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설교의 이해

공원에서 군중들에게 설교하는 청교도 목사

PARTⅡ
청교도 설교의 이해
– 퍼킨스와 에임스를 중심으로 –

설교 은사의 신성함은 마차를 오르내릴 때 도움을 받는 숙녀의 위엄과 같다. 다른 언어와 지식의 은사들은 설교의 탁월성을 인식하여 단지 옆에 서 있는 하녀와 같다. – 퍼킨스, 1617년

이 글은 영국의 대표적 청교도 설교자들이며 사제(師弟) 간이기도 한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와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 1576-1633)의 설교론을 일차 자료에 입각하여 비교함으로 역사적 이해를 얻고자함이 목적이다. 종교개혁시대의 끝자락에 해당되는 16세기 중후반 영국 국교회와 17세기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배경으로 제시되는 두 사람의 설교 이해는 당시의 상황과 신학을 그대로 담고 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캠브리지 대학에서 선생과 제자 그리고 동역자의 위치에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종교개혁의 역동적인 역사적 전개와 긴밀한 연관이 있다. 두 사람은 18년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차가 있음에도 격동의 시대, 거기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종교개혁 신학 특히 설교론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아울러 두 사람의 설교 이해는 한국교회 강단에도 도전이 될 것인데 설교운동으로 일컬어지는 청교도의 생생한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대표적 청교도 설교자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와 윌리암 에임스(William Ames, 1576-1633)의 설교를 분석하여 교회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설교자들로 평가되는 청교도 설교 이해에 접근하려 한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당시 교회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이며 두 사람은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와 제자로 만났으나 그들이 살았던 삶의 자리에 따라 설교 이해가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퍼킨스보다 한 세대 앞선 ‘영국 장로교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토마스 카트라아트(Thomas Cartwright, 1535-1603)를 비교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는 퍼킨스와 에임스만으로 제한하는데 그 이유는 세 사람을 함께 비교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특히 카트라이트는 두 사람보다 제네바와의 유대적 상관성이 더욱 긴밀하기 때문이다.1)

퍼킨스는 16세기 영국 국교회를 종교개혁 정신에 근거하여 바르게 일깨웠으며 퍼킨스의 가장 훌륭한 제자 에임스는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 새로운 토양 네덜란드 개혁교회에 그 나름대로의 독창성을 발휘하며 청교도주의를 이식한 공로가 적지 않다. 종교개혁을 지지한 영국 국교회의 한 멤버로서 16세기 퍼킨스가 말하는 설교론과 영국 국교회의 출신이었지만 17세기 화란 개혁교회의 토양에서 전개된 에임스의 설교론은 분명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좌로부터) Thomas Cartwright(1535-1603), William Perkins(1558-1602), Williams Ames(1576-1633)
(좌로부터) Thomas Cartwright(1535-1603), William Perkins(1558-1602), Williams Ames(1576-1633)

교회사는 퍼킨스를 ‘청교도주의의 아버지’로, 에임스를 ‘최초의 개혁교회 윤리신학자’로 일컫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해를 돕기 위해 두 사람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하기로 한다. 퍼킨스는 1584년부터 1594년까지 캠브리지대학 교수로 10년간 봉직했는데 그의 설교와 강의 그리고 로마 가톨릭을 예리하게 비판한 대적한 글들과 청교도 원리의 권위자로서 대학의 유명인사로 부상하였다.2)

캠브리지대학 시절 퍼킨스를 지도 교수로 섬겼던 에임스는 극단적 청교도(an extreme Puritan)로서 대학 채플 때 모두 입어야 하는 설교자의 가운(surplice)을 입지 않았으며, 1609년 설교 중 카드놀이를 공격하기까지 하였다. 1610년 캠브리지대학교를 떠나야만 했던 에임스는 네덜란드로 옮겨가 항론주의자들과의 논쟁으로 그곳 최고의 칼빈주의자 대열에 합류한다. 그리고 1622년 프라네커대학교의 교수가 된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는 첫 번째 개혁주의 윤리학 저서로 평가되는 ‘De Conscientia, eius Jure et Casibus’(1632)가 있다.3)

신앙의 선배인 퍼킨스와 그의 제자인 에임스의 설교론을 연구함으로써 21세기 위기의 한국교회가 한줄기 지혜를 얻으며 새로워지기를 기대한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교회를 위한 제언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먼저 두 가지 점을 명기하고자 하는데:

첫째, 두 사람의 설교론을 역사신학 관점에서 비교하는 선행연구를 찾 기가 쉽지 않음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둘째, 17세기 원전을 중심으로 비교하는 일인데 더 많은 자료들을 가 져올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두 사람의 설교에 대한 이해를 파악 하는 데는 그런대로 만족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셋째, 청교도인 퍼킨스와 에임스의 생애와 사상 또는 두 사람의 상관성 에 대해서는 여기에서는 생략할 것인데 이는 이 부분은 나름대로 앞서 연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퍼킨스와 에임스에 대해 몇 편의 글을 이미 학계에 발표하였다.4)

2. 퍼킨스의 설교 이해

퍼킨스의 설교 이해는 그의 저작 ‘Of the calling of the ministerie two Treatises’(1609년)와5) ‘The Art of Prophesying’(1617년)을6) 근거로 서술될 것이다.7) 특히 퍼킨스가 자신의 글을 위해 Augustinus, Hemingius, Hyperius, Desiderius Erasmus, Illyricus, Wigandus, Jacobus, Mathias, Theodorus Beza, Franciscus Junius 등의 도움을 받았음을 명기한다.(Art., 673)

윌리엄 퍼킨스의 설교 이해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단지 개혁 정통주의 서클의 인물들에게서만 영향을 받은 설교 이해라기보다 교회사 전반에 있어 도움이 되는 인물들을 가져오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예외적으로 칼빈이 보이지 않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8)

윌리엄 퍼킨스는 1609년 출간한 ‘Of the Calling of the ministerie, two treatise. Describing the Duties and Dignities of that calling’에서 목사직에 관해 고린도전서 4:1을 제시하며9) 서술한다.10) 학구적 논문이라기보다는 현장 목회자들에게 전하는 실질적 목회적 글이다. 또한 이 글은 전반적으로 신학생들에게 전하는 글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설교자로서 가져야 할 자세를 제시함으로써 현장 목회자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어 다시금 힘을 내어 진정한 주의 종들로 거듭나게 하는 동기가 엿보이는 일종의 목회서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퍼킨스는 특이하게 설교를 ‘예언’(prophesying)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백금산 목사는 본서에 대한 추천의 글에서 퍼킨스의 설교론을 ‘청교도 설교론의 고전’이라고 일컫고 있다.

(1) 대언으로서의 설교

영국 국교회 소속 목사 퍼킨스는 설교자의 대언(prophecy)에는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의 선포로서의 ‘설교’와 백성을 대신한 ‘기도’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목소리로 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선포하는 것이고, 기도는 사람의 목소리로 아뢰는 것이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다.(Art., 646)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성과 일치성 가운데 설교해야 한다.

퍼킨스의 설교 준비는 설교 내용 준비와 설교 전달 준비로 나누어진다. 또한 설교 준비는 말씀의 부지런한 개인 연구가 요구된다.

첫째, 교리와 더불어 성경을 분명하게 이해한다.
둘째, 성경을 문법적, 수사적, 논리적 분석을 하고 다른 도움도 받으며 이해해야 한다.(Art., 650)
셋째, 초대교회로부터 인정된 정통신학에 입각한 글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
넷째, 성경을 연구할 때 떠오르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생각들을 기록 하여 사용해야 한다.
다섯째, 끝으로 우리의 눈을 열어 성경을 밝히 이해하도록 하나님께 기 도하는 일이다.(Art., 651)

물론 철학자나 고대 교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사람의 증언들 위에다 우리의 믿음을 세워서는 안 된다.(Art., 664) 그러면서도 교리와 더불어 성경본문을 이해해야 한다는 퍼킨스의 입장에서 16세기 종교개혁시대의 긴박한 현장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퍼킨스는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이해를 근거로 설교의 적용을 둘로 나누는데 복음적 적용과 율법적 적용이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지만 죄의 질병을 치료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복음은 성령의 능력으로 구체적인 삶을 가르치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다. 그러면서도 율법에 속하지만 그 율법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많은 진술이 있어 복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Art., 664)11)

또 다른 적용에는 정신적인(mental) 것과 실제적인(practical) 것이 있는데 정신적인 적용에는 교리와 규정이(doctrine or regraduation)12)이 요구되고, 실제적인 적용에는 지시와 교정이(instruction and correction)이 요구된다.(Art., 668) 권고가 열매로 맺혀지지 않을 때는 권고의 강도를 세게 하되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항상 마음을 다한 따뜻한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성경 본문에서 교리를 가져오려고 해서는 안 되고 조심스럽게 가능한 최소한의 교리를 가져올 것이다.(Art., 669)

또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로서 분명히 가져야 할 자세 곧 순수한 전달자이어야 한다고 퍼킨스는 말한다.13) 하나님의 대사인 목사는 성령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설교해야 하는데 성령의 나타나심을 설교하기 위해서는 단순하고 능력 있는 설교를 해야 한다.(소명, 123) 지식의 유무에 상관없이 이해되는 설교의 평이성과 타락한 사람의 양심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성령의 능력이 제시되어야 한다.(소명, 124)

설교자는 화목의 복음을 가지고 일하는 일꾼이며 그 복음의 해석자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결코 복음의 저자가 아니며 화목의 해석자이며 하나님의 해석자이다.(소명, 125) 이사야가 추구했던 ‘학자의 혀’(사 50:4)는 성령의 가르침과 지시가 요구된다. 하나님의 해석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가르침이 전제 되지 않고서는 안 된다.(소명, 127)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영은 말씀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역사하지 않으신다.”(소명, 128) 그러기에 설교자는 간절한 다윗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14) “이 놀라운 것을 깨닫는 데는 영적인 조명이 필요하고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학자의 혀가 요구된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육체와 이성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연구를 한 후에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처럼 기도해야 한다.”(소명, 129)

설교자는 또 성령의 조명을 받는 철저한 성경 연구를 한 후 학자의 혀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또한 설교자의 거룩한 삶이 요구되는데 화목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로서 설교자 자신이 구체적으로 화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요청이다. “어찌 더러운 입술로 마음에 거룩함도 없이 성화를 설교할 수 있겠는가?”(소명, 129)라고 도전한다.

퍼킨스는 당시 어려운 영적 상황을 직시하며 경건의 삶이 없는 설교자들을 질타한다. “오늘날 회심 자가 적은 이유는 자기 자신과도 화목하지 않은 하나님께 다른 사람들을 화목 시키고자 하는 목사들을 하나님이 싫어하시기 때문이다.”(소명, 130) 설교자는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자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해석자가 되어야 하고 사람의 해석자가 되어야 한다. 이처럼 설교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참된 해석자의 직무를 감당해야 한다.(소명, 130)

(2) 성령과 설교

퍼킨스는 특이하게 암기에 의한 설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암기에 의한 웅변설교는 비 영적으로 육체의 가장 부패한 감정을 부추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퍼킨스는 설교원고 암기를 피해야 하는 이유로 첫째, 많은 시간이 요구되며, 둘째, 설교 중 실수하게 될 경우 혼란에 빠질 수 있으며, 셋째, 성령에 의해 인도 받는 발성과 행동 그리고 감성의 거룩한 흐름을 방해 받기 때문이라고 말한다.(Art., 670)

무엇보다도 설교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내용에서 인간의 지혜는 숨고 강력한 성령의 나타나심이 요구된다. 말씀의 설교는 하나님의 증거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회중 앞에서의 고백이지 결코 인간적 기술이 아니다.15) 그렇다고 강단에 서는 목사가 무식해서는 안 된다. 교양과목이나 철학을 공부해야 하며 설교를 위해 많은 독서가 요구되지만 회중 앞에서는 결코 지식의 허세를 부려서도 안 되며 철저하게 이러한 인간적인 모습들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

설교자의 학문은 숨겨져야 하고 오직 성령의 역사만이 설교에서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전달하는 말은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사역을 생명력 있게 하는 것은 그 설교자 안에서 그리고 그 곁에서 역사하시는 오직 성령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다. 물론 성령의 나타나심은 설교자의 말과 제스처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설교 언어는 성령이 가르치시는 영적이고 은혜로운 언어야 한다.16)

설교자의 말은 회중이 이해하기 쉽고 성령의 권위를 드러내는 말로 단순하고 분명해야 한다. 설교자가 원어를 사용할 때 회중의 마음은 혼란스러우며 이해를 어렵게 한다. 설교자는 세속적인 언사나 격에 맞지 않는 말들을 금해야 한다. 설교자의 마음의 거룩함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언사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사가 먼저 그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곧 하나님은 설교자의 경건한 생활에서 나오는 경건한 말을 기뻐하시는데 목사가 특별히 지녀야 할 것은:

첫째, 선한 양심,
둘째, 내적 감각 곧 불타는 거룩한 감성,
셋째, 하나님을 향한 경외,
넷째, 인간에 대한 사랑,
다섯째, 덕망,
여섯째, 온화함이다.(Art., 671-672)

부연하면 퍼킨스는 목소리와 몸을 쓰는 설교자의 제스처에 대해 긍정적이며 적극적이다. 그러니까 그저 가만히 서서 전달하는 그런 설교자의 모습은 퍼킨스에게는 상상할 수 없다. 모든 회중이 들을 수 있도록 설교자의 목소리는 크고 분명해야 할 것을 말한다.

물론 당시 기계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을 생각해야 하겠다. 그렇지만 목소리는 내용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데 교리를 위해서는 보다 부드럽게 그리고 권면을 위해서는 뜨겁고 힘 있게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은혜로운 몸의 제스처를 써야 하며 손, 팔, 눈을 사용하여 감사, 슬픔, 확신 등 회중의 경건한 감정을 끌어내도록 애써야 한다. 이를 위해 당시 존경받는 설교자를 모범으로 삼아 배우기를 적극적으로 권면한다.(Art., 672)

대학에서 사역하는 목사들에게 퍼킨스는 교만에 빠질 위험성을 경고한다.(소명, 167) 물론 자신을 포함한 신학 교수 내지는 교목들에게 주는 메시지라 할 수 있겠다. 목사는 그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서 “처음부터 우리의 눈을 영예에 둘 것이 아니라 소명을 잃어버릴 위험성에 두라.”고 요구한다.(소명, 168)

목사의 명예는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제대로 사용될 때인데 곧 소명의 차원에서 평가가 되어야 한다.(소명, 175) 설교자의 설교 전후의 기도는 온전한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며 경외와 거룩함으로 그리고 겸손하게 주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소명, 191)

퍼킨스는 무엇보다도 목사가 먼저 거룩한 삶을 살 것을 요청하는데 성도들은 강단에서 외치는 목사의 거룩한 설교보다는 목사의 세속적인 행동을 먼저 따르기 때문이며 목회의 열매가 없는 첫째 이유는 목사가 성화되지 않은 채로 사역에 임하고 있기 때문이다.(소명, 192-195)17) 퍼킨스는 경건하고 은혜로운 설교를 위해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첫째, 성경 본문을 또렷하게 읽는다.
둘째, 낭독된 그 성경 본문 자체로부터 느낀바와 이해한 바를 제시한다.
셋째, 본문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진 몇 가지 교리와 유익을 모은다.
넷째, 본문으로부터 얻은 교리들을 그리스도인의 삶과 윤리에 단순 하고 평범한 언어로 적용한다.

곧 이 모든 것을 더 요약하면 유일하신 그리스도를 설교하며, 그리스도를 힘입어, 유일하신 그리스도를 찬양하기 위해 설교한다.18)

(3) 청중의 유형

설교자는 적용을 위해 설교를 듣는 회중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곧 어떤 사람들이 자신의 설교를 듣는지 분석하여 그에 따라 설교준비와 전달과 적용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퍼킨스가 대학 교수로서 자칫 소홀히 할 수 있는 목회 현장에 대한 이해를 요청하고 있는 점은 그가 생각하는 신학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신학은 목회를 위한 신학이다. 퍼킨스는 일곱 가지로 청중을 나눈다.

첫째, 불신자로서 성경을 모를 뿐 아니라, 가르침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은 사람이다. 설교자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해야겠지만 끝내 거부할 때는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둘째, 가르칠 수는 있지만 신앙에는 무지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우선 교리문답으로 신앙의 기초를 세워야 한다.(Art., 665)

셋째, 유식하나 겸손하지 않은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죄의 완악을 깨뜨려 회개로 이끌어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슬픔을 갖도록 해야 한다.

넷째, 겸손한 사람들인데 겸손의 실체를 정확히 분석해서 신중하게 복 음과 함께 율법을 제시해야 한다.(Art., 666)19)

다섯째, 믿는 자들에게는 세 가지가 제시되어야 하는데 1) 칭의, 성화 그리고 견인의 복음, 2)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서의 새로운 순종 을 가져오는 저주가 없는 율법, 3) 의인으로서 죄인임을 인식 시 키며, 늘 율법의 묵상, 죄의 느낌을 시작하되 복음 안에서의 끝 을 맺도록 해야 한다.

여섯째, 믿음 문제에 시험 든 자들에게는 형제애로 그들의 실족과 상처 를 분석해서 신뢰 가운데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야 한다.(Art., 667)

일곱째, 불신자와 믿는 자가 함께 하는 일반적 경우에는 율법을 통한 죄의 회개를 촉구하고 동시에 복음의 음성을 아울러 듣게 하면 될 것이다.(Art., 668)

(4) 퍼긴스 설교의 특이성

퍼킨스의 설교 이해에는 몇 가지 독특성이 있다. 구약을 근거로 하여 제사장적 목사 이해와 천사론이다. 이는 퍼킨스가 소속된 영국 국교회의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하겠다. 물론 로마 가톨릭적인 사제론과는 차별을 보이면서도 퍼킨스는 중보자로서의 목사에 대한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목사를 돕는 천사에 대한 입장은 필자가 속한 개혁 신학에서 볼 때 분명 낯선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역의 도구로서 제시되는 천사는 위로가 된다. 퍼킨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고해성사를 “간교한 술책이자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을 옥죄는 고문대라고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말하면서도 성도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죄 때문에 목사를 찾아와 경건한 도움과 거룩한 기도를 요청하는 고백은 인정한다. 목사가 자기 양떼의 영적상태를 알고 하나님께 그를 위한 중보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목사는 백성 가운데 살아야 하는데 문제는 목사가 부패한 백성들의 삶에 영향을 받을 수 있기에 이에 대해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소명, 177-179, 183-186) 이러한 모습은 퍼킨스가 로마 가톨릭교회와는 선을 그으면서도 그러나 영국 국교회 소속 목사의 한 사람임을 확인시키는 대목이다.20)

퍼킨스에게 있어 천사(소명, 204-221)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돕기 위해 보냄을 받았음이 분명한데 이것은 모든 목사에게 커다란 위로와 가치가 있는 교리로서(소명, 205) 천사들이 신실하고 경건한 목사들을 더 많이 섬기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목사들에게 주된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소명, 207) 아울러 천사들이 가장 기뻐하는 영혼 구원이 목사의 사역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목사들은 천사들을 기뻐하지만 결코 섬기거나 숭배하지는 않는다.(소명, 208) 천사숭배는 ‘주제 넘는 일’로 천사들의 목사들을 섬기는 일을 통해 성도들이 목사들을 존경하는 자세를 가짐이 마땅하다는 것이다.(소명, 209) 아울러 주의 종들은 고된 소명 가운데서도 위로와 만족을 얻으며 사명을 깊이 인식하고 신실한 주의 종으로 기쁘게 주의 교회를 섬기게 된다는 것이다.(소명, 210-11)21)

퍼킨스의 천사론은 개혁신학에서는 낯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설교자를 기꺼이 도우신다면 얼마나 은혜롭고 기쁜 일일까 귀를 기울이게 된다. 퍼킨스는 구약을 근거로 천사론을 가져오고 있다.

(5) 제도적 개혁을 추구

퍼킨스는 참된 목사의 희소성에 대해 ‘일천 중의 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참된 사자요 참된 해석자인 진정한 목사는 흔하지도 통상적이지도 않다. 그런 사람들은 이 땅에서 드물며 참으로 적은 사람 즉 ‘일천 중의 한 사람’이다.”(소명, 131) 아니 “일천 명 중에 한 사람도 없다는 뜻이다.”고 까지 말하기에 이른다.(소명, 132) 퍼킨스는 참된 목사가 적은 세 가지 이유를:

첫째,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시함,
둘째, 목사의 소명을 감당하기가 어려움,
셋째, 목사의 신분과 경제적 보상이 미미함으로 제시한다.(소명, 132-33)

그러면서 퍼킨스는 구약에서 레위 인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지에 대한 세심한 지침이 주어졌음을 근거로 말하며 교회가 목사에게 그 어떤 직업보다도 ‘가장 크게’ 대우를 해줄 것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개혁을 위한 ‘훌륭한 기독교 정책’이라는 것이다.(소명, 134)22) 그렇다고 돈을 밝히는 목사를 바른 목사로 퍼킨스가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목회 지를 결정할 때 목사는 경제적인 조건을 따지기보다 교인들의 영적 상태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어떤지, 어떤 영적 상태인지, 그들이 과연 경건을 사모하는지 등이 목회지의 결정 기준이 되어야지, 다른 조건을 우선시해서는 안 된다.(소명, 182) 퍼킨스는 자신의 제안을 위해 몇 가지 지침을 제공한다.

첫째, 양질의 목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기독교 통치자들과 군주들은 최 선의 노력을 기울여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제공해야 한다. 이것이 분명하고 확실한 결론이다.(소명, 135)

둘째, 목회 소명을 귀하게 여겨 타인들도 목회 소명을 사모하도록 해야 한다.(소명, 136)

셋째, 학문연마가 직접적으로 목회에 도움이 되도록 하되, 학문에 너무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며 도리어 현장에서 섬기는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넷째, 성도들이 목사를 존경하고 그가 전하는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야 한다.(소명, 138)23)

퍼킨스는 영국 국교회의 정책으로 또는 영국 국가의 정책으로 제시하는데 그가 영국 국교회의 일원임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24)

3. 에임스의 설교 이해

필자가 텍스트로 사용한 에임스의 저서는 그의 나이 47세 때인 1623년 라틴어로 출간된 ‘Medulla Theologica’로서 1643년 영어 ‘The Marrow of Sacred Divinity’로 번역된 이후 ‘The Marrow of Theology’(1997년)로 바뀐 저서 가운데 묘사되는 설교 이해 부분을 가져왔다.25)

물론 에임스가 이 저서에서 한 주제 설교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주제에 대해 에임스가 이해하는 바를 나름대로 명확하게 파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거기다 에임스의 신학 이해가 삶의 현장을 목격하며 쓰고 있기에 현장으로서의 설교 이해는 나름대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1) 소명

에임스는 교회 직분을 특별직(extraordinary ministers)과 일반직(ordinary ministers)로 구분한다. 특별직이란 선지자, 사도와 같은 직분으로 특별한 기간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직분이고 일반직은 교회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있는 직분들을 말한다. 두 직분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소명을 전제로 하며 일반직은 특별 직분에 의존하는데 말하자면 이들의 후계자로 볼 수 있다.26)

머로우(Marrow, 183,184)는 이렇게 말한다. “특별직의 권위는 실질적으로 사람에 의해서나 사람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 교회의 특별직은 처음 교회를 설립하시면서 교회를 특별하게 보존하기 위해 타락한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다.”

엄격히 말해 위클리프, 루터, 츠빙글리는 특별직은 아니지만 그들의 역할은 특별직에 해당한다고 에임스는 생각하는데 이들이 특별직에 해당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Marrow, 185) 일반직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사역의 방향을 잡는데 일반직이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워진 질서에 따르기 때문에 일반적이라 일컫는다. 일반직은 성경에서 제안된 일들을 벗어나 그 어떠한 일도 자의적으로 규정하거나 행해서는 안 된다. 일반직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사람으로부터 임명된다 할지라도 그 사역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것이다.

일반직에 요구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이다. 일반직은 특별직에 의존하기에 그들의 계승자라 말할 수 있다. 일반직의 목적은 보통의 수단을 통해 교회를 보존하고 전파하며 갱신하는 것인데 두 가지 방향을 갖는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일해야 한다.(Marrow, 190) 일반직에서 수행하는 말씀의 설교는 교회에서 지속적이어야 하며 극도로 중요한 사역으로 설교자의 의무는 말씀으로부터 회중의 신앙인격 함양을 위해 하나님의 의지를 공포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먼저 성경을 즐거이 연구하며 성경의 가르침에 먼저 순종하여 실천하는 자이어야 한다.27)

그런데 설교자는 주해나 주석을 참고는 하되 의뢰하지 말아야한다.28) 설교자는 듣는 회중의 지위, 수준, 연령대를 고려하여 말씀을 전해야 한다. 설교자가 헛된 말에 빠져서는 안 되고 말다툼과 허황된 변론을 피해야 할 것이며 신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여 책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에임스에게 있어 사역은 교회의 한 역할로서 선택함을 받은 한 사람이 거룩한 것들을 위한 특별한 권리에 의해 책임을 갖는 것으로29) 오직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그리고 그에게만 순종함으로써 행해지는 권세로서 그 사역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는 명령의 권한은 갖지 않는다.(Marrow, 182) 이 사역은 특별 의무와 관련되기에 특별하지만 절대적이지 않다. 분명한 것은 사역의 권한은 소명에 의존하며 소명에로의 적합성은 은사와 자원하는 마음이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세 가지 요소는 신앙, 회집, 사역인데 신앙은 교회의 본질적(essential) 요소, 회집은 필수 불가결한(integral) 요소, 사역은 특정한 구조적(organic) 요소이다. 교회에는 가부장제나 그 어떠한 거룩한 규율이 용인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종이라는 의식과 신성한 섬김만이 존재할 뿐이다.(Marrow, 183)

(2) 강해설교

에임스는 설교가 성경의 강해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회중들이 설교를 듣고 말씀을 삶에 적용하기 위해 요구되는 두 가지는 성경 본문이 품고 있는 바를 언급해야 하고 또 하나는 처한 상황에 따라 회중의 양심을 향하여 그 말씀이 적용되어야 한다. 본문이 가지고 있는 진리 곧 교리를 설명해 주고 이로부터 선함 곧 적용을 제시해야 한다.30)

교리는 직접적인 결과로서 성경 본문으로부터 일차로 발견되어야 하고 그런 후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31) 교리를 향한 명쾌한 말씀에 대해서는 더 이상 토론이나 언급이 불필요하며 허용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회중이 질문할 경우 증명하기 위해 교리의 토의는 증명의 형식을 요구하며 이미 그러한 과정을 거친 경우라면 예증의 형식을 가져오면 되겠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회중의 유익이다.(Marrow, 192)

설교 중 설교자가 피해야 할 점은 회중에게 너무 강압적인 태도를 취한다거나 듣는 회중을 배려하지 않고 성경 본문 그 자체를 망각한 채 너무 많은 것을 다 말하려고 하는 과욕이다. 또 주어진 성경 본문을 무시한 채 그 본문과 상관없이 설교하는 행위이다. 결과 회중들은 설교자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혼동하고 어떻게 그 말씀을 적용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회중은 일목요연하게 설교의 요지를 기억하기가 어렵고 가정에 돌아가 개인적으로 말씀을 다시 떠올리기 어려워 그런 설교를 통한 삶의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Marrow, 191) “설교자가 오직 성경 진리를 발견하고 설명하는 데만 정신을 쏟아 회중의 경건과 축복이 있는 적용과 실천을 간과하는 것은 죄이다.”32)

게다가 본문에서 도출되는 모든 교리들을 설교자는 다 말할 필요가 없고 필요와 상황에 따라 성도의 유익을 위해 그 가운데서 선별하여 말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너무 많은 것을 다른 본문에서 무분별하게 빌려올 경우 따라오지 못하는 성도들의 실망이 커져 믿음에서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한다.(Marrow, 192) 말씀의 활용은 둘로 나누이는데 판단과 실천이다. 판단은 정보와 마음의 개혁을 제공한다. 정보는 진리를 증명하며 개혁은 어떤 잘못을 반박한다. 그렇지만 이미 정죄된 이단을 직접적으로 논박하기 보다는 분명하게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생활의 실천에 있어 요구되는 지시는 교훈과 교정(矯正)으로 구성되는데 교훈은 마땅히 따라야 할 바를 제시하고 교정은 마땅히 피해야 할 바를 정죄한다.(Marrow, 193) 설교는 좌우 양날의 날선 칼과 같은 것으로 살아 있고 능력 있는 말씀으로 눌린 자에게 위로를 주며 좌절가운데 있는 자에게 권면을 또 잘못된 행위를 교정하기 위한 경고를 주며 실천적 적용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특히 기억해야 할 점은 이 모든 열매들이 인간의 지혜나 그 어떤 육적 감정을 움직여서가 아니라 순전히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마땅히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33) 하나님 안에서 신앙을 세우기 위해 선포되는 설교는 성령의 말씀이고 생명의 말씀이다. 그러기에 에임스는 설교에 인간의 증언이 결코 첨가되어서는 안 되며(Marrow, 194),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라틴어나 헬라어 또는 히브리어 단어나 문장을 마땅히 사용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데 학문의 과시라는 맥락에서이다.

에임스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들의 말과 혼합될 때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성 완전성 그리고 엄위성이 훼손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화려한 말에 현혹되어 복음의 단순성을 싫어하게 되기 때문이다. 에임스는 형식적으로는 에둘러 말하는 것, 수사학적 서두로 시작하는 것, 그럴 듯한 웅변을 불필요한 것 등을 멀리한다. 또 설교자가 본론에서 벗어난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는 것을 세 가지 이유로 경계한다.

첫째, 인간의 맛을 보이고,
둘째, 시간이 소요되며,
셋째, 보다 신령한 일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Marrow, 195)

(3) 설교 언어와 동작

에임스는 설교 이해를 이론에서만 끝나지 않고 목회의 관점에서 실질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설교자의 언어와 동작은 진심에서 우러나는바 영적이어야 한다. 설교자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삶으로 실천하고 중심이 말씀에 견고히 서 있어야 하며 거룩한 권위와 함께 열심, 사랑, 온유, 자유 그리고 겸손을 드러나는 자이어야 한다.

설교자의 발음은 자연스러우며 친절하고 명확하고 회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또렷또렷해야 하는데 그럴 때 사람들은 감동을 받는다. 듣기에 불쾌한 두 종류의 목소리가 있는데 하나는 무겁고 느리며 노래하는 듯 졸리는 듯 하는 목소리로 잘 연결이 되지 않아 이해가 어려운 말투의 목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설교에 가장 부적절한 목소리로 말이 너무 빨라 서두르며 즉흥적이고 귀가 따가울 정도로 강압적일 때 설교의 주제를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또 일반 법정이나 광장 연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언어나 발음 그리고 제스처 등은 설교에는 부적절하기에 피해야 한다.

에임스에게 있어 성령의 능력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설교는 우아하고 번지르르한 수사보다는 아주 간단명료하고 단순한 말에서 훨씬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Marrow, 195) 설교에 있어 가식의 분량만큼 효과와 권위는 상실된다. 설교를 위해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취해야 할 것은 그 어떤 것도 버려서는 안 된다.

설교 전후의 기도는 설교 효과에 도움을 준다. 설교 전 기도의 내용으로는 말씀의 목적, 효용, 우리의 간구, 우리의 무가치함, 우리의 의무와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이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회중들이 같은 마음으로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구하며 신실하게 그 뜻을 순종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설교 후 기도는 감사가 마땅히 포함되어야 할 것이며 설교의 주제를 기억하며 간구로 전환시키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다.(Marrow, 196)

(4) 겸손한 들음

하나님과 인간의 영적 교제의 수단으로 에임스는 두 가지를 일컫는데 ‘말씀의 들음’과 ‘기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34)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단지 문자적으로 설교를 듣는다는 것만은 아니며 독서 등 여타 다른 방식으로도 가능하다. 말씀의 들음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의지를 내적으로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35)

말씀을 받음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마음의 집중과 의지의 집약이다.(Marrow, 254) 마음의 집중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되기를 열망하며, 의지의 집약이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마음을 다해 순종하기 위해 우리의 의지를 활용함을 말한다.36) 곧 시편 119:106의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다해 순종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바를 흔들림 없이 지키려는 강한 의지가 요구된다. 그 말씀의 바른 들음은 내면적 행위가 따라 오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신실한 신앙적 순종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Marrow, 255) 참으로 경건하게 되려면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고착(固着) 된 믿음으로부터 깨어나야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한 그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 때만이 그 말씀에 의해 감화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Marrow, 255) 이 신앙에 의해 우리는 말씀에 매달리게 되고 그 말씀으로 구원에로 접붙임을 받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것으로 먼저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적으로 영광을 돌리며 다음으로 말씀의 들음을 통해 믿음, 소망, 사랑의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훈련이 되는데 이 자체로 바른 예배가 구현되기 때문이다.(Marrow, 256)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들음에 있어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은 어쩌다 하나님 대신 인간을 예배하지 않도록 인간의 말이나 인간의 문장이 하나님의 말씀과 섞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37)

에임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 반대되는 태도로는 첫째 교만인데 이는 겸손, 순종과 반대되며 그 대신 인간의 의지를 내세운다는 것이다. 교만은 모든 죄의 원인으로 유일하게 말씀의 권위를 경멸적으로 내팽개치기 때문이다.(Marrow, 256)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국 세상 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른 신들을 구하고 이들에 복종하는 우상숭배에 빠진다는 것이다.(Marrow, 257)38)

마지막으로 에임스는 기도의 중요성을 잊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에 집중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청종과 기도는 구별되는데 기도는 우리의 의지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Marrow, 259)39) 그런데 그 기도는 단순히 인간적 세속적 의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그 무언가를 얻으려는 갈망,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구하는 의지, 결국하나님 앞에 그 소원을 제출하고 가져다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Marrow, 259) 그 제시는 복종적이고 겸손해야한다.(Marrow, 260)

4. 퍼킨스와 에임스 설교 비교

16세기 17세기 격변의 시대 퍼킨스와 에임스는 선생과 제자 사이이지만 설교론에서 그 차이를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영국과 유럽이라는 차이점을 시작으로 해 16세기 영국 국교회의 일원으로서 캠브리지대학의 교수였던 퍼킨스와 영국을 떠나 17세기 네덜란드 개혁교회라는 토양 위에서 목사와 교수로서 서술되는 에임스의 종교개혁 정신이 드러나는 설교론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은 퍼킨스와 에임스가 처했던 삶의 자리 곧 그의 신학이 형성되었던 그 역사적 현장을 들여다 볼 때 나름대로 두 사람 사이의 상이성이 이해가 가능하다. 퍼킨스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제 종교개혁 신학에 발을 들여 놓은 채 종교개혁의 초기 대열에 참여하고 있는 16세기 영국 국교회의 한 사제로서의 그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에임스는 퍼킨스의 제자였지만 신앙과 신학의 뿌리를 영국의 종교적 분위기와는 확연히 차이를 보이는 보다 자유로운 네덜란드개혁교회로 옮겨온 목사로서 게다가 격변의 시대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어느 정도 종교개혁의 신학이 영글어가고 있는 개혁교회 현장에서 학생들을 위한 강의안으로 제시되는 설교이해라는 점이다. 곧 두 사람이 처한 상이한 역사 상황이 퍼킨스와 에임스의 설교론이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 청교도 설교자들은 말할 수 없는 박해 가운데서 성도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기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며 생존의 위협까지를 감수해야 했던 성도들에게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애정적 교제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청교도의 설교 이해에 작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40)

에임스와는 다르게 퍼킨스의 설교 이해는 구약적인 경향이 없진 않는데 선지자적 제사장적 목사 이해가 그렇다. 그가 에임스와는 다르게 설교를 영어단어 ‘sermon’을 가져오기 보다는 굳이 ‘prophecy’를 가져온 점은 선포하고 대언하는 선지자로서 권위와 설교자 자리 이해에 무게를 두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제사장적 설교자 이해도 다르지 않은데 대언자로서 뿐 아니라 중보자로서의 목사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퍼킨스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 이해와는 나름대로 선을 긋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퍼킨스와 에임스의 설교는 철저하게 성경 본문 중심이다. 가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는 자로서 설교자를 염두에 두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성령의 역사는 필수적이고 본질적이다. 퍼킨스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로서의 설교자, 에임스는 강해설교자로서의 설교자를 분명하게 강요한다.

퍼킨스의 설교론은 목사 중심의 하향식 경향이 보인다면 에임스의 설교론은 말씀을 듣는 회중 중심의 상향식이라 하겠다. 퍼킨스의 설교자론은 이사야가 추구했던 성령이 도우시는 ‘학자의 혀’를 갖는 설교 자라면 에임스의 설교자론은 성도들의 위치에 서서 그들을 섬기는 일꾼으로서의 위치가 다르다.

퍼킨스는 교리를 우선시 하면서 그 교리를 통한 성경이해를 제시하는데 이는 당시 어려운 신교와 구교 분열의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제자 에임스에게서는 이런 점은 다르다. 에임스는 먼저 말씀을 바르게 이해한 후 거기로부터 설교에 필요한 교리를 추출할 것을 말하고 있다. 에임스와 퍼킨스는 설교자가 철저하게 성령의 역사를 의뢰할 것을 요청하며 목사는 경건생활과 겸손으로 설교가 인간의 일로 잘못되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할 것을 강조한다.

설교자가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지만 그 어느 때나 그 학문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데 설교는 결코 인간의 기술(記述) 내지는 인간의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에임스의 설교론에서 요구되는 것은 수사학이 아닌 단순성이며 과감히 버려야 할 것은 가식이다.

퍼킨스와 함께 에임스는 꼭 같이 설교 적용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두 사람의 설교 적용은 예리하며 분석적이며 실질적이고 목회적이다. 그럼에도 적용에 있어서도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퍼킨스가 율법적 적용과 복음적 적용을 나누며 설교자 중심의 적용이라면 에임스는 말씀을 듣는 성도 중심의 복음적 적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 예로 퍼킨스는 성령이 주는 학자의 혀와 천사론은 설교자를 위로하고 돕는 자이다. 그 대신 에임스는 설교자가 성도들을 위로하고 섬기는 종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또 퍼킨스의 설교론에서 나타나는 특이성은 두 가지를 제시할 수 있는데 설교자를 기쁘게 도와주는 천사론과 설교자를 최고로 대우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적 개혁안이다.

맺는 말
16, 17세기 주의 몸 된 교회의 신실한 종이었던 퍼킨스와 에임스의 설교론은 오늘 21세기 한국교회에게 귀한 교훈과 경종을 준다.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설교의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이며, 둘째는 그 말씀의 강한 적용이다.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교회의 타락은 설교의 타락에서 출발한다. 청교도주의를 부흥운동, 각성운동, 설교운동 등으로 평가하게 되는 것은 근저에 ‘오직 성경’이라는 신학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는 설교를 잊지 않았다. 퍼킨스와 에임스의 설교론은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오늘 한국 교회가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렵게 된 것은 세속적 가치관을 가지고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듣는 청중의 입맛에만 맞추려는 설교를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세속적 가치관이 교회를 다스리기에 목사들과 교회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청교도의 설교론의 강점은 적용인데 이 점에서 또한 한국 교회 설교자들이 주목해야 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한국 교회의 설교의 약점은 적용이 약한데 퍼킨스와 에임스의 설교 적용은 매우 자세하고 구체적이며 분석적이다. 대각성운동의 주역인 조나단 에드워즈도 강한 적용을 잊지 않았는데 이러한 점에서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이 겸손함으로 배울 수 있었으면 한다.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청교도들이 말하는 설교가 무엇인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하겠다.

순전한 복음전파, 성령의 사역으로서의 설교, 목사의 경건한 삶, 구체적 설교의 적용 거기에 신비롭기 까지 한 설교자를 기꺼이 돕는 천사를 기억한다면 오늘 한국 교회가 영적으로 각성하며 변화를 경험하게 되리라 믿는다.(*) 글쓴 이 / 주도홍 교수(백석대학교 역사신학)

< 참고 문헌 >

– 1차 자료
1) Ames, William. The Marrow of Theology. Grand Rapids, 1997. Perkins, William. A Godly and Learned Exposition upon Christ’s Sermon in the Mount. London, 1631, 423-63.
2) “Of the Calling of the Ministerie, Two Treatises. Describing the Duties and Dignities of that Calling” (1609).
3) The Works of that Famous and Worthy Minister of Christ, in the Universitie of Cambridge.

Vol. II. Cambridge, 1617.
4) 윌리엄 에임스. 신학의 정수. 서원모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
5) 토마스 카트라이트. 기독교교리강론. 서울: 개혁주의성경연구소, 2004.
6) 윌리엄 퍼킨스.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 채천석 역.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6.

– 2차 자료
1) 안덕원. “존 웨슬리에 있어서 설교와 성찬의 의미와 관계: 한국교회에서의 적용”. 「성경과 신학」 65 (2013): 153-84.
2) 원종천. “주도홍 박사의 ‘청교도주의의 설교 이해’에 대한 논평”.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제61차 정기논문발표회 자료집: 한국교회와 설교」 (2013. 4. 27): 145-46.
3) 주도홍. “윌리엄 에임스”. 칼빈 이후의 개혁신학자들. 부산: 고신대학교 개혁주의학술원, 2013, 135-56.
4) 개혁교회 경건주의. 서울: 대서, 2011.
5) 새로 쓴 세계교회사.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2006.

< 미 주 >
1) 토마스 카트라이트, 기독교교리강론 (서울: 개혁주의성경연구소, 2004). 비교. 주도홍, 새로 쓴 세계교회사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2006), 308-18.
2) “Perkins, William,”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1997), 1256.
3) “Ames, William,”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51-52.
4) 참고. 주도홍, “윌리엄 에임스”, 칼빈 이후의 개혁신학자들 (부산: 고신대학교 개혁주
의학술원, 2013), 135-56; 주도홍, 개혁교회 경건주의 (서울: 대서, 2011), 83-100(“퍼킨스”); 101-12(“에임스”).
5) William Perkins, A Godly and Learned Exposition upon Christs Sermon in the Mount
(London 1631), 423-63; “Of the Calling of the Ministerie, Two Treatises. Describing the Duties and Dignities of that Calling”(1609).
6) William Perkins, The Works of That Famous and Worthy Minister of Christ, in the
Universitie of Cambridge, vol. II (Cambridge, 1617), 646-73: “The arte of prophecying.”
7) 위의 두 저작을 한데 묶어 펴낸 한국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윌리엄 퍼킨스,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 채천석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6).
8) 이후 너무 빈번히 원전을 인용해야 하는 사정으로 바로 본문에 책 제목의 약자와 함
께 쪽수를 명기할 것이다.
9) 고전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10) 앞에 제시한대로, 윌리엄 퍼킨스,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 117-241에 실려 있다.
11) Perkins, The Works of that Famous and Worthy Minister of Christ, 664: “Hence it is, that many sentences, which seemed to belong to the law, are by reason of Christ, to be understood not legally, but with the (a) qualification of the Gospell.”
12) reproof.
13) 퍼킨스,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 122: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을 순결하게 연구하고 전해야 한다.”
14) 시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15) Perkins, The Works of that Famous and Worthy Minister of Christ, 670: “because the preaching of the word is the testimony of God, and the profession of the knowledge of Christ, and not of humane skill: and again, because the hearers ought not to ascribe their faith to the gifts of men, but to the power of Gods word.”

16) Perkins, The Works of that Famous and Worthy Minister of Christ, 670: “The speech must be spiritual and gracious.”
17) 퍼킨스,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 168-93: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사를 풍성하게 주신다. 그것은 때로 우리 가치를 과대평가하게 하고 교만케 하는 많은 유혹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목
표하는 것이 결코 인간적이거나 육적인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우리의 목적은 오직 영혼을 구하 는 것이다. 우리의 전쟁 무기는 자만, 허영, 기만 따위의 육적인 것이 아니다”(168); “지식과 학 위와 경륜이 있다면 목사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목회 소명의 위대함과 자신이 섬겨야 할 하나님의 위엄과 이런 위대한 사역에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깨달아 겸손해지고 낮아져야 한다”(170); “그 삶 에 악이 없는지를 확실히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한 손으로 세우고 다른 한 손으로 부수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193)
18) Perkins, The Works of that Famous and Worthy Minister of Christ, 673: “The Summe of the Summe Preach one Christ by Christ to the praise a Christ.”
19) Perkins, The Works of that Famous and Worthy Minister of Christ, 666: “Let the Law bee propounded.”
20) 퍼킨스,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 177-79. 목사는 하나님에 대한 백성의 해석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간구를 표현하고 그들의 필요를 알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도우시도록 간구하는 것만으 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야 한다. 목사는 백성의 죄를 의식하고, 공적으로 그리고 사적으 로 하나님께 그것을 고백해야 한다(177-78). 목사는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할 뿐만 아니라 백성의 죄도 고백해야 한다(178). 확실히 백성의 죄 를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 목사의 의무라면, 의도적이거나 부주의하게 그들과 거하지 않은 것 만이 아니라, 정당하고 적절한 이유 없이 그들과 거하지 않아도 심각하고 두려운 죄가 됨이 틀 림없다.(179)
21) 퍼킨스,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 206. 천사들이 우리의 외적인 사역을 우리와 함께, 또는 우리를 대신해서 해 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모든 거룩한 행사와 법적인 활동에 항상 임재 한다. 특히 목사들이 공적인 예배를 이끌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또한 천사는 이 모든 경우와 더불어 좋은 목사들의 노고와 성실과 신실함의 증인이다. 천사는 목사들이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그것 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을 때에도 그들이 어려운 고통의 길을 여행하는 동안에 힘과 위로를 주며 도와줌으로써 섬긴다.
22) 퍼킨스,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 134-35. 많은 경멸을 받고 부담은 큰 데 비해 보상이 극 히 적은 곳에 좋음 목사가 일 천 가운데 하나라도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23) 퍼킨스,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 139. 거룩한 목사보다 더 사랑받고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자는 없다. 이사야가 말하는 것처럼,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아름답다.(사 52:7) 우리는 평화의 소식을 가져오는 사람들의 발에 입맞춤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에 갈라디아 인들이 바울을 대했던 것처럼 좋은 목사를 ‘하나님의 천사’(갈 4:14)로 대하고 받아야 한다.
24) 존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의 설교의 개혁자로서 생각할 수 있다. 웨슬리는 예전의 옹호자였지 만, 영국 성공회의 설교의 갱신을 이룩한 인물로 묘사된다. 참고. 안덕원, “존 웨슬리에 있어 서 설교와 성찬의 의미와 관계: 한국교회에서의 적용”, 「성경과 신학」 65 (2013): 153-84.
25) William Ames, The Marrow of Theology (Grand Rapids, 1997). 한국어 번역으로는 윌리엄 에임스, 신학의 정수, 서원모 역(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이 있다.
26) Ames, The Marrow of Theology, 190.
27) Ames, The Marrow of Theology, 191: “For one who teaches another ought before and
while he teaches himself, Rom. 2:21”
28) Ames, The Marrow of Theology, 191: “He must not put his trust in notes and
commentaries.”

29) Ames, The Marrow of Theology, 182: “The ministry is an ecclesiastical function in which
a man, being singled out, is responsibly by special right for holy things.”
30) Ames, The Marrow of Theology, 191-92: “In setting forth the truth in the text the minister should first explain it and then indicate the good which follows from it. The first part is
concerned with doctrines and proofs; the latter with application or derivation of profit from the doctrines.”
31) Ames, The Marrow of Theology, 192: “A doctrine rightly must first be discovered and then discussed. The discovery is made by a logical analysis in which rhetoric and grammar are utilized.”
32) Ames, The Marrow of Theology, 192: “They sin, therefore, who stick to the naked finding and explanation of the truth, neglecting the use and practice in which religion and blessedness consist.”
33) Ames, The Marrow of Theology, 194: “The doing of all these things must have in it no show of human wisdom or mixture of carnal affections; it should manifest itself throughout as the demonstration of the Spirit.”
34) Ames, The Marrow of Theology, 254: “Hearing the word is the devout receiving of the will of God.”
35) Ames, The Marrow of Theology, 254: “It denotes any perceiving of the will of God, and especially inward receiving and submission.”
36) Ames, The Marrow of Theology, 255: “Intention is the application of our will to the devout observance of the will of Godnow known.”
37) Ames, The Marrow of Theology, 256: “Therefore, no word or sentence of men ought to be mingled with the word of God or transmitted in the same manner lest by chance we worship men instead of God.”
38) Ames, The Marrow of Theology, 257: “As in pride men refuse to submit themselves to the will of God; so in taking counsel which is not of God they seek other gods, as it were, to whom they may be subject.”
39) Ames, The Marrow of Theology, 259: “Prayer differs from the hearing of the word in that hearing is oriented to the will of God but prayer to our will. In hearing the word we accept God’s will but in prayer we offer our will to God to be accepted by him.”
40) 참고. 원종천, “주도홍 박사의 ‘청교도주의의 설교 이해’에 대한 논평”,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제 61차 정기논문발표회 자료집 (2013. 4. 27), 「한국교회와 설교」, 145-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