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31) 중세 중기의 역사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31) 중세 중기의 역사

6. 중세의 대학과 학문

중세의 대학은 11세기부터 이탈리아의 살레르노 등지에서 의학의 발달로 시작하여 신학, 법학을 중심으로 발달되었다. 12세기에 들어와서는 더욱 대학들의 발전은 무성하였다. 주로 성당학교로부터 시작하였는데 파리, 옥스포드는 신학으로 유명했고, 볼로냐는 교회법과 민법, 살레르노는 의학으로 유명했다. 커리큘럼은 7과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인문 과목으로 문법, 수사, 논리 혹은 변증법이었고, 예과 과목으로는 천문학, 산술, 기하학, 음악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마친 자들을 위한 고등 과목으로 신학, 교회법, 의학이 있었다.

이 시기에는 라틴어가 학교에서의 유일한 학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었다. 교육은 강의와 부단한 토론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대학들은 모두가 교회적이었고 교황의 인가를 받아야만 했다. 중세기 동안 80여 개의 대학이 설립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독특한 역사와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파리 대학, 몽델리에 대학, 블로냐 대학, 파두아 대학, 옥스포드 대학, 켐브리지 대학, 비인 대학, 프라하 대학, 라이프치히 대학, 하이델베르그 대학, 바젤 대학 등이다.

당시 모든 대학은 학문 가운데 신학을 모든 학문의 여왕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신학은 가장 인기 있는 과목이었다. 철학이나 여타 과목들은 신학의 시녀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학문의 풍토가 신학과 철학에 편중됨으로 그리스의 전성시대처럼 그리스 철학이 활기를 띠었고 그 영향은 그동안 중세교회 은총의 신앙 아래 숨겨져 있던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었다. 그래서 철학이라는 학문적인 논리로 기독교의 진리를 입증해 보려는 지적활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를 스콜라주의 신학이라 부른다.

특히 대학중심으로 발달한 신학문 스콜라주의는 십자군운동을 통해 동방과의 접촉에서 유입되어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발달되었다. 신학과 철학과의 관계는 초대교회로부터 대립적인 상태로 발전하였다. 지금까지 신학이 논하는 교리 등은 계시로서 인간이 세운 철학적인 이론과는 상반되는 완전한 진리로 인식했다. 비록 변증론 자들이 철학을 이용한 흔적이 그들의 기독교 사상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양자는 본질적으로 별개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즉 철학이란 전체 복음의 계시보다는 부족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12세기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스콜라주의에 의해 신학과 철학이 만나고 동일시되는 시대가 되었다. 스콜라 신학의 선구자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영국의 켄트베리 교구에서 활동했던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 1033-1109)이었다. 1093년 그는 켄트베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를 스콜라 신학의 원조로 자리매김 하는 이유는 그가 신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이성을 적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성을 통해 적용할 수 없는 신앙문제는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신앙을 통해 믿고 있는 것들을 이성을 통해 확실히 하고 싶어 했다.

안셀름은 그의 신학저서 ‘서언’(Prologion)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를 상상할 수 없는 존재이다.”(God exists because we can’t imagine any greater being.) 안셀름 의 이러한 주장은 결국 신앙으로만 수용하던 신의 존재를 이성으로 입증하려는 방법을 사 용했다는 데 그 의미가 더 크다. 이렇게 시작 된 안셀름의 신앙의 이성적인 증명은 그의 논문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에서 그 Anselm of Canterbury 리스도가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이렇다.

“하나님에 대한 범죄는 인간의 범죄이기 때문에 인간만이 죄를 위한 보상을 지불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엄이 요구되는 무한한 보상을 해 낼 수가 없다. 그래서 신인(神人)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인간의 죄 값을 지불하게 되었다.”

이런 성육신의 이론은 인간의 속죄의 의미와 하나님의 은혜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고도 볼 수 있다. 안셀름 다음으로 중세 스콜라주의의 기초를 놓았던 사람은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2)였고 그 다음에 중요한 사람은 ‘4권의 문장서’(Four Books of Sentences)의 저자인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 1100-1160)였다. 이 책은 중세기에 최초로 조직신학적 분석과 체계로 신론에서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학의 중요한 문제들을 취급하였다. 이 책은 후에 중세 대학에서 기본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즉 당시 신학교육은 롬바르드의 ‘4권의 문장서’에 대한 주석이라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자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역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였다. 1224년경 토마스는 나폴리 시외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도미니칸 수도원에 입단하여 위대한 스승인 알버트(Albertus Magnus, 1206-1280)에게 수사하였다. 그는 유명한 저술인 ‘이방인에 대하여’와 ‘신학대전’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부친 이름이 ‘토미즘’(Thomism)이다.
토마스는 “우리는 두 개의 진리를 갖고 있다.”고 하였다. 하나는 이성의 눈으로 파악 할 수 있는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신학의 눈 으로 알 수 있는 지식이다. 철학이 바로 전자 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성 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진리는 물론이고 구 원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계시하였다. 그러므 로 철학과 신학이 양쪽에서 이러한 진리를 Thomas Aquinas 탐구할 수 있는 것이다. 토마스는 인간의 이성은 신앙이 받아들이는 진리를 증명하는 역할을 하가 때문에 신앙과 이성이 상반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 등도 신학과 철학이 동시에 취급할 수 있는 문제라고 하였다.

그래서 토마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다섯 가지의 방법’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토마스의 이론은 근대 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를 낳았고 전통적인 교리를 당시의 새로운 철학적 경향과 결합시켜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조직적인 신학의 구조주의(構造主義)를 잉태시켰다. 바로 이런 논리 위에서 전개한 그의 대표작이 ‘신학대전’이다. 당시 많은 이들이 철학을 기독교의 적이라고 했지만 토마스의 이러한 공헌은 철학을 신학자들이 도구로 사용할 수 있도록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7. 선비주의의 등장

중세교회의 몰락기에 교회의 부패와 침체해져 가는 모습을 보고 영성의 회복을 주장하며 나타난 무리는 신비주의자들이었다. 이 시대는 교회사에서 신비주의가 창궐했던 시기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이 신비주의 운동이 우후죽순처럼 발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신비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은 독일의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였다. 그는 신(新) 플라톤의 경향을 강하게 띄고 있었다. 특히 에크하르트는 당시 신학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며 신앙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스콜라주의와는 반대로 인간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체의 언어는 정확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연구나 합리적인 이론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성 속에서 무 아의 경지로 소멸되는 신비적 명상을 통해서 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창조 이전 에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마음속에 모든 피 조물들의 관념이 존재하였다고 보았다.

“일체의 존재와 경계를 초월하는 신격 의 진정한 정수 속에 나는 이미 존재하였다. Meister Eckhart 거기서 나는 스스로를 원하였다. 그곳에서 나 는 스스로를 알았다. 그곳에서 나는 나 자신을 창조하기를 의도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나의 존재에 따른 스스로의 원인인 바 이는 영원한 것이다. 물론 나의 존재 생성 과정은 시간적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를 많은 사람들이 범신론이나 영혼의 창조성을 부인하는 등 세상과 피조물이 영원하다는 견해라고 비난하였다. 종국에 그는 이단으로 정식 고발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로마에 항소하여 자신의 이단성을 부인하였으나 문제가 판결나기 전에 그는 사망하고 말았다. 에크하르르트와 같은 이러한 신비주의자들이 중세교회의 말기에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하였던 이유는 이들의 주장 즉 인간이 내면적인 명상을 통해 하나님께 갈 수 있다는 것은 곧 아무런 중재 없이 하나님께로 나감을 의미하며 이는 곧 제도적인 의식이나 성직자들의 중재권에 대한 정면 대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비록 이단으로 비난 받았지만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활동은 지속되었다. 대표적인 사람들로서 존 타울러(Johannes Tauler, 1300-1361)와 헨리 수소(Henry Suso, 1295-1366)가 있다. 이들의 사역을 통해 많은 이들은 신비주의를 수용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라인 강의 저지대인 플랜더스 지방 출신인 로이스블랙의 존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에크하르트의 신비사상을 평범한 인간들의 일상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을 시키게 되었고 그 결과로 ‘게하르트 그루테’(Gehard Groote, 1340-1384)라는 즉 근대적 경건이라는 경건신앙의 개척자를 잉태시켰다.

이들이 주장한 ‘근대적 경건’(Devotio Moderna)이란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엄격한 명상과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면서 중세교회의 부패한 신앙에 활력소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곧 중세의 제도적인 교회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지적되었다. 그루테는 특별히 공동생활 형제단을 설립하여 강요된 수도생활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민중들의 경건운동을 주도함으로 종교개혁의 정신적인 터전을 이루었다.

특히 이런 교육을 받은 자들이 경건을 강조하며 기존 교회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여 개혁의 의지를 확대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들 가운데 16세기 종교개혁의 세례 요한과 같은 역할을 했던 로텔담의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가 배출되었다. 중세 후반기의 신비주의 운동은 이렇게 극단적인 신비형태의 신앙에서 점점 경건운동의 흐름으로 진전되었고 이들이 심어놓은 씨앗이 결국은 중세의 제도적인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 글쓴 이 / 심창섭 (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

< 참고 : 스콜라신학 >

교부들이 초대 교회부터 10세기 이전까지 성경을 붙들고 이단들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교리로 정리했다면, 11세기 이후 종교개혁 전까지 중세의 스콜라 학자들은 그 교리들을 수집, 분석하고 체계화하여 개연성 있는 모든 반론에 대해 그 합리성을 변증했다. 이들은 이성을 교회의 권위에 복종시키고 교리들을 독자적으로 증명하고자 노력했다. 따라서 스콜라 학자들의 관심사는 새로운 진리를 찾아내거나 성경을 재조사하는 데 있지 않았다. 이들의 관심은 자신들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을 확증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이들은 신학(해석학과 성경신학)에 독창적으로 기여하지는 못했다. 이들은 교부들에게 물려받은 교리를 당대와 후대에 전달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성취하고자 했던 과업 두 가지 중 하나는 교리와 이성(철학)을 조화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리를 ‘신학대전’으로 질서정연한 체계로 배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그만큼 신뢰했다. 그러나 스콜라 학자들은 후에 이성의 작용에 있어 극단으로 치달았다. 상상 가능한 모든 질문들 즉 불건전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 – 예를 들어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시는 것과 인간을 창조하시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웠는지, 남자가 부활할 때 에덴에서 잃은 갈빗대를 돌려받는지, 천사가 한 장소에 얼마나 많이 있을 수 있는지 등 –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는 질문들을 끌어들였다.

스콜라신학의 원천은 교리적 원리(신학)를 제공한 어거스틴과 변증방법(철학)을 제공한 아리토텔레스의 저서였다. 스콜라 학자들은 어거스틴의 노선을 따라 ‘신앙이 지식에 앞선다.’라는 원리로 출발했다. 스콜라신학은 오늘날까지 로마 가톨릭의 지배적 신학이다. 교황 레오 13세는 1879년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신학을 가톨릭신앙의 표준이자 19세기의 기독교 철학의 가장 안전한 안내자로 천명함으로써 이 점을 새롭게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