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이해와 선교

PARTⅠ

이슬람 이해

이 글은 2014년 3월 27일 서울 상현교회에서 있었던 예장(통합)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위원장 임준식 목사)와 이슬람교대책위원회(위원장 권영욱 목사)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제98회기 지역별 순회세미나에서 이슬람대책위 강사가 발표한 발제문이다.< 편집자 주 >
1. 이슬람에 대한 이해

(1) 이슬람의 경전 꾸란(Quran)

오늘날 이슬람(Islam)은 기독교, 불교, 유교로 불리는 세계 4대 종교의 하나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무지하면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슬람을 이단(異端)으로 보느냐 타종교로 보느냐 하는 것은 이슬람의 신(神) 알라(Allah)를 기독교의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신(神)으로 보느냐 아니면 다른 신(神)으로 보느냐에 달렸다. 즉 같은 신(神)으로 본다면 이단(異端)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다른 신(神)으로 본다면 타종교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이슬람의 신(神) 알라(Allah) 는 기독교의 하나님의 속성(屬性)과 다르고 이슬람의 율법과 경전의 기본 교리(敎理)가 기독교와 다르기 때문에 이슬람은 이단이 아니라 타종교로 보아야 한다.

이슬람이 말하는 최후의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 571?-632)는 무슬림(Muslim)들에 의해 모든 계시(啓示)의 종결자(終結者)로 추앙 받고 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신(神)으로부터 받았다는 계시(꾸란, Quran)는 다분히 주관적이고 인위적으로 절대화 되어 있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인위적으로 절대화 된 꾸란(Quran)이라는 이 교리에 철저히 복종하기 때문에 꾸란(Quran)의 영향력은 무슬림들에게 절대적이다.

그런데 이슬람은 꾸란(Quran)이 기독교의 신구약 성경과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기독교보다 600년 후에 등장한 이슬람의 교리가 실제로는 신구약 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슬람은 처음부터 기독교를 반대하고 기독교 신앙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등장한 종교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독교에 대해 호전적이다.

신약성경 사복음서가 증거 하는 예수는 인류의 구세주이시다. 그러나 이슬람의 경전 꾸란의 예수는 이와는 너무나 상이(相異)하다. 복음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구원을 가져 온 평화의 왕으로 계시한다. 그러나 꾸란은 예수를 이스마엘이나 이삭과 같은 선지자 중 하나로 보며 최후 계시자는 예수가 아니라 무함마드라고 한다.(꾸란 2:136; 3:84; 4:163) 또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함으로 기독교의 구원의 교리를 거부한다.

꾸란은 이스마엘이 알라(Allah)의 메신저와 선지자가 되었다고 주장하지만(꾸란 19:54), 성경은 이삭이 약속의 자녀로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었다고 증거 한다. 또 꾸란은 예수가 알라의 심부름꾼일 뿐이라고 폄하한다.(꾸란 4:157) 꾸란에 의하면 예수는 스가랴, 세례 요한,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의인’(義人)에 지나지 않는다.(꾸란 6:85) 이것은 꾸란이 1세기의 그레코-로만 세계에 퍼져있던 ‘의로운 죽음’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혼합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꾸란의 내용들은 대부분 이슬람이 형성되기 전에 존재했던 당시의 이방 종교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미 그레코-로만 시대에 초기기독교에 대한 타종교의 폭력이 심화되었었는데 이른바 이러한 반(反) 기독교적 전통을 이은 꾸란은 기독교인들을 어리석은 이교도로 폄하한다. 꾸란은 기독교인을 거짓말쟁이로 단정 짓기 때문에(꾸란 18:4,5) 이슬람은 기독교인이 경배하는 것은 다 배격한다.(꾸란 109:1-6)

그렇기 때문에 꾸란은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을 절대 친구로 삼지 말라고 경고하며(꾸란 5:51), 심지어 알라(Allah)를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항하여 싸우라고 명령한다.(꾸란 9:29) 그래서 꾸란은 기독교인을 이교도로 취급하며 기독교 여성과 결혼하는 것도 금지한다. 꾸란은 이교도 여성과 결혼하는 것보다 무슬림의 노예와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가르친다.(꾸란 2:221) 이 율법은 지금까지 철저히 이행되고 있어 무슬림과 결혼한 타 종교인들은 이슬람국가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러나 꾸란은 그들이 말하는 예수 즉 ‘이싸’(실제로는 신약의 예수와 다름)를 28회나 언급할 정도로 신약성경의 영향을 받았다.(꾸란 2:87,136,253, 3:3,45,52,55,59,84, 4:157,163,171, 5:46,78,110,112, 114, 116, 6:85, 19:34, 33:7, 42:13, 43:57,61,63, 57:27, 61:6,14) 또 꾸란은 예수를 ‘이싸 알 마씨’(그리스도 예수)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에 반대하기 위해 그렇게 부르고 있을 뿐이며 실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최후의 선지자인 무함마드를 위해 앞서 온 세례 요한과 같은 선지자로 이해한다.(꾸란 61;6)

또 꾸란은 그리스도를 왕, 제사장, 선지자 삼중직의 구원자로 이해하지 않고 무함마드의 수하에 있는 일개 선지자로 간주하여 기독교 정통교리에 엄청난 폭력을 가한다. 이처럼 이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꾸란에 나오는 28명의 예언자들 중에는 예수뿐만 아니라 의외의 인물인 알렉산더 대왕까지 나오는데 이것은 이슬람이 혼합주의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꾸란이 말하는 것처럼 인성(人性)만 가지신 예언자가 아니라 완전한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가지신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
또한 영지주의(靈智主義) 이단이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이슬람 역시 이 영향을 받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죄와 사망 가운데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그를 믿는 자들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성취하셨다고 증거하고 있다.

(2) 이슬람과 여성

현대인에게 문화가 옷과 같은 것이라면 종교는 마음과 같다. 즉 옷이 그 나라의 문화를 표현한다면 종교는 그 나라 사람들의 마음과 사상을 표현한다. 옷이 문화라면 종교는 삶이기에 여성이 남성보다 옷에 더 신경을 쓰는 것처럼 남성은 종교에 더 열심이다. 근본주의 이슬람이 평화를 가장한 문화의 옷을 입고 한국사회에 다가온다는 사실을 중시하여 우리는 이슬람 원리주의가 여성을 어떻게 이해하며 해석하는지 더 나아가서 인간의 문화에 어떻게 적용하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유대인들이 모세 오경처럼 중시하는 미쉬나(Misnah, 유대교의 전통적 규범, 막 7:3-15)는 주후 200년경 여후다(Jehuda)에 의해 성문화되었다. 그는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을 찬양했는데 그의 두 번째 찬양은 여성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여후다보다 200년 전의 예수님은 여성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예수에게 끌고 와서 모세의 율법이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했는데 예수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요 7:53-8:11) 이 때 예수님은 남녀 모두를 죄인이라는 관점에서 동등하게 다루셨기 때문에 여성만 정죄하시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대답하심으로 여자에 대한 편견이 없음을 잘 보여주셨다.

그러면 꾸란은 어떻게 말하는가? 간음한 남녀를 둘 다 백대씩 때리라고 말한다.(꾸란 24:2) 그러나 이슬람에서 꾸란과 버금가는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이맘(imam) 부카리(Bukhari)의 하디스(Hadith)에 무함마드가 간음 사건을 다루는 장면을 보면 다르다. 간음한 여자만 가슴까지 땅에 묻고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은 즉시 실행되었고 지금까지도 그의 행동 모델은 무슬림들의 지침이 되고 있다.

이슬람 사회를 지탱하는 이슬람의 법 샤리아(Sharia)는 여성에 대해 사랑과 용서보다는 형벌을 강화함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위에 있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 남녀가 모두 동등하게 지음 받은 존재라고 하면서도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꾸란은 “마음에 드는 여성 2명, 3명 혹은 4명과 결혼해도 좋다.”(꾸란 4:3)라고 하며 일부다처(一夫多妻)를 두둔한다. 이는 21세기의 일부일처(一夫一妻)와 남녀 양성(兩性) 평등사상과 다른 이중적인 가르침이다.

구약성경에도 일부다처(一夫多妻)의 사례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원래 창조 시부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둘이 합하여 한 몸이 되라고 말씀하심으로 일부일처(一夫一妻)를 명하셨다. 성경인물 중 하나님의 명령으로 일부다처를 취한 경우는 없고 다처(多妻)를 취했기 때문에 가정의 불화와 어려움을 겪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신약성경보다 700년 후에 기록된 꾸란이 여성에 관해 언급한 내용들을 마태복음과 비교해 보자. 무함마드는 노골적으로 여성을 낮추어 본다.

신약성경 :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마 14:4)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 26:13)

꾸란 : “남자는 여자보다 우위(優位)에 있다. 알라(Allah)께서 서로 간에 우열(優劣)을 붙인 것으로서 또한 남자가 생활에 필요한 돈을 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점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우위에 있으며 따라서 정숙한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하고”(김용선, ‘꾸란의 이해’, 375에서 재인용, 꾸란 2:187도 ‘남성은 여성의 위에 서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꾸란은 여성보다 남성이 우위에 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한다. 특히 ‘알라께서 서로 간에 우열(優劣)을 붙인 것’이라고 함으로써 이슬람에서는 남성이 영원히 여성 위에 존재한다. 반면에 마태복음 14장은 권력으로 여성을 차지한 헤롯의 잘못까지 지적하고, 마태복음 26장은 예수님이 여성을 죄인으로만 간주하던 당시의 시각을 수정하여 여자였지만 공정하게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동을 높이 평가한다.

주로 여성에 관해 언급한 꾸란 제2장 암소의 장 ‘바까라’와 제4장 여인의 장 ‘니싸아’를 통해서 근본주의 이슬람의 여성이해를 살펴보자.

‘바까라’에는 남성에게는 유리하고 여성에게는 불리한 조항들이 있다. 무슬림의 결혼은 전적으로 남성 위주이다. 남성은 정식으로 결혼을 했더라도 두 번까지는 언제든지 원하면 이혼을 할 수 있고(꾸란 2:229), 여성과 동침하지 않았다면 지참금을 주기 전에 이혼해도 죄가 안 된다.(꾸란 2:236) 이혼 당한 여인은 임신 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3번의 생리가 끝날 때까지 반드시 남자의 집에 머물러야 하며 만일 여자가 임신 중이었다면 출산과 동시에 추방된다.(꾸란 65:4)

또 법정 증인 채택에서도 남성 한 명에 여성 두 명이 필요하다고 함으로써 여성을 남성 절반의 가치로 간주한다.(꾸란 2:282) 여성 한 명이 잘못 증언하면 다른 한 여성이 그 증언을 보충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이로써 여성의 증언 자체를 평가절하 한다.

또 남성 한 명에게 상속 된 재산과 여성 두 명에게 상속 된 재산의 금액이 같다.(꾸란 4:176)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보다 두 배를 상속받는다. 특히 ‘바보’에게는 재산을 분배해서는 안 되는데(꾸란 4:5), 그 ‘바보’가 꾸란의 전후 문맥상 여성이라는 점에서 얼마나 여성을 무시하는지 알 수 있다. 꾸란은 이러한 여성에게 불리한 재산 상속을 이슬람 법으로 못 박고 있다.(꾸란 4:11) ‘바보’를 뜻하는 아랍어 ‘수파하’에 대해 922년에 죽은 꾸란 학자 알 타바리(Al-Tabari)는 남긴 ‘타프시르’(Tafsir)라는 책에서 ‘바보 중에 가장 바보가 여자’라고 했다.

니싸아(꾸란 제4장)에는 간음과 쾌락에 대해 애매모호한 가르침이 있다. 자기 아내 이외의 여성과 간음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고 정상적인 쾌락을 얻으려면 돈을 주고 그 쾌락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꾸란 4:24) 즉 여자에게 돈을 주면 간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남성의 간음은 허용하면서 여성에게는 절대 간음하지 말라고 한다. 그 이유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에 여성은 무조건적으로 남성에게 순종해야 한다.(꾸란 4:34) ‘누수즈’는 아랍어로 부인이 남편의 권위에 항거한다는 뜻인데 이슬람법에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반역과 같은 행동이다. 또 신분이 좋은 여자를 얻고 싶은데 재산이 부족할 때는 그 여자에게 줄 지참금으로 하녀를 대신 줄 수 있다.(꾸란 4:25)

이슬람 사회에서 자주 거론되는 명예 살인(殺人)도 여성을 철저히 유린한다. 근본주의 이슬람은 여성이 옷에 향수를 바르거나 남성들만 모인 곳에 지나가는 것조차 창녀처럼 여긴다. 이러한 편견이 여성을 단순하게 속박하는 것을 넘어서 여성의 인권을 유린할 뿐 아니라 이슬람 법 샤리아(Sharia)에 따라 명예 살인이라는 끔직한 범죄로 이어진다. 이 점에서 이슬람 법 샤리아는 21세기의 보편적 가치인 민주주의와 인권문제를 초월하기 때문에 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다.

꾸란은 또 이렇게 가르친다. “간음한 여인을 집안에 감금하되 죽음이 그녀를 데려가든지 알라(Allah)가 구원의 길을 열어 줄때까지 감금하라.”(꾸란 4:15) “나쁜 짓을 한 자는 임종의 순간에 회개해도 아무 소용없다.”(꾸란 4:18) 이는 성경에 예수께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에게 하신 말씀과 또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쪽 강도에게 자비를 베푸신 말씀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꾸란에 여성과 관련되어 많이 등장하는 주제가 결혼(꾸란 2:221,230, 235,237, 4:3,4,6,22-25,127, 5:5, 11:78, 15:71, 23:6, 24:3,32,33,60, 25:54, 28:27, 33:37, 49,50,52,53, 47:3, 60:10)과 이혼(꾸란 2:227,229-232,236-237, 33:4,37,49, 58:2,3, 65:1, 66:5)에 관한 것이다. 꾸란 4:22-23이 부적절한 결혼에 관해 나열하지만 이미 이런 결혼은 이슬람 사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왜 꾸란이 이렇게 결혼 금지 문제를 길게 언급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역발상으로 생각해보면 이슬람 사회에서 이혼과 재혼을 손쉽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남자들에게 다양한 이혼과 재혼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다.

꾸란 2:232은 “이혼당한 여자들이 헤어진 남편이 재혼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꾸란 4:19은 “이혼한 여성이 재혼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지만 사실상 무슬림 권에서는 남성 위주의 이혼과 재혼만이 가능하다. 아랍어에서 이혼이란 단어인 ‘탈락’은 모든 시대를 불문하고 이혼이 남성의 말에 의해 성사되어 온 것을 의미한다. 과연 이혼이 남성 한 쪽의 의견만 중시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예수님은 본래 이혼과 재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셨다. 모세 율법은 이혼증서를 써주면 가능하다고 가르쳤지만(마 19:7, 참고 신 24:1-4), 마태복음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완악하였기에 이혼을 허락한 것이라고 하면서(마 19:8) ‘음행한 이유 외에’ 이혼과 재혼을 간음이라고 해석하였다.(마 19:9) 그러나 본래의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혼과 재혼 자체를 금하셨다.(눅 16:18, 막 10:11,12) 예수님이 재혼과 이혼을 금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따른 것이며 또한 당시 여성들에게 불리한 남성 위주의 사회적 환경에서 열악한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고 생존권을 지켜주려는 것이었다.

21세기 이슬람 사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슬람 사회에서 이혼과 재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이는 꾸란이 가르치고 있는 방식과 큰 차이가 없다.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숭고한 정신 위에 든든하게 세워져야 한다. 이 점에서 성경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결혼과 이혼에 관한 가르침은 꾸란에 나타나 있는 무함마드의 가르침보다 21세기에 더 중시되어야할 인류의 보편적 선행적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3) 이슬람 문화와 기독교 문화

역사상 로마 가톨릭이 주도한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많은 무슬림들이 희생당한 후 현대에 이르러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지하드(jihad)의 형태로 미국의 9.11테러와 같은 끔직한 사태를 촉발하였다는 측면도 있지만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만고의 진리 앞에서 우리 모두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이슬람은 지하드(jihad) 곧 이슬람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불신자들을 죽이는 전쟁을 정당화 한다. 아랍어 지하드(jihad)는 성전(聖戰, 거룩한 전쟁)이라고 번역되기도 하지만 투쟁(鬪爭)이라는 의미가 더 정확하다. 학자들은 이를 대(大) 지하드와 소(小) 지하드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이는 원래 지하드의 의미가 너무 혐오스러워 12세기 때 알 가잘리(AL-Ghazali)라는 학자가 구분지은 것이다. 그는 하디스를 인용하여 소(小) 지하드는 이슬람을 수호하기 위해서 무기를 들고 싸우는 전쟁을 의미하고 대(大) 지하드는 내면의 전쟁 즉 죄악과의 전쟁, 음란과의 전쟁 등 영적(靈的) 전쟁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 지하드(jihad)는 이슬람 확산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용되는데 ‘마음으로 나타나는 지하드,’ ‘글로 나타나는 지하드,’ ‘통치로 나타나는 지하드,’ ‘칼로 나타나는 지하드’ ‘금융 지하드’ ‘싸이버 지하드’ 등 여러 종류가 있다. 테러와 전쟁은 이념과 군사력이 충돌할 때 일어나지만 결코 종교의 이름으로 테러가 감행되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서구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근본주의 이슬람에 대한 대표적인 이미지는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 ‘한 손에 꾸란, 한 손에 칼’인데 미국 9.11 테러 이후로 이런 이미지는 더욱 더 고착되었다. 혹자는 이는 이슬람에 없는 사상이라고 미화시키기도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를 보면 한 손에 꾸란 한 손에 칼이라는 구호가 그림으로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 근본주의 이슬람이 극단적인 과격한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이유를 꾸란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서구문명을 적대시하려는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문화적 이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슬람 문화의 종교적 전통은 사랑과 평화와 자비보다는 비난과 폭력을 앞세우기 때문에 이슬람은 평화나 진리라는 미명하에 이념으로 무장한 정치 집단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슬람의 정치 집단적 의식은 무함마드가 출현할 당시에 유목민이 가졌던 가치관과 친족 중심의 연대의식이 지닌 부족 중심의 전형적인 집단 지향성에서 기인된다. 이러한 내용은 이집트 정치가였던 하이칼(Muhammad Husayn Haykal)이 1933년에 쓴 무함마드 전기(The Life of Muhammad)에도 잘 나타나있다.

(4) 한국의 다문화 가정

핵무장을 치밀하게 준비한 이란이 근본주의 이슬람 패권주의(覇權主義)의 상징이 되고 있다. 이슬람 원리주의가 ‘테러 지하드’를 통하여 세계를 정복하려고 한다. 이슬람의 세계 정복은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와 유럽을 넘어서 미국과 동북아시아로 확대되고 있다.

이슬람의 한국 진출도 도를 넘었기에 극도의 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자주 제기되고 있다. 한국 기독교가 ‘비전 2020’을 향해 범 교단적으로 군(軍) 복음화 선교에 박차를 가하는 마당에 이슬람이 2020년에 세계 이슬람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함으로써 한반도를 거점으로 전 세계를 이슬람화 하려는 전략을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이슬람은 한국에서 모스크 건립, 국제 이슬람학교 설립, 이슬람문화센터 설립, 꾸란 번역, 이슬람대학 건립, 이슬람 관련 서적과 자료 출판(일명 ‘펜의 전략’), 결혼 전략 등을 추진 중이다. 이러한 내용은 2005년에 이슬람연맹에 의해 발행된 ‘한국이슬람 50년사’에 발표되었다. 많은 이들이 이 문제에 관심 갖고 한국인의 전통가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일치하지만 이슬람의 문화적 가치는 21세기의 보편적 문화와 불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슬람의 대(對) 한국사회 침투에 대비해 전략적으로 협력해 나가야한다.

이슬람중앙회가 CTS 기독교 TV가 방송한 “이슬람 한국진출 이대로 좋은가?”에 대해 2008년 12월 18일 언론중재위원회에 3차에 걸쳐서 제소하였다가 취하한 사건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한국기독교에게 일깨워준 단적인 예이다. 이 사건은 기독교 학자들이 학문적으로 이슬람의 폭력성을 경고한 내용에 관해 이슬람 측에서 스스로 시인한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 이슬람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검은 돈인 오일 머니를 앞세우고 또한 문화의 옷을 입고 한국사회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 이러한 도전은 한국 교회 안에 많은 다문화 가정이 침투해 들어오면서 더욱 위험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인들처럼 외국문화를 쉽게 받아들이는 민족도 드물다. 다이어트 열풍으로 한국사회에 침투해 들어온 이슬람의 벨리 댄스(Belly Dance)는 어느덧 우리의 전통문화인 국악 한마당을 능가하였다. 주말에 동네 인근의 야산 입구에서 문화공연이라면서 배꼽을 드러낸 한국여성들이 벨리 댄스를 추는 어설픈 일도 빈번해졌다. 지금 동네마다 개설된 문화센터에 벨리 댄스 무료강습과 아랍어 무료강좌가 앞 다투어 선보이는데 이런 배경에는 이슬람을 포교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으며 여기에 이미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문화의 파괴력은 우리가 상상 못할 위력을 가지고 있다. 수능시험에서 아랍어를 제2 외국어로 선택하는 일이 해마다 늘고 있다. 아랍어가 상대적으로 다른 외국어보다 쉽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는 그 반대로 아랍어 시험문제의 난이도가 다른 외국어 과목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기 때문이다. 아랍어 알파벳만 알아도 될 정도다. 또한 표준 점수제라는 채점제도 때문에 많은 이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통계를 보면 지난 3년간 8개 제2 외국어 과목시험을 치른 학생 중의 평균 45% 정도가 아랍어를 선택했다.

그러자 일부 무슬림 학자들은 신문의 칼럼을 통해서 “이렇게 인기 있는 아랍어를 왜 사(私) 교육에 맡기고 있나? 즉시 공(公) 교육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공교육으로 끌어들이라는 말은 전국 고등학교에 아랍어 교사를 한 사람씩 배정하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슬람권에서 교사자격의 이슬람 선교사들이 물밀 듯이 들어와 우리 학생들의 영혼을 점령해 나갈 것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즉시 난이도의 형평성을 조정하여 교묘하게 입시까지 손을 대는 이슬람이 다른 외국어를 택한 학생들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는 불공정관행을 개선해야한다. 이슬람의 여성 차별과 일부다처제는 혼인의 순결과 양성평등과 일부일처제의 가치를 중시하는 한국사회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전근대적인 악습을 이슬람은 이것을 숨기고 문화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우리 집 안방까지 발을 들여놓으려 한다.

무슬림 여성들의 인권도 심각한 상황이지만 아무도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인권상황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이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는 길이 열려야 한다. 앞으로 무슬림여성의 인권문제와 더불어서 무슬림 남성과 결혼한 후에 자녀까지 낳았지만 이슬람법에 따라 이혼당한 한국인 여성의 처참한 인권상황에 관한 연구들도 많이 나오기를 희망한다.

한국에서 무슬림 남성이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도 한국국적만 받으면 고국에 있는 본처와 자식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서 한국인 여성들과 서류상 이혼을 하고 동거하기도 한다는데 이런 변형된 일부다처제는 가정파괴의 주범이며 일부일처제라는 보편적 가치에 비추어 볼 때 반(反) 인륜적인 범죄이다.

이슬람 포교의 강력한 수단이 결혼을 통한 자연출산율 증가라는 사실은 이미 확인되었다. 이슬람은 한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누리지만 이슬람권에 있는 많은 한국인 봉사자들과 전문사역자들은 공적인 활동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온갖 생명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이슬람권의 이런 암담한 상황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처참하게 인권유린을 당하는데 향후 이 문제에 관한 국제적인 동조와 연구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2. 성경의 아브라함과 꾸란의 이브라힘은 같은가?

우리는 이슬람을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종교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다. 즉 아브라함의 종교를 이삭을 통해서 전수받은 사람들이 기독교와 유대교인들이라고 한다면 이스마엘을 통해서 전달 받은 사람들이 바로 무슬림들이라는 설명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슬람의 신(神) 알라(Allah)와 기독교와 유대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섬기던 바로 그 신(神)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기독교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종교를 타락시키고 경전으로 내려 준 성경을 변질시켰기 때문에 알라(Allah)가 선지자 무함마드(Muhammad, 571-632)를 통해서 하늘에 있는 경전의 원본을 내려 보내어 아브라함의 종교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 이슬람이라는 주장을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반복되는 이런 거짓말에 속아 오늘날의 중동사태를 배다른 형제들의 싸움이니 이삭과 이스마엘의 싸움이니 하면서 무슬림들의 근거 없는 주장을 대신 홍보해 주고 있는지 모른다.

무함마드는 과연 이스마엘의 후손인가? 이 문제를 생각하자면 거슬러 올라가서 아브라함부터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경의 아브라함(Abraham)과 꾸란의 이브라힘(Ibrahim)이 과연 같은 인물인가?

성경의 아브라함은 아버지 이름이 데라(창 11:31,32)인데 꾸란의 이브라힘의 아버지 이름은 아자르(Azar)라고 한다.(꾸란 6:74) 우선 아버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는데 99세 때부터 하나님께서 바꿔주신 이름이다.(창 17:5) 그런데 꾸란의 이브라힘은 젊었을 때부터 이브라힘이라고 불리던 사람이었다.(꾸란 21:60) 또한 성경의 아브라함은 이방인들에 의해서 불속에 던져진 일이 없는데 꾸란의 이브라힘은 이방인들이 그를 불속에 던진 것을 알라(Allah)께서 구해 주셨다고 한다.(꾸란 21:68,69) 꾸란의 여러 주석에 보면 그를 태워 죽이려던 이방인들은 앗수르 왕 니므롯의 백성들이라고 한다.(김용선 주석, 최영길 주석)

특별히 성경의 아브라함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Makkah)에 간 일이 없는데 꾸란의 이브라힘은 메카에서 이스마엘과 함께 카바(Kaaba) 신전을 건축했다고 한다.(꾸란 2:125~127) 그리고 이슬람의 제 2경전이라고 불리는 부카리(Sahih al Bukhari)의 하디스(hadith)에 보면 이브라힘은 이스마엘에게 이혼을 명령했다는 것이다.(Bukhari hadith volume4 book 55 number 584) 성경과 꾸란의 이러한 극심한 내용상의 차이는 성경의 아브라함(Abraham)과 꾸란의 이브라힘(Ibrahim)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또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스마엘이 메카에 가서 살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스마엘이 메카로 간 것이 아니라 바란 광야에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21:21) 성경은 “그가 바란 광야에 살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애굽 여인을 아내로 얻어 주었다.”고 되어 있어 애굽 여인과 결혼할 때는 그가 바란 광야에 살았지만 평생을 거기서 살았다는 말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히브리 원문에는 ‘때에’라는 말이 없다. “그는 바란 광야에 살았다. 그리고 그의 모친이 애굽 여인을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는 것이 올바른 번역이며 킹 제임스 번역이나 Good News Bible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즉 성경에 의하면 이스마엘의 거처는 바란 광야 즉 이스라엘 남쪽이며 모세가 열두 정탐꾼을 보냈던 가데스바네아 북부의 바란 광야였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이 메카에 가서 살았다는 이슬람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보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또 이스마엘의 후손 중 어떤 사람이 메카에 가서 살았고 그들의 후손 중에 무함마드가 태어나서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시작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친절하게도 이스마엘의 후손들의 거처까지 알려주고 있다. “이스마엘의 자손들은 하윌라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창 25:18) 하윌라에서 술까지 통하는 지역이 어디인지 우리가 잘 모른다. 그러나 친절하게도 영어 성경에 보면 거기가 어딘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Near the border of Egypt(이집트 국경 부근)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쉽게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이스마엘의 모친인 하갈은 애굽 여인이었다. 그리고 이스마엘의 아내도 애굽 여인이었다.(창 21:21) 그렇다면 이스마엘과 그의 후손들이 애굽 근처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언어이자 할머니의 언어를 그 자식들과 자손들이 자연스럽게 배웠을 것이기 때문에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살았을 것이라는 것이 자연스런 추측이며 성경도 애굽 국경 부근에서 살았다고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슬람 측의 주장을 합리화 하려면 이스마엘의 몇 대 후대의 자손들이 언젠가 메카로 이주해 와서 그 조상 이스마엘이 아브라함과 함께 섬기던 그 창조주 하나님을 섬겼었는데 그 후손 중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주장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인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훌륭한 학자가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근거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우리가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도리어 성경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들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시편 83편을 읽어 보면 3절에 “주님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님의 원수들이 누구란 말인가? 6절에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 이들이 주님의 원수들이라고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마지막 18절에 보면 “여호와라 이름 하신 주 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마치고 있다. 즉 이스마엘 후손들과 하갈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원수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며 살았던 것이지 그 후손들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그대로 대대손손이 물려주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마엘이 하갈의 복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의 장래를 예언해 준 것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사람 중에 들 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He will lie in hostility toward all his brothers. 창 16:12) 이스마엘은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형제들과 대적하며 살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으며 이스마엘의 후손들도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하였더라.”(창 25:18)라고 번역되었지만 영어 성경에 보면 “they lived in hostility toward all their brothers.”라고 되어 있다.

이스마엘은 그의 형제들과 적대적 관계로 살 것이고 그의 후손들 역시 그 형제들 즉 이삭의 후손들과 적대관계를 가지고 살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었고 또 그 예언대로 적대적 관계를 가지고 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시편 83:) 그러므로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아브라함으로부터 계승한 믿음을 충성스럽게 지키다가 무함마드 때에 그 믿음을 크게 확산시켰다는 주장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원수로 살았다는 성경 말씀과는 정반대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부카리(Bukhari)의 하디스(hadith)에 보면 이브라힘이 이스마엘과 하갈을 데리고 메카에 와서 거기 버리고 갔다고 한다. 그 때 메카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천사가 파준 우물 잠잠(ZamZam)에서 물이 흘러나오자 주르훔(Jurhum) 족속의 사람들이 와서 함께 살기를 청하였고 그 때 이스마엘은 젖먹이였으며 그들이 이스마엘에게 아랍어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하갈은 주르훔 족의 아랍 여인과 이스마엘을 결혼 시켰다는 것이다.(Sahih Bukhari volume4 book 55 number 584) 그래서 이스마엘은 아랍인들의 조상이 되었다고 하는데 성경에 의하면 이스마엘은 메카에 가지도 않았으며 이집트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러나 이 하디스(hadith)를 기초하여 후대 사람들이 무함마드의 족보를 만들어 냈다. 이슬람의 제2의 경전인 부카리의 하디스에 이스마엘은 주르훔 족속에게서 아랍어를 배웠다는 것을 보면 아랍인들이 이스마엘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스마엘이 모든 아랍인들의 조상이라는 말은 거짓이라는 것을 스스로 반증 하는 것이다.

후대에 만들어진 무함마드의 족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씨엗 유쑤프(Syed Yusuf)로 대부분의 이슬람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무함마드는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 까이달(Qaidar-게달)의 후손이라는 주장이다. 또 하나는 부카리의 하디스가 만들어지기 거의 100년 전에 무함마드의 전기 ‘씨라툴 라쑬알라’를 최초로 펴낸 이븐 이스학(Ibn Ishaq)같은 비중 있는 학자들의 자료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이스마엘의 첫째 아들인 나빗(Nabit-느바욧)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자료는 모두 무함마드부터 이스마엘까지를 25 세대로 그 족보를 소개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웹싸이트에는 30세대로 소개하는 곳도 있다.) 무함마드는 주후 571년에 태어났으며 아브라함은 주전 2000년 전 사람이다. 그 두 사람 간격을 연결하는 인물들이 본인들을 제외하면 23명이라는 족보는 누가 봐도 약 2570년의 간격을 채우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하디스에 무함마드가 자신의 근본에 대해서 설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자기(무함마드)는 무다르(Mudar)의 후손이며 그것은 지브리일(Gibriil) 천사가 자기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는 점이다.(Ibn Sa’d, Kitab al-Tabaqat al-Kabir, Volume I,p.4) 이는 무함마드 자신도 몰랐고 그 조상들에게 전해들은 것도 아니고 자신의 가문이 간직하고 있었던 족보에 근거한 것도 아니며 다만 천사가 말해주었다는 그런 아무도 입증할 수 없고 증거도 찾을 수 없는 계시를 빙자한 무함마드 개인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그것을 근거로 부카리의 하디스에 보면 무함마드가 키나나(Kinana)의 아들 나드르(Nadr)의 자손 무다르(Mudar)의 족족에 속했다고 말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Sahih al Bukhari, volume 4, Book 56, Number 698) 물론 후대 사람들이 이들 이름을 무함마드 족보에 포함시켜 명단을 만들어 낸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슬람 이전 문헌에는 이스마엘과 무함마드가 혈통 상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자료가 없다. 이는 모두 이슬람 이후 무함마드가 했다는 말을 수집하여 엮은 하디스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그 하디스라는 것들이 무함마드가 죽은 지 약 200년 후부터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죽은 지 200년이 넘은 사람이 살았을 때 했다는 말을 수집했다는 것의 신뢰도가 어느 정도나 될까를 상상해 보기 바란다.
그래서 무슬림들이 경전처럼 여기는 부카리의 하디스에는 종종 황당한 기사들이 발견되는데 예를 들면 “지구상의 최초의 성전은 메카의 카아바 신전(Masjid ul Haram)이고 두 번째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Masjid al Aqsa)인데 그 두 건축물의 역사적인 간격이 40년 이라는 것이다.(Sahih al Bukhari Volume 4 Book 55 number 585)

이는 카아바 신전을 자기들 말대로 이브라힘과 이스마엘이 건축했다면 주전 1950년경에 건축했다는 말인데 무함마드가 주후 621년 어느 날 밤중에 천마(天馬)를 타고 방문했다는 예루살렘 성전(Masjid al Aqsa)과 역사적 차이가 40년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때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에 의해서 파괴되어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무함마드가 거기 가서 선지자들과 함께 예배드렸다고 주장하기에 예루살렘 성전은 오늘날 이슬람의 성지가 되어 있는 것이다.(꾸란 17:1 참조)

이슬람의 제2 경전이라고 하는 부카리의 하디스가 이 정도 수준이라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종교가 아니라 무함마드가 속했던 꾸라이시(Quraish) 종족의 신(神) 알라(Allah)를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한 신(神)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아브라함의 이름을 메카로 끌어들여 그의 서자인 이스마엘과 함께 카아바 신전을 건축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 무함마드가 창시한 종교인 것이다. 그러기에 전에는 이슬람을 마호메트교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근거 없는 비(非) 성경적 말을 주장함으로 본의 아니게 그들의 거짓말을 홍보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더 계속해서는 안 될 것이다.

3. 이슬람과 타문화

한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홍익인간(弘益人間)을 목표하는 단일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20세기 후반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가끔 길거리에서 눈이 파랗고 머리카락이 노란 외국인을 만나면 깜짝 놀라 그 외국인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곤 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서면서 외국인들이 급증하더니 이제는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숫자가 150만을 넘어섰고 한 해에 결혼하는 부부 중 외국인과 결혼하는 사람이 10%나 된다.
이제 한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으며 어쨌든 몰려드는 외국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장관급 인사 15명을 포함한 전문가들 50여명으로 구성된 국민 대통합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두고 다문화 정책이 우리나라에 성공적으로 뿌리내리도록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독일 안젤라 메르켈 총리, 영국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프랑스의 사르코지 전 대통령 등 유럽 선진국 지도자들은 자기나라 다문화 정책이 이슬람 때문에 실패했다고 공언했다. 그들도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인들을 융화시켜 평화로운 복지국가를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해 다문화 정책을 추진했었다. 그런데도 한국의 다문화주의자들은 유럽의 실패를 거울삼아 제도를 보완하고 풍성한 재정을 포함한 정책적 지원을 하면 우리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럴듯한 환상에 젖어있다.

유럽의 정상들과 정치인들인들 왜 그런 생각을 안 해 봤겠는가? 재정지원 뿐 아니라 기존의 정책과 제도와 법을 바꿔가면서까지 무슬림들의 비위를 맞춰 평화롭게 공존하려고 노력해봤으나 안 되더라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다. 그런데도 한국이 유럽에서 실패한 다문화 정책을 억지로 추진한다면 우리는 그들보다 더 비참한 실패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면 한국이 그들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복지 혜택이나 재정이나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유럽보다 결코 높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무슬림들은 유럽에서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 문화에 동화될 수 없었을까? 그것은 특별히 문제가 많은 무슬림들만 유럽에 모였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1) 이슬람 율법 샤리아의 기본정신 때문이다.

샤리아(Sharia)의 기본정신은 ‘알 왈라 왈 바라’(Al Walla, Wal Bara)이다. ‘알 왈라’(Al Walla)는 무슬림(muslim)들끼리는 국적, 성별, 피부색, 인종, 언어, 신분에 관계없이 무조건 돕고 보호하고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말이다. 반면 ‘왈 바라’(Wal Bara)는 이슬람 외의 종교를 가진 자들과는 국적, 성별, 피부색, 인종, 언어, 신분에 관계없이 절대로 존경하거나 사랑하거나 친절을 베풀거나 돕거나 친구로 사귀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철저히 미워하며 대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 때문에 이슬람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열성적인 무슬림들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며 특정 지역에 무슬림들끼리 모여살기를 선호하고 자신들의 신앙과 문화를 지키는 게토(ghetto)를 형성해 그 영역을 넓혀 나간다.

(2) 이슬람의 배타적 세계관 때문이다.

이슬람에서는 세계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한 쪽은 무슬림들만 살 수 있는 ‘평화의 집’(다르 알 쌀람, Dar al Salam) 또 한 쪽은 기독교와 유대교를 포함한 불교 힌두교 배화교 라마교 유교 등 이슬람 이외의 모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사는 ‘전쟁의 집’(다르 알 하릅: Dar al Harb)이다. 그래서 열성적인 무슬림들은 설교나 강연들을 통해서 이슬람 이외의 문화권의 사람들과는 항상 ‘지하드’(알라를 위한 전쟁) 상태라는 것을 의식하며 살도록 교육을 받는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이런 교육 내용이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는 하지만 종종 그들의 교과서에 실린 이런 내용들이 서방세계 매스컴에 폭로되어 충격을 주기도 한다. 전쟁 상태라면 그들의 모든 행동은 일반적인 윤리 기준으로 평가하면 안 되고 전시 행동지침이 적용된다는 의미이다. 전시에는 적을 속이는 것은 훌륭한 전략이고 적의 요인들을 암살하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며 많은 적들을 죽인 사람은 영웅이 되고 다른 사람들이 본받아야할 모델이 되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면 온 세계가 혐오하는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 같은 끔찍한 테러범이 이슬람권에서는 영웅으로 존경받는가 하면 평범한 서민들이 알카에다 같은 테러단체에 자발적인 후원금을 보내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3) 무함마드가 보여준 행동지침 때문이다.

무함마드가 보여준 행동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무슬림들의 모델이며 율법의 근원이 되었다. 이를 아랍어로 ‘우스와 하사나’(uswa hasana)라고 한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힘이 없을 때는 “종교는 강제로 하지 말지니라.”(꾸란 2:256)라며 유화 정책을 폈다. 그러다 주후 622년 메디나로 이주 후 세력을 결집하여 힘이 생기자 주변의 족속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고 주후 630년 고향인 메카(Mecca)까지 점령하고는 “이제부터는 두 개의 종교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특히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변질된 경전(經典)을 가지고 있는 타락한 무리들이기 때문에 ‘가장 사악한 피조물’(꾸란 98:6)이라며,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는 “이교도들은 어디서 발견하든지 살해하라.”(꾸란 9:5)고 명령했다. 그래서 이슬람은 초기부터 전쟁과 칼로 세력을 넓혀 나갔다. 어떤 이들은 ‘한 손엔 꾸란 한 손엔 칼’이라는 사상은 이슬람에 없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이는 이슬람의 여러 교리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슬람의 핵심이다.

이슬람의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를 보면 녹색바탕에 이슬람의 신앙고백을 중앙에 아랍어로 적어 놓고 그 밑에 전쟁용 칼을 그려놓았다. 이는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 이슬람의 핵심을 확실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4) 이슬람의 나지스(Najis or Najes) 사상 때문이다.

‘나지스’(Najis or Najes)는 비(非) 무슬림들은 더러운 존재들이라는 관념이다. 이슬람권에 가면 비(非) 무슬림들이 쓰던 잔으로는 마시지 않는 사람들이나 아무리 배가 고파도 비(非) 무슬림들이 주는 음식은 안 먹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몇몇 유별난 사람들이 아니라 정상적인 이슬람 율법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취하는 행동이다.

이슬람에서 가장 거룩하다고 여기는 도시 메카(Makkah)를 향한 고속도로 수십 킬로미터 전방에는 ‘여기서부터 비(非) 무슬림들은 통과할 수 없음’이라는 대형 간판이 있다. 또한 죄수들을 고문실로 끌고 갈 때 눈을 가리는데 죄수가 무슬림이 아니면 죄수의 수갑을 채운 손을 잡아끄는 대신 작은 막대기 끝을 잡고 따라오게 한다. 이는 비(非) 무슬림을 불결하게 여기는 꾸란에 기록된 나지스 사상 때문이다.(꾸란 9:28)

(5) 이슬람에서 비(非) 무슬림을 친구로 삼는 것은 죄악이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이것은 꾸란에 있는 명령이다.(꾸란 3:28, 4:139, 4:144) 유럽에서 이슬람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는 사람들을 위해 안내와 질문에 답변해 주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 거기에 어떤 사람이 비(非) 무슬림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도 되는지 물었다. 이슬람 성직자는 이렇게 답변했다. “그 초청에 응하는 것은 비(非) 무슬림들을 친구로 사귀지 말라는 알라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가면 안 된다.”

심지어 꾸란에는 ‘비(非) 무슬림들은 가장 사악한 짐승들’이라고 정의한다.(꾸란 8:55) 짐승들 중에는 애완용으로 사랑받는 동물들도 있다. 그러나 사람만 보면 달려들어 공격하는 사악한 짐승은 보이는 대로 사살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이슬람 외의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사악한 짐승이라는 꾸란의 구절 때문에 이슬람권에서는 이를 적용한 잔인한 살인사건들이 종종 발생한다. 심지어는 유럽 친구들과 사귄다는 이유로 자기의 친자식을 명예 살인하여 알라에게 충성심을 증명하려는 헌신된 무슬림의 기사가 가끔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6) 타크피르(takfir) 문화 때문이다.

이슬람에서 ‘카피르’(Kafir)는 불신자라는 뜻이지만 배교자 혹은 이교도를 포괄적으로 칭하는 말로 ‘죽여도 좋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타크피르’(takfir)는 ‘카피르’를 처형할 때 무슬림들이 외치는 구호 같은 것인데 지금도 ‘타크피르!’하고 외치면 주변의 무슬림들이 돌과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어 폭력으로 죽이기까지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슬람에는 자경단(自警團)이라는 것이 있는데 배교자, 간음한 자, 살인자 등 주요 범죄자들은 법정에 끌고 가지 않고 직접 처형할 수 있다는 샤리아(sharia) 율법에 근거를 둔다. 따라서 ‘카피르’에게 임의로 폭력을 가해도 처벌 받지 않는 것은 이슬람권에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집단적으로 몰려가서 기독교인들이 예배드리는데 불을 지르거나 결혼식장에 몰려가 테러를 저지르는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이슬람 학자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5인방 중의 한 사람이며 이슬람에 관한 책을 120권이나 쓴 유수프 가라다위(Yusuf al-Qaradawi)는 “만일 배교자를 살해하라는 율법이 없었다면 이슬람은 오래 전에 없어졌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7) 딤미(Dhimmi) 사상 때문이다.

‘딤미’(Dhimmi)는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기독교인이나 유대교인들로부터 목을 자르지 않는 대가로 받는 ‘인두세’(지즈야, jizya)라는 세금제도가 있었는데 이 세금을 내고 목숨을 부지하는 하층민들을 ‘딤미’(dhimmi)라고 불렀다. 이 딤미 제도는 철저한 인권 유린, 폭력과 무거운 세금으로 타 종교인들을 괴롭히던 제도였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을 통치할 때 없애버렸다. 그러나 그 정신은 아직도 무슬림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열성적인 무슬림들은 꾸란을 읽다가(꾸란 9:29) 이 제도가 사라졌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속히 샤리아(sharia)로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어 21세기에도 이 제도를 실행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매주는 아닐지라도 모스크에서 설교를 통해 이런 가르침을 받고 있는 무슬림들은 타문화에 적응이 거의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이미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무슬림들도 많은데 왜 하필 극단주의자들의 견해를 들먹이며 혐오감을 조성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극단주의 무슬림들이 깜짝 놀랄만한 테러를 저질렀을 때 그 많은 평화주의자 무슬림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들도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아(sharia)로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이슬람의 궁극적인 목표에는 동의하지만 성취 방법에서만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인 것이다.

4. 이슬람의 금융 법 수쿠크(sukuk)

꾸라이쉬(Quraysh) 부족이 핵심세력이었던 이슬람이 7세기에 아라비아 반도를 무력으로 정복한 이후 주위에 있던 부족들을 점차 점령해 나가면서 9,10세기에 이르렀을 때 중앙아시아를 포함하여 이집트와 북 아프리카 지역이 이슬람 화(化) 되었다.

현재 무슬림은 전 세계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16억에 이른다. 최근 미국 외교 전문지인 ‘Foreign Policy’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률을 보이는 종교가 이슬람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전통적으로 기독교가 강력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유럽에 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유럽에 이슬람이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슬림 인구의 유입과 유럽의 저조한 출산율에 기인한다. 그래서 무슬림 인구의 다량 유입으로 인해 유럽에서 각종 사회문제가 유발됨으로써 오늘날 프랑스, 오스트리아, 덴마크, 네덜란드, 독일, 영국 등의 유럽 국가에서 반(反) 이민 정책을 고수하며 이슬람을 경계하는 정당이 점차 힘을 얻기에 이르렀다.

위에서 언급한 지역들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나라들 중에 인도네시아와 방글라데시와 태국과 인도에서 이슬람이 점차 그 세력을 확장해 나고 있으며 지난번 북경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의 서쪽 지방 자치구에서 테러와 무력 행동이 수차례 발생한 것을 놓고 볼 때 이슬람의 무장이 아시아에서도 점차 노골화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이슬람이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것은 한국의 근현대사에 있어서 개화기와 일제 점령기에 실크 로드, 아라비안나이트, 신밧드의 모험, 밸리 댄스 등의 대중문화의 옷을 입고 들어 온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이후에 UN의 지원 아래 16개국의 연합군에 포함된 터키 군대가 ‘형제의 나라’라는 미명하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이슬람이 한국 사회에 침투하게 되었다.

최근에 발표된 ‘The Church around the World’에 의하면 지난 50년 동안 기독교는 47%의 성장에 그친 반면 불교는 63% 성장하였고, 힌두교는 117% 성장한데 반해 이슬람은 무려 500%나 성장했다. 이슬람의 성장에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히는 것이 자연성장인 인구증가에 의한 것이다. 이는 이슬람 인구가 아주 높은 출생률 증가로 전 세계에서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 무슬림 금융의 한국 침투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맨해튼에 있던 쌍둥이 건물인 세계무역센터가 무슬림들에 의해 납치된 여객기 2대로 인해서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고, 이어서 또 한 대의 여객기가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 DC에 있는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을 파괴하였고, 마지막 한 대의 여객기가 땅에 곤두박질쳤던 그야말로 철저히 준비된 테러를 벌인 이후에 지금 세계는 이슬람과의 대(對) 테러 전쟁 중에 있다.
그 후에 세계경제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고 있다. IMF 이후에 한국 경제가 되살아나는 듯 하는 분위기도 완전히 역전되어 지금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없는 불확실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세계경제를 주도하던 월가의 주식도 연일 하락하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미국연방 준비제도이사회(FRB)가 세계최대 보험회사인 AIG에게 850억불을 지원하고, 이어서 부시 행정부가 7000억불에 해당하는 사상 초유의 구제금융 법안 처리를 미국 하원에 요청하였지만 1차 표결에서 안타깝게도 부결되었다가 2차 수정안이 가까스로 통과된 일련의 사태는 이슬람과의 대테러 전쟁 중에 있는 오늘날의 세계경제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능히 가늠해 볼 수 있다.

한국이 IMF 직후에 많은 외자 유치를 위해 온갖 힘을 쏟을 때 은근 슬쩍 이슬람의 오일 머니가 한국 사회에 유입되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한국에 이슬람 문화원과 이슬람 대학이 버젓이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 한남동에만 있는 이슬람 사원이 이제는 전국에 걸쳐서 부산, 파주, 부평, 안산, 포천, 안양, 광주, 전주 등 8개에 이르고 있으며 그밖에 동암, 대구, 마천, 마석, 김포 등 전국에 걸쳐서 임시 사원이 50~60개로 무질서하게 산재해 있다.

이렇게 한국 사회에 우후죽순 식으로 이슬람이 자리를 잡게 된 배경은 IMF 이후에 많은 동남아시아의 불법 외국인 노동자들을 한국교회가 사랑으로 감싸준다면서 보호해 준 것도 한 몫을 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엄청난 이슬람의 양산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한 때 3D 업종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벌어서 본국에 송금 한다면서 물밀듯이 들어온 동남아시아인들 중에서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태국 등에서 몰려온 불법 노동자들 중에 상당수 무슬림들이 섞여 있었으며 그 중에 철저히 훈련된 이슬람 선교사들이 숨어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한국 사회에서 이슬람이 교묘하게 그 정체를 숨기고서 경제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오일 머니를 대량으로 유포하면서 공식적으로 한국 사회를 파고들었고 동시에 비공식적으로 불법 노동시장을 통해 한국 교회의 동정까지 받으면서 침투해 온 것이 이제는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까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심각하게 그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중대한 시점을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2008년 10월 7일에 마포에 있는 가든 호텔에서 국내 최초로 이슬람 금융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이것은 부산광역시가 후원을 하고 재단법인 한국혁신전략연구소가 주최하고 다산자기관리부동산투자회사와 넥서스 투자회사가 주관한 모임인데 미국 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를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 투자 패턴의 방향을 바꾸려는 시도 중에 하나이다. 이렇게 우리가 꾸란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는 소위 샤리아 은행(Sharia Bank)에서 주도하는 이슬람 금융을 경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슬람의 검은 돈인 오일 머니의 위력 때문이다.

(2) 무슬림 금융의 함정

그러면 왜들 이렇게 난리들인가? 지난 이슬람 금융세미나에서 허남식 부산광역시장과 이승일 한국은행총재가 기조연설을 하였다. 이후에 송종찬 삼일회계법인에서 ‘이슬람의 금융, 회계, 및 조세제도’ 소개와 이슬람 금융센터의 로슬란 이사가 ‘이슬람 금융 시스템 및 이슬람 금융 상품’ 소개가 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이 향후 이슬람 금융을 한국 사회에 확장시키겠다는 계획이다. 발표와 행사를 주관한 사람들 모두가 한국에 이슬람 금융센터를 건립하여 은행, 금융, 증권, 보험 등뿐만 아니라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이슬람 펀드도 조성하겠다는 계획이다. 더 나아가서 한국 내에 이슬람 금융 전문가를 양성하고 한국 기업들에 대해서도 직접 투자를 벌여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모두가 단순하게 생각하여 한국 기업에 돈이 필요하니까 이슬람 금융으로부터 투자를 받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이슬람 채권이 몰려오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의 법인 샤리아(Sharia)에 근거한 물량공세를 통해 한국 사회에 이슬람이 침투해 들어오려는 치밀한 전략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파하고 있어야 한다. 머지않아 한국 경제는 무방비 상태로 오일 머니로 무장하고 있는 이슬람 채권인 수쿠크(sukuk)에 굴복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국가의 근간을 세우는데 필요한 실정법보다는 코란에서 가르치고 있는 종교법인 샤리아(Sharia)를 더 중요시한다. 인간사에 만연되어 있는 금융기법에 대해서도 샤리아(Sharia) 법은 아래의 5가지에 대해서 금지하고 있다.

– 이자수수 금지(그러나 실제로는 수수료라는 명목으로 이자를 다 받는다.)
– 도박사업 금지
– 원금보장 금지
– 위험부담과 불확실성 금지
– 술, 돼지고기 등의 매매 금지

이런 원칙을 가지고 이슬람 금융 채권인 수쿠크(sukuk)는 단기적인 투자보다는 5년 이상의 장기적인 투자를 미끼로 한국 기업을 공략하려고 한다. 더구나 이슬람 금융 채권은 유럽이나 미국의 금융기관보다 약 1.5% 정도 더 싼 금리를 제공하면서도 담보설정을 하지 않는 등의 기법으로 초기에 저렴한 자금을 막대하게 확보하려는 한국 기업의 정서를 교묘하게 파고들 책략을 세워놓았다.

기업을 하는 사람치고 자산 규모와 담보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을 간파한 이슬람의 수쿠크(sukuk)는 기업의 장래성과 사회에 대한 기여도와 공헌도를 중시하여 담보 없이 파격적으로 저렴한 금리의 금융을 지원해 주는데 향후 많은 한국의 기업들이 여기에 넘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대표적인 이슬람 금융기법인 수쿠크(sukuk)는 코란의 가르침인 샤리아(Sharia) 법에 의거하여 이자나 담보를 받지 않고 자금을 조달하도록 설계된 채권이다. 예를 들면 개인이 집을 살 때 원금과 이자를 대신 수수료로 상환을 받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교묘하게 이슬람 법망을 넘어간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수쿠크(sukuk)가 발행되는 형태도 다양하다.

– 무라바하 : 이슬람 채권으로 집을 구입한 후에 채무자에게서 수 수료를 받고 빌려주는 형식을 취한다. 혹은 물건을 구 매자에게 넘긴 후에 수수료와 원금을 나누어서 받거나, 아니면 수수료만 먼저 받고 만기일에 물건을 매각한다.
– 무샤라카 : 이슬람 금융 기관과 기업이 사업에 공동으로 투자한 후에 일정부분의 수익을 나누어 갖는 방식이다.
– 무다바라 : 이슬람 금융 기관이 기업의 사업에 투자를 한 후에 배 당금을 받는 방식이다.
– 이 지 라 : 이슬람 금융 기관이 시설을 구입하여 임대료를 받고 설 비를 빌려주는 방식이다. 일종의 임대계약이다.

이상의 다양한 수쿠크(sukuk) 금융기법은 기존의 일상적인 이익 추구와는 달리 이슬람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한국 사회에 침투해 들어온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배후에 한국 사회를 이슬람화 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수쿠크(sukuk) 채권도 이미 인간사에 만연되어 있는 다양한 경제기법의 일환이지만 그 배후세력이 이슬람이기에 경계해야 한다. 문제는 당장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오일 머니는 달콤한 유혹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처럼 외상값을 돈으로 갚는 대신에 자기 집이나, 땅이나, 부인이나, 딸자식들을 종종 채권자들에게 넘긴 사례들이 빈번하였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당장 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거저 주다시피 막대한 돈을 대주다가 기간이 만료될 때 원금과 수수료를 갚을 능력이 없으면 돈 대신 부인이나 딸자식들을 강탈해 가는 이른바 인신매매하는 일들이 많다. 더구나 이슬람은 일부다처제이기에 수쿠크(sukuk) 법에 의해 이자를 받지 않는 대신 그보다 엄청난 값에 해당하는 인신매매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일들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누가 처음부터 자기 부인이나 딸자식들을 내놓을 아비가 있겠는가? 그러나 수쿠크(sukuk) 법이 이러한 것을 사실상 방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장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담보 없이 거대한 돈을 빌려주고 만기가 되었을 때 원금과 이자를 갚을 길이 막막해지면 빌린 돈의 대가로 부인이나 딸자식들을 넘겨줄 수 있다는 점에서 수쿠크(sukuk) 법은 오늘날도 인신매매를 방조하는 폐단을 낳고 있다.

오늘날의 수쿠크(sukuk) 법은 기업이 사업용 자리를 마련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담보도 없이 사용하였다가 만기일에 사업이 어려워져서 모든 기반이 송두리째 이슬람의 손에 넘어가게 되면 그 만큼 한국사회에서 민족자본이 침식되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일제 강점기에 왜 독립투사들이 일본인들의 돈을 마다하고 비록 영세하지만 민족 자본에 철저히 의존하였는지를 우리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통해서 깊이 깨달아야 한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 운동자금의 대부분은 독실한 기독교인들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돈에 매이는 것처럼 비굴한 것이 또 있을까? 우리 한민족의 문화적 가치와는 다른 이질적인 옷을 입고 다가오고 있는 것이 이슬람의 금융기법인 수쿠크(sukuk) 채권이다. 당장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이슬람 채권에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블룸버그 자료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이슬람 채권인 수쿠크가 전년에 비해 75%난 급증했다. 이는 고유가 시대에 오일 머니가 상당수 그 위력을 행사하였다는 증거이다.

이제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도 이미 이슬람 국가가 된지 오래되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와 같은 나라들이 아시아 국가들이지만 이미 중동 문화의 옷으로 갈아입은 지 벌써 오래다. 최근 3년 동안 아시아에서 수쿠크(sukuk) 채권의 3/4가 말레이시아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무엇을 말하는가? 일본도 재무부 국제협력은행과 같은 국책 기관에서 G7 국가 최초로 수쿠크(sukuk) 발행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하여야 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이다. 예수님께서는 맘몬을 섬기든지 하나님을 섬기든지 선택하라고도 말씀하였다.

과거 한국의 기독교는 공산주의와 맞서서 싸웠다. 이제 이와 병행하여 이슬람과 맞서서 싸워야 한다. 이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도 거부하는 이단적 정치적 경제 집단이다. 오늘 이 시대에 검은 돈인 오일 머니를 쥐고 있는 이슬람의 정체를 바로 알고 우리 모두 이슬람의 금융제도인 수쿠크(sukuk) 채권에 맞서서 나가야 한다. 진리는 삶 속에서 불의와 맞서서 진실한 힘을 발휘할 때 그 가치가 드러난다.(*)
PARTⅡ
이슬람 선교

1. 우리의 이웃으로 다가온 무슬림

이슬람(Islam)과 무슬림(Muslim)이란 말의 정의는 다양하다. 이집트 아랍혁명 후 동일한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들이 서로 다른 무슬림들이 믿는 이슬람은 진짜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한국에서 만나는 무슬림 중에는 온건한 무슬림도 있고 과격한 무슬림도 있다. 수염을 기른 무슬림 모두가 과격한 무슬림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슬람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무슬림들이다. 그들 중 일부가 과격한데 특히 지하드(聖戰, jihad)를 하는 살라프파(Salafism) 무슬림들은 고지식하고 꽉 막혀 있다.

주후 610년 무함마드로 시작 된 이슬람은 변질 된 유대교와 기독교를 완성시킨 종교라고 무슬림들은 믿고 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하늘로부터 내려 받았다는 꾸란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고 무함마드 역시 성경의 예언자가 아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슬람에 대한 연구가 빈약하다보니 정확성이 결여된 이슬람에 관한 정보들이 너무 많이 퍼졌고 이를 올바로 바로 잡으려는 시도를 하지만 시일이 오래 걸릴 것 같다.

이슬람은 7세기에 태동하여 주변의 유대교와 기독교 및 지역 관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한 아랍인의 종교였으나 정복전쟁을 통하여 한때는 아라비아 반도는 물론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스페인 그리고 일부 인도 대륙까지 퍼져가면서 세계 종교로 변모해 갔다. 많은 학자들이 이슬람의 확산이 빠르다고 하나 오늘날 아랍 국가 중에는 수년간 인구통계를 실시하지 못한 나라들이 많아 무슬림의 세계 인구통계는 정확성이 없다.

그러나 한류의 확산, 한국의 무역증대, 산유국으로부터 원유도입 그리고 한국의 이슬람 국가와의 교류 확대는 자연스럽게 무슬림의 한국입국을 증가시켜 주고 있고 일부 무슬림은 한국의 체류비자를 얻으려고 한국 여성과 혼인을 하고 있다. 아프간 사태 이후 주한 아랍 대사들을 중심으로 한국아랍소사이어티 재단이 발족되었고 이제는 이런 공식적인 재단을 통해 한국 사회 안에서 이슬람과 이슬람 문화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또한 아랍의 대학생들과 한국의 대학생들 간의 상호 교류를 주선하였다.

그동안 한국 정부의 대(對) 중동 및 이슬람 국가와의 외교는 한국의 원유수입과 한국기업의 건설수주 및 한국 상품의 수출과 맞물려 있었다. 그러다보니 한국 정부와 고위급 인사들이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인식과 주권 외교를 펼치기 보다는 이슬람 편향의 자세를 갖기도 했다. 우리의 이슬람과의 관계는 국제 사회라는 틀 속에서 우리가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슬람은 정치와 종교, 사회와 문화, 국제 외교 등 다양한 영역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을 단순히 종교로만 보게 되면 우리의 이슬람에 대한 해법은 단편적인 처방에 머물고 말 것이다. 사실 이슬람은 메시지와 가치(사회적인 윤리)와 율법(형법 등)이 어우러져 있다. 이슬람 율법(sharia)은 교리들을 포함하고 인간과 알라(Allah) 간의 관계에 의한 제도(기도, 금식, 구빈 등),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에 의한 제도(혼인, 이혼, 매매 등) 인간과 사회 간의 관계에 의한 제도(지하드, 슈라, 윤리, 형벌)를 포함한다.

지하드(聖戰, jihad) 역시 이슬람 율법과 관련되어 있고 일부 학자들은 지하드를 사회 종교적 운동이라고 했다. 지하드를 주창한 이집트의 사이드 꾸뜹(Sayyid Qutb)은 알라(Allah)의 율법을 세우는데 장애가 되는 기관이나 국가를 제거하는 것도 지하드라(聖戰, jihad)고 했다. 말로는 꾸란에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는 말이 있다고 하면서도 비(非) 이슬람적인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이 꾸란 구절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은 이러한 사이드 꾸뜹의 영향을 받은 무슬림들이 많고 또 이슬람을 정치에 이용하는 정치적 이슬람이 아랍 이슬람 세계에 대유행이다.

2. 무슬림과 가까워지기

우리와 종교와 문화가 전혀 다른 무슬림과는 관계를 열기는 그리 쉽지 않다. 더구나 그들에게 신뢰를 가지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무슬림과의 친분 관계를 맺으려면 우선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 무슬림들 중에는 세상을 향해 닫힌 사고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무슬림과의 관계를 쌓기 위해서는 먼저 다리를 놓을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서로 간의 공통된 인간적인 관심사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인간이 갖는 공통된 문제들이 있다. 또 이슬람과 꾸란(Quran)의 알라(Allah)와 기독교의 하나님(Jehovah)이 그 개념에서는 전혀 다르지만 공통된 부분(창조주, 초월자, 유일 신 등)은 무슬림과 대화를 나누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먼저 이슬람의 꾸란과 기독교의 성경이 무엇이 어떻게 서로 다른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기독교가 어떤 점에서 그들과 차이가 나는지를 잘 알아야 그들이 복음을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들 중 일부는 꾸란에 나오는 ‘이싸’를 예수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무슬림을 처음 접하는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혼동하기 쉽다. 꾸란의 예수와 성경의 예수는 같지 않다. 그러나 꾸란에도 예수가 있다는 말을 일부 기독교인 중에는 그 말을 그대로 믿기 때문이다. 꾸란과 성경에서 사용되는 어휘가 유사하거나 동일하더라도 그 개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실 무슬림이 믿는 꾸란의 ‘이싸’는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와 여러 면에서 다르다. 꾸란에서 ‘이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피조물 인간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으며, 그냥 하늘로 올리어 갔다고 한다. 이슬람의 전승에 따르면 이 ‘이싸’가 다시 와서 십자가를 다 부수고 돼지를 죽이며 ‘이싸’가 이슬람을 전파할 것이라고 말한다. 꾸란의 ‘이싸’는 성육신하지 않았고 인간과 그의 본성이 같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꾸란에서 말하는 ‘이싸’가 성경의 예수와 유사점은 있지만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무슬림과 기독교인 간에 ‘루흐’ 즉 영(靈)에 대한 개념도 다르다. 무슬림들은 알라가 인간과 동물에게 ‘루흐’를 주어 생명을 갖게 했다고 말한다. 또 일부 무슬림은 120일이 되면 태아에게 ‘루흐’가 들어가므로 그 때부터 낙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사람과 동물이 죽으면 ‘루흐’는 몸에서 떠난다고 믿는다.

이 같은 무슬림들의 ‘루흐’에 대한 인식을 보면 ‘나프스’(혼, 魂)와 같은 말로 사용한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알라(Allah)를 ‘루흐’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슬람에서 ‘루흐’는 ‘혼’(魂)이나 ‘지브릴’ 천사를 가리키지만 아랍어 성경은 ‘루흐’는 ‘spirit’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경은 인간의 영(靈)이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하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영(靈)이 거듭나므로 우리의 삶이 달라진다.

2007년에 우드베리, 슈빈, 마크스가 ‘기독교인이 된 무슬림’ 700여명에게 실시한 연구에서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한 원인 중 첫째는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고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원인으로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하늘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intimacy)를 갖는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했다고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러나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을 때 전도가 일어난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개신교보다는 로마 가톨릭을 더 많이 신뢰한다. 미국의 일부 기독교인들도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사회적 영적 필요가 충족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느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아랍인 교회를 갔더니 육적인 기독교인이 많았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기독교인들의 돌봄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예수를 믿기 전 10년 동안 이슬람에 대한 질문들이 많았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면 10명 중 8명은 1년 안에 이슬람으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도 있지만 자신이 속한 가족과 사회와 배우자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혼자 먹고 사는 일이 간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은 자신의 문화를 버리려 하지 않는다. 무슬림이 교회에 나오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슬람에서 해결 못한 것을 해결 해 주어야 그들이 다시 이슬람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또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이 성경대로 산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헌신되고 주를 위하여 충성하는 모습이 무슬림 개종자에게 보여야 한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어려서부터 반기독교적인 정서에서 살아왔고 기독교에 대한 변증적인 지식을 배웠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편견이 많다. 더구나 이슬람 사회가 지금은 타크피르(상대를 카피르=알라를 믿지 않거나 이슬람의 율법을 어긴 자로 단죄함) 문화에 휩싸여 있어서 이슬람에 대하여 잘못 말했을 때 이슬람 사회의 지탄이 크고 또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는 만일 그가 다른 종교로 개종하면 자신이 속한 가족과 공동체를 떠나서 아내와 이혼을 당하고 자녀들을 만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에 섣불리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으려 한다.

그럼에도 지금은 이슬람 국가에서 꿈에서 예수님이 교회에 가라고 해서 스스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는 사람이 있고 교회 홈페이지에다가 자신이 이슬람을 버리고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반적으로 무슬림 전도는 교제가 어느 정도 이뤄진 다음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좋다. 물론 이런 경우 전도자는 대부분 자신이 기독교인인 것을 밝힌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깊은 교제 전에 먼저 복음을 전할 수도 있고 또 무슬림이 자기 스스로 직접 교회나 기독교인에게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교회에 찾아온 무슬림을 주일 대예배로 인도하기 보다는 달리 얼마 동안 무슬림들이 교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좋다. 국내에서 디아스포라 예배는 그 형식이 기존 예배와 큰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무슬림이 처음 교회에 발을 디뎠을 때 교회에 다음과 같은 자료들이 비치되어 있으면 좋다.

– 무슬림의 문화에 익숙한 내용과 관련된 성경의 메시지(가령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이야기는 이슬람의 문화와 유사한 내용이 많다.)
– 무슬림의 세계관과 밀접하게 관련된 성경 본문 읽기(무슬림들에게 거부 감이 적은 누가복음의 구절들이나 구약의 잠언과 창세기 구절 등)
– 이슬람의 신앙과 차이가 나는 본질적인 문제를 다룬 자료 등

무슬림 사역에는 ‘헤세드’ 즉 하나님의 인애(仁愛, compassion)가 필요하다. 히브리어 헤세드는 선함과 친절이라는 말인데 인간의 ‘헤세드’는 이런 의미이다.

– 남에게 호의와 은택을 베푸는 친절(삼상 20:15)
– 낮고 비천한 자, 궁핍한 자 그리고 불쌍한 자에게 베푸는 친절과 자 비(잠언 20:28)
– 하나님에 대한 사랑(렘 2:2, 호 6:4) 등

그리고 하나님의 ‘헤세드’는 하나님이 피조물의 필요에 하나님이 베푸는 친절과 인자(仁慈)로서 이런 의미가 있다.

– 적들과 불화로부터 구해주는 인자하심(창 19:19)
– 죄로부터 구속해주는 인자하심(미 7:20)
– 하나님의 친절(민 14:18)
– 친절의 행위들과 자비들(창 32:11) 등

그러므로 우리는 무슬림과의 만남에서도 하나님의 인애(仁愛, 헤세드)를 잊지 말아야 하고 그들의 사회적인 필요를 채워주고 그들과 복음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슬림과의 만남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지해야 한다.

3. 무슬림들에게 복음 전하기

무슬림 전도는 겸손과 수용자 중심이어야 한다. 복음을 듣는 무슬림을 이해하고 애정을 가지고 다가가야 한다. 한국인이 갖고 있는 문화, 세계관, 사고방식 등을 무슬림들에게 강요하지 않으려면 먼저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무슬림의 용어들에 익숙해야 한다.

전도 된 무슬림을 양육하려면 그가 이전에 이해하는 개념과 어휘들을 사용해 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무슬림이 이해하는 개념과 성경이 가르치는 개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가령 아랍어 비르(birr)라는 말이 아랍어 성경에서는 의(義, righteousness)라는 의미이지만 이슬람에서는 재물이나 유익한 것 또는 즐거움과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의미이다.
무슬림과 만난 때 기독교 신앙에 대해 좀 더 겸손한 태도로 무슬림의 말에 인내하는 태도를 갖는다. 이슬람 초기부터 기독교는 적절하게 무슬림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무슬림들은 서구적인 성경 해석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예를 들면 이삭과 이스마엘을 각각 유대인과 무슬림으로 대입시킨 후 이스마엘은 저주받았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슬림 전도에 도움이 안 된다. 무슬림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이스마엘(꾸란에는 ‘이스마일’이라고 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하나는 이슬람이 기독교, 유대교와 더불어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것을 강조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공통점을 통해 대화할 수 있는 장점도 있으나 성경의 이스마엘과 꾸란의 이스마일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이슬람에 대한 이해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콥트 정교회와 개신교가 구약보다는 신약에서 더 큰 차이를 보이고 로마 가톨릭이 개신교 보다 이슬람과 더 많은 대화를 했다.

무슬림 사이에서도 꾸란에 대한 해석이 달랐다. 7세기 기록 된 꾸란이 8세기의 사회 역사적인 상황(狀況, context)과 오늘날 무슬림들의 필요와 현대적인 관심사를 고려하면서 꾸란 텍스트를 주석하자는 좀 더 융통성이 있는 컨텍스트 중심의 주석 방식을 택하는 무슬림들이 있다. 이들은 꾸란의 의미를 무슬림의 삶과 어떻게 관련시키느냐가 주된 관심사다. 매일 매일 실제 삶에 적용하고 다른 시기와 환경 특히 현대 시대의 필요와 관심과 연결된 주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슬림 주석가와 법학자들은 윤리적 율법적 내용을 주석할 때 그리고 꾸란의 특정한 법적 판단이 우주적으로 적용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결정할 때 오직 언어적 기준만을 의존한다. 그런데 꾸란이 기록 될 당시에 주어진 법적 판단은 사회적 역사적 상황이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늘날과 관련되지 않거나 오늘날 그런 법률적 판단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꾸란의 윤리적 율법적 내용에 대한 해석에서 무슬림들 사이에 다음 세 가지 접근 방법을 볼 수 있다.

– 텍스트 중심(엄격한 문자주의와 율법주의적인 접근)
– 준 텍스트 중심(원칙과 현실의 중간 입장)
– 컨텍스트 중심(인간 이성에 의한 해석)

위와 같은 분류는 꾸란 주석가들이 다음 두 가지를 어느 정도로 의존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 하나는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하기 위하여 언어적 해석에만 의존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오늘의 현대적인 컨텍스트는 물론 꾸란의 역사적 사회적 컨텍스트를 고려하는 것이다.

(1) 텍스트 중심의 무슬림

텍스트를 엄격하게 따르며 문자적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텍스트 중심의 무슬림들은 현대적인 필요도 도외시하고 다만 무슬림들을 인도하는 것은 꾸란이라고 한다. 이들은 꾸란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꾸란에서 남자 4명의 여자와 혼인할 수 있다고 말하면 그 텍스트가 계시된 사회 역사적인 컨텍스트를 고려할 필요 없이 영원히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왜 꾸란이 7세기 메카에서 4명의 부인과 혼인하는 것을 허용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텍스트 중심의 무슬림들로는 오늘날 전통주의자(traditionalist)와 살라프파(Salafism)들에게서 볼 수 있다.

(2) 준 텍스트 중심의 무슬림

사회 역사적인 컨텍스트를 무시한다는 점에서는 텍스트 중심의 무슬림들과 같으나 자주 변증적인 담화에서 다소 현대적인 말로 윤리적 법적 내용을 한 묶음으로 포장해버린다. 이들은 대개 현대 신(新) 부흥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인데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 인도아대륙의 자마아트 이슬라미 그리고 모더니스트들이 여기에 속한다.

(3) 컨텍스트 중심의 무슬림

꾸란의 윤리적 법적 내용의 사회적 역사적 컨텍스트를 강조하고 이에 따른 주석을 한다. 그들은 꾸란을 윤리적인 내용이 계시되고 해석되고 적용되는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경제적 컨텍스트에 비추어서 이해하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윤리적 법적 컨텍스트에서 어느 것이 변개(變改)가 가능하고 어느 것이 불가능한지 결정하는데 현대 무슬림 학자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자유를 부여한다. 컨텍스트 중심의 무슬림들로는 파즈룰 라흐만(Fazlur Rahman)과 같은 신(新) 모더니스트 그리고 이즈티하드(개인의 법적 판단)를 옹호하는 자 등 소위 진보적인 무슬림들이고 더 일반적으로는 오늘날 개방 된 무슬림들이 여기에 속한다.

(4) 우리의 입장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꾸란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해석이 성경에 부합되는지를 먼저 살피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다. 특히 아랍 기독교인들의 공동체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지도 잘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는 신학과 그와 관련된 개념들이 이슬람 신학과 어떤 차이가 있고 그들의 세계관과 문화인식이 우리와 어느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무슬림과의 만남은 추상적인 교리보다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인격에 더 관심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인격, 행하신 일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즉 가능하면 추상적인 논리는 피하고 비유, 스토리, 예화를 사용하고 ‘이야기’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자녀를 못 낳는 부부의 이야기’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이야기’는 무슬림들의 문화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무슬림과 나누기에 아주 좋다.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인 사가랴와 아론의 자손인 엘리사벳이 둘 다 제사장 가문인데(눅 1:5) 제사장 가문은 정결과 깨끗함의 상징이었고 명예스런 가문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자녀가 없는 것은 수치였다.(창 16:4, 11:29-32,30:1,23) 라헬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창 30:23)고 했다. 유대인들은 자녀를 통하여 구원의 때까지 생명을 이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자녀를 낳지 못하면 멸시와 부끄러움을 당했다. 창세기에는 하갈이 여주인을 멸시한 이야기도 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창 16:4)

누가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자신의 수태가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생각했다. 수태 전에는 부끄러운 비천한 여자였으나 수태 후에는 하나님이 그녀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셨다고 했다.(눅 1:25) 엘리사벳은 그 녀의 부끄러움을 없애주시려고 하나님이 그녀에게 자녀를 갖게 하셨다고 고백했다. 또한 누가복음 15:11-32은 참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잘 알려주는 본문이다. 이 성경 본문은 무슬림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체로 되어있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의 진수가 들어 있다.

또 무슬림들이 싫어하는 돼지와 무슬림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족의 명예(체면)와 충성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다. 무슬림들은 아버지가 상속하기 전에 자녀들이 아버지 재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에게 불명예와 수치로 여겼다.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가버려 아버지의 체면이 손상되었다. 그런데 체면이 손상된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눅 15:20) 그런데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결론을 열어두고 있다. 그 결론의 하나로서 우리는 무슬림에게 “만일 네가 큰 아들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으냐? 만일 이 이야기 속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에 어떻게 반응하겠느냐?”고 물을 수 있다.

이처럼 누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소통시키는데 명예와 수치 세계관을 사용하고 있다. 무슬림과 의사소통에서 우리가 수치와 명예 세계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수치와 명예가 무슬림들의 가장 중요한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속적인 무슬림들에게는 두려움과 능력이 더 중요하다.

4. 무슬림과 다리 놓기

(1) 이슬람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무슬림과의 교제 그리고 전도에는 반드시 무슬림과 이슬람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무슬림과 이슬람은 서로 떼어 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꾸란 주석가 이븐 카시르는 이슬람교를 알라(Allah)와 함께한 종교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 이슬람은 기본적으로 알라(Allah)의 한 분되심을 인정하고 진지한 헌 신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 또 부차적으로 이슬람은 무함마드의 커뮤니티에 연루되어 알라(Allah) 가 전해준 규범이다.

이렇게 이슬람에 대한 정의를 보면 개인으로서 알라(Allah)에게 헌신하는 무슬림과 무함마드 커뮤니티에 속한 무슬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이슬람에 대한 접근에서도 우리는 항상 개인으로서의 무슬림과 커뮤니티 속의 무슬림을 염두에 두고 접근해야 한다.

아랍혁명이 일어난 아랍 국가에서는 “이슬람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슬람의 율법이 무엇이냐?”를 두고 무슬림들끼리 대립하고 있다. 이집트의 경우 이슬람 종교를 정치에 이용하는 무슬림 형제단들이 집권한 후 일반 이집트 무슬림들은 무슬림 형제단이 말하는 ‘이슬람’을 믿지 않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이슬람 근본주의 그룹인 살라프파(Salafism) 무슬림들은 무슬림 형제단의 ‘이슬람 율법’(Sharia)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회개해서 알라(Allah)에게 되돌아오고 그들이 잘못을 고치지 않는 한 무슬림 형제단과의 화해는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2) 무슬림들이 말하는 이슬람 교리와 역사가 오늘의 현실과 맞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정통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하늘에 있던 모경(母經, 무슬림들이 믿는 천상의 꾸란 원전)을 지브릴 천사가 무함마드에게 꾸란(Quran)을 내려줬다고 한다. 그러나 꾸란이 무함마드에게 주어질 때 아랍어나 아람어 등 인간의 언어를 사용했으며, 꾸란에는 무함마드의 극히 사적인 일들도 나오기 때문에 무함마드가 꾸란을 받을 때 그저 타자기 같은 역할만 했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반박한다.

지금 무슬림들이 갖고 있는 꾸란은 무함마드 사후 200년 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함마드 당시에는 꾸란이 없었다. 그리고 무함마드 사후 꾸란을 만들 당시는 15개 자음으로 28개의 소리를 표기했으므로 정확하지 못한 것이 분명히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무함마드가 암송하는 것을 들었던 아랍인들에 의하여 꾸란이 나중에 기록으로 남겨졌기 때문에 아랍인들의 기억력에 의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꾸란 구절들의 초기 내용은 뼈나 나무에 적힌 것들이어서 어느 부분이 손실되었는지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3) 무슬림을 이해하는 세 가지 통로

우리가 무슬림을 이해하는데 세 가지 통로가 있는데 꾸란, 하디스, 무슬림의 속담이다. 일부 서구 선교사들은 꾸란을 인용하여 복음을 전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꾸란을 인용하여 대화를 시작하면 무슬림들은 기독교인이 꾸란에 더 많은 신뢰를 두는 것으로 오해한다. 또 잠시 성경의 진리 대신에 꾸란 본래의 정확한 의미를 찾기보다 꾸란을 대화를 위한 다리로 성급하게 사용했던 내부자(insider) 접근 방식도 단기적 유익을 줄 수 있을지 모르나 이는 권장할만한 방법이 아니다.

한 때 낙타 전도법이 좋다고 했으나 낙타 전도법은 전도를 위한 내용이 아니고 전도하기 전 단계에 사용될 내용이고 또 해당 꾸란 구절의 의미가 정확하게 해석되지 못한 내용이 들어 있다. 꾸란은 반(反) 기독교적이고 꾸란에는 예수가 없고 기독론도 없다. 내부자 운동의 과도한 상황화가 일부 이슬람 의례를 따르고 ‘이싸 모스크’를 만들어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내부자의 꾸란 이해는 잘못된 꾸란 이해에 근거하므로 꾸란을 아랍어로 읽을 수 있는 무슬림이라면 금방 그 허점을 알게 된다.

(4) 무슬림 전도의 최상의 방법은 성경

결국 이슬람 선교에 있어서도 성경적인 성경해석이 중요하다. 즉 성경이 우리의 선교를 알게 해주고 선교를 만들어주고 선교를 지도해 주고 비평해 주어야 한다. 또 무슬림 선교는 특정 시간에 특정 상황에서 특정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므로 성경 읽기에 있어서 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 말은 성경을 선교 신학적으로 읽고 또 무슬림 선교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성경만이 무오한 진리로 믿지만 그러나 무슬림들은 성경은 변질 된 것이고 꾸란 만이 변질 되지 않은 진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아직까지 제대로 정확하게 한국어로 번역된 꾸란이 없기 때문에 꾸란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한 때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국내 교회에 증폭되었을 때 직접 무슬림을 강사로 세우거나 무슬림들의 글을 교인들에게 읽힌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 안 된다. 왜냐하면 무슬림들이 말하는 이슬람은 이슬람의 참 모습이 아닐 때가 많고 진실을 덮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 중 하나는 꾸란을 해석하는데 성경과 연관 지어 해석하려는 것이다. 즉 성경과 꾸란의 공통 된 주제를 찾아내어 그러므로 성경과 꾸란은 서로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꾸란을 성경과 연관 지어 해석하려고 한다면 꾸란 본래의 의미를 찾아내기 어렵다. 꾸란을 깊이 연구해보면 꾸란은 성경과는 전혀 연속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리어 꾸란은 성경을 부인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5) 무슬림 전도 시 유의할 점

첫째,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꾸란에 너무 의존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선교사들은 꾸란 보다는 성경의 메시지를 직접 선포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무슬림들에게도 성경의 복음은 선포되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입증되어야 한다. 이슬람과 꾸란을 전공하는 기독교 학자들이 꾸란과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을 뽑아 서로 유사한 점과 다른 점을 연구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공통적인 결론은 꾸란을 해석하는 데 토라에서 꾸란으로 옮겨갔다는 이론을 내세우면 꾸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깊이 연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혹자는 꾸란에 나오는 유수프의 이야기는 무함마드 시대 때 토라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가 전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성경의 스토리가 꾸란에서 달라진 것은 서로 별개의 내용들이 함께 짜 맞춰지기도 하고 제외되기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꾸란의 유수프의 이야기를 성경의 요셉 이야기의 다른 버전으로 보는 것은 문화적인 관점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꾸란의 유수프 이야기와 성경의 요셉 이야기에서 형식상의 많은 유사성을 발견해도 이 두 이야기는 주제와 신학적 윤리적인 면에서 동일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무슬림들을 이해하려면 무함마드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하디스 (hadith)나 그의 생애를 기록한 시라(sira)가 도움이 된다.

오늘날 무함마드가 ‘그렇게 말했다’고 하는 내용의 일부는 부카리와 같은 하디스 학자들이 모아 놓은 하디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슬람에서 구두(口頭) 전승은 종교 지도자나 그의 가족과 친구에게 전해 내려오는 것이었고 무슬림들은 그러한 구전(口傳) 된 전승을 그들의 삶에 실천하려고 한다. 그래서 근본주의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처럼 턱수염도 기르고 여성들은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니깝(niqab)을 쓰도록 강요한다.

하디스에 이런 말이 있다. “알라(Allah)와 마지막 날을 믿는 자라면 선한 말을 하게 하거나 침묵하게 하라. 알라와 마지막 날을 믿는 자라면 그의 이웃을 존대하라. 알라와 마지막 날을 믿는 자라면 그의 손님을 존대하라.” 여기서 이웃을 존경하고 높이는 것은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말이고 또 손님을 존경하고 높인다는 것은 자신의 얼굴에 웃음을 띠고 손님에게 공손하게 말하는 것이다. 하디스의 이런 내용은 무슬림들에게 남에게 공손하게 서로 말하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는 무함마드의 말이므로 성경의 메시지는 아니다.

이렇게 하디스를 통해 무슬림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슬람은 알라와 무함마드의 종교라는 것이다. 무함마드를 빼 놓고 이슬람을 말할 수 없다. 꾸란과 하디스를 사용하여 무슬림과 대화를 하려면 아랍어를 적어도 10여년 이상 배워야 하고 꾸란 주석의 역사와 꾸란에 대한 언어적, 신학적, 수사학적 이해를 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런데 이집트의 문화적 특징을 알려고 하면 파라오 문화, 기독교 문화, 이슬람 문화 이 세 가지를 살펴보아야 하지만 만일 이집트인들의 가치관을 알려고 하면 그들의 민간 속담을 알아야 한다. 아랍 속담은 무슬림들 사이에 내려오는 것으로서 아랍 국가마다 유사한 속담과 나라마다 다른 속담들이 있다. 속담은 오랜 세월 무슬림의 삶이 우러나오는 경험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항상 숨은 이야기가 들어있고 교훈과 도덕이 담겨 있다. 무슬림과 대화에서 그들의 속담을 알면 그 의미 전달이 배가가 된다. 무슬림들이 알고 있는 속담 속에 들어 있는 공유된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대화가 속도감을 더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꾸란과 하디스 등을 알려면 ‘꾸란의 이해’ ‘한국인과 소통을 위한 아랍 문화’ 그리고 ‘아랍의 종교’ 등의 책을 읽어보면 좋고 이슬람의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는 ‘이슬람 문명의 이해’가 좋다. 그동안 무슬림들 속에서 사역하는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학은 공부했으나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전략을 배운 사람이 많지 않았고 성경을 주해하는 실력은 강할 수 있으나 아랍 무슬림 상황 속에서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는 능력과 관심은 매우 적었다.

5. 기도와 성령의 인도

무슬림 전도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이다. 무슬림들이 믿는 알라(Allah)는 영(靈)이 아니다. 무슬림들의 기도는 의식적이고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와 다르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의 행위 모범을 따라가는 것에 관심을 가지나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행하심에 따르고 그를 닮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기에 무슬림들에게 전도하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한다. 무슬림을 위하여 기도할 때 이 같이 기도하고 기도의 동역 자들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 하나님이 그들을 주께로 이끌어 주시도록(요 6:44)
– 그들의 마음이 복음의 좋은 토양이 되도록(눅 8:15)
– 그들이 복음을 잘 알아듣도록(행 28:28)
– 하나님이 무슬림들 중에 일꾼을 세워주시도록(마 9:36-38)

무슬림들이 말하는 ‘믿음’은 구원의 믿음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구원받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있다. 그러나 이슬람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복음을 전해야 한다. 무슬림들에게 ‘알마시흐’(메시아)는 ‘이싸’(예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나 아랍어 성경에서 ‘알마시흐’는 구세주로서 왕이요 예언자요 제사장이다. 무슬림들이 사용하는 ‘알마시흐’와 아랍인 기독교인이 사용하는 ‘알마시흐’는 어휘는 같으나 그 개념이 완전 다르다.

그러므로 꾸란과 성경에 나오는 유사한 어휘들이 복음을 실어 나르는 접촉점으로 조금의 도움은 될 수도 있으나 이들 간의 차이를 정확히 모르면 완벽하게 복음을 전달하기 어렵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충만함을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구주로서 신뢰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먼저 자신이 이런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이슬람 법학자 알샤피이는 믿음에 대한 정의를 ‘마음으로 승인하고 입으로 공개적인 고백을 하며 종교적인 의무를 준수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슬람 신학자 알아쉬아리는 믿음을 말과 행함으로 구분하였다.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믿음으로 이슬람의 믿음을 바라보면 이슬람은 종교적인 의무나 행위를 믿음의 구성요소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 다섯 번 기도하는 무슬림들에게는 기독교인들이 자주 기도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신실한 신앙인’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기독교인들은 성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나 무슬림은 성령으로 예배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슬림 주변에 살고 있는 아랍 기독교인들은 무슬림들의 영향을 받아 성령에 대한 이해가 다소 불안정한 경우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무슬림을 향한 기도와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 기울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무슬림과의 대화에서는 ‘예, 아니오’와 같은 단답형 질문보다는 무슬림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 더 낫다.

사도 바울은 구원의 믿음을 그리스도를 믿고 헌신하는 것(행 16:31, 골 2:5) 혹은 하나님을 믿고 헌신하는 것(롬 4:24, 살전 1:8)이라고 했다. 바울은 믿음을 진리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정서적인 동의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의지적인 결단이라고 이해하고 그 증거로서 사랑(고전 13:2, 갈 5:6)과 순종(롬 1:5, 16:26), 선행(살전 1:3, 딛 2:14, 3:8) 등이 생겨난다고 했다.

이처럼 구원의 믿음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행하심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슬림들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행하심에 결부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무슬림들에게 그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 하나님의 것을 더 많이 이해하고 기독교인에게 주신 기업의 풍성함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우리가 기도하자.(엡 1:18)

사실 무슬림에게 믿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이야기는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나의 삶이 어떻게 변화 받았는지’를 무슬림과 나누는 ‘나 자신의 간증’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렇다면 무슬림을 대상으로 한 전도의 원리는 무엇인가?
(1) 얕은 곳에서부터 시작하라.

이슬람 종교와 문화에 가장 많이 물들어 있는 무슬림에게 외국인이 전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낮은 수위의 수영장에서 수영하듯 무술림 중에도 세속적인 무슬림이나 이슬람 율법을 강조하지 않는 무슬림에게 다가 가 전도하는 것이 이슬람에 광신적인 무슬림보다 더 효과적이다.

(2) 낚시뿐 아니라 그물로 고기를 잡아라.

대부분의 전도자들은 무슬림들과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은 오직 일대일의 깊은 관계전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정(友情)을 쌓는 것이 개종이나 회심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슬림은 개인보다는 커뮤니티 중심이라는 것을 알면 그들에 대한 접근에서도 개인 전도는 물론 커뮤니티 전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이슬람 커뮤니티를 바라보고 사역의 기회를 찾아 그물을 던질 필요가 있다. 즉 전체를 보고 씨를 넓게 뿌려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우정(友情) 전도 법에 따르다보면 소수의 사람을 만날 수 있으나 무슬림 가족이나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하면 일시에 더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역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무슬림 한 사람이 전도를 통하여 주님께 돌아오기도 하지만 씨를 넓게 뿌리면 천 명 중 몇 명은 복음에 적극 반응한다. 이런 예로서 가령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모바일(SMS 성경구절 보내기)과 인터넷을 통한 선교(SNS 외)를 들 수 있다.

(3) 개종한 무슬림 전도자를 세우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아라.

아랍인을 지도자로 세우는 훈련을 계속하고 또 무슬림이었다가 예수를 믿게 된 개종자를 통하여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최소한 그들과 자주 만나도록 계획하고 그가 그리스도 제자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다른 그룹과도 네트워크를 만들어주어 서로 도움을 주고받게 한다.

2011년(Mofid Wasef, 2011) 실시한 과거 무슬림이었다가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된 73명에 대한 예수님의 부활, 신성, 성육신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꾸란이나 아랍 기독교인들의 책보다 성경이 무슬림이 개종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무슬림 개종을 위한 전도 자료가 성경적으로 정확한지 먼저 확인해 보아야 하고 또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자료이어야 한다.

또 교회가 사용하는 이슬람에 대한 자료들이 이슬람 세계의 현실에 맞는 내용인지 그리고 외국어로 된 자료를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이슬람을 잘 모르는 번역자의 오류들에 대한 수정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무슬림이 쓴 이슬람 서적들이 항상 완벽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이 이슬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돕는 자료들을 만들어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고 제자로 양육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자료들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이슬람 선교를 위해 동역과 협력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야 하고 그 동역의 바탕에는 각자의 은사들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결 론

이슬람은 단순한 종교집단이 아니라 종교적 정치집단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한국을 무대로 전 세계를 이슬람화하고자 한다. 그들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며 많은 사람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주는 사탄의 세력이다. 신약성경은 이미 적그리스도가 그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싸움이 영적 전쟁임을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과거 한국교회는 많은 이단과 사이비와 싸워왔는데 이제는 교단마다 ‘이슬람 대책 위원회’를 별도로 세워 이슬람 선교에 힘을 모아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지금 시작해도 결코 늦은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악한 영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진리는 반드시 이긴다. 이슬람은 오일 머니와 거짓 교리와 이중성과 폭력성을 앞세워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우리 모두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어 다시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의 기치를 높이 들고 삼천리 방방곡곡과 온 세계로 나가야 한다.(*) 출처 / 교회와 신앙 2014.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