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33) 교황권의 마지막 전성기

4. 분열과 치유의 몸부림

그레고리 11세가 교황청을 옮기자 아비뇽에서 다른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세워 교황이 두 명이나 생겼다. 이제 프랑스는 아비뇽의 교황들을 지지하였고, 영국, 보헤미아, 독일 등은 로마 교황들을 지지하면서 유럽은 교황청의 분열로 인해 분열되었다. 교황청이 분열되자 각 지역의 교회들도 분열의 조짐이 나타났다. 교황창과 중세유럽의 이 같은 대 분열의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통일되었던 교황청이 양분화 되어 종교의 이질화 현상뿐 아니라 사회적인 분파적 혼란이 야기되자 독일과 프랑스의 일부 지식인들이 계3의 물결을 주도하면서 갈라섬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를 공의회주의(Conciliarism) 혹은 종교회의 운동(The Conciliar Movement)이라고 한다.
교황청의 양분된 이 같은 분열을 막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 결국 양파의 추기경들을 중심으로 1409년 피사(Pisa)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결국 또 다른 화를 초래하였다. 피사에 모였던 대표들이 새로운 제3의 인물로 알렉산더 5세를 교황으로 선출했으나 프랑스와 로마에서는 이를 거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졸지에 3명의 교황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알렉산더 5세에 대한 지지는 많았으나 그는 1년이 못되어 사망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요한 23세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자 그는 독일의 황제 지그문트에게 의뢰하여 통일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에 당시 황제였던 독일의 지그문트가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다른 회의를 소집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백년전쟁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지그문트야말로 유럽에서 유일한 강력한 군주였다. 지그문트에 의해 1414년 콘스탄스(Constance)에서 회의가 소집되었고 요한 23세는 의외로 참석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참석자들이 사임을 요구하자 도주해 버렸다. 그는 수재월 동안 유람하다가 종국에는 붙잡혀 강제로 퇴위당하고 말았다.

그 동안 로마 교황이었던 그레고리 12세는 만약에 자신의 대적들이 사임한다면 자신도 사임한다는 조건부의 사임을 하였다. 그러자 종교회의에서는 이 기회를 포착하여 새로운 교황으로 말틴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아비뇽의 교황이었던 베네덕트 13세는 자신의 교황 직을 주장하면서 한 성채로 도주하고 말았다. 1423년 그의 사망 후에는 결국 다른 교황이 후계자로 선출되지는 않았다. 콘스탄스에 모였던 대표자들은 분열의 종식과 더불어 이 회의를 통해 이단과 부정부패를 막기 위한 여러 가지 작업에도 착수하였다. 그리고 향후에 계속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개혁 작업을 지속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분열의 아픔과 함께 교황청의 권위는 점점 쇠퇴해져 갔다. 이제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진단하고 다시 성경적인 교회를 재건하기 위한 갱신 운동이 대학의 유능한 개혁자들에 의하여 거론되기 시작했다.

5. 종교개혁의 샛별 죤 위클리프(John Wyclife, 1329-1384)
위클리프는 옥스포드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다가 1371년에 외교가로 활동하였고 그 후에는 왕실에서 봉사하였다. 교황청이 아비뇽에서 프랑스의 종노릇을 하였기에 통치에 대한 위클리프의 주장은 영국의 지배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위클리프는 일체의 합법적인 통치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통치권은 그리스도의 모범처럼 군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피지배자의 이익을 위해 섬김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합법적인 권한이라도 그 한계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체적인 지배에 반대되는 이론이었다. 그렇지만 영국의 귀족들은 세금의 징수 등 교황들의 세속권한의 침투를 반대하던 터이라 위클리프의 이론을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종교적인 권력의 횡포와 마찬가지로 세속권력의 횡포에 대해서도 동일한 이론을 적용하였다. 그는 세속적인 권한도 시민들에게 봉사하고 섬김의 의미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위클리프의 이 같은 이론이 반대의 벽에 부딪쳤던 관점은 역시 그의 교회론이었다. 그는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아 진정한 교회를 유형교회가 아니라 무형교회로 진단하였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는 당시 대분열로 인해 추문에 휩싸여 있던 교황교회가 아니라 구원받도록 택정함을 입은 자들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무형의 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많은 종교적, 세속적 지도자들의 구원에 대한 유기를 의미했으며 종국에는 교황의 구원마저도 불확실한 것임을 의미하였다. 위클리프는 또한 성경의 소유권은 교황이 아니라 교회라고 주장하였다. 교회만이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교회만이 성경을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교황청과 관계없이 교회가 성경을 지방언어로 번역할 수 있었던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위클리프를 어렵게 만든 가장 신학적인 문제는 그의 성만찬에 대한견해였다. 이미 로마 가톨릭교회는 1215년 라데란 종교회의에서 화체설 교리를 공인한 바 있었다. 위클리프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성육신시에 인성이 파괴되지 아니하는 것과 같이 성만찬시에도 그리스도의 몸이 실재로 떡 속에 임한다 해도 떡 역시 그대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 대해 많은 사랑들은 그를 이단으로 몰아 부쳤다. 그는 비록 이로 인해 휴직상태로 살았으나 그의 인기로 인해 옥스포드에서 여전히 연구와 저술의 생애를 보낼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1381년에 루터워즈에 있는 자신의 교구로 옮겨 은퇴하였다가 1384년에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콘스탄스회의에서 그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그의 유골이 파내어져 화형을 당하였다. 그리고 유골을 태운 한줌의 재는 스위프트 강물에 뿌려졌다. 위클리프의 사후에 그의 정신을 계승한 롤라즈(Lollards)라는 집단이 나타나 위클리프의 교리를 널리 전파하였다. 이들은 성경이 일반 대중들에게 속한 것이므로 대중언어로 번역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또한 성직자들은 세상의 관직을 겸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성상의 사용을 금지하고 독신제도나 순례 등은 신성모독 행위라고 규정하였다.

또한 그들은 화체설과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부인하였다. 그리하여 귀족들까지도 이러한 운동에 가담하였고 이 운동은 곧 민중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이 운동은 종교개혁의 신호탄으로 16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영국의 프로테스탄트는 이 운동 때문에 큰 힘을 얻었던 것이다.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가장 큰 중세교회의 개혁운동을 최초의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나라는 보헤미아 지방이었다.

6. 개혁의 불을 붙인 존 후스(John Huss, 1339-1415)

보헤미아는 오늘날의 체코슬라바키아로 이곳에서 일어난 개혁의 불길은 유명한 설교자였든 존 후스가 프라하 대학의 총장이었던 시절에 발생했다. 문제의 발단은 영국에 유학 갔던 체코의 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 왕 리처드 2세는 보헤미아 공주와 결혼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우호적인 양국과의 관계 속에서 영국에 유학을 갔던 사람들이 위클리프의 저술들을 보혜미아로 가지고 들어오게 되었다.

이렇게 보헤미아에 반입 된 위클리프의 저서들은 프라하 대학에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프라하 대학은 독일인들과 체코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분열된 상태에 있었고 이러한 분열은 그들로 하여금 위클리프의 사상에 대한 상반된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다. 체코인들은 위클리프의 신학을 받아들였고 독일인들은 반대하였다. 물론 체코인들이 위클리프의 사상을 전적으로 다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총장이었던 후스 같은 경우에는 전통적인 화체설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두 파간의 불화는 해결을 보지 못하였고 체고 인들이 보헤미아 국왕의 지원을 받아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자 독일인 교수들은 프라하를 떠나 라이프찌히에 자신들의 대학을 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프라하를 떠난 독일인들이 프라하를 위클리프의 사상을 중심한 이단의 온상이라는 비난을 하면서부터 야기되었다. 이제 프라하는 이단의 사상을 전하는 도시로 간주 되었다. 그럼에도 프라하에서 새로운 위클리프 개혁사상이 급속히 퍼졌고 이에 프라하의 대주교는 위를리프의 저술들을 금하고 후스와 반대 입장에 서게 되었다. 대주교는 교황의 칙령을 받아내어 후스의 설교를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후스는 불복하고 설교를 계속했다. 1410년 그가 로마로 소환 받았지만 그는 그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로마 교황은 1411년 후스를 파문했다. 그럼에도 당시 보헤미아 당국과 국민들의 후스에 대한 지지가 지대했기 때문에 이러한 교황의 파문은 실질적인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후스로 하여금 보다 극단적인 노선을 택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당시 피사의 종교회의가 선택한 교황을 자격 없는 자로 몰아부치면서 그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선포하였다.

후스는 교황의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 아니라 교황이 정당하지 못할 때에 거기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결국 이러한 생각 때문에 그는 성경이야말로 교황과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복종해야 할 궁극적 권위라고 주장하였다. 즉 그는 성경에 순종하지 않는 교황에게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또 다른 정황이 후스로 하여금 개혁의 의지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상태로 몰고 갔다.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23세는 이탈리아와의 정치관계로 나폴리를 공약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에 공약을 위한 군비 충당을 위해 면죄부의 판매를 결정하였다. 이미 20년 전에 면죄부 매입에 대한 경험이 있었던 후스는 오직 하나님만이 죄 사함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면죄부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교황 의 전쟁 선포는 교황의 야망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교황의 도움이 필요했던 보헤미아의 국왕은 후스에게 침묵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후스의 영향을 받은 체코 시민들은 교황청의 착취에 대한 공개 시위를 하고 있었다. 이에 요한 23세는 후스를 다시 파문시켰으며 후스는 조국이 자신 때문에 시련에 빠져들기를 원치 아니했기 때문에 프라하를 떠나 한적한 시골에서 저술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황제였던 지기스문트는 후스를 콘스탄스 종교회의에 소환하여 그의 입장을 변호하도록 조치한다는 것이며 황제가 후스 자신의 신변을 보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후스는 큰스탄스에 나타났다.

그러나 처음약속과는 다르게 요한 23세는 회의와는 관계없이 후스를 종교재판에 넘기려고 했다. 후스는 교황의 초소로 잡혀가서 자신의 이단사상을 철회하라는 명을 받았다. 격렬한 논쟁 끝에 그는 결국 죄인으로 취급되었고 수도원의 독방에 감금되는 신세가 되었다. 1415년 후스는 쇠사슬로 온 몸이 결박당한 채 회의석상에 나타났으며 그는 여러 가지로 자신의 사상을 철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불복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공정한 판결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나는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완전히 공의로우시며 유일한 심판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항소하리라. 나는 그의 손에 처분을 맡긴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 증인들이나 오류에 가득 찬 회의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진리와 공의로 모든 개인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감옥으로 돌아갔으며 곧 사형장으로 끌려가 화형에 처해졌다. 그는 형장으로 가는 도중 자신의 저서가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포기할 마지막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큰 목소리의 기도와 함께 목숨을 거두었다. “주 예수여! 바로 당신을 위하여 이처럼 잔인한 죽음을 아무런 불평 없이 감당합니다. 부디 나의 적들에게 자비를 내려주소서!”

보혜미아 인들은 이러한 참혹한 후스의 죽음에 대해 분노를 감추지 못하였고 거의 만장일치로 종교회의를 부인하였다. 그리고 452명의 귀족들이 모여 “우리는 후스의 주장에 동조한다.”고 선포했다. 사태는 더욱 심화되어 종교회의는 프라하대학의 해산을 명하고, 후스를 지지하는 귀족들을 콘스탄스로 소환하고, 보헤미아 국왕까지도 이단 지지의 왕으로 선포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진전되다보니 후스파들은 하류 계급에서 일어나고 있던 극단적인 종말론주의자들(타볼파와 호렙파 등)과 연대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 나타났던 여러 저항 운동 세력들은 무력에 의한 해결방안을 펴하기 위해 4개의 헌장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보헤미아 저항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그 4개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왕국 전체에 자유롭게 전파되어야한다.
둘째, 성만찬 때 떡과 포도주를 둘 다 평신도에게 베풀어야 한다.
셋째, 성직자들은 재산을 포기하고 사도적 빈곤생활을 해야 한다.
넷째, 공적인 범죄 특히 성직매매를 처벌해야 한다.

당시 국왕 웬체슬라스 사망 후 콘스탄스에서 후계자로 명명 된 지기스문트는 이 4개항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기스문트는 후스파의 저지를 위해 교황에게 전쟁을 소집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보혜미아는 그 후 수차례에 걸친 오랜 전쟁의 질곡을 치르게 되었다. 보헤미아는 무려 10여년 이상의 전쟁을 통해 신앙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으며 결국 보해미아교회는 기독교권에로의 합류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기존 교회를 떠나 형제 연맹을 조직하였으며, 이 연맹은 인근 모라비안 지역까지 확산되었다. 그 후 형제단들은 로마 가톨릭 지지자들이었던 합스부르그 출신의 황제들에 의해 박해를 받으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의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이들의 영도자였던 존 아모스 코메니우스(1592-1670)는 유배지에서 이들을 격려하며 개혁신앙이 꽃피워질 소망을 염원하였다. 결국 형제단의 운동은 교회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며 모라비아파라는 이름으로 전승되었으며 일부는 칼빈의 신앙을 따르게 되었다.(*) 글쓴 이 / 심창섭 (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