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14) 각국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14)
각국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배재학당 교사는 아펜젤러에 의해 1887년 벽돌로 지어진 한국 최초의 학교근대건물이다.(지상 1층, 지하 1층, 연면적 약 366㎡, 사진은 건축공사 장면)
배재학당 교사는 아펜젤러에 의해 1887년 벽돌로 지어진 한국 최초의 학교근대건물이다.(지상 1층, 지하 1층, 연면적 약 366㎡, 사진은 건축공사 장면)

1. 캐나다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

미국 북장로교, 호주 빅토리아장로교 그리고 미국 남장로교에 이어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회도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캐나다장로교회는 1897년 한국 선교에 동참키로 결의하고, 1898년 9월 푸트(W R Foote, 富斗一) 목사 부부, 그리어손(Dr. Robert G Grierson, 具禮孫) 의사 부부, 그리고 맥래(D McRae, 馬具禮) 목사를 한국에 파송했다.

이들은 함경도와 간도 지방을 중심으로 선교를 시작했고 후에는 원산 함흥 용정 등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전도, 교육, 의료 등 세 분야에서 활동했다. 캐나다 장로교회는 1925년 감리교, 회중교회와 연합해 캐나다연합교회(United Church of Canada)를 구성했는데, 당시 주한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중 한 사람인 루터 영(Luther L Young, 榮在馨)을 제외하고는 다 이 연합에 찬성해 1925년 이후에는 캐나나 연합교회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활동했다.

James Gale(1863-1937)
James Gale(1863-1937)

비록 장로교회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캐나다인으 로 내한한 첫 선교사는 게일(James S Gale, 1863-1937) 이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출신인 그는 동 대학 기 독교청년연합회(YMCA)의 파송으로 1888년 12월 내한했다. 게일은 서울, 황해도 송천(소래), 부산에서 활동했고 후에는 북장로교로 이적해 원산, 서울 등지에서 활동했다.

게일은 한국 역사와 문화, 풍습 등 한국학 연구와 저술로 큰 업적을 남겼다. 게일의 뒤를 이어 1890년 9월 내한한 의사 하디(Robert A Hardie, 河鯉永)는 부산 원산 등지에서 의사로, 전도자로, 협성신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특히 그는 1907년 전후 한국 교회 부흥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1893년 12월에는 캐나다인 매켄지(William J Mckenzie)가 독립선교사로 내한, 황해도 장연군 소래(松川)에 거주하면서 서경조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설립하는 등 헌신적으로 일했으나 1895년 6월 23일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캐나다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 동기가 됐다.

2. 미국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

장로교와 함께 한국 선교를 주도한 교파는 감리교회다. 미국 북 감리회와 남 감리회가 선교사를 파송했다. 북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는 1885년 입국한 아펜젤러로 시작되었음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프랭클린 마샬대학과 드루신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1885년 2월 2일 북 감리교 파울러(Fowler) 감독에게 안수를 받았다. 이튿날 한국으로 향해 2월 27일 요코하마를 거쳐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함께 내한했다. 그해 5월 3일에는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856-1922) 내외와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Fitch Scranton, 1832-1929)이 입국했다.

서울 정동에 정착한 아펜젤러는 영어학교를 시작으로 한국 선교에 나섰고, 정동감리교회와 배재학당 설립, 성경 번역, 신학교육, 문서 활동 등 다방면에서 한국 교회 형성에 기여했다. 1887년에는 존스(George Heber Jones)와 올링거(Franklin Ohlinger)가, 1889년에는 맥길(W B McGill)과 메타 하워드(Meta Howard)가 내한했다.

윤치호(1865-1945)
윤치호(1865-1945)

남 감리회는 1896년부터 한국 선교를 시작했 는데 윤치호의 역할이 컸다. 1888년 미국 밴더빌 트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한국 근대인물 중 신학을 공부한 첫 인물로 알려져 있다. 윤치호는 남 감리회에 한국 선교를 요청했다. 그 결과 1895년 10월 18일 중국 주재 선교사 헨드릭스(E. A. Hendrix) 감독과 리드(C. F. Reid, 李德)가 내한해 선교 가능성을 점검한 바 있다.

이듬해인 1896년 5월 리드가 한국 선교사로 내한함으로써 남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가 시작됐다. 1890년 내한했던 캐나다인 로버트 하디는 1898년에는 남 감리회로 이적해 목사 안수를 받고 의료활동보다는 복음 전도자로 활동했다.

3. 침례교, 성결교, 구세군의 한국 선교

장로교와 감리교 외에도 1890년에는 영국성공회가 콜페(C. J. Corfe, 高堯翰) 감독을 파송해 한국 선교에 동참했고, 미국 침례교 선교 단체인 엘라딩기념선교회는 폴링(E. C. Pauling), 가들라인(A. Gadelinre) 등을 한국에 파송했는데, 재정난으로 1900년 사역을 중단했다. 이들의 사업은 독립선교사였던 캐나다인 펜윅(Fenwick)에게 이양되고 후일 침례교회의 모체가 됐다.

성결교는 1907년 우리나라에 소개됐다. 감리교적 배경에서 생성된 성결교회의 모체는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인데 카우만(Charles E. Cowman)과 킬보른(Ernest A. Kilbourne)에 의해 창립됐다. 이들은 1905년 11월 일본 도쿄에 성서학원을 설립했는데 한국인 김상준과 정 빈이 1907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서울 종로 염곡에서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한국 성결교회의 시작이 됐다.

구세군은 1908년부터 한국 선교를 시작했는데 한국에 온 첫 선교사는 호가드(R. Hoggard, 許加斗)였다. 그는 1908년 10월 1일 입국해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4. 한국 기독교 여성교육의 선구자 스크랜턴

Mary Scranton
Mary Scranton

1884년 스크랜턴(Mary F. Scranton, 1832-1909)은 미 감리회 해외 여선교부의 한국 파견 첫 여선교 사로 임명됐다. 스크랜턴은 52세라는 나이 때문에 한국행을 쉽게 결정짓지 못했다. 그러나 신앙심이 그를 움직였다. 스크랜튼은 의료 사업을 담당할 한국 파송 선교사로 임명된 그의 외아들 윌리엄 스 크랜턴(William B. Scranton)과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  1885년 6월 20일 서울에 도착한 스크랜턴은 한 달 먼저 서울에 자리 잡은 아들의 집에 거하면서 선교사업 준비를 했다.

그러나 양인들을 불신하고, 서양을 두려워하던 한국인들은 파란 눈의 이방인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우리가 부녀자가 있는 집에 가까이 가기라도 하면 그녀들은 창문을 닫고 커튼 뒤로 숨어 버렸고 어린이들은 울부짖으며 달아났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서양인들이 한국 아이를 살찌워 피를 빨아 먹는다는 등의 괴 소문이 횡행하고 있었다.

1886년 서울 정동에 여학교를 세웠지만 학생은 모으기 쉽지 않았다. 한국에는 “여자는 교육할 필요가 없다.”라는 인식이 확고했고, 여성들의 외출은 밤에만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콜레라까지 퍼졌다. 학교 건물이 완공되기 전인 5월, 스크랜턴은 아들 집에서 첫 학생을 만났다. “영어를 배워 황후의 통역관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관료의 소실(小室, 첩)이었다. 그러나 첫 학생은 병으로 석 달 만에 학업을 접는다.

1886년 5월 31일 개교한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 이화학당
1886년 5월 31일 개교한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 이화학당

6월, 두 번째 학생으로 꽃님이라는 열 살배기 소녀가 찾아왔다. 가난한 여인이 딸을 부양할 수 없어 맡긴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처음에는 좋은 음식과 옷을 주지만 나중엔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라며 겁을 주자 곧 여인은 아이를 도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꽃님이를 미국으로 데려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한 후에야 아이를 두 번째 입학생이자 이화학당 최초의 영구학생(permanent pupil)으로 삼을 수 있었다.

1886년 여름 서울에 만연한 콜레라로 서대문 근처에 버려진 별단이라는 아이를 아들 의사가 치료했다. 별단이는 두 번째 영구학생이 됐다. 네 번째로 이화학당을 찾은 학생은 훗날 조선 최초의 여의사가 된 박 에스터(김점동)였다. 하나 둘 학생들이 늘어,

한국 최초 여의사 김점동(왼쪽)과 이화학당 학생들(1887년)
한국 최초 여의사 김점동(왼쪽)과 이화학당 학생들(1887년)

1887년에는 학생이 11명이 되었다. 1886년 2월 고종 23년에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았다. 이는 국가로부터 교육기관으로 인정됐다는 의미다.

스크랜턴은 교육이념을 “가부장적 굴레 속에 고통 받는 여성들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진정한 한국인으로 당당하게 서는 것”을 제시했다. 이런 여성교육 목적은 파이크(L. G. Paik)의 저서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 in Korea’(1929)에서 볼 수 있다. “우리의 교육 목적은 한국 소녀들이 우리 외국 사람의 생활이나 의복, 환경에 적응하도록 변화시키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오로지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 사람이 되게 하는 데 만족한다.”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있는 스크랜턴 비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턴 여사가 이화의 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