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 서론

사도신경 강해 서론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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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기독교가 가진 여러 가지 특색 중 하나는 교리를 별로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과거에는 한국교회가 교리를 아주 중요시했습니다. 비기독교적 문화의 배경을 가진 사회에 새로운 종교를 소개하려면 그 종교가 가르치는 기본 교리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독교에 대하여 어느 정도 상식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이론, 이념, 교리 같은 것에 대한 신임이 약화되어서 그런지 교리 문제로 교단이 갈라지는 경우도 별로 없고 교리 에 따라 어떤 교회를 선택하는 경우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모두들 성령을 강조하고 교인 수와 연보 액수를 중요시하다보니까 장로교와 오순절 교회의 다른 점이나 교리의 조그마한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보는 것 같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작은 교리까지 지나치게 손봉호 박사 강조해서 이 교회와 저 교회가 이렇게 저렇게 다르다고 따지는 것이 그렇게 건전하다고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리를 너무 무시해서 기독교인지 우상인지의 구별마저 분명하지 않게 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기독교는 계시(啓示) 종교이기 때문에 그 신조(信條, 信經)가 사람의 경험이나 사색(思索)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계시에 근거한 기본적인 신조를 무시하면 기독교는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그 시대와 사회의 문화적 경향에 편승하게 됩니다.

사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이미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의 타락이란 그 시대 그 사회의 주류 풍조와 비슷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그 기본신조(基本信條)를 항상 유지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있어야 어느 정도 순수성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라고 할 수 있는 사도신경(使徒信經)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도신경의 12가지 신앙고백 내용을 차례로 설명함으로써 기독교는 무엇을 믿으며 기독교의 특징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주일 아침 예배를 시작할 때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러이러한 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임에도 감히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 역사상 기독교 교리를 표현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간단한 신앙고백 중의 하나인 동시에 기독교의 가장 보편적(普遍的)인 교리이며 신앙고백입니다.
‘보편적’이란 말은 적어도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모든 종파는 사도신경만은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고 실제로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모든 교회는 이 신조가 형성된 이후에 계속해서 사도신경을 고백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사도신경은 기독교를 나타내는 하나의 징표(徵表)라 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도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개신교회서도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천주교에서 개신교를 생기게 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 Luther)는 사도신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나 초대교부들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다. 마치 꿀벌들이 온갖 아름다운 꽃에서 꿀을 모으듯이 위대한 사도들이 전해 준 성경의 가르침을 오묘하게 요약한 것으로 어린이들과 순수한 기독교인들의 유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즉 신비한 성경 66권을 아름다운 꽃에 비유한다면 사도신경은 그 꽃에서 꿀벌들이 꽃가루를 모아 꿀을 만들어 놓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사도신경을 강조함으로써 개혁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라는 것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가운데 천주교나 개신교 모두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세 가지가습니다. 그것은 사도신경, 니케아 신앙고백, 아타나시우스 신앙고백입니다. 그 중에 아타나시우스 신앙고백은 상당히 깁니다. 그리고 니케아 신앙고백은 비교적 간단한데 이것은 주후 382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150명의 신학자와 교부들이 모여서 채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어떤 종교회의에서 의논해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사도신경의 12가지 신앙 항목은 12명의 사도들이 한 사도가 한 항목씩 만들었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12개의 신앙고백이 사도신경에 들어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에 불과합니다. 사도신경을 사도의 고백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과 일치하기 때문이지 사도들이 만들어 낸 신앙고백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형태는 주후 710-724년에 정식으로 널리 보급된 ‘공인된 문서’ 즉 ‘택스투스 리셉투스’(Textus Receptus)에 실린 고백과 같습니다. 다만 당시 신앙고백에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것 보다 한 가지 고백 즉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가’라는 말이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는 말 앞에 더 들어 있습니다.

‘지옥에 내려가셨다가’라는 말은 초기 기독교의 여러 신앙고백에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지금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주후 700년경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그 이전부터 그와 비슷한 신앙고백들이 교회에서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가령 주후 215년의 히폴리투스(Hippolytus)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질문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까?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성령으로 잉태하사동정녀 마리아에게 나 시고,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 사 되었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 늘에 오르사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셋째,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회와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까?

그리고 주후 300년에 유행한 마르셀루스(Marcellus)라는 사람의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내가 믿으며,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과 마리아로 말미암아 태어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장사 지낸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公) 교회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이 마르셀루스의 신앙고백이 지금의 사도신경과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는 말이 빠져 있을 뿐입니다. 그 외에도 주후 404년의 루피누스(Rufinus)의 신앙고백과 주후 400년에 지금의 애굽 북쪽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 지역에 있던 아프리카 교회가 사용했던 신앙고백도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고백과 비슷합니다.
이 같이 사도신경 외에도 교회 역사상 많은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한국 장로교회가 채택하고 있는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이 있습니다. 이것은 1646년에 영국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교회당에서 영국 신학자들과 국회의원들이 모여서 결정한 신앙고백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오늘날 모든 장로교가 채택하고 있으며 또한 침례교와 감리교 신앙고백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물론 엄격하게 말하면 감리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사도신경이 어떻게 형성 되어 전해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도신경은 히폴리투스나 마르셀루스나 혹은 루피누스 등의 여러 교부들에 의하여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이 의식적으로 만들었다기보다는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사도들의 신앙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동안 오늘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어떤 것이 더 기본적이고 어떤 것이 기본적이 아니라는 인식이 조금씩 형성되고 의견일치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 성령께서 교회의 역사(歷史)에 역사(役事)하셨다고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교회사학자인 베르코프(H. Berkhof)는 “교회사에서 사도신경에 미사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참 놀랄 만한 일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천주교는 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것은 천주교 예배의 핵심을 이루기에 미사를 매우 중요시합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미사를 중요시하던 시대에 사도신경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미사에 대한 연급이 사도신경에 당연히 들어갔어야 할 것입니다. 즉 ‘거룩한 미사를 믿사오며’ 정도의 구절이 하나쯤 들어갔을 법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그런 구절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공통된 신앙고백이 될 사도신경이 성령의 인도로 형성되었다고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신경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교리를 아주 정확하고 간결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중요한 고백이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가운데 이루어 주셨다고 믿어야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왜 이런 신앙고백이 필요할까요? 마태복음 16장에는 베드로의 유명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시고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은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유명한 선지자중의 하나라고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보시고 “이것을 네게 가르쳐 준 것은 혈육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라고 아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2:8,9에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使者)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시인 한다’는 말은 ‘고백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믿는 사람이 반드시 올바른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고 직간접으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왜 성경 외의 신앙고백이 따로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세례를 줄 때 어떤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표준이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든지 목사님께 와서 세례 받겠다고 하면 목사님이 세례를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세례를 받으려면 적어도 기독교 신앙에서 기본적인 것들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무엇을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할 것인지 교회에서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때 그 때마다 목사님이 알아서 결정하고 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까지 다 읽으면서 “이것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하자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그 내용을 다 기억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또 그저 “신구약성경에 있는 것을 내가 다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너무 추상적이고 막연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간결하고 기본적인 신조(信條) 적어도 필수불가결한 신앙의 기준에 대한 간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아서 명실(名實) 공(共)이 기독교인으로 인정받으려면 적어도 사도신경이 제시하고 있는 신조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과 비(非) 기독교인을 구별하는 가장 기본적인 표준을 하나 만들어 둘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조(信條)입니다.

둘째,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시킬 때에도 신앙고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부모의 신앙을 물려주려면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요소를 알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신구약 성경책을 그냥 물려준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성경의 핵심을 가르치려면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가령 안드레가 베드로의 동생이라든지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다든지 하는 것들만 계속해서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은 우스울 것입니다.

셋째, 이단(異端)을 물리치기 위해서 신앙고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는 많은 이단이 생겨났습니다. 이단이란 성경의 가르침대로 믿지 않고 자신들의 경험이나 사색을 기준으로 하여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성경의 가르침에 다른 것들을 첨가하거나 아니면 성경 내용 중 어떤 것을 빼버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올바른 신앙의 표준이 분명하지 않으면 이단들이 나타나서 저마다 자기들 주장이 옳다고 떠들 것입니다. 앞에 소개한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결정한 니케아 신앙고백을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에는 계시지 않았다 하거나 하나님과 동등한 본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 자를 우리 공회가 저주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니케아 종교회의 때에 이미 많은 이단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에는 계시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본체(本體)를 가졌다는 사실을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을 순수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앙고백이 꼭 필요합니다. 로마서 10:9,10은 신앙고백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하며 두 가지를 또 강조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그 순서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마음과 2)입, 3)믿는 것과 4)고백하는 것 네 가지를 서로 연결해 놓았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입으로 고백하는 것과 마음으로 믿는 것은 서로 분리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하도 거짓말을 잘하니까 입으로 하는 말과 마음으로 믿는 것이 서로 다를 수도 있습니다. 즉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말하는 것은 그런 뜻으로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믿는 것을 그대로 고백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 데 특별히 그가 부활하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구태여 부활을 강조했을까요? 적어도 사도 바울의 생각으로는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부활하셨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현대인에게도 어렵거니와 그 시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믿기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가 죽으셨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실 분으로 죽으셨다는 것은 그의 죽음이 평범한 죽음이 아니고 대속(代贖)의 죽음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또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려면 예수님에게 죄가 없으셔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동정녀를 통하여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나셨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모두 함축(含蓄)하고 있습니다. 비러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마음으로 믿는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마음이라는 말을 영어로 heart라고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머리(head)와 마음 (heart)을 구분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을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마음으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식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해서 지식을 아주 무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구분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무시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마음이라고 했을 때는 지식을 제외한 마음이 아니라 지식을 포함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는다는 말은 지식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고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결단’(決斷)을 강조했습니다. 논리적인 결론이나 인과관계의 결과가 아니라 한 인격체가 결과에 대해서 전적으로 책임질 수 있도록 결정하는 것을 실존의 핵으로 보았습니다. 반면에 그들은 상대적으로 결단의 내용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단의 내용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무엇을 믿는가?”하고 물으면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예수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데?”하고 물으면 “그런 것은 몰라도 돼! 예수만 믿으면 돼!”라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믿음에는 분명히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그런즉 저회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라고 했습니다. 전파되는 내용이 없으면 믿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是認)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역시 중요합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꼭 입으로 시인해야 하나? 마음으로 믿으면 되지!”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믿을 뿐만 아니라 입으로 시인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총각이 어떤 처녀를 사랑한다고 합시다. 마음속으로 아주 깊이 사랑합니다. 이 사실을 안 처녀는 기분이 좋겠지요. 그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처녀가 더 원하는 것은 여러 사람 앞에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당신을 내 아내로 삼아서 영원히 사랑하겠다.”라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고백해야만 혹 더 예뿐 여자를 만나서 마음의 갈등이 생겨도 입으로 시인했기 때문에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만약 한 번도 입술로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다면 나중에 “내가 언제 당신을 사랑했느냐?”하고 발뺌할 수도 있겠지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면 그만이지 왜 혼인식을 올립니까? 친지들과 여러 증인 앞에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신실하기로 약속하면서 관계가 공식적이 되고 더 확실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선언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세례를 베풀며 그 사실을 선언하고 교인의 명부에 등록하는 것에는 그런 의의도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입으로 고백하면 신앙이 더 확실하게 굳어질 수 있습니다. 좀 약한 신앙이라도 공중 앞에 나가서 고백한 뒤부터는 그 고백에 충실하도록 믿고 행동하려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직분을 맡는 것도 그런 효과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신앙이 약한 사람이라도 집사로 봉사하게 하면 그 직분 때문에 신앙이 더 성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사 때 엉뚱한 짓 하던 사람이 장로가 되고 나서 갑자기 신앙이 좋아지고 점잖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마음과 입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조금 모자라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나의 주(主)로 모시겠습니다.”라고 고백하고 나서 그 다음에 그 고백에 맞게 믿음을 강하게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신앙이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께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앙은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무엇을 믿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시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 즉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앙고백이 뜻하는 것이 무엇이며 특별히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 이 고백은 어떤 의미를 주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글쓴 이 / 손봉호 박사 출처 / 사도신경강해, 성서유니온선교회, 2008

< 손봉호 박사의 이력 >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신학 석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자유대학 철학 석·박사,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 사회교육과 교수, 명예교수, 한국칸트철학회 회장, 밀알복지재단 이사장, 시민정보미디어센터 이사장, 한국철학회 회장, 제18대 한성대 이사장, 제6대 동덕여대 총장, 고신대 석좌교수 < 상훈 >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현대수필상, 국민훈장모란장 外 < 저서 > 오늘을 위한 철학, 나는 누구인가?, 고통 받는 인간, 바람직한 예의문화의 정착, 고상한 이기주의, 울림. 열림. 어울림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