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25) 절제회의 금주금연 운동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25) 절제회의 금주금연 운동

1900년대 초 거리에 세워진 전국 금주(禁酒)운동 간판
1900년대 초 거리에 세워진 전국 금주(禁酒)운동 간판

1. 선교초기는 술, 담배 불간섭영역

한국에서 사역하던 초기 선교사들이 술과 담배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이를 금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가 소개된 초기에는 성탄절이 되면 술을 빚어 교인들이 함께 나누어 마셨다는 기록이 있고, 예배당에 들어올 때 신발장 옆에 담뱃대를 정렬해 두었다가 예배가 폐하면 함께 담배를 피웠다는 기록도 있다.

선교사들 중에도 음주나 흡연하는 이들이 있었다. 언더우드도 이 점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가 서구문명 사회의 신학교에서 교육받았던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처럼 초기 선교사들은 음주와 흡연 문제는 아디아포라(adiaphora) 즉 문화적 ‘불간섭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일정기간 음주나 흡연에 대해 관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한국 교회가 금주와 금연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알렌이 입국한 후 10여년이 지난 때부터였다.

 

1920년대 조선기독교절제회 금주와 구습타파 가두시위
1920년대 조선기독교절제회 금주와 구습타파 가두시위

2. 금주(禁酒), 금연(禁煙) 운동의 시작

이후 한국의 선교사들은 금주(禁酒), 금연(禁煙)과 함께 도박, 축첩을 금하고, 혼인 장례 등에서의 구습을 타파하고, 비과학적인 의식을 개조하고자 노력했는데 금주(禁酒), 금연(禁煙)은 이런 측면에서 강조되었다. 한국 교회가 금주, 금연 운동을 추진할 때 크게 세 가지 점에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신앙상 유익하지 않다는 점, 건강에 해롭다는 의학적인 이유 그리고 개화 혹은 국민의식 계몽을 위한 의도가 있었다.

한국에서의 금주운동이 일어난 것은 1900년 이후로 볼 수 있지만 1895년을 전후한 때로부터 금주, 단연(斷煙)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계주론(戒酒論)을 펴기 시작했다. 감리교는 이미 1894년부터 금주정책을 견지하고 그해 8월에 모였던 감리교 선교회에서 금주(禁酒)를 공식적으로 결의하였다. 당시 교회는 음주(飮酒) 행위를 4중적 범죄로 규정하였다.

첫째, 하나님께 범죄 하는 일,
둘째, 교회법을 어기는 일,
셋째, 부모형제, 처자에게 광언지설(狂言至說)하는 일,
넷째, 자기 몸을 망하게 하는 일이다.

금연(禁酒)이 강조된 것도 동일한 이유였다. ‘그리스도 신문’ 1897년 5월 7일자에서는 “담배 먹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편한 것시 만흐니라. 이런 사람은 여러 가지 병이 잇나니 힘줄이 약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념통이 더 벌덕 벌덕하고, 슈전증이 나고, 안력에 대단히 해롭고, 여러 가지 병이 만흐니라.”고 하면서 금연을 강조하였다.

조선기독교절제회의 금주운동 전단지
조선기독교절제회의 금주운동 전단지

3. 금주, 금연 운동의 조직화

한국 교회에서 금주, 금연 운동이 조직 화된 것은 1900년대 이후인데 특히 절제운 동(節制運動)을 통해 보다 구체화되었다. 1907 년 이후에는 금주, 금연으로 절약한 재화로 외채 청산에 기여하자는 민족적 동기도 있 었다. 1911년에는 주한 선교사들이 ‘기독교 절제회’를 조직하고 금주, 금연, 순결에 관 한 문서를 제작 배포하기 시작하였고, 1912 년에는 평양, 황해도 황주(黃州) 등지를 중심 으로 계연회(戒煙會)가 조직되어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 계연회는 금연으로 절약한 돈을 모아 외지에 전도인을 파송하는 전도운동을 겸하였다.

1917년부터 1941년까지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공의회’가 발행하는 주일학교 장년 및 유년공과에 절제에 관한 내용을 삽입하여 교회학교에서 절제교육을 실시했다. YMCA는 20년부터, 감리교는 1923년부터 금주, 금연회를 조직하여 절제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에 공포된 감리교회의 ‘사회신경’에는 “심신을 패망케 하는 주초와 아편의 제조, 판매, 사용금지” 조항이 삽입되었고, 감리교인 임배세(林培世)가 작사한 절제 계몽가인 ‘금주가’가 31년 간행의 ‘신정 찬송가’에 포함되기도 했다.

금주가(禁酒歌) / 임배세 작사

1.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 될가 늘 두렵다

2. 패가망신 될 독주는 빗도내어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 한 푼 안 쓰려네

3. 전국 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 세워
자녀수양 늘 식히면 동서문명 잘 빗내리

4. 천부주신 네 제능과 부모님게 받은 귀체
술의 독기 밧지 말고 국가위해 일할 지라
(후렴)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
우리나라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잇나니라.

한국의 절제운동과 사회교육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교단은 구세군이었다. 구세군은 한국선교 직후인 1910년 10월부터 연 1회 ‘구세신문’에 ‘금주호’를 발행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금주호’에 첨부, 인쇄된 금주 서약서가 금주 결단을 촉발하였다. 이러한 금주, 단연(斷煙) 운동은 1930년대 전국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35년 2월 10일은 금주(禁酒)의 날로 선포되었고, 이때를 전후하여 조선 기독교여자절제회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등이 주최하는 금주 가두 행렬, 금주 강연회 등이 전개되었다. 이때 불리던 절제운동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꿈을 깨어라 동포여 지금이 어느 때라 술 먹나
개인과 민족 멸망케 하는 자 그 이름 알콜이라

2. 입에 더러운 담배는 왜대리 용단하라 형제여
몸과 정신을 마비케 하는 것 담배란 독약이라
(후렴)
술잔을 깨치라 담배 대를 꺾어 버려라
2천만 사람의 살 길은 절제운동 만만세

이와 같은 금주, 단연 운동의 결과로 한국 교회 초기부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술, 담배를 끊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한국 교회 전통에서는 주일성수, 조상제사 중지, 노름(도박)의 금지, 축첩반대 등과 함께 금주, 단연은 세례 받을 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다짐이었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