없는 곳에 소중하게 묻어두고 통일의 그날을 기약하고 집을 나왔는데 그 태극기가 아직도 거기 그대로 있을지 의문이다. 먼 훗날 내가 고향에 가는 날 마음껏 그 태극기를 흔들어 보리라.

북의 김일성은 남한을 기만하기 위하여 소련군을 북에서 철수하도록 종용하여 소련군은 압록강 북편으로 일단 철수하였고 한편 김일성은 군비를 계속 증강해 나갔다. 전쟁준비를 착실하게 진행했다. 상당한 병력과 무기를 확보한 상태였다. 그리고 나서 대한민국 정부에 요청하기를 “외국 군(軍)이 우리나라에 온 것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돕기 위함인데 이제 무장해제도 끝나고 북에서 소련군이 철수했으니 남한에서도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미군도 1949년 철수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미군은 북한의 소련군과 달리 신생 대한민국의 국방을 위한 아무런 무기도 넘겨주지 않은 채 철수 했다.

김일성은 교활하여 그의 전쟁의도를 남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계속 평화공세를 이어 나갔다. 당시 북한에는 조선민주당 당수였던 조만식 장로님이 평양에 억류되어 있었고 남한에는 김삼룡, 이주하 등 두 명의 거물급 남노당원이 억류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교환 교섭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조만식 장로를 남한으로 보내고 대신 김삼룡, 이주하 두 사람을 북으로 보내라는 흥정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제 서로 전쟁은 없고 평화 시대가 오는 것처럼 위장하여 전쟁을 도발하려는 김일성의 의도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공산당 수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한국의 오늘 친북좌파들이 얼마나 평화를 외치는가? 저들이 말하는 평화, 민주주의, 진보는 바로 공산당 식의 적화통일임을 알아야 한다. 노무현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사람 사는 세상’이란 바로 ‘주체사상’ 즉 공산당의 노동자 농민의 세상을 말함이다. 프르레타리아 독재를 말한다. 이런 세상을 구현하려면 소시민, 학자, 지식인, 종교인들은 모두 숙청되어야한다는 것이 공산당의 이론이다. 공산독재 국가 건설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또 공산당의 철학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 공산당의 특징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한번 써 먹은 사람은 그 다음에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모두 숙청해 버린다. 이것은 박헌영이 북에서 숙청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가운데 북위 38도에서는 해방이후 계속해서 피아간에 무력충돌이 일어났지만 대규모의 전면전이 일어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김일성은 비밀리에 남침 전쟁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의 생각은 혼란한 남조선을 3일이면 부산까지 점령하여 8월 15일을 통일 조선의 경축일로 삼겠다는 허망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사람들 편을 들어주셔서 나라의 위기를 모면했다.

3.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南侵)
이렇게 김일성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1950년 2 월 소련에 가서 당시 스탈린의 허락을 받고 중국에 가서는 당시 주석이던 주은래 수상과 중공군 사령관 모택동의 허락을 받았고 또 그때 북으로 간 남로당 의 박헌영의 말한 “북한이 전쟁을 시작하면 남한의 국민들 20만 명이 봉기할 것이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있다.”고 고무한 말을 믿고 김일성은 결국 1950년 6월 25일 그 무서운 비극의 막을 연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알 것은 그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애치슨 장관은 전후(戰後) 미국의 ‘보호평화선’을 설정하면서 한국을 배제한 채 대마도로 경계선을 만들어 필리핀과 연결했다. 또한 주한 무쵸 대사도 북의 남침가능성은 없을 것이라고 국무성에 보고했다. 이것도 북한에게 남침하는 빌미를 주었겠지만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 무렵 전방 부대장들이 교체되고 북한의 평화공세가 수상하다하여 전군에게 비상경계령을 1950년 4월에 내렸다가 6.25사변 무렵 그 경계령을 해제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육군본부 장교구락부에서 장교들이 그 전날 파티를 벌인 것이며 전쟁이 나던 날은 주일이라 모든 군인이 휴가를 나가 농번기에 농사를 도와주었는데 이런 여러 가지 상황을 절효의 기회라고 판단한 북한 공산군이 대한민국으로 일제히 침범해 들어온 것이다. 이처럼 6.25사변은 ‘북침(北侵)’이 아니라 ‘남침(南侵)’이다. 똑바로 알자.

북의 김일성은 해방 후 5년간 단단히 무장했고 남한은 무기도 병력도 미미했다. 미군은 철수 하면서 아무건 무기도 국군에게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월 28일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날 4,000 여 명이 건너던 한강 다리를 폭파하는 바람에 수백 명 피난민이 한강에 익사했다. 유엔에서는 한국동란이 발발하자 6월 26일에 긴급 안보리를 열고 북에게 속히 뒤로 물러가라고 종용했으나 북의 김일성은 응하지 않았고 계속 남진하여 드디어 낙동강까지 진격해 내려갔다.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도시와 마을에서는 동리 공산당 동조자들이 폭도로 변하여 수많은 양민을 체포하여 인민재판(人民裁判)으로 총살, 타살 등이 자행되었고 많은 인사들이 북으로 끌려갔다. 당시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 전신) 교수였던 석학 정인보 교수도 북으로 납치되었고 같은 연희 전문학교 출신 서울 방송국(HLKA)의 인기 아나운서였던 윤용로(尹用老)씨도 북으로 끌려갔다. 북으로 끌러간 학자들은 대부분 이용당하고 나중엔 광산으로 보내져 강제노동 중 사망했다.

8월 15일에는 부산에서 통일조선 경축행사를 갖도록 하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괴군은 사력을 다하여 경상북도 왜관 근처에서 낙동강을 도강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낙동강에서 피아간 무서운 전투가 7월29일부터 거의 한달 동안 계속되었다. 피아간에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때 많은 고등학교 재학생 학도병들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맨 몸으로 적과 싸웠다. 특히 포항에서의 이들 학도병들의 전투는 길이길이 한국전사에 빛날 사건이다. 이들이 포항에서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낙동강 전투가 위태로웠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유엔은 세계 모든 회원국들에게 연락하여 한국전쟁에서 신생 대한민국이 국토를 회복하도록 군대를 파송해 달라는 요지의 전문을 보냈고(유엔 안보리 결의안 84호) 이윽고 Australia, Belgium, Canada, Colombia, Ethiopia, France, Greece, Luxembourg, Netherlands, New Zealand, Philippines, South Africa, Thailand, Turkey, United Kingdom, United States 등 16개국이 지상군을 한국전선에 파병했고 그 외 Sweden, Italy, Norway, Denmark, India 등이 병원선과 의약품을 보냈다.

Allied Forces(유엔군) 사령관에는 당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극동 사령부 사령관이었던 맥아더(Douglas MacArthur, Scotland 출신의 신화적 존재) 원수가 임명되었다. 7월초에 오산에 파견된 미 24사단(일명 스미스부대)은 최초의 인민군과의 교전해서 패배했다. 사단장 딘(Dean) 소장이 적에게 포로가 되는 불상사가 생겼다. 몇 년 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도 포로수용소의 소장이 포로들에게 납치 되었던 사건도 있었다.

이때 맥아더 장군은 이 난국을 타개할 방법으로 인천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지휘하여 낙동강에서 치열한 진투가 벌어질 무렵 1950년 9월 15일 미명(未明)에 군함 280 여척을 동원하여 역사적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여 서울이 1950년 9월 28일에 수복되었고 서울을 탈환한 유엔군과 국군은 북으로 패주하는 인민군을 추적하는 한편 남으로는 낙동강까지 괴뢰군들을 격파하며 진격했다. 낙동강 전투는 승리로 종결되었고 패주하는 인민군은 지리산에 입산하여 은신하게 되니 이때부터 공비토벌작전이라는 새로운 임무가 전투경찰에게 주어졌고 백선엽 장군 휘하의 부대도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비를 사살하고 민가에서 공비에서 시달리던 주민들을 구해 냈고 그 어린이들을 위한 고아원도 세워 주었다.(백선엽 저, ‘군과 나’ 참고)

4. 내가 체험한 6.25 사변(事變)

이렇게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북에서 학교가 휴교라서 집에서 마루에 앉아 영어공부를 하는데 이것을 이웃이 내무서(경찰서) 밀고하여 1950년 7월 어느 날 내무서에 끌려갔다. 며칠을 기다리니 많은 사람이 이런 저런 이유로 끌려와서 감옥은 30명이 훨씬 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우리는 줄을 지어 어디론가 끌려갔다. 밤을 새워 걸었다. 공습이 심하여 낮에는 꼼짝 못하고 밤에만 걸었다. 밤에 비행기가 나타나면 ‘항공!’이란 구령이 떨어졌고 이런 구령이 나면 모두 땅에 엎드렸다. 비행가기 지나면 ‘집합!’ 구령과 함께 여기저기에서 먼지를 털면서 다시 모여 줄을 지어 행진했다. 그 때 나는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몇 시간을 걸었는데 다시 ‘항공!’ 이라는 구령에 모두 땅에 엎드렸다. 얼마 후 모두 모이라는 구호가 있었지만 나는 모이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죽은 듯 엎드려서 저들이 모두 사라지기만 기다렸다.

긴 행렬이 모두 지나갔다. 사람들이 없고 주위는 적막이 깃드니 더욱 무서웠다.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쳤으나 지리를 모르고 워낙 산간지대라서 방향 감각을 알 수 없어서 이리 저리 헤매다가 어느 논두렁에서 피곤에 지쳐 잠들었는데 이상한 소리에 놀라 눈을 떠보니 날이 밝아 해가 떠올랐는데 인민군 병사 두 명이 나에게 총부리를 겨눈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체포되어 근처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 숙직실을 감옥을 사용하는 곳에 수감되어 버렸다. 내가 네 번째 죄수였는 데 날이 갈수록 많은 사람이 잡혀 들어와서 13명이 모두 좁은 숙직실 방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예배를 드리다가 동리 사람의 밀고로 현장에서 발각되어 잡혀 온 청년도 있었다. 정부를 비판하다가 잡혀 온 사람도 있었다.

그곳은 괴뢰군 훈련소였다. 여러 날이 지났다. 매일 인민군 신병들이 훈련을 받고 있었고 우리는 감옥에 수감되어 하루 세끼 주어지는 주먹 수수밥을 얻어먹기 위해 운동장을 가로 질러 식사장소까지 걸어야 했다. 이렇게 감옥에 갇힌 지 두 달가량 지났다. 9월의 어느 날 밤 긴 총대를 멘 인민군 사병 한 사람이 우리 감옥에 와서 내 이름을 불렀다. 나오라는 말에 나가보니 같이 가자고 해서 잠시도 틈을 지 않는 그의 감시를 받으며 산속으로 끌려갔다.

먼데서 인민군 군가가 들려왔고 걸어갈수록 더운 군가 소리는 크게 들려왔다. 그곳에 산비탈 길을 굽이굽이 돌아 목적지에 가보니 많은 군인들이 산에 줄지어 앉아 군가를 부르고 있었는데 인민군 장교 몇 사람이 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달은 휘영청 밝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지 직감할 수 있었다. ‘총살!’이란 단어가 맨 처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곧 군가가 끝나고 무뚝뚝하게 생긴 인민군 장교 한 사람이 내 어깨를 치며 “이 동무요? 반동 간나이!”하고는 나를 노려본다.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앞섰다.

그곳에서 나는 인민재판을 받았다. “미 제국주의자의 말을 공부하던 반동분자인데 동무들 이 동무를 어떻게 할까요?” 그 소리가 끝나자마자 “직결이요! 직결이요! 직결이요!” 앉아서 군가를 부르던 모든 군인들이 저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당장이라도 나를 칠 기세로 큰 소리로 “직결이요!”을 연거푸 외쳐 댔다. 나는 기절할 지경이었다. 직결이란 즉석에서 총살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들은 그 달 밝은 밤에 총살을 집행할 수도 있었는데 군관이 “이 동무는 평양에 가서 처형할 것이요.”라고 하고는 다시 수감하라고 명령했다.

인민재판은 간단했다. 검사만 있고 변호사가 없다. 검사가 말 한 마디 물어보면 그것이 인민재판 종결이다. 어느 경우나 인민재판의 판결은 사형이다. 과연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 서울 시내에서 얼마나 많은 양민이 이런 방법으로 인민재판을 통해서 목숨을 잃었을까!

다시 수감된 나는 그때부터 밤만 되면 나를 태우러 오는 자동차가 오는가 하고 공포심에 가슴이 조렸다. 멀리서 자동차의 불빛이 보이면 혹시나 하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러기를 한 달 1950년 10월 20일에 큰 사건이 생겼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 때 국군의 공수부대가 이 근처에 공수부대를 투하하여 순천을 탈환하는 때였다. 서부전선에서는 백선엽 장군의 제1사단이 평양을 탈환한 때였다. 평양은 10월19일에 탈환했다고 한다.

그 날이 나에게는 사형의 날이었다. 1950년 10월 20일은 아침부터 유엔군 전투기가 수십 대가 날아와서 상공을 비행하며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해대는 바람에 아침도 점심도 모두 먹을 수 없었다. 우리가 감금되어 있던 곳은 모두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 사방에 비명소리 그리고 검은 연기가 자욱하다. 창문에 구멍을 내어 보니 밖은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이다. 병사들이 이리 저리 황급히 뛰어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 완전 무장하고 있었는데 어디론가 이동할 준비를 하는 듯했다.

오후 1시경 인민군 중위가 사병 두 사람을 거느리고 우리 감방에 와서 발로 창문을 걷어차며 두 손을 허리에 대로 “제일 나이 많은 동무가 누구냐?”고 물었고 며칠 전 들어온 나이 40이 넘어 보이는 아저씨가 손을 들자 “동무는 집에 가기요.”하며 석방해 주었다. 나이 어린 나는 나도 집에 갈 수 있는 줄 생각하고 나도 집에 보내 달라고 애원했더니 인민군 장교는 그 무거운 군화로 내 가슴을 힘껏 걷어차는 바람에 나는 저 만치 나가 떨어졌다. 가슴이 몹시 아팠다. 그보다도 공포심이 우리 모두를 엄습했다. 이때부터 나는 가슴을 앓는 병을 갖게 되었다.

장교는 우리를 모두 밖으로 끌어낸 후에 뒷산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우리는 묵묵히 장교와 두 사병을 따라 감옥 뒷산으로 올라갔다. 얼마를 올라가니 공터가 있었다. 멎으라는 말에 모두가 멎었고 줄을 서라고 해서 모두 줄을 섰다. 그러나 무엇이 못 마땅한지 장교는 좀 더 올라가자고 하더니 드디어 산꼭대기 근처에 까지 다다랐다. 거기에 어느 공터에서 우리를 두 줄로 세웠다. 나는 앞줄 오른편에서 두 번째에 서 있었다.

인민군 중위는 “오늘 모두 고향으로 보내주겠다.”고 하더니 “손수건 있는가?”라고 물었다. 누구 하나도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하고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예수쟁이는 천당으로 보내주겠고, 남조선을 좋아 하는 사람은 이승만에게 보내 주겠고, 영어를 좋아하는 동무는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오늘 보내 주겠다.”라고 말하고는 뒤로 물러서더니 갑자기 권총을 꺼내 하늘을 향해 공포를 쏘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앞줄 가장 왼편 즉 내 반대편에 서 있던 스물을 갓 넘긴 젊은이가 “주여!”하면서 앞으로 넘어지는데 가슴에선 붉은 피 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또 한방의 총성이 들리더니 바로 내 옆에 서 있는 분이 앞으로 쓰러졌다. 그 다음은 내 차례였다. 바로 이때 죄수들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모두 뿔뿔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들은 너무 급히 일을 처리하느라고 우리를 결박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방으로 도망했다. 탕, 탕, 탕! 총성은 계속되었다. 나는 너무나 무서웠다. 그래서 내 왼편 10미터 거리에 도랑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리로 재빨리 몸을 굴려 도랑에 들어가서 떨고 있었다.

산에 올라올 때만해도 그런 도랑이 있는 것을 못 보았는데 총살 때 그런 도랑이 기적적으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이어서 지금도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것으로 믿고 감사 한다. 나는 도랑 속에서 어린 시절 유년주일학교 시절 반사(班師)에게서 배웠던 시편 23편 말씀을 외우면서 “하나님, 나를 살려 주시면 일생을 하나님을 위해 몸을 바치겠습니다.”라는 극히 이기적인 기도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총살 집행은 계속되었다. 도랑 속에서 고개를 들어 옆을 보니 산위로 도망가던 죄수를 따라가던 인민군 사병이 뒤에서 그의 머리를 사격하는데 그 죄수는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려졌다. 인민군 장교는 “제일 어린 간나새끼 잡아라!” 라고 소리 지르는데 이것은 분명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달아나는 죄수들을 죽이려고 여기 저기 뛰어 다니는 군인들의 군화소리가 들리는데 내 등에 총알이 박혔다. 허벅지를 꼬집으니 아팠다. 아직 죽지 않은 듯 했다.

나중에 보니 나를 찾던 군인의 군화에 돌이 발에 걸려서 내 등에 떨어진 것인데도 인민군은 나를 못 본 것인지 아니면 보고도 못 본채 한 것인지 쏘지 나를 쏘지 않았다. 분명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인민군 사병들의 눈을 가리어 주셨다고 나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발아래 있는 나를 못 보았을 리 없고 보았다면 나를 쏘지 않았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한다.

너무 놀라고 공포심에 사로 잡혀 나는 기절했다. 총살이 오후 1시경에 시작되었는데 얼마 후 의식을 회복하니 사방은 고요한데 달이 휘영청 중천에 떠 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그러나 도랑을 벗어나기가 너무 불안스러웠다. 어디서 어느 누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좀 더 도랑 속에 있었다. 멀리 산 아래 마을에서는 개 짖는 소리와 아낙네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도 숙청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는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었다. 죽든지 살든지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도랑을 벗어난 것은 달이 기울 무렵이었다. 나는 되도록 높은 곳으로 기어서 올라갔다. 드디어 산정에 이르렀다. 올라가면서 보니 달빛에 피가 뻔쩍 거렸다. 산꼭대기 바위틈에 숨었다. 오른 편 순천시를 보니 어제 까지만 해도 캄캄하게 등화관제가 되던 그 도시에 오늘은 불이 대낮같이 환했다. 유엔군이 입성한 것이었다.

한편 왼편을 보니 산 능선위로 달빛에 실루에트로 인민군 병력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시간이 자나더니 대포며 기관총이며 무슨 화기인지 알 수 있는 포탄들이 서로 오고 갔다. 어떤 포탄은 내 옆에 떨어지기도 했다. 공산군과 유엔군과의 교전 중간에 내가 갇힌 것이었다. 몸을 바위틈에 숨기고 전투가 끝나기만 기다렸다. 두어 시간 서로 포탄이 오고 가더니 잠잠해 졌다. 새벽이 밝았다.

밑으로 어제 총살당하던 곳을 바라보니 여기 저기 흰 옷을 입은 시체들이 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날 하루를 바위틈에 숨어 지냈다. 마침 화전민들이 만들어놓은 무밭이 있어서 무를 뽑아 먹으며 하루를 지냈다. 밤은 항상 무서웠다. 산짐승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인민군 패잔병이나 적위대 대원이 어디서 숨어서 나를 지켜보는 것만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교전이 있은 지 만 하루가 지났다. 산에 오른 지는 사흘 째 되는 날 그날은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가을 날씨였다. 집에 가고 싶었으나 지리를 모르니 어디로 가야하는지 몰랐다. 산 아래 도로를 바라보면서 고향에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태극기를 단 칸 보이 차량 수십 대 지나갔다. 나는 산에 서서 목이 터지도록 만세를 외쳤다. 남한의 군대임을 태극기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오래 만에 보는 태극기였다.

북한에서는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를 폐지했다. 나는 태극기를 땅속에 감추어 두고 태극기를 자유로 흔들어 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만세를 부르고 있는 동안 국군의 칸보이 차량이 모두 지나갔다. 다음엔 푸른 깃발을 단 칸보이 차량이 뒤를 이어 달려왔다. 푸른 깃발은 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유엔기였다.

하루 속이 집에 가야하겠기에 두 손을 들고 산을 뛰어내려오니 미군이었다. 작전상 이동하는 미 군인들의 칸보이 차량이 멎으며 장교가 지프차에서 내리더니 “유 콤뮤니스트?” 라고 총을 겨누며 쏠 시늉을 했다. 나는 집에서 어머니로부터 영어를 배워 두었던 터라서 내 모든 실력을 발휘하여 상황을 설명했다. 미군장교는 거짓말이라고 하며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더니 현장에 가보자고 했다. 우리는 산을 올라 총살 장에 가보았다. 열 한 사람의 시체가 널려 있는 모습을 보고 “유 히어로우!” 라고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차에 태워 내 고향집에 태워주기도 했다. 길을 가면서 전사한 인민군의 시체, 팔다리가 잘라진 부상병의 모습, 아직도 생명이 붙어 있는 듯한 병사의 신음소리, 시신 썩는 냄새로 코를 들 수 없었다.

몇 달 만에 고향에 돌아와 보니 선친께서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동리 다른 유지들과 함께 내무서(북한의 경찰서) 뒤뜰 방공호에 산채로 던져져서 생매장 되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동리 사람 수십 명이 이렇게 희생되었다. 합동 장례식이 끝나자 중공군이 개입하여 유엔군이 후퇴하고 있으니 지금은 작전상 후퇴이므로 3일 후면 돌아 올 테니 속히 귀중품만 가지고 피난 나가라는 국군 가두방송의 권유로 1950년 12월 1일 전에 없이 눈이 많이 내리던 추울 겨울 밤 6시 20분 저녁을 막 먹으려다가 말고 가져 갈 수 있을 만큼의 짐을 꾸려서 나이 어린 여동생 셋과 어머니와 함께 정든 고향을 떠났다.
밤을 새워 걸어서 이튼 날 평양 감흥리에 도착했으며 하루 밤을 지새고 이튼 날 어머니는 우리 네 남매를 데리고 나가서 빈대떡을 사주셨고 오후 2시 북방에서 중공군의 포성이 들려오자 다른 모든 피난민과 함께 대동강으로 나가 어머니와 어린 세 여동생들과 작별했는데 어머니는 내 손목을 잡고 “3일이면 다시 만날 수 있으니 신앙을 지키며 건강하게 있다가 곧 다시 만나자!”라고 하시고는 눈물을 흠치셨다. 그로부터 3일이 아닌 30년, 아니 그 두 배의 세월인 60년 세월이 흘렀건만 보고 싶은 어머니는 만날 길이 없다.

눈물에 젖은 이별은 그리도 슬펐다. 평양 대동강의 모든 다리는 폭파되었고 지금 불타고 있는 능라도 인도교 밖에는 다른 다리가 없어서 그 다리를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개미떼처럼 이리 저리 뜨거운 불타는 곳을 피해 곡예사처럼 겨우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대동강을 건넌 후 강 저편을 보니 강 언덕에는 그 추운 날씨에도 서서 손수건을 흔들어대는 어머니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작별을 고하는 귀여운 여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 참을 서서 열심히 손을 흔들다가 돌아서서 철길을 따라 23일을 걸어 크리스마스 전날에 영등포에 도착했다.

그리고 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여기 저기 쓰레기통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피난민 수송용 화차 통 지붕에 실려서 5일간 걸려서 부산에 도착했다. 군인가족 경찰가족들은 화차 통 안에 탔었고 다른 피난민들은 모두 화차 통 지붕에 앉아 추이를 이겨내며 살기위해 몸부림쳐야했다. 기차는 제멋대로 가다가 멎고 멎는가 하면 또 움직이고 말로만 듣던 부산에 도달하는 데는 일주일가량 걸렸다.

5. 남한과 유엔군의 반격(反擊)

내 이야기는 이만하고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맥아더 장군의 유엔군은 북으로 북진을 계속하여 한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장군)의 선발대는 벌써 압록강 초산에 태극기를 꽂았고 병사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드릴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았다. 동부전선에서는 한국군 제6사단이 북으로 진격해 나갔다. 통일은 시간 문제여서 온 나라는 축제의 분위기였으며 교회들은 일제히 종소리를 울렸다.

이 때 중공군의 개입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나라는 통일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세가 불리해지지 중공군을 불러 드려 1950년 10월 26일에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6.25사변에 개입했고 날씨는 무척 추어서 싸움을 감당할 수 없었다. 중공군은 꽹과리를 치며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인해전술로 기습을 해오는 바람에 유엔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동부전선 함경북도 청진호 근처에서 있었던 일이다. 미 해병 1사단이 중공군 여러 사단에게 완전 포위되어 많은 희생자를 냈고 또 혹독한 추이에 동사자도 많이 생겨났다. 구사일생으로 포위망을 뚫고 흥남 항구로 집결한 유엔군은 LST 편으로 철수 작전을 시작했다. 이때 그 지방 피난민 14,000 명도 배에 승선하려 공산군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미 10군단장은 민간인은 승선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반대하는 것을 그 당시 군단 민사부에서 근무하던 현봉학 박사(의사) 가 간청하여 만 명이 넘은 큰 무리를 화물선과 군함에 승선시켜 거제도로 수송할 수 있었던 사건이다.(이때 문재인도 넘어옴) 현봉학 박사는 과거 필라델피아에서 환자를 돌보다가 나중에 미국 서부 지방으로 이사했다는 말이 있다.

이 때 흥남부두에서 붐비는 피난민들 틈에서 부모 자식 친척이 서로 헤어져 서로 행방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는데 때를 배경으로 흘러나온 노래가 ‘굳세어라, 금순아!’이다. 평양 대동강에서도 눈물겨운 일들이 많았다. 폭격으로 불에 타고 있는 능라도의 인도교를 건너는데 실족하여 물에 익사한 사람들도 여럿이었다. 유난히 추었던 그해 겨울 얼어 죽은 사람들 수두룩했다. 황해도 황주에서 피난길을 걷던 우리가 갑자기 유엔군 공군의 공습을 받아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서른 살을 넘지 못했을 젊은 여인은 사망했고 등 뒤에 업혀 있는 생후 몇 개월 된 어린 애기가 울고 있던 모습은 내 평생 잊지 못한다.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자 유엔군 사령과 맥아더 장군은 만주를 폭격할 것을 투르만 대통령에게 건의했으니 거부당하고 오히려 1951년 4월 투르만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을 파면했다. 이때 만주를 폭격했더라면 한국전은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미대통령은 제3차 대전을 우려해서 맥아더 장군의 청을 거절했다.

유엔군은 드디어 옛 38도선 근처에 까지 후퇴했다. 부대를 재정비한 유엔군은 다시 공격을 개시하여 단장의 능선, 철의 삼각지대, 백마고지 등지에서 중공군과 인민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크리스마스를 미국에서 보내려고 생각했던 미군 병사들은 뜻하지 않은 전세에 실망했다. 1951년 봄 소련의 스탈린이 죽었다. 공산군은 승산이 없음을 알고 휴전을 제의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싸움을 계속하면서 정전회담은 처음에는 개성에서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판문점으로 옮겨 여러 가지 휴전의 절차를 논의하는 동안 한국 사회 에서는 전국에서 ‘휴전결사 반대!’라는 구호를 외치며 학생들이 연일 데모를 했다. 그러나 1953년 7월 27일 아침 10시를 기해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북괴 김일성이 적화통일의 야심으로 시작한 동족상잔은 3년 1개월 2일 만에 종전(終戰)이 아닌 정전(停戰)으로 끝났다.

그러므로 한국전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북한과 남한의 전선 사이에는 4km 거리의 완충지대를 만들어(DMZ, Demilitarized Zone) 휴전이후에도 북괴측은 여러 번 정전협정을 위반한 무력도발을 일으켰다. 가장 최근의 사건은 우리가 다 잘 아는 대로 ‘미루나무 도끼사건’ ‘천안함 폭침사건’ ‘연평도 포격사건’ 등이다.

정전협정은 대한민국의 뜻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전협정서에는 유엔군을 대표하여 클라크(Mark Clark) 중장이 서명했고 중공군을 대표하여 팽덕회가 인민군의 남 일이 각각 서명했다. 한국군 대표 최덕신 장군은 참석은 했지만 서명은 하지 않았다. 포로교환에 있어서는 인민군 포로 중에 북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하는 ‘반공포로’들이 많았는데 포로교환이 있기 전에 이승만 대통령은 이들 반공포로 전원을 1953년 6월 18일에 석방하여 자유대한에 살게 하거나 아니면 본인이 원하는 제3국을 택해서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배려했다. 이에 대해서는 7월 27일 정전협정 60주년 기념일에 쓸 원고를 통해서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결 론

북의 공산당은 지금도 남한을 적화 통일 하려고 온갖 기만전술을 다 동원한다. 민주주의, 진보, 사람 사는 세상, 평화 등 그들이 북의 공산당 본부의 지령을 받고 남한에서 준동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런 말들은 모두 주체사상(主體思想) 즉 “모든 소시민, 지식인, 종교인은 없애 버리고 노동자 농민을 위한 공산독재 정권을 만들겠다.”는 말을 아름답게 포장한 말들임을 명심해야 한다.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를 경험한 사람이 가장 잘 안다. 특히 기독교를 믿는 성도는 절대로 공산주의에 동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서로 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종교를 인정치 않는다. 숙청의 대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북을 드나들면서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목사들은 모두 사이비 목사들이다. 기독교 신자들 잡아 죽이는 정권을 돕는 것은 같은 죄를 범하는 결과가 된다.

사울에게 예수님은 “네가 나를 왜 핍박하느냐?”라고 물었다. 사울을 예수를 핍박한 적이 없다. 예수 믿는 성도를 핍박했다. 예수 믿는 성도를 핍박하는 것이 곧 예수를 핍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핍박하는 자를 도와주는 자는 적그리스도이다.

신생 대한민국이 공산군의 침략을 받아 위태로울 때 나라를 구한 사람은 바로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이며 공산군을 섬멸한 맥아더 장군이며 종횡무진 가는 곳마다 북한 괴뢰군을 격퇴한 백선엽 장군의 덕이다. 나는 군대에 복무하는 동안 육군 모 군단 사령부 정보처에서 백 장군님의 동생 되는 백인엽 장군을 모시고 번역하는 일을 얼마동안 봉사한 적이 있는데 이들 형제는 철저한 반공 애국자 이며 나라를 위해 일생을 바친 분들로 머리가 숙여진다.

물론 16개국 유엔군에게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부산 대연동에 가면 유엔묘지가 있다. 1984년 모국 방문 시 그곳을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특히 유엔 기관에서 일하던 나로서는 더욱 감회가 깊었다. 전 세계에서 많은 청년들이 이름도 모르는 낯선 나라에 와서 우리를 위해서 꽃다운 청춘을 희생하지 않았는가?

모국에서 지금 북을 찬양하고 지지하는 세력들은 공산주의 사회를 모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의 말을 액면 모두 그대로 믿으면 큰일 난다. 그들은 공산세계 건설을 위하여 온갖 거짓말을 서슴치 않는다. 얼마나 많은 북한 동포들이 이들 공산당에게 속아왔는가? 6.25사변으로 인하여 남북한 모두 합하여 민간인 군인 모두 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고향을 잃은 사람의 숫자는 천만 명이 넘는다. 3일이면 돌아올 수 있다던 작전상 임시 후퇴가 63년 세월이 흘러도 아직 고향에 돌아갈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대동강 언덕에서 작별하던 어머님의 모습, 내 귀여운 세 여동생의 모습들이 오늘따라 왜 이리도 보고 싶을까?

‘Freedom Is Not Free’

한국과 미국에 살고 있는 청소년들이여!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63년 전에 북의 김일성이 시작한 6.25사변의 진상이다. 절대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속지 말라. 국군묘지에 잠들어있는 수많은 전몰장병들이 무엇을 위해 하나 뿐인 목숨을 나라위해 바쳤겠는가? 미국 워싱턴 근처에 가면 6.25사변 전쟁 조형물이 서 있는데 미군 병사들이 진격하는 모습이다. 표지판에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글귀가 보인다. 자유란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두 번 다시 공산당에게 다시는 자유를 유린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글쓴 이 / 고 김명도 목사(6.25 사변에 관해서 오늘 이야기한 내용보다 더 상세히 알고 저 하는 분은 백선엽 장군이 쓴 ‘군과 나’라는 책을 꼭 읽어 보시기 바란다.)
한국 6.25사변 개요

1. 선전포고 없이 기습 남침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경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과 소비에트 연방 스탈린의 지지를 받은 북한의 김일성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지원한 전차를 앞세워 38도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하였다.

오전 9시경에는 개성방어선을 격파하고 당일 오전에 동두천과 포천을 함락시켰다. 26일 오후에 의정부를, 27일 정오에는 이미 서울 도봉구의 창동 방어선을 넘었다. 창동 방어선이 뚫린 대한민국 국군은 미아리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조선인민군의 전차에 의해 붕괴되었다.

28일 오전 2시 30분에는 한강에 있던 한강대교가 폭파되었고, 이후 서울에는 공산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7월 14일에는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이 미군에게 넘어갔다. 조선인민군의 공세에 밀린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이전하였다.

1950년 9월 15일에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같은 해 9월 28일에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으며, 10월 19일에는 북한의 인민공화국 수도인 평양까지 다다랐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요동치게 되었으며, 그 와중에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3년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수많은 군인 및 민간인이 사상하였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측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결과로 남·북 간의 적대적 감정이 커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2. 6.25사변에 대한 다양한 호칭

대한민국 정부와 대다수의 언론은 공식적으로 6.25 사변(六二五 事變, 한 나라가 상대국에 선전 포고도 없이 침입하는 일) 혹은 6.25 전쟁(六二五 戰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밖에 한국동란(韓國動亂), 6.25 동란(六二五 動亂)으로도 일컬으며, 약칭으로 ‘육이오’라고도 한다. 그러나 북한은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 또는 조선전쟁(祖國戰爭)으로 부른다. 대한민국에서는 초기부터 80년대까지 6.25사변이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했으나 진보적 지식인 계층이 미국을 비롯한 외국문헌에 등장하는 ‘Korean War’를 직역한 ‘한국 전쟁’으로 번역 보급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어 오늘 날과 같이 각종 학계와 언론 및 출판계에서 ‘한국 정쟁’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조건 ‘한국 전쟁’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이 전쟁을 마치 타국에서 벌어진 전쟁처럼 보이게 하는 문제점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다른 국가(중국)들은 ‘조선 전쟁’, ‘항미원조전쟁’ 등 정치적 입장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 등은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으로 부르기도 한다.

3. 누가 전쟁을 일으켰나?

(1) 김일성이 전쟁의 방아쇠를 당겼다

김일성은 스탈린, 모택동과 “전면공격으로 서울을 점령하고 인민봉기를 유발해 한국 정부를 전복하여 1개월 내에 전쟁을 종결한다.”는 기본전략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군 총참모장 강건과 소련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에프는 5월 말 ‘선제타격작전계획’을 완성하였다. 김일성은 개전 일을 6월 25일로 정하고 6월 18일 ‘정찰명령 1호’를 전선 사령부에 하달하였다. 이는 공격 직전 국군 주력부대의 위치를 파악하고 작전지도를 작성하기 위한 정찰행동 시작을 명령한 내용이었다.

이후 부대기동이 완료된 6월 22일에는 공격 출발지점에서 대기 중이던 각 사단에 공격명령인 ‘전투명령 제1호’가 하달되었다. 북한군은 예정대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일제히 38선을 넘어 남침을 개시하였다. 당시 국군은 24일 비상경계령이 해제되면서 많은 장병들이 휴가를 나간 상태였다.

한편 김일성은 내각비상회의를 개최해 당 간부들에게 남한이 무력침공을 개시했다고 둘러댔으나 당시 남북한의 정황 및 북한군 남침명령 관련 문서들은 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 북한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사전에 치밀한 남침 준비를 했다

김일성은 소련에 무력남침을 요청하여 스탈린의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이에 더해 모택동의 지원 약속까지 받아냈다. 여기서 명확하게 정리할 것은 전쟁이 김일성의 주도로, 김일성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소련의 지원을 받았던 북한은 모든 전력에서 남한 군을 압도했다. 특히 북한은 우리 쪽에 단 한 대도 없던 최신 전차를 242대나 보유했고 항공기도 우리의 10배나 갖추었다. 더욱이 6.25사변 전에도 북한이 보낸 공비의 출몰과 38선에서의 잦은 도발로 인해 상황은 어려웠다.

특히 개성 서북쪽의 송악산 전투가 두드러지는데 당시 빼앗긴 우리 진지를 되찾기 위해 서부덕 상사를 포함한 10명이 특공대로 나섰다. 이들은 포탄과 수류탄을 안고 북측의 기관총 진지에 뛰어들어 격파한 영웅들이다. 그러나 준비가 전혀 없었던 남한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3) 북한에 비해 남한은 무방비상태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인민군은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왔다.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대한민국 국군은 인민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이전부터 38선 부근에서의 소규모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많이 놀라지 않았으나, 잠시 뒤 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로 복귀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무슨 일인지 알 길은 없었다.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북한 인민군이 침공해 왔다는 소식만 간단히 전하고 “장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리 원대복귀 하라.”는 공지방송만 반복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로 서울시민은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방송을 통해, 서울 시민들이 서울 안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독려한 반면 그 자신은 방송 진행 중에 각료들과 함께 6월 27일 새벽 2시 서울 시민들을 버리고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정부는 적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

서울 시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북한 인민군이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오자 그 때서야 서울 시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시민 144만6천여 명 가운데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서울을 빠져나간 사람은 40만 명이었다. 그 가운데 80%가 월남 동포였고 나머지 20%인 8만 명이 정부고관, 우익정객, 군인과 경찰의 가족, 자유주의자들로 추정된다.(*) 출처 / 한국 전쟁역사실 홈 페이지

4. 6.25사변 관련 각종 통계

 

1950.6.25. ~ 1953.7.27. 6.25사변이 우리에게 남긴 것
1950.6.25. ~ 1953.7.27. 6.25사변이 우리에게 남긴 것

(1) 각국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단위 / 명)

– 한국 : 사망 570947, 부상 950073, 실종 460428(합 약 2백만 명)
– 미국 : 사망 54246, 부상 103248, 실종 8177(총 약 16만6천 명)
– 호주 : 사망 339, 부상 1216, 실종 39
– 벨기에 : 사망 107, 부상 345, 실종 5
– 캐나다 : 사망 291, 부상 1072, 실종 21
– 콜롬비아 : 사망 140, 부상 536, 실종 0
– 에티오피아 : 사망 120, 부상 536, 실종 0
– 네덜란드 : 사망 120, 부상 645, 실종 4
– 뉴질랜드 : 사망 42, 부상 81, 실종 0
– 노르웨이 : 사망 2, 부상 0, 실종 0
– 필리핀 : 사망 92, 부상 299, 실종 57
– 남아프리카 공화국 : 사망 20, 부상 0, 실종 16
– 태국 : 사망 114, 부상 794, 실종 5
– 터키 : 사망 721, 부상 1475, 실종 175
– 영국 : 사망 1109, 부상 3497, 실종 1263

(2) 각국 군인 사상자

– 한국군 : 사망 14만9005명, 부상 71만7083명,
실종 13만2256명, 포로 9634명
– 유엔군 : 사망 5만7615명(5만4246명) ( )안은 미국군
부상 11만5312명(10만3284명)
실종 2232명(739명), 포로 6267명(4853명)
– 북한군 : 사망 29만4000명, 부상 22만6000명,
실종 자료 없음, 포로 11만3000명
– 중공군 : 사망 18만4000명, 부상 71만6000명
실종 자료 없음, 포로 3만1000명

(3) 민간인 사상자

– 한국 : 사망 24만4663명, 피 학살 12만8936명
부상 22만9625명, 북한으로 납치된 자 8만4532명
행방불명자 30만3212명
– 북한 : 사망 40만6000명, 피 학살자 자료 없음,
부상 159만4000명, 행방불명자 68만 명
한국으로 납치된 자 자료 없음

(4) 남한 재산피해

– 공공단체 시설 : 542 공공건물 파괴
– 학교 : 33015 학교 건물 파괴
– 교회, 사찰 : 5236개 교회당, 사찰 파괴
– 사회단체 시설 : 171개 건물 파괴
– 병원 : 940개 병원 건물 파괴
– 주택 : 52만4000동 파괴 (*)

편집 / 월간 개혁신앙 정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