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30) 평양 장로회신학교 설립

 

1907년 6월 20일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 (뒷줄 왼쪽부터) 방기창(邦基昌), 서경조(徐景昨), 양전백(梁甸伯), (앞줄 왼쪽부터) 한석진(韓錫普), 이기풍(李基豊), 길선주(吉善宙), 송린서(宋麟瑞)
1907년 6월 20일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
(뒷줄 왼쪽부터) 방기창(邦基昌), 서경조(徐景昨), 양전백(梁甸伯),
(앞줄 왼쪽부터) 한석진(韓錫普), 이기풍(李基豊), 길선주(吉善宙), 송린서(宋麟瑞)

1. 1901년 첫 신학교 개교, 학생은 장로 2명

신학교육은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거룩한 의무였다. 이 의무를 깊이 체득한 인물이 칼빈이었다. 누구보다도 신앙교육을 중시했던 칼비은 1559년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한 후 유럽의 여러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여러분들은 통나무를 보내주십시오. 우리는 불붙는 장작을 만들어 돌려드리겠습니다.”라고 썼다. 칼빈은 미래의 복음의 씨를 육성할 필요를 느끼고 학교를 설립했는데, 그 후 개혁교회 전통에서 신학교육은 말씀 사역자의 양육과 교회 존립과 확장을 위해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인식되어 왔다.

 

 

 

 

 

 

한국 최초의 평양신학교와 신학생들, 초대 교장 마포 삼열(Samuel A Moffett)
한국 최초의 평양신학교와 신학생들, 초대 교장 마포 삼열(Samuel A Moffett)

이러한 신학교육 기관 설립의 긴박성에 대해서는 내한 선교사들도 깊이 인식하고 있다. 특히 청일전쟁 이후 기독교 교세가 확장되어감에 따라 교회지도자 양성은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이 점은 선교정책 차원에서 강조되기도 했다. 1890년 6월 내한한 네비우스는 소위 삼자원리(三自原理)를 제시했는데, 그가 제시한 자전(自傳)이란 신학교육을 통해 한국인 전도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원리였다.

2. 신학교의 원조 ‘신학반’

장로교의 신학교육은 이미 1890년부터 시작되었다. 언더우드는 그해 가을부터 자신의 집에서 ‘신학반’(神學班)이라는 이름으로 신학교육을 실시한 바 있다. 첫 수강생들은 의주에서 온 김관근 백홍준, 소래의 서경조 최명오, 서울의 서상륜 정공빈 홍정후 등이었다. 1892년에는 수강생이 16명으로 불어났는데, 김관근 김규식 송석준 양전백 한석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면면을 볼 때 신학반은 당시 교회의 필요에 따라 한국교회 지도자를 양성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개월 단기과정의 신학반을 정규신학교육으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로 미흡했다. 그동안 지역별로 운영되기도 했던 성경반이나 사경회가 부분적으로 신학교육적 기능을 감당하기도 했으나,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설립됨에 따라 한국인 교역자 양성은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이런 필요성에 공감하여 주한 4개 교단 장로교 선교부로 구성된 장로교선교공의회는 신학교 설립을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1901년 평양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정식 개교하였다. 평양 주재 선교사인 마포삼열(Samuel A Moffett)에 의해 추진된 이 신학교가 한국장로교회의 첫 신학교였고 평양에 있었기 때문에 평양신학교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 신학교의 첫 학생은 평양 장대현교회의 김종섭, 방기창 두 장로였다. 마포삼열의 집에서 시작된 이 학교의 첫 교수는 마포삼열과 이길함(Graham Lee)이었다. 수업은 1년에 3개월 공부하는 집중 수업 방식이었다. 1902년에는 길선주, 송인서, 양전백, 이기풍 등 네 학생이 입학하였고, 점차 그 수는 증가하였다. 1905년 22명, 1906년 50명, 1907년 75명, 1909년 138명으로 증가하였다. 이 장로교회의 신학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곧 1906년부터 미국 남장로교와 호주장로교 그리고 후에는 캐나다 장로교회도 교수단을 파송하여 주한 4교단 장로교가 공동운영하는 신학교로 자리 잡았다.

3. 평양신학교 첫 교수진과 학생들

신학교육을 주도한 초기 선교사들은 마포삼열을 비롯하여 이길함, 언더우드, 소안론(W L Swallen), 배위량(W B Baird), 곽안련(C A Clark), 이눌서(W D Reynolds), 기일(J S Gale), 왕길지(G Engel) 등이었다. 북장로교 선교사의 경우 매코믹 신학교 출신이 신학교육을 주도했다. 마포삼열은 신학교의 설립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1924년까지 24년간 교장으로 봉사하였고, 그 후에는 라부열(S L Robert) 선교사가 2대 교장으로 봉사했다.

제1회 장로회공의회(1901년 9월) 회원 일동
제1회 장로회공의회(1901년 9월) 회원 일동

1907년 6월 20일에는 신학교 첫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길선주(40세), 방기창(58세), 서경조(58세), 송인서(40세), 양전백(39세), 이기풍(40세), 한석진(41세) 등 7명이다. 이들은 그해 9월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써 한국의 첫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감리교는 1901년 김기범 김창식 두 사람을 ‘집사 목사’로 안수하였으나, 장로교회는 1907년 9월 17일 비로소 목사를 배출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한국 장로교회 형성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08년에는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했으나 1909년(제2회)에는 8명을, 1910년(제3회)에는 27명을, 1911년(제4회)에는 15명을 배출했다.

신학교 역사에서 획기적인 일은 시카고의 매코믹 여사가 기부한 5000달러로 교사를 신축한 일이다. 신학교는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의 6000평 대지에 있었는데, 1908년 5월에 2층의 한옥 교사를 건축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였다. 후에 교사 주변에 6동의 기숙사가 건립되었는데, 두 동은 매코믹 여사가 보낸 기금으로 지었고, 선교부별로 각각의 기숙사를 지어 신학교육을 지원하였다.

이후 신학교는 크게 발전하여 1916년에는 230명의 목사 후보생이 재학하고 있었고, 6명의 전임교수와 7명의 협동교수가 있었다. 이때까지의 졸업생 누계는 171명에 달했다. 1918년에는 신학교 교지 성격으로 ‘신학지남’(神學指南 2015年 겨울호, 통권 제325호)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조선예수교장로교 신학교가 추구한 신학은 역사적 기독교 신학을 견지했고, 칼뱅주의적인 보수주의신학을 추수했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 성경의 영감설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적어도 1920년대 말까지 한국교회는 이런 입장에 굳게 서 있었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