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32) 교황권의 마지막 전성기

 

1. 전 유럽의 통치자가 된 교황

교황 그레고리 7세는 정치와 종교에 중세 유럽에 있어 교황의 권위를 확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교황권의 최전성기는 이노센트 3세(1198-1216) 때였다.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 1161-1216)는 당시 영국의 죤 왕을 파문시키고, 영국에 성사수여 금지령을 내렸다. 프랑스 왕도 교황의 생각대로 영국을 위협하는 데 동조할 정도였다. 그래서 결국은 죤 왕이 교황에게 굴복하는 치욕의 역사를 경험하였다. 영국 왕은 영국을 교황에게 바치고 자신은 교황의 봉신이 되는 조건에 굴복하였던 것이다.

이노센트 3세는 로마에서 라테란 종교회의를 소집하고, 412명의 주교들과 800명의 수도원장을 참석시켰다. 그리고 그는 개회 연설에서 교황은 지상 교회의 수장일 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수장권도 부여받았다고 하였다. 이노센트 3세는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라고 말함으로 황제의 권위를 교황 아래 두는 비유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신으로 그는 유럽을 통치해 갔다.

그런데 이 때 황제의 권좌를 중심으로 교황을 지지하는 당과 황제를 지지하는 당이 있었다. 이 파벌은 이탈리아와 독일을 중심으로 심화되어있었다. 이러한 편싸움을 잘 이용하여 이노센트 3세는 여러 사람들을 경쟁시키면서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프리드리히 2세를 황제로 세우는 권력투쟁의 승리자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도 교황의 위력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필립 아우구스투스가 본처인 덴마크 여인 잉게보르그를 버리고 바바리아 공작의 딸과 결혼하자 교황은 프랑스에 영국의 죤 왕에게 했던 것과 같이 성무금지령을 선포하였다. 왕의 영토의 모든 지역에 대한 파문이었다. 이 금지령에 의해 모든 교회의 의식이 금지되었다. 미사도 금지되고 분향도 금지되고 결혼도 무효화되고 죽은 자에 대한 기도와 장례가 거부되었다. 왕은 이렇게 교황에 대항해서 버텼지만 1200년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성무 금지령이 철회되자 기쁨의 축제가 열렸고 이로 인해 삼백 명이 축제기간에 죽을 정도로 대단한 사건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교황의 권위는 마찬가지로 속권을 통치하는 절정기를 이루었다. 이노센트 3세는 레온의 알폰소 9세와 카스티야의 베렘가리아의 결혼을 두 사람이 친족이라는 이유로 무효화시켰다. 5년 동안 이들은 교황을 상대로 싸웠으나 결국은 굴복하고 베렘가리아는 수녀원에 입단하였다.

그 외에 나바라의 왕은 무어족과의 동맹을 맺는다는 이유 하나로 왕위에서 교황에 의해 폐위되었고 아라곤의 왕은 매년 교황청에 조공을 바치는 봉신의 역할로 전락되었다. 이노센트 3세는 유럽의 변방 지역에까지 그리고 동방제국의 왕들도 다루었다. 스웨덴의 경우 합법적인 혈통이 왕위를 계승하는 데 절대적인 도움을 주었고 노르웨이에서는 성직자나 평신도가 법정에서 재판을 받지 않도록 보호했다.

또 덴마크에서는 왕이 되려는 서자의 야심을 꺾었고 그 외에 헝가리, 아일랜드, 폴란드, 불가리아, 세르비아, 아르베니아 등에 대한 정치적인 간섭과 교회들의 서방교회로의 귀의를 촉구하였다. 이러한 정치적인 교황의 수단과 영향력은 명실공이 교황이 유럽의 통치자로서 등장하고 교권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기였다. 특히 이 기간에 열렸던 라트란 종교회의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뀐다는 화체설을 확정지었다. 사실 이노센트 3세의 치적을 통해 교황의 권세와 영광은 극에 달하였다. 속권(俗權)과 성권(聖權)이 모두 교황의 지배하에 예속되는 교황 지상주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세교회의 번성기도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몰락의 길을 가게 되었다. 중세교회가 몰락의 길을 가게 된 것은 주로 교황권의 쇠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교황권이 쇠퇴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원인이 있다. 그 중에서 민족주의 등장과 분파주의의 기승 등 다양한 변화로 인한 지각변동이 몰락의 원인이 되었지만 몰락의 이유들은 그 과정을 살펴보는 가운데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사가들은 중세교회의 쇠퇴기를 14세기와 15세기로 보지만 중세교회의 이러한 말기 현상은 13세기 이미 발생하고 있었다.

2. 민족주의의 발흥

민족주의가 대두된 초기 국가는 영국, 스페인, 프랑스였다. 교황 그레고리 7세 때 세속 왕들과 충돌은 주로 성직(聖職) 수임권(受任權)이었지만 13세기 이후는 돈 문제였다. 이노센트 3세의 치적에서 보았듯이 교황청은 국제무대에서 활약의 범위를 넓히고 그들 위치를 강화했다. 그러나 국제무대에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권력을 행세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였다. 이탈리아에서만 그 비용을 충당할 수가 없었다.

교황청은 그간 교황청 재원이었던 땅의 많은 부분을 사라센족에게 빼앗겼다. 이런 가운데 교황은 수입원을 강구해야만 했었다. 그래서 교회는 ‘베드로의 은전’(Peter’s pence)이라는 통화세(通貨稅)를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게 부여하고 유럽의 다른 지역의 모든 지 교회에 십일조 세를 부과하였다. 그리고 만일 교황청의 이같은 세금을 거부하면 파문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 외에 십자군 운동의 이름으로 교황청이 유럽의 왕들로부터 여러 가지 경제적인 지원이 강요되곤 하였다.
이러한 교황청의 정책에 영국과 프랑스가 제일 먼저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교황의 횡포에 맞서서 전에 보지 못했던 구호를 외쳤다. “왕은 자기 영토에서 황제다.” 영국은 1213년 죤 왕이 이노센트 3세에 굴복하여 교황청의 봉신으로 봉건적인 조공을 바치던 것을 거부하고 1279년 교회 토지의 유증을 금지시켰다. 1351년에는 교황청이 영국 교구들의 성직 임명을 거부하고 교황청이 부유한 영국의 교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충돌은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왕이었던 공정(公正) 왕(王) 필립(Philip the Fair)은 교황의 허가 없이 프랑스 내의 성직자들에게 연간 수입의 절반을 세금으로 징수해 가기 시작하였다. 이에 반발한 교황 보니페이스는 1296년 교황의 허가 없이 세금을 바치는 성직자는 파문시키겠다고 맞섰다. 그러자 프랑스는 보복이라도 하듯 로마 교황청에 금의 이송을 금지시켰다. 교황 파키우스는 이 같은 정황에서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고 통치권을 복권하려고 베드로의 열쇠이론을 주창하였다.

그리스도가 사제일 뿐 아니라 왕이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하나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하나의 열쇠는 속권(俗權)과 성권(聖權)을 다 의미한다.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논리를 내세움으로 교황과 왕은 별개의 권력으로 두개의 칼의 개념을 뒤집고 이 둘을 다 가진 교황의 최고 권한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왕권을 주셨다는 왕들의 주장을 일축하였다.

1299년 교황 파키우스는 교황의 교서인 우남상탐(Uam Sanctam)을 발령하고 이 주장을 공식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황의 정책이 더 이상 프랑스의 민족주의를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드디어 1303년 필립의 부하들은 로마 근처 아나니에 여름 휴가차 나온 교황 보니페이스에게 폭행을 가하여 단명하게 만들었다.

3. 교황의 아비뇽 유수(幽囚)

보니페이스 사후에 그의 후계자였던 베네덕트 9세가 등극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클레멘트 5세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격이 유약했기 때문에 프랑스 왕 필립 4세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보니페이스가 필립 왕에게 내린 수찬 정지와 파문을 취소하고 필립 왕의 무죄를 선포하였다. 이러한 클레멘트 5세는 프랑스 영토는 아니지만 프랑스와 근접한 아비뇽이라는 지역에 교황청을 1304년에 옮겨 1377년까지 무려 73년간 프랑스 출신의 교황들로 형성하는 전환 역사를 가져왔다. 이리하여 교황청은 하나의 프랑스인의 기구처럼 인식되기도 하였다. 이 기간을 또한 교황의 아비뇽 유수(幽囚, 잡아 가둠)라고 한다.

이렇게 프랑스 왕 필립은 자신의 무죄를 클레맨트 5세를 통해 승인받았을 뿐 아니라 이미 사망한 보니페이스 8세를 정죄하는 재판을 시도하여 교황제도 자체에 대한 심한 손상을 입혔다. 클레멘트 5세는 또한 기사들의 재산을 노린 프랑스 왕의 의도대로 성전 기사단을 해체하고 기사단 총장이었던 쟈크 드 모례이를 화형에 처했다. 당시 프랑스에 있는 성전 기사단들은 교황에게 복종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전 기사단들은 십자군 운동 때 성지 탈환을 위해 생긴 기사단으로 그때는 사실상 십자군 원정이 종결되었기 때문에 성전과도 무관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무장한 채 부유한 재산을 누리고 있었고 특히 교황을 위해 존재하였다. 필립 왕은 어느 변절된 기사단원들의 보고를 악용하여 그들의 타락을 폭로하면서 그들이 성지를 이단들에게 팔아넘겼다고 주장하여 이단 죄를 적용시켰다. 그리하여 프랑스 전역의 모든 성전 기사단원들이 하루밤새에 체포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파리에서만도 59명의 성전 기사단원들이 화형당하는 비극을 연출하였다. 이때는 종교재판이 국가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힘 없는 교황은 항의도 못하는 형편에 처하였다. 교황청의 아비뇽 천거는 이탈리아의 교회 재산의 손실과 교황청에 대한 위상의 손실을 가져왔다. 따라서 성 베드로의 유산들이 이탈리아의 귀족들의 수중에 들어갔고 교황청을 옮김으로 이탈리아에서 교회의 세금징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랑스의 아비뇽의 교황들은 이탈리아의 귀족에게 상실한 땅을 찾기 위해 상인들로 구성된 군대를 모집하였고 군비 충당을 위해 프랑스, 영국, 독일의 지역 교회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신임 주교의 첫해 수입을 전부 교황청에 바치도록 하였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주교 자리가 생겼을 경우 교황이 임명을 보류하든지 아니면 공석으로 남겨두면서 수입은 교황 자신이 챙기는 경우도 있었다. 또 이 당시에 이용 된 중요한 자금의 출처는 곧 면죄부 판매였다.(그림 성전 기사단)

이 제도의 기원은 십자군 원정 때 십자가를 드는 자에게는 과거에 부과된 고해를 면죄해 주는 일종의 면죄부를 주었다. 이것이 발달하여 성지의 군사들이든 유럽의 십자군들이든 그들에게 자금을 주는 사람은 사면이 되는 관행으로 발달하였다. 그리고 병원이나 대성당 등의 자선 사업 혹은 교량을 놓는 사업을 지원해도 면죄부가 지급되었다. 이 이론은 끝없이 발달되어 연옥의 영혼들도 산자의 봉헌으로 인해 구원받는다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자금 출처의 또 다른 수단은 성인들의 공로가 저장된 곳간에 관한 이론이었다. 성인들의 공로는 자신의 구원보다 더 많은 공로를 소유하기 때문에 그들의 잉여(剩餘) 공로가 천상의 곳간에 간직되어 있다고 교황은 주장하였다. 그래서 교황은 성인들의 공로를 꺼내서 부족한 자들에게 전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곳간에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저장되는 곳이기 때문에 고갈되는 법은 없다고 보았다. 이 공로를 나누어 준다는 명목으로 헌납의 헌신을 유도했다. 이 공로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기부하도록 신앙심을 유발시켰다.

이렇게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교황들과 추기경들은 아비뇽에서 많은 수입으로 부패했으며, 정치적으로 프랑스 시녀가 되었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교황의 권좌를 더럽혔다. 또 수입의 2/3가 이탈리아의 베드로의 유산을 되찾기 위한 전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인 교황의 지배하에 있는 교황청에 돈이 유입되는 것을 다른 나라들이 더 이상 방치하지 않았다. 영국과 독일이 특히 반대하고 나섰다. 일이 이렇게 진전되자 교황 그레고리 11세 때에 교황청은 다른 나라의 지지를 상실하지 않도록 1377년에 로마로 돌아와 우르반 6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청 복귀역사를 이루었다.(*) 글쓴 이 / 심창섭 (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