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13) 미국교회 본격적 한국 선교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13)
미국교회 본격적 한국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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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교가 본격 시작 될 무렵, 1904년 호주 기자가 찍은 제물포(인천) 항

1. 미국 각 교단, 한국에 선교사 파송

1884년 9월 알렌의 입국을 시작으로 외국의 한국 파송이 시작된다. 첫 선교부는 1789년 조직된 미국 북장로교회(PCUSA,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로서 중국 일본에 이어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미국 북장로교는 알렌에 이어 언더우드 선교사를 파송했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于, 1859-1916)는 1885년 4월 5일 미국 북감리회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와 함께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했다. 당시 국내 정세가 불안해 미국 대리공사 폴크(Foulk)의 만류로 아펜젤러 부부는 곧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2개월 후 다시 입국하게 된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비록 교파는 달랐으나 일생을 통해 가장 친근한 선교의 반려자로서 상호 협력했다. 영국 런던 출생인 언더우드는 13세세 때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뉴저지 주에 있는 화란개혁교회의 뉴브런즈윅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과 호주 각 교단이 파송한 최초의 한국 선교사들(우로부터 좌로) : 미국 북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 미국 북감리회 아펜젤러 선교사, 미국 남장로교 레이놀즈 선교사, 호주 장로교 데이비스 선교사
미국과 호주 각 교단이 파송한 최초의 한국 선교사들(우로부터 좌로) : 미국 북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 미국 북감리회 아펜젤러 선교사, 미국 남장로교 레이놀즈 선교사, 호주 장로교 데이비스 선교사

한국에 파송 된 첫 목사요 선교사였다. 그해 6월에는 의사 헤론(Dr. John Heron)이 내한했고, 북장로교 한국선교부가 조직됐다. 이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개척전도, 의료,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마포삼열(Rev. S. A. Moffett, 1890), 배위량(Rev. W. M. Baird, 1891), 소안론(Rev. W. L. Swallen, 1892), 이길함(Rev. Graham Lee, 1892) 선교사 등이 내한하여 평양과 부산에 선교지부를 개설하고 선교지역을 확대해 갔다. 또 애덤스(Rev. J. E. Adams·1895) 목사 부부는 대구에, 밀러(Rev. F. S. Miller, 1892) 목사는 청주에 각각 선교지부를 개설했다. 그 후 계속하여 선천(1901), 안동(1909) 등지에 선교지부가 설립됐다.

2. 호주 장로교 한국에 선교사 파송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두 번째 장로교 선교부는 호주 장로교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호주의 빅토리아주 장로교회(PCV,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인데 한국 선교는 1889년 10월 데이비스(Rev. Joseph Henry Davies) 목사와 그의 누이 데이비스(Mary T. Davies)에 의해 시작됐다.

데이비스는 한때 인도 선교사였으나 건강이 좋지 못해 귀국 후 멜버른대학교를 졸업하고 카오필드 문법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일했다. 그는 다시 인도로 가고자 했으나 한국 선교의 긴박성을 알리는 북중국 주재 영국교회 선교사 월프(John R Wolfe) 주교의 편지를 읽고 한국 선교를 자원하게 됐다. 성공회에 속해 있던 그는 장로교로 이적한 후 에든버러 뉴칼리지에서 신학수업을 받고 1889년 8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빅토리아주
138교파별 한국선교 구역분할
1차 합의 : 1892년, 미국 북장, 남장
2차 합의 : 1909년, 미국 북장, 남장, 남감, 북감

미국 남 감리교
강원도 2/3, 연안, 해주, 원산 이남지역

미국 북 감리교
평북, 대천, 박천, 연변, 강원도 1/3, 서울 남부, 충남지역
기타 / 5천 명 이상의 읍 지역은 장, 감 두 교파가 함께 전도하여 교회를 세울 수 있게 했고, 1936년까지 지켜졌다.

청년연합회(Young Men’s Fellowship Union) 지원으로 그는 10월 2일 부산을 거쳐 10월 4일 그의 누이와 함께 제물포로 입국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데이비스는 언더우드, 헤론 등과 함께 5개월간 지내며 한국어를 습득했다.

선교사가 없는 지방으로 가서 일하기로 작정한 데이비스는 1890년 3월 14일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약 20일간 500㎞에 이르는 여행을 마치고 4월 4일 부산에 도착했으나 천연두와 폐렴에 감염돼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인 4월 5일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빅토리아주 장로교 청년연합회와 여전도회연합회(PWMU)는 한국 선교를 계속 지원했다. 그 결과 1891년 10월에는 매카이(Rev. J Mackay) 목사 부부와 세 사람의 미혼 여선교사, 곧 멘지스(B. Menzies), 페리(J. Perry), 퍼셋(M. Fawcett) 등 5명이 한국에 파송되었다. 이들은 부산을 거점으로 경남지역에서 활동했다. 후일 호주 장로교는

189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순회전도 일행
189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순회전도 일행

부산, 마산, 진주, 거창, 통영 등 5개 지역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전도, 교육, 자선, 의료 활동을 전개했다.

3.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

1864년 조직된 미국 남장로교회(PCUS·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는 북장로교 보다 8년 늦게 한국 선교에 동참했다. 1891년 10월 언더우드가 첫 안식년으로 귀국해 내슈빌에서 모인 ‘외국 선교를 위한 신학교협의회(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 연차대회에서 한국 선교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미국 벤더빌트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윤치호도 한국 선교를 호소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당시 매코믹신학교 학생이었던 테이트(Lewis Boyd Tate)와 리치몬드의 유니온신학교 출신 정킨(William M Junkin),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등이 한국 선교를 자원했다. 처음 남장로교 선교부는 한국 선교 계획이 없었으나 이들의 자원과 선교기금의 후원으로 이들을 한국 선교사로 임명했다. 이들은 테이트(Miss Mattie Tate), 데이비스(Miss Linnie Davis), 볼링(Miss Pasty Bolling) 등 미혼 여선교사들과 함께 1892년 11월 3일 입국했다. 이들은 서울에서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 후 전주에 첫 선교부를 설치했다. 이후 광주, 군산, 목포, 순천 등지에도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전도, 교육, 의료, 자선사업 등을 전개했다.
(*)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