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왜 신앙고백이 필요한가?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말을 진술하는 것과는 다르다. 진정한 신앙고백에는 세 가지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첫째, 사실에 대한 내용과 그 내용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지 그 내용이 있어야 하며,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슨 내용을 말하고 있는가는 관심도 없고 인식도 없으면서 이 말을 백 번하면 병이 낫는다거나, 귀신이 쫓겨 간다거나, 마음이 평안해진다는 생각을 갖고 어떤 진술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은 신앙고백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최면이나 염불일 뿐이다.

둘째, 자신이 진술하고 있는 그 내용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럼으로써 진술하고 있는 그 내용과 나 자신과의 관계가 분명해지는 것이다. 그래야 단순한 객관적 사실 진술이 아니라, 나의 신앙고백이 되는 것이다. 신앙고백은 제 3자적 입장에서 어떤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인가를 분명히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신경도 “나는 …..을 믿습니다.”라는 말로 고백하는 것이다.

셋째, 진정한 신앙고백이 되기 위한 셋째 조건은 진술하고 고백한 내용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다. 그 고백을 수행하기 위하여, 혹은 그 고백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떤 대가나 희생도 기꺼이 지불하는 삶을 말한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 가운데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부인하지 않기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진정한 신앙고백에는 그 고백을 하는 사람의 전적인 헌신이 언제나 수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신앙고백은 그가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인가를 분명히 알게 한다. 한국교회에는 진술(statement)만 있지, 고백(confession)이 없는 것 같다는 의견을 사석에서 피력한 외국인 교회사 학자를 만난 적이 있다. 진술은 어떤 사실에 대한 인정이라면, 고백은 자신의 삶을 건 헌신을 수반한다. 신앙고백이 분명하다는 것은 그는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것이 분명한 사람이라는 말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에게 신앙고백은 생명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언어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생사의 사건이다. 그 고백 때문에 모든 고통을 걸머지면서도 살아남을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그 고백 때문에 모든 영화를 내려놓고 죽을 수도 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한 신앙고백을 요구하신 것은 이 때문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그러므로 신앙고백은 신자의 힘이다.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이다. 참된 신앙고백을 하며, 그 고백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삶의 현장에서 뵈옵게 된다. 신자가 이 땅에서 누릴 가장 큰 위로요, 보람이요, 행복이다.

그러나 수많은 신자들이 신앙고백을 단순히 언어행위로만 여길 뿐, 그것에 신자와 교회의 삶을 걸어야 되는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신앙고백이다. 신앙고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기독교인과 기독교 지도자들이 여기저기 교회 안팎에 널려있다.

그런데 신앙고백을 강조하면 교회의 화합과 일치에 장애가 된다고 드러내놓고 말하기도 한다. 신앙고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교회를 편협 되게 하고 외곬으로 만든다고 비난한다. 포용력을 갖고 폭넓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한다고 불평한다. 무엇을 믿는가를 신앙의 본질로 삼지 않고, 무엇이 더 현실적으로 실용성이 있는가를 중요한 관심사로 삼는 데서 온 병폐이다. 신본주의를 버리고 인본주의로 살기 시작하면서 초래된 참상이기도 하다.

신앙을 고백하는 것과 신앙고백을 가르치는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시작하면 결국은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이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는 무서운 결과를 몰고 오게 된다. 신앙고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결국 교회를 교회가 아닌 것으로 만들고, 신자를 신자가 아닌 사람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선지자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을 갈멜산으로 모아놓고 단도직입적으로 요구한 것이 그것이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좇으라!”(왕상 18:21)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고, 그 고백대로 살라는 요구였다. 그들의 현실에서 여호와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알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 되었고, 그것은 곧 아합과 이세벨을 등지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기를 포기하는 것을 각오하는 것이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님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을 요구하신다. 한국교회와 성도는 갈멜산에서 주어졌던 엘리야의 도전 앞에 심각히 자신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요구에 머뭇거리지 말고 반응해야 한다. 그것은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고 그 고백대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설사 현실적으로는 망하는 길처럼 보인다 해도 말이다.(*) 글쓴 이 / 정창균(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