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혼과 한국교회의 과제

동성혼과 한국교회의 과제

올해(2015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의 동성혼(同性婚) 합법화 판결 이후 국내에서도 지난 수년간 계속되었던 동성애 논란의 초점이 동성혼 합법화 이슈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성연합을 법적 결혼으로 인정할지 여부는 이해 당사자 간의 사적 권익 차원을 넘어 사회의 근간 및 국가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더욱이 동성혼은 남녀 간의 혼인(婚姻) 제도를 제정하시고 명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도전일 것입니다.

동성혼의 이러한 본질적 심각성을 인식하면서, 한동대학교와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가 공동으로 ‘동성혼과 한국교회의 과제’라는 주제로 포럼을 개최합니다. 기독학술인은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 사회와 국가의 중차대한 사안에 관한 공적 논의에 적극 참여하면서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와 인애의 도구가 되어야 할 책무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또한 그간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던 교계의 반(反) 동성애 운동을 성찰하며 동성혼에 대한 학술적 깊이와 실천적 전략을 아우르는 대응방법론을 강구하고자 합니다. 이번 포럼을 시작으로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지속적 협력과 사역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무리로서의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감당해야 할 소명을 궁구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이번 포럼은 동성혼 대책에 필요한 법률, 심리, 미디어, 과학 분야 등 전문분야 중심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14일 오전에는 관련 전문가들이 모이는 Core Group 토의가 진행되며, 오후에는 논문발표 및 전체 포럼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오후 논문발표 및 전체포럼에서 일반인과 학생들의 참여를 적극 초대합니다. 부디 참여해 주셔서 좋은 의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2015. 11. 14.
한동대학교 학문과신앙연구소 소장 최용준 교수,
기독교학문연구회 회장 유재봉 교수,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실행위원장 김태황 교수

주제 : 동성혼과 한국교회의 과제
일시 : 2015년 11월 14일(토) 오후 1시
장소 : 한동대학교 오디토리움
주관 : 한동대학교 학문과신앙연구소,
기독교학문연구회,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논문 발표자 및 논문제목

390101
동성혼과 한국교회의 과제(1)
구약의 동성애

1. 서 언

구약에서 동성애와 관련된 본문은 세 가지다. 두 개는 소돔과 기브아에서 일어나 역사적 사건이고 하나는 동성애를 금지하는 율법이다. 또 다른 경우는 동성애를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창조질서와 결혼제도와 관련된 본문에서 동성애에 관한 교훈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동성애의 모델로서 제시된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도 ‘구약의 동성애’란 주제에 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여기에 제시된 본문을 주석하면서 구약이 동성애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1)

2. 본 론

(1) 창조 질서와 혼인

– 인간 창조

인간창조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과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 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

인간창조에 대한 언급에서 복으로 주어진 첫 번째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것이다. 이 명령이 성립하려면 결혼은 남녀 간의 결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생육과 번식 그리고 충만이라는 조건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항구적일 때만 가능하다. 즉 하나님의 명령은 최초의 인간 또는 태고적 시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 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조항이라는 말이다.
또한 소위 ‘문화적 사명’으로 알려진 인간의 청지기적 사명도 좁게는 남녀가 함께 이루는 가정, 넓게는 사회를 통해서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애는 이 사명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문화명령은 처음부터 이성간의 결혼에 초점을 두고 있다.

– 혼인의 원칙

창조 시에 주어진 문화명령은 이성간의 결혼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성경은 결혼에 대 한 지침을 별도로 언급하고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4)

이 구절은 성경에 최초로 언급된 결혼에 관한 언급 이지만 첫 결혼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모든 결혼에 적용되어야 할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 다. 당시에는 아담과 하와밖에 없었기 때문에 주어진 결혼원칙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 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이 본문을 인용하시면서 이혼을 금하셨기 때문이다.(마 19:5,6)

이 원칙은 세 가지를 명령하고 있다.(미완료와 완료형 와우 계속 법): 1) 부모를 떠나 서 독립하는 것, 2) 아내와 합하는 것, 3)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그의 아내와 합할 지니라.”라는 표현이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하나님이 남녀를 창조하신 원리를 따라 결혼하는 것이다. 이 남녀 간의 결혼을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누리도록 하셨다. 본문은 ‘아내와 합하라’고 했지 ‘아내의 역할을 맡은 사람’과 합하라고 하지 않았다. 즉 결혼은 남자끼리, 여자끼리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결합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역행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결혼과 가정을 통해서 주시려는 복을 거부하는 것이다.

결혼을 통한 하나님의 복은 남녀 간의 결혼에서 보장되는 것이지 동성 간의 결합에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가 될 지니라.”란 말은 부부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결합을 의미한다. 이것은 서로 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지만 항상 피차간의 신뢰와 헌신 을 바탕으로 한다.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이성간의 결혼에 해당하는 것이지 동성 간의 결혼은 신체 기능상 맞지 않다.

하나님은 남녀의 창조를 통하여 결혼제도를 허락하셨다. 그 결혼은 남녀 간에 성립되고, 결혼을 통하여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여 문화적인 복을 누리는 출발점이다.

(2) 소돔의 죄

소돔의 죄와 관련해서 문제가 되는 본문은 창세기 19:5절이다: “(소돔 사람들이)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 을 상관하리라.” 이 본문의 문맥은 창세기 18장에 나타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에서 시작 된다. 이 본문의 사건은 그 연장선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소돔의 죄를 확인하기 위해서 온 현장에서 일어난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소돔 사람들의 죄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들의 행동의 의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 언어와 문맥적 고찰(동사 yāḏa‘의 의미)

이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히브리어 동사 yāḏa‘(야다)는 기본적으로 ‘알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 ‘성관계를 가지다’란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이런 용법은 히브리어의 고유한 특징은 아니다. 다른 셈어에서도 ‘알다’라는 동사가 성적인 의미를 포함한다. 빈도수로 말하자면 히브리어 동사 yāḏa‘는 구약에 구백 회가 넘게 쓰였지만 그 중에 단지 열 번 좀 넘게 성적인 의미로 쓰였다.(창 4:1, 17, 25; 38:26; 민 31:17, 18, 35; 삿 11:39; 19:25; 21:11; 삼상 1:19; 왕상 1:4)

언어의 의미를 규정할 때 종종 빈도수가 의미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그 단어가 몇 번 사용되었는가보다는 오히려 그 단어가 특정한 문맥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맥에 의하며 5절에서 소돔사람들의 행동의 의도를 알려주는 동사 yāḏa‘는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인 ‘알다’로 보기는 어렵다. 즉 낯선 사람의 신분을 알아보기 위해서 그렇게 무례한 행동을 한 것으로 볼 수 없다.(4절) 우선 롯의 반응을 보면 그가 간청하면서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고 했다.(7절) 이것은 단순히 ‘무례하게 행하지 말라’ 혹은 ‘예의를 갖추어라’는 것이 아니라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지 말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악하게 행하다’(rā’a’)란 말은 많은 경우 선에 대한 반대되는 도덕적 개념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동사: 창 38:10; 삼하 11:27; 사 59:15, 명사: 신 28:20; 시 28:4; 사 1:16; 렘 4:4; 21:12; 23:2, 22; 25:5; 26:3; 44:22, 호 9:15)

만일 소돔 사람들의 행동의 의도가 롯의 손님의 신분확인을 하려는 상황에서 롯이 그것을 단순히 예의에 어긋난 무례한 일로 생각하고 만류했다면 그것을 악행으로 단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롯이 수세에 있는 상황에서 그는 더욱 공손하게 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롯의 이런 반응은 그 상황이 얼마나 긴박하고 심각했는가를 암시하고 또 소돔 사람들이 악한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다음으로 5절의 동사 yāḏa‘는 8절의 yāḏa‘ 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남자를 모르는 두 딸’이란 말은 ‘남자와 성적인 경험이 없는 딸’이란 말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같은 상황에서 사용된 단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 말은 ‘동침하다’란 뜻으로 자주 쓰이는 동사 šāḵaḇ(사캅)을 쓰지 않아도 문맥상 성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yāḏa‘는 šāḵaḇ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소돔 사람들이 šāḵaḇ을 쓰지 않고 yāḏa‘를 쓴 이유는 그들이 비정상적인 성관계를 요구하는데서 완곡한 표현이 더 적절한 것 같다.

– 사건의 정황

이 사건은 창세기 18:20,21에서 제기된 소돔과 고모라의 부르짖음에 대한 조사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부르짖음이 너무아 크고 그들의 죄가 매우 중하다고 말씀 하셨다. 이 부르짖음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일어난 불의에 의해서 고통 받는 희생자들의 부르짖음 이었을 것이다.(cf. 시 9:13; 욥 34:28; 사 5:7, 등)

390102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에 대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천사들을 소돔에 보내셨다. 사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소돔의 죄를 그런 식으로 조사하지 않아도 다 아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죄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또 이런 사건이 발생한 것과 그것이 기록된 것은 자기 백성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소돔에서 일어난 사건은 소돔의 전형적인 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천사가 저녁에 소돔을 방문했을 때 롯이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영접했다. 그 시간은 나그네에게 위험이 시작된다는 경고가 된다. 그런데 그때 롯이 왜 성문에 앉았는지는 알 수 없다. 고대 근동에서 성문은 시민들이 모이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 거기에 모여 공동체의 문제를 논의하고, 상거래도 하고, 소문도 퍼뜨리고, 하고 싶은 말을 하기도 했다.(창 23:10,18; 신 16:18; 22:19; 룻 4:1,11; 삼하 19:8; 왕상 22:10; 암 5:12,15)

그는 한때 장막에 살았던 자로서(창 13:12) 소돔의 집에 거할 때도 유목사회의 전통을 지키며 살았다. 롯은 그 성을 방문한 두 사람이 천사라는 것을 모르고 단지 나그네로 생각했을 것이다. 특별히 본문은 롯의 정중하고도 사려 깊은 환대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1절에서 구푸려서 자신을 낮추는 것과 2절에서 “내 주여… 당신의 종의 집으로” 란 표현은 겸손한 언행을 나타낸다. 그들에게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란 요청은 우선 시원하게 일하기 좋은 시간에 여행하라는 뜻도 되겠지만 문제가 많은 소돔사람들이 알아채기 전에 떠나라는 말도 될 것이다. 어떤 의미이든 그들에 대한 각별한 배려가 담긴 말이다.

천사들은 그 호의에 대해서 단호하게 “아니다. 우리는 노천 광장에서 유숙할 것이다.”(19:2)라고 대답한다. 거기에 대해 롯도 강경하게 그들이 자기 집에 유숙할 것을 강요하자 그들이 그 집에 들어가서 빨리 만들 수 있는 무교병(출 12:8; 23:15)으로 식사를 했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롯의 환대는 나그네를 접대하고 약자를 돌아보는 것이 생명처럼 중요한 유목 사회와 이스라엘 사회에서 환대에 대한 모범이 되었다.

롯의 집에서 천사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돔 사람들이 낯선 사람들의 방문을 알고서 “소돔성의 소년부터 노년까지에 이르는 모든 사람들이 사방에서 와서 그 집을 에워쌌다.”고 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라는 것은 과장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4절의 표현은 그들의 관습에서 나온 일치된 행동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롯에게 물었다: “그들 이 어디 있느냐?” 이미 알고 있 기 때문에 답변도 필요치 않았 다. 이이서 “그들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고 했 다. 그들의 요구는 정말 나그네 의 환대를 침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평가로 끝날 수는 없다. 이 말의 의도가 성적 인 것과 관련될 가능성을 보여주 는 것은 롯의 반응으로 나타는 행동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손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딸을 내어주겠다고 제의하면서 “너희 눈에 좋을 대로 행하라.”(8절)고 했다. 이것은 소돔 사람들이 무엇을 요구했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롯은 자신의 딸들을 가리켜서 ‘남자를 모르는 두 딸’(8절)이라고 표현했다. 왜 하필이면 그렇게 말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손님들의 신분을 확인하러 왔는데 그들에게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딸을 내어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물론 천사들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인하여 그들의 의도는 성사되지 않았고 롯과 그의 딸들도 보호를 받았다.

본문 상황전개를 볼 때 천사를 환대한 롯의 태도와 천사를 공격하려했던 소돔사람들 간의 태도는 명백한 대조를 이룬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의 초점이 롯처럼 선행을 행치 않은 소돔의 죄가 증명이 되었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고 보기 어렵다. 그들은 이 본문에 나타난 사건에서 아무 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그들의 의도는 그들의 일상화된 죄를 말해주는 것으로서 그것이 심판의 대상임이 증명되었다. 그래서 본문이 말하는 그들 의 죄는 동성관계의 성폭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3) 동성애 금지법

레위기의 동성애 금지법은 두 가지다.(18:22; 20:13) 이 둘은 같은 내용이지만 형태상 차이가 있다. 이 두 금지법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레위기 18:22 – we’ ęt-zāḵār lō tiškaḇ miškeḇē ‘iššā tō` ēḇā hī (여자와 눕듯이 남자와 눕지 말라. 이것은 가증스럽다.)

레위기 20:13 – we’ īš ‘ašęr yiškaḇ’ ęt-zāḵār miškeḇē ‘iššā tō`ēḇā `āśū š enēhęm mōṯ yūmāṯū demēhęm bām.
(남자가 여인과 눕듯이 남자와 눕는 경우는 그 둘은 가증한 일을 행했으니 그 둘이 반드시 죽게 하라. 그들의 피가 자신에
게 있을 것이다.)

– 금지 조항

당위 법 형식으로 제시된 레위기 18:22은 금지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문장은 특별히 ‘남자와 더불어’를 앞에 배치시켜서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일반 동사구문은 동사, 주어, 목적어 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남자에 해당하는 단어 zāḵār(자카르)는 일반적으로 남자와 사람 그리고 남편을 동시에 가리킬 수 있는 ’īš(이쉬)와 다르다. 또 사람을 가리키는 ‘āḏām(아담)과도 다르다. 이것은 여성과는 정확하게 대조되는 남성을 의미한다. 이 문장에서 강조된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함께 지음 받은 여성의 파트너이다.(창 1:27)

그래서 이 zāḵār란 단어로써 이 법이 의도하는 것은 그 대상이 어떤 상태이든지 남자라면 그와 가지는 성행위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특정한 남자의 범주를 따로 제시하거나 나열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모든 종류의 동성애 관행에 대한 구약의 정죄는 고대 근동에서 유일한 것이었다.

남성이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레위기 20장의 조건법에서는 ’īš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īš와 zāḵār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성인 남자는 어떤 연령의 남자와도 성관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īš는 그냥 부정대명사로 ‘~하는 자마다’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이 문장의 본동사는 부정어와 함께 미완료로 쓰였다.(tiškaḇ) 이것은 부정어와 함께 절대금지법으로 쓰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대하고 쓰는 말이다. 동사 šāḵaḇ은 기본적으로 ‘눕다’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치사 ’ęt와 함께 ‘성관계를 갖다’란 의미로 쓰인다. 이 단어는 야곱의 딸 디나가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창 34:2), 그리고 다말이 암놈에게 강간을 당할 때(삼하 13:14) 쓰였다.

그래서 성관계와 관련해서 사용되는 yāḏa`(알다)와 동의어로 쓰이는 말이다.(창 19:5:8) 우리말로 ‘동침하다’ 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동사가 zāḵār와 함께 쓰이면 좀 더 구체적으로 ‘남자와 (항문)성교를 하다’로 번역된다. 이 금지명령이 단수로 쓰인 것은 수신자인 이스라엘 모든 남자를 하나의 공동체로 간주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언약을 준수하면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야 했다.

다음으로 종속문처럼 이어서 나오는 miškeḇē ‘iššā란 표현은 좀 애매하다. 문자적으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여자의 눕는 곳’을 의미한다. 이 문자적 의미는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진 견해다. 그래서 이것은 부부관계에서 남성의 위치가 여성의 자세와 같이 수용적인 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율로 여겼다. 그러나 miškeḇē가 명사로서 단순히 침상을 의미하지만 원래 동사 šāḵaḇ의 의미를 상실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명사의 속격관계가 아니라 ‘~와 동침하다’는 관용어로 쓰인다.

예를 들어 ‘남자와 성관계를 갖다’는 miškeḇē šāḵaḇ라고 표현했다.(민 31:17, 35; 삿 21:11) 이 구문을 그대로 miškeḇē ‘iššā ā의 번역에 적용하면 이 표현은 여자와 동침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여자와 성관계를 갖는 것을 남자와 갖지 말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 명령은 동성 간의 성관계에서 어떤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 간의 성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다.

– 금지 이유

동성 간의 성관계를 금할 것을 명령한 즉시 그 이유가 뒤따른다. 그 이유는 ‘그 행위가 가증하다’(tō` ēḇā hī)는 것이다. 히브리어 tō` ēbā는 기본적으로 ‘아주 싫다’는 의미를 지닌 ‘혐오’를 뜻한다.(detestable, abhorrence, abomination, loathness) 동성애는 하나님께 가증스럽다. 이 tō`ēbā 라는 단어를 잘 이해하는 것이 동성애 논쟁에 매우 중요하다.

친 동성애자들은 이 용어가 주로 정결법과 관련되기 때문에 도덕적 규범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 그들은 ‘가증하다’는 말이 강간이나 도적질과 같은 본래의 악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을 위한 의식적 정결이나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을 의미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명령이 현대의 동성애와 무관하다고 본다.

사실 이 단어는 폭 넓게 쓰였다. 성경은 이 용어를 제의적 정결뿐만 아니라 관습에도 적용한다. 애굽 사람들은 목자들도 싫어하고(창 46:34) 이스라엘 사람과 식사하는 것(창 43:32)도 가증스럽게 여겼다. 또한 tō` ēḇā가 무질서와 혼동과 섞이는 것이 부정한 것으로 보고 이것을 바로 잡는 것이 금지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즉 부정한 동물을 먹는 것(레 11), 문둥병(레 13), 설정(레 15), 근친상간(레 18:6-18), 월경 중 성관계(레 18:19), 몰렉에게 자녀를 바치는 것(레 18:20), 다른 종류의 가축을 교배시키는 것, 씨를 섞어 뿌리고, 옷감을 짤 때 실을 섞어 짜는 것(레 19:19) 등 모두 부정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중에는 신명기에도 우상의 형상(7:25), 창기의 돈을 하나님의 전에 바치는 것(23:19), 흠이 있는 동물을 바치는 것(17:1), 부정한 음식(14:3) 등이 가증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부정하다고 해서 죄의 내용이나 경중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즉 일상생활의 부정보다 음행과 근친상간과 같은 도덕적인 부정이 더 심각하고, 우상숭배의 부정은 가장 심각한 것이다. 그런데 레위기에서는 이런 조항에 대해서 한 번도 tō’ ēbā란 용어를 직접 적용시킨 적이 없다. 오히려 다른 곳에는 tō` ēḇā가 도덕적 악행에 적용되는 경우도 많다.

특별히 잠언에 20번 쓰인 tō` ēḇā는 모두 ‘가증하다’ 혹은 ‘미워하다’로 번역되어 윤리적, 도덕적 죄나 그 동기와 관련되어있다: 사악한 자(3:32: 15:8; 15:9, 26; 21:27), 부정직성(6:16-19; 8:7; 12:22; 17:15; 26:25-28; 29:27), 사기(11:1 20:10, 23), 사악한 마음(11:20), 악행(13:19; 16:12), 교만(16:5), 비웃음(24:9), 불법(28:9) 등이다.

또한 선지서에도 많은 경우 tō’ ēbā가 우상숭배와 관련되었지만 윤리적인 것과도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예레미야는 악과 죄의 대가의 원인 중에 가증한 것을 들고 있다: “내가 위선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 그들이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며 그들의 가증한 것으로 내 산업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니라.”(렘 16:18) 에스겔도 이 단어로써 윤리적인 죄를 지적 했다: “혹은 그 이웃의 아내와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혹은 그 며느리를 더럽혀 음행 하였으며, 네 가운데 혹은 그 자매 곧 아비의 딸과 구합하였으며…”(겔 22:11)

흥미로운 것은 에스겔이 tō’ ēbā zimmā(음란, 악행)를 나란히 쓴 것이다: “네 음란과 네 가증한 일을 네가 담당하였느니라.”(겔 16:58) 여기서는 음란한 행위와 가증한 행위를 동의어로 쓰였다. 이것은 근친상간에 대한 레위기의 금지법에도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너는 여인과 그 여인의 딸의 하체를 아울러 범치 말며 또 그 여인의 손녀나 외손녀를 아울러 취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그들은 그의 골육지친이니 이는 악행(zimmā)이니라.”(레 18:17)

이것은 동성애에 대한 평가와 같은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 동의어 관계는 ’가증하다‘란 말이 레위기에서 윤리적으로 쓰인다는 것을 근거가 될 수 있다. tō’ ēbā가 도덕적 죄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 구약의 헬라어 번역인 칠십인 역(LXX)에도 나타난다. 칠십인 역 번역가들은 하나의 히브리어 단어를 문맥과 내용에 따라서 모두 네 가지로 번역했다: akathartos(부정), asebeia(불경건), bdelygma(가증한 것), anomia(불법) 그 중에서도 가장 빈도수 높은 것은 바로 bdelygma(68번)이고, 다음으로 anomia(28번)이다.

그렇지만 이 둘은 서로 대조적인 것이 아니다. 제의적인 것에도 anomia로 번역했기 때 문이다.(겔 8:6) 다시 말해서 칠십인 역이 레위기의 동성애 금지법의 이유로 제시된 tō` ēḇā를 anomia 로 번역하지 않고 bdelygma로 번역했다고 해서 그것을 도덕적으로 불법이 아닌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tō` ēḇā는 원래 그 공동체의 기준에 근거해서 위험스러워 보이고 또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가리켰다. 이 개념은 먼저 제의(祭儀)에 적용되고 다음으로 법률적이고 윤리적인 것에도 적용되었다. 종교적인 것은 윤리의 근거와 동기가 된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이 두 영역이 동시에 포함된다. 레위기는 이 둘을 크게 구분하지 않는다. 도덕적인 죄는 곧 종교적 죄가 되기 때문이다. 레위기 18장에 언급된 내용은 ‘더럽히는 것’과 ‘악’(`āw ōn)과 ‘가증한 것’을 같은 차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레 18:25,26)

그리고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tō` ēḇā라는 단어는 레위기에서는 오직 동성애를 금지하는 조항에만 쓰였고(레 18:22; 20:13) 또 그 문맥에서 비정상적인 성관계(레 18:26,27,29,30)에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후자는 전체를 요약하는 성격이 있다. 그래서 이 본문은 동성애 윤리와는 상관없는 정결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견해이다. 이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씨의 손실을 금지하는 것이라는 것도 근거가 약하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한 근친상간은 자녀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거룩한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는 레위기의 법이 언약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 가족관계와 관련해서 주어졌다는 것은 십계명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동성애가 그 백성과의 언약관계를 침해하는 요소로 규정하고 금하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 같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했다. 이것은 단순히 이교도와 구분 짓는 기준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거룩이란 말은 구분이나 격리를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속성과 관련된 것이다. 동성애는 가증스런 것이기 때문이 이스라엘은 이 규정을 지켜야 했다.

– 심판 규정

동성애법을 위반하는 자에게 심판이 뒤따른다. 레위기 18:22에는 그 조항에 대해 한정 된 심판은 없고 그와 관련된 죄에 대해서 같은 심판이 주어졌다. 그것은 ‘백성에게서 끊쳐지는 것’이다: “무릇 이 가증한 일을 하나라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레 18:29) ‘이 가증한 일’이란 앞에서 나열한 금지법을 종합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그 중 월경 시 성관계를 갖는 것(레 18:19)을 제외하고는 다 도덕적 죄와 관련된다. 이 금지법 가운데 어떤 것도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 주어졌다.
‘백성에게서 끊어지는 것(karet)’은 레위기 7:20에 처음 나타나는데 이스라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 법은 고대사회에서는 범법자와 그 자손을 그 나라에서 제거함으로써 소멸을 위한 신의 조건적 저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것은 이런 자연적인 이유보다 훨씬 더 엄중한 데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범법자는 하나님과의 언약이 파기됨으로써 구원이 위태롭게 된다. 이것은 결코 작은 벌이 아니다. 아마도 죄인들은 대(大) 속죄일에 용서 받을 기회를 얻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시행하는 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여기에 대해서 랍비들의 전통은 개인적으로 이 율법을 범할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시행하신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달린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영역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단적으로 그 죄를 범할 때는 이것이 땅을 더럽힌 행위이기 때문에 ‘땅이 그 들을 토해낸다.’(레 18:28)고 표현한다.

이것은 가나안인의 축출(민 33)과 나중에 이스라엘이 쫓겨나는 것(레 26)을 연상케 한다. 가나안 인들의 경우는 이 모든 가증한 죄를 범한 전과가 있다는 것을 경고로서 알려준다.(레 18:27) 이 가운데 동성애와 관련해서 생각하도록 하는 것은 소돔의 죄가 될 것이다. 그들이 그 죄로 말미암아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를 기억해야 했다.

한편 동성애에 대한 심판으로 레위기의 다른 본문은 사형을 명하고 있다.(레 20:13) 이것은 동성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일깨워 준다. 사형 방법은 아마도 돌로 쳐 죽이는 방식일 것이다.(레 20:27) 레위기의 법은 고대 근동의 다른 법보다 더 엄격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적, 육적 생명이 다 달려있기 때문이다.

(4)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

친(親) 동성애자들은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동성애(同性愛) 관계라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이를 주장하는 학자 들이 근거로 제시하는 본문을 정당하게 주석하면서 그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했다.(삼상 18:1,3; 20:17)

본문은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개역개정, 18:1)고 했다. 여기서 ‘사랑하다’(’āhaḇ)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사랑하다’를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문맥에 따라서 그렇게 볼 수 있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다윗과 히람의 관계를 표현할 때 쓰인 ‘사랑’은 정치적 언약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통하는 것을 두고 그것을 정치적인 음모로 해석할 수 없다면 그 사랑의 의미도 정치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문맥이 다르다. 이 본문에서는 감정적인 측면이 우선하고 만일 정치적인 면이 있다면 그것은 부차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 될 것이다.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에 감정적인 요소가 앞선다고 인정할 때 호너와 같은 학자들이 그 두 사람이 서로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 사랑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히브리어 ’āhaḇ은 단순히 남녀 간의 성적인 사랑을 나타내기 보다는 더 넓은 개념을 가졌고 그 용례도 다양하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감정적 표현인 ‘좋아 하다,’ ‘사랑하다,’ ‘경외하다,’ ‘집착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다양한 사랑의 관계에 적용 된다: 남녀 간의 사랑(창 24:67; 29:18), 남자 간의 사랑(왕상 5:15),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창 22:2; 25:28),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출 20:6; 신 5:10),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신 4:37: 10:15). 또 일이나 사물에 대한 집착에도 사용된다.(시 33:5; 사 56:10) 그 외에도 친구를 표현할 때 이 동사의 분사형(’ōhēḇ)을 써서 명사로 나 타낸다.(렘 20:4,6)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남자 간의 관계를 나타낼 때 쓴 ‘사랑’이란 말이다. 특히 솔로몬과 히람의 관계에서 나타난 사랑(왕상 5:15)은 정치적인 파트너를 의미하고, 신하 중에서 다윗이 사랑하는 자도 역시 정치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쓰였다.(삼하 19:7) 이런 점을 고려하면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에서도 정치적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피차의 정치적 계산 때문에 서로 사랑했다는 것은 그들의 헌신적인 태도와는 다른 것이다.

David & Jonathan
David & Jonathan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의 성격을 규정할 때 요나단의 마음이 통했다는 것을 아가서의 ‘내 마음이 사랑하는 자’(아 1:7)란 표현에 연결시켜서 연인(戀人) 사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법상 어색한 면이 있다. ‘마음이 사랑한다’는 것은 아가서의 경우와 같이 성적인 관계를 의미할 수 있다.(cf. 창 34:3) 그런데 아가서의 ‘내 마음이 사랑한다’(’āhaḇā nafšī)는 것과 ‘마음이 연결되었다’(nęfęš niqšerā)는 표현 간에는 차이가 있다.

후자는 에로틱한 관계가 아니라 같은 마음을 가지고 헌신적인 사랑의 태도를 포함하는 것이다. ‘사랑하다’는 동사와 관련해서 특이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나의 친구’(’ōhaḇī)라고 하실 때 ’āhaḇ의 완료형을 써서 표현했다는 것이다.(사 41:8; 대하 20:7) 이런 관계가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그 사랑의 관계는 서로의 신의(信義)를 전제로 하는 헌신적인 우정이 될 것이다. 때로는 남자들의 우정은 이성(理性)을 뛰어넘는 깊은 사랑의 감정을 수반할 수도 있다.

– 오라 우리가 들로 가자(삼상 20:11)

여기서 문제는 본문의 들을 “사람이 없고 한적한 장소, 은밀한 장소, 도피처, 가장 다 양한 만남과 사건이 생기는 장소”로 이해하고 이 구절을 아가서의 “내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자”(아 7:12)라는 표현과 관련짓는 것이다.(Schroer & Staubli, 1996: 18) 이 두 문장은 두 동사 hālaḵ(가다)와 yāṣā(나가다)가 병치되어있는데 아가서 본문은 두 동사 사이에 접속사 we가 없는데 이것은 문체가 시문이기 때문이지 내용상 차이는 없다.
들판은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룻 3:) 살인이 난 곳이기도 하다.(창 4:) 다윗과 요나단이 들로 나가는 의미는 그 두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가게 되었으며 또 거기서 무엇을 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들로 가게 된 배경은 다윗의 격앙된 감정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삼상 20:1) 다윗의 다그치는 질문에 요나단이 다윗을 안심시키며 안전을 확신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음을 인식한다.(삼상 20:2,3)

다윗은 월삭 정례 식사 모임에 서 사울과 대면하게 될 것을 피하면서 사울의 마음상태를 살피겠다고 하자 요나단은 다시 안전을 확신시키려고 하나 다윗을 그것이 사울의 의지에 달렸으므로 요나단의 능력 밖이라고 생각한다.(삼상 20:5-10)

그때 요나단이 들로 나갈 것을 제안한다. 이 상황을 보면 요나단의 제안은 대화의 분위기를 바꾸어서 다윗이 사울의 정치적 박해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들에서 대화한 내용은 서로의 안전에 대한 약속으로 이루어졌다. 요나단은 다윗이 안전할 것이라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삼상 20:13) 다윗에게 자신의 생명을 지켜달라고 요청했다.(삼상 20:14) 이것은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후손까지도 포함하는 집안에 대한 호혜였다.(삼상 20:15)

여기서 요나단은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암시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한 맹세는 진정한 우정에 입각한 서로의 안전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위험한 정치적 내용의 대화를 아무데서나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들로 나아가서 하는 것은 적절했다. 결국 그 ‘들판’은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기 위한 은밀한 장소가 아니었다.

–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삼상 20:30)

이 표현은 다윗의 입장을 대변한 요나단에 대해서 사울이 격노하면서 꾸짖는 말의 한 부분이다. 여기서 호너(Horner, 1978: 31-3)는 요나단이 다윗을 ‘파트너’로 삼았다고 번역하면서 동성애의 가능성을 제시 한다: “네가 이새의 아들과 절친한 짝이라는 것을 내가 모르나?” 이것은 히브리어 bāḥar(선택하다) 대신에 칠십인 역을 번역한 것이다.

그는 칠십인 역 번역자가 히브리어 본문의 bāḥar가 ‘자위전환’
(metathesis) 현상이 일어난 오기로 철자의 순서를 바뀐 ḥābēr로 보고 번역한 헬라어 μέτοχος를 채택했다. 이것은 설득력이 있는 본문비평이다. 왜냐하면 타동사인 bāḥar가 분사형(bōḥēr)으로 쓰였는데 전치사 le(~에게)와 연결된 것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동사를 ‘동료’를 의미하는 명사인 ḥābēr로 바꾸어서 이 문장을 명사문으로 이해한 것은 자연스럽다.(cf. 시 119:63, 잠 28:24, 사 44:11) 그러나 호너의 설명은 문법적으로나 내용면에서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는 “여기서 헬라어 단어는 métochos를 쓸 뿐만 아니라 ‘벗’ 혹은 ‘짝’이란 의미로 쓰였다.

특히 이 경우와 같이 뒤에 인물이나 사물의 속격(genitive)이 오면 ‘나눔’ 혹은 ‘참여’를 의미한다고 하지만 헬라어 본문에 기록된 ‘이새의 아들’에 붙은 정관사와 명사의 형태는 속격이 아니라 여격(dative)이다. 또 내용상 동료, 벗을 의미하는 ḥābēr이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해도 그것이 두 사람의 성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이 말은 요나단이 다윗과 한편이 되어서 그를 편들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NIV)

–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삼상 20:30)

앞 단락과 관련하여 사울이 사용한 이 원색적인 표현이 다윗과 요나단 간의 성적인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수치’와 ‘벌거벗은’이란 말이 이스라엘 족장 사회에서는 성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고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가 동성애 관계임이 명백하다고 주장이 있다.

사실 이 두 단어가 성적인 것과 관련되었다는 지적은 틀린 것은 아니다. ‘벌거벗음’에 해당하는 ‘ęrwā는 ‘노출’ 또는 ‘남자나 여자의 성기부위’를 의미한다. 그런데 ‘수치’에 해당하는 bōšęṯ는 30번 가운데 단 한 번만 성적인 것과 관련된다.(호 9:10) 그것도 간접적으로 우상숭배와 관련해서 은유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일단 사울이 말하는 수치는 요나단의 배신행위가 수치스런 행동이 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는 문맥이다. 대화의 흐름 속에서 사울이 그렇게 화를 낸 이유를 살펴보면 그의 말이 부적절한 동성적인 배경에서 나왔는지 아니면 정치적인 배경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삼상 20:31)

이것은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여 보호하는 자체가 사울 왕가의 왕위를 보존하는데 위협이 되고 또 정말 우려하던 대로 다윗이 왕이 된다면 그것은 그 어미가 낳은 아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매우 치욕스런 일이기 때문에 이런 과격한 표현을 썼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요나단의 동성애가 문제가 되었다면 어머니의 수치가 아니라 요나단의 벌거벗은 수치라고 해야 했을 것이다.

– 서로 입 맞추었다.(삼상 20:41)

이 본문이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가 신체적으로 동성애적 관계라고 말할 수 없다. 성경에는 연인이나 부부간에 입 맞추는 것 외에도 여러 대상에 대한 입맞춤이 있다. 특별히 다윗과 요나단의 경우는 작별을 표하는 입맞춤으로서 서로 번갈아가면서 키스했을 것이다.(창 31:55; 룻 1:9; 행 20:37) 서로를 아끼고 돌보는 언약관계에 있는 이들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고 이별하는 상황에서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따라서 서로 입 맞추는 것을 동성 간의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은 보편적인 지지를 받기 어려워 보인다.

이 입맞춤을 두고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가 동성애적 관계였다고 한다면 나오미와 그 자부들의 관계도 레즈비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룻 1:9,14)

– 그대는 심히 내게 아름다움이라.(삼하 1:26b)

요나단이 죽은 후에 다윗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부른 애가에 나타난 표현이다. 한글로 ‘아름답다’로 번역된 이 말은 일반적으로 사랑의 대상을 표현할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이 단어의 어원 nā‛am(즐거운, 사랑스러운)을 언급하면서 이것이 아가서에서 연인에게 적용된다고도 한다.(아 1:16; 7:7) 그렇지만 아가서에서 연인의 사랑에 단지 두 번 쓰인 그 단어를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에 적용시켜서 동성애로 보려는 것은 좀 지나친 감이 있다.

이 동사는 ‘사랑받는’이란 의미를 지닌 ’āhūḇ (’āhaḇ)의 분사 수동형(신 21:15; 느 13:26)과는 달리 포괄적인 개념을 가졌다. 히브리어 nā‛am 은 ‘즐거운,’ ‘사랑스런,’ ‘친근한,’ ‘기쁜’ 등의 의미로 쓰였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은 ‘즐거운’(pleasant)으로 번역했다.(RSV, KJV, JPS, NASB) 본문의 사전적 의미로는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다윗의 표현 속에 동성애적인 감정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남성간의 우정에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함과 편안함이 함축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 여인의 사랑보다 더 하였도다.(삼하 1:26c)

이 구절은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에 대한 가장 강렬한 표현이다. 올리언(Olyan, 2005: 7-16)은 요나단의 사랑을 ‘여인의 사랑’과 비교하는 것은 요나단의 사랑의 성적인 특성에 대한 암시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이 비교가 그들의 관계가 더 이상 언약적 신뢰가 아니라 감정적인 에로스의 관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표현 자체는 그 사랑의 깊이가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도록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감정적이 에로틱한 성적인 관계를 증명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이것은 목숨을 대신할 정도의 남자들의 깊은 우정에 대해서도 충분히 쓸 수 있는 말이다. 특별히 다윗의 애가는 군사적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전형적인 조가의 운율을 갖추고 있다.

또한 이 애가(哀歌)는 그 형식이 시적일 뿐만 아니라 내용도 비유법을 써서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삼하 1:23)는 과장된 표현을 쓰고 있다. 다윗의 애가가 지닌 이런 특징들을 고려하면 ‘여인의 사랑보다 더 하였도다’라는 표현으로써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에로틱한 동성애적 관계로 증명하려는 것은 무리한 시도라 하겠다.

주석에서 보았듯이 동성애적인 요소가 있는 것으로 보는 모든 본문들이 성적인 에로틱한 사랑이 아니라 상호간에 깊은 신뢰와 사랑을 줄 수 있는 우정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다. 진정한 우정이란 유익과 쾌락이 아니라 상호 신뢰와 헌신 그리고 덕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데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가 그랬다. 그래서 성경 본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요나단의 진정한 우정을 통하여 사울의 정치적인 박해를 피하고 다윗이 합법적인 왕이 되는 하나의 과정을 보여준다.

3. 결 론

앞의 본문 주석과 설명에 기초해서 결론을 내리기는 쉽다. 구약은 동성애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결혼원칙이 남녀 간의 결합을 나타내고, 소돔의 멸망이 동성애 성폭력과 관련이 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구약의 동성애법은 단순한 성결법이 아니라 도덕법과 관련된 것으로서 하나님께 가증한 것으로서 오늘도 유효하다. 또한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도 동성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구약은 동성애를 철저하게 금하고 있다.(*) 글쓴 이 / 신득일 교수(고신대학교 구약학) 네덜란드 캄펜신학대학원과 남아공화국 노스웨스트대학교에서 구약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고신대 신학과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 위에서 사역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 참고 문헌 >
Horner, Tom (1978). Jonathan Loved David; Homosexuality in Biblical Time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Olyan, Saul M. (2005). Surpassing the Love of Women, in Mark D. Jordan (ed.), Authorizing Marriag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7-16. Schroer Silvia & Thomas Staubli (1996). Saul, David und Jonathan – eine Dreiecksgeschichte?: Ein Beitrag zum Thema ‘Homosexualität im Ersten Testament.’ Bibel und Kirche 51. 15-22.

< 미주 >
1) 이 글은 다음 세 논문을 요약, 보완해서 정리한 것이다. 신득일, ‘소돔의 죄: 동성애인가? 약자에 대한 냉대인가?,’『성경과 신학』, 7-36, 2008. 신득일, ‘구약의 동성애 법,’『신앙과 학문』, 제14권 제2호, 133-157, 2009. 신득일, ‘다윗과 요나단,’ 『갱신과 부흥』, vol. 7, 33-48,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