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29) 백만인 구령 운동(1909~1910)

1. 대부흥 후 100만 명 전도운동 불 붙어

1903년 원산에서의 부흥, 1907년 평양의 대부흥에 이어 1909년과 1910년 어간의 ‘백만인 구령운동’(Million Souls Movement)은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원산에서 발현해 평양에서의 대부흥으로 나타난 영적 각성이 성령의 역사(役事)였다면, 1909년과 1910년 두 해에 걸쳐 전개된 백만인 구령운동은 이름 그대로 민족복음화를 위한 전도운동이었다.

100만 명의 신자를 목표로 하여 거 교회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1907년 1월에 시작된 부흥의 역사는 약 6개월간 계속된 것으로 보지만 장로교의 경우 청주집회(1907년 3월), 감리교의 경우 공주집회(1907년 4월)를 고비로 현저히 약화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부흥의 불길을 이어 전도운동으로 확산하자는 취지에서 주한 장로교와 감리교 등 6개 선교부가 공동으로 추진한 운동이 백만인 구령이었다.

2. 백만인 구령운동의 시원(始原)

이 운동의 기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남감리회 개성선교부 선교사들 곧 갬블(F. K. Gamble), 리드(C. F. Reid), 스톡스(M. B. Stokes) 등이 1909년 7월 개성 송도에서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던 중 전도와 구령의 이상을 갖게 된 것이 그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선교지역에서 5만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고, 그해 9월 초 송도에서 개최된 남감리교 연회에서는 ‘이십만 명을 그리스도에게로’를 목표로 전도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는데, 이것이 ‘백만인 구령운동’의 시원이 된다.

장로교회도 이에 호응하였다. 장대현교회 목회자였던 길선주 목사는 1908년 압록강 연안 순회 집회를 마치고 평양에 돌아오면서 거 교회적 전도운동을 구상하였다. 장대현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시작하면서 참석한 이들과 함께 구령의 열정을 갖게 되어 거 교회적 전도운동을 제안하였다고 한다. 1910년 제4회 독노회에서 길선주 목사가 부회장 겸 전도국장으로 피선돼 이 운동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게 됐다.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평양 대부흥을 경험한 이후 이 부흥의 불길을 다시 일으켜보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부흥과 민족복음화에 대한 갈망이 묵시적 연합을 이루어 1909년의 전도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을 추진한 중심 세력은 감리교 선교사들이었고 주한 장로교 및 감리교 선교부는 이를 수용해 거 교회적 운동으로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3. 백만인 구령운동의 특징

즉 1909년 10월 8일과 9일 서울에서 모인 장감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는 남감리교 연회에서 채택한 ‘이십만 명을 그리스도에게로’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여 ‘백만 명을 그리스도에게로’(A Million Souls for Christ)라는 전도운동으로 채택하고,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목표 달성 기간은 1910년 10월 9일까지 1년으로 하고 풍성한 결실을 위해 기도하기로 했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신자는 20만 명에도 미치지 못한 상태였는데, 100만 명을 전도하자는 목표는 지나친 욕심이었음이 분명하지만 의도는 분명했다. 100만 명의 신자면 민족을 살릴 수 있고 자주와 독립을 지켜갈 수 있다고 인식했다. 이때 연합공의회는 이 운동의 구체적인 실행을 위해 게일을 위원장으로 해 언더우드, 밀러(Hugh Miller), 벙커(D A Bunker)를 위원으로 위촉했다. 백만인 구령운동은 초교파적 전도운동이었으나 주한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추진되었는데,

첫째는 대중 전도집회였다.

서울을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 전도 집회가 개최됐다. 이때 마침 외국의 부흥 전도자들이 입국해 이 일에 동참했다. 미국의 저명한 부흥사 채프만(J Wilbur Chapman) 목사와 복음송 가수였던 찰스 알렉산더(Charles M Alexander) 일행은 서울과 주요 도시에서 전도 집회를 열었다. 이 전도단의 반주자이자 작곡가인 로버트 하크니스(Robert Harkness)는 ‘백만 인을 예수께로’라는 노래를 작시, 작곡해 보급했다. 조지 데이비스(George T B Davis) 등도 내한해 이 일에 동참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전도를 위한 여러 집회가 개최됐다.

두 번째는 가가호호 방문해 전도하는 축호(逐戶) 전도였다.

전도자들은 거리에서나 학교, 가정집을 방문해 낱 복음서와 전도지를 배포했다. 백만인 구령운동 기간 중 70만권의 마가복음서가 분배되었고, 약 300만장의 전도지를 배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금요 철야기도의 시작

이 전도운동 기간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의 표인 ‘날(日) 연보’가 드려지기도 했다. 날(日) 연보란 우리의 물질을 드리듯이 우리의 날(日)을 바쳐 복음전도에 헌신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선교사들은 이것을 날 전도(day preaching) 혹은 날(日) 연보(day offering)이라고 불렀다. 이 전도운동 기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총 10만일을 날(日) 연보로 작정했다. 평양에서는 1000여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22,000일을 전도일로 작정했다. 이 기간에 기도운동도 일어났는데 수요 기도회에 이어 금요일에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이때의 금요 기도운동이 지금의 금요 철야기도회의 시작이 된다.

결과를 볼 때 백만인 구령운동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실제 입교한 이들은 구호의 1/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점증하는 일제의 압력과 1910년의 강제합병 등 정치적 환경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일제는 백만인 구령운동을 한국인의 정치운동으로 간주해 집회를 방해했다. 선교사 주도가 한국인의 자발적 참여와 동원을 이끌어내지 못한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복음화의 이상(理想) 즉 그 꿈은 값진 것이었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