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21)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되심의 유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21)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되심의 유익

제 16 주일(문 43,44)

요절 :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 하려 함이니(롬 6:6)

문 43 :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더 얻게 되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 그의 권능으로서 우리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살해당해 죽고, 그와 함께 묻혀서 육체의 악한 소욕이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 하게 되고 그 대신 우리 자신을 감사의 제물로 그에게 바치도록 하 는 것입니다.

문 44 :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말을 첨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
답 : 가장 무서운 시험 중에서라도 나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과 공포를 통해 서 지옥에서 당할 불안과 번민에서 우리를 건져내 주셨다는 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지난 16주일 40,41문답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에 대하여 공부했다. 이제 계속해서 43,44 문답에서 예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이 우리에게 어떠한 유익을 주는 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한글에는 없는 고백이지만) ‘음부에 내려가심’을 고백한다. 과연 예수 십자가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1. 예수와의 연합

먼저 생각해 보려는 것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고백할 때 무엇을 고백하게 되는가 하는 점이다. 참된 성도의 고백이 단순히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 그 자체를 섬기고 또 그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는 행위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유감 되게도 어떤 교인들은 그러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대하는 것을 본다. 천주교인들은 성당 안과 경내에 주로 세워져 있는 십자가상 앞에서 정성껏 절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십자가 그 자체에 신비한 능력과 그 어떤 효험을 믿는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은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에 대하여 올바르게 믿는 신앙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십자가 사건은 성도 한사람 한 사람에게 놀라운 적용이 된다. 즉 참된 신자라면 반드시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자신은 예수와 연합된 존재로서 예수와 함께 죽고 장사되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구원의 진리를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 6:3,4a)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모든 성도는 그들의 신앙고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십자가 희생과 죽음에 참여했음을 고백하는 자들인 것이다.

참된 성도는 이렇게 예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신앙을 갖고 있는 자이다. 이는 주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죄 없으신 그 분 혼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주께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과 연합되어 죽으신 사건이 십자가 희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그래서 요리문답 43문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고백하도록 가르쳐 준다. “그의 권능으로서 우리의 옛 사람이 못 박혀 죽고 그와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한편 로마서 6:6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설명한다. 이는 성도가 십자가를 고백할 때는 바로 이 점을 고백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가 달려 죽으심을 고백하는 것은 그 분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죽어버린 것을 고백하는 것이 다. 그래서 고백자는 예수와 함께 무덤에 장사된 것이다. 모든 참된 성도는 이 사실을 온전히 깨달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고백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이미 예수와 함께 연합하여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십자가를 믿은 사람은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는 자의 감격과 기쁨을 이렇게 외쳤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2. 죽음과의 단절

사도신경에서 성도가 주님의 십자가를 고백할 때 성도에게 적용되는 또 하나의 진리는 완전히 사망과 단절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를 고백할 때 적용되는 실제적인 의미이다. 즉 성도의 이러한 고백을 통해 성도에게는 더 이상 모든 인간을 통제하는 죽음이 지배하지 못하게 한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죽는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처럼 죽음은 모든 사람을 지배하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이는 인류의 조상이 범한 죄의 결과로 인하여 미치는 불행한 운명인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핵심적인 설명을 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이렇게 숙명적으로 주어진 죽음이란 형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전하게 믿고 고백하는 바른 신앙을 갖게 되면, 그에게는 더 이상 죽음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한다. 아니 그는 죽음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된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피할 수 없는 죽을 운명 속에 살아가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서 피 흘려 그들과 함께 죽으시고 장사되시므로 이를 믿는 자들에게 참 소망인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희생 제물 되신 십자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라고 말씀하고 있다.

요리문답 43문에서는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우리의 죽을 육체의 악한 충격이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택한 자들에게 전가되어 아담의 형벌 즉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죽음이라는 악의 역사를 단절하고 오직 예수께서 완성하신 새 생명을 가지고 죄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하신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사도 바울은 이러한 바른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2-14)

정말로 이 놀라운 은혜를 망각하고 예수를 믿은 후에도 여전히 죄 가운데서 계속하여 악한 생활을 지속적으로 저지르며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는 참된 성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의 사도신경 고백은 온전한 고백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3. 참된 헌신

과연 이러한 엄청난 구원의 진리 즉 자기를 죽음에서 건져 주시고 영원한 사망의 형벌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진정으로 고백하고 또 그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죽을 자리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살게 되었다고 가정할 때 그는 자기를 살려준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야 하겠는가?

이 질문은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죄인 된 처지에 대한 확실한 점검을 하게 한다.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자기는 신자라고 생각하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과연 앞서 점검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그 사건이 의미하고 교훈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살펴 내게 적용하는 철저한 과정이 있었는가? 모든 성도는 이 사실을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 그러면 그 과정 속에서 그는 반드시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철저한 영적 점검과정을 경험한 자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넘쳐, 온전히 은혜 받은 자로서의 감사와 순종 그리고 그에 따른 진정성 있는 참된 헌신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헌신은 단순히 종교적 규정만 따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헌신에는 깊은 사색과 연구와 분석과 결단이 요구된다. 사도 바울은 이 과정을 거쳐 구원을 확신하고 믿는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실로 이런 구체적인 헌신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겠다. 나의 시간과 물질 그리고 모든 소유한 것을 하나님께 다 드려 참된 헌신의 삶을 살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구속의 은혜를 체험한 자라면 그에게 당연히 나타나는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하며 자신을 드리는 향기로운 제사 제물로서의 헌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권면했다.

4. 주님의 음부 방문의 의미

요리문답 44번째 질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음부(지옥)에 내려가신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말을 첨부한 이유가 무엇인가? 대답은 “나의 가장 무서운 시험 중에서라도 나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과 공포를 통해서 우리가 지옥에서 당할 불안과 번민에서 건져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되어있다.

한글로 된 사도신경에는 이 말이 빠져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초대교회의 성자 어거스틴(St. Augustine)이 고백의 난해함을 들어 이 부분을 삭제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 결과 서방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이 방식을 유지하여 지속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교회사에 있어서 모든 성인들은 이 고백을 유지하였고 또한 이 교리가 갖고 있는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심오한 영적 의미를 놓쳐서는 아니 될 줄 믿는다.(참고, 기독교강요 2권 16장 8-10절)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그의 영혼이 음부(지옥)에 내려가셨다고 고백한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고백은 어떤 의미일까?

A. 이 고백과 상관된 성경 구절들

우선 이 교리와 관련된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이라.”(마 27:46)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 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 3:18,1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엡 4:9)

B. 주님의 음부 방문에 대한 이론들

이 구절들에서 발견되는 진리를 해설하는 몇 가지 이론들이 있다.

(1) 천주교의 설명

천주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그의 영혼이 음부(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음부(limbus patrum)에 내려가셔서 지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예수님 이전에 죽은 성도들, 율법 아래서 죽은 족장들의 영혼에게 그가 이룬 구속을 선포하시고 그들을 그 갇혀 있는 감옥에서 자유하게 하셨다.”(칼빈 기독교강요 2권 16장 9절)

그러나 이 가르침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되었다. 첫째, 그들은 실재하지도 않은 연옥(煉獄, limbus, 해설자 주: 얼마 전 천주교회에서는 연옥의 실재를 부인하고 그들의 잘못된 교리를 취소했다.)을 설정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둘째, 이전의 구약시대 성도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등이 연옥에 미리 가서 예수님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는 부자 나사로 비유를 통해 아브라함이 이미 연옥이 아닌 낙원에 가 있음을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눅 16: 23)

(2) 루터의 설명

독일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지옥에 내려가심’을 실제 상황으로 인식하여 “예수께서 죽으신 후 직접 지옥에 내려 가셔서 죽음의 세력들과 싸워 물리치시고 승리하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설명도 받아드릴 수 없다. 그 이유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구절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루터 개인의 주장일 뿐이라 하겠다.
(3) Bucer, Beza의 설명

종교개혁자들인 이들은 예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descended into hell)라는 뜻은 ‘무덤에 갇히심’(to grave)을 의미한다고 가르쳤다. 즉 무덤에 묻히신 것을 다른 말로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표현했다는 주장이다. 이 설명 역시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색하다. 물론 실제로 예수께서는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셨다. 그러나 이 사실을 지옥에 내려가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좀 무리한 주장이라고 하겠다.

(4) 개혁주의적 설명

그러면 개혁주의 입장에서 이 표현 즉 ‘예수께서 지옥에 내려 가셨다’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에서 ‘이 묘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지신 영적고통(Spiritual Torment)이다.’라고 했다.(기독교강요 2권 16-10)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적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가 당하신 고난을 묘사한 말씀이라는 설명이다. 즉 칼빈은 예수께서 목숨이 끊어진 다음 실제로 그 영혼이 지옥에 간 것이 아니라 죽기 전에 십자가에서 당하신 처참한 고난을 묘사한 말이라고 이해했다.

사실 복음서에 보면 주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이 범한 죄에 대한 엄청난 대가를 다 당하시고, 그의 영혼이 참으로 말할 수 없는 고난 즉 지옥의 형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무서운 심판을 받으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친히 이 고난을 몸소 겪으시면서 그 과정을 이렇게 말씀으로 표현하셨다. 마태복음 26:38에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고, 마태복음 27:46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며 절규하셨다. 그 이유는 완전한 삼위일체로서 하나이셨던 아버지 하나님과의 단절(죽음)의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이다.

왜 이토록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외면하셨을까? 그것은 아담 이후로 인간에게 전가된 죄의 형벌인 죽음의 고통을 홀로 다 담당하도록 하시기 위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추상같은 심판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를 믿는 자의 죄는 사해져서 나에게 전가된 죄의 형벌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심판은 예수께서 대신 받으신 것이 된다.
이는 죄인인 우리가 받아야할 죄의 형벌을 죄 없으신 예수께서 당하신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주님의 영혼은 고민하여 죽게 될 정도의 심각한 형벌의 고통을 겪으신 것이다. 놀랍게도 다윗은 이 사실을 미리 내다보고 이렇게 예언했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시 18:4,5)

한편 베드로 사도가 직접적으로 언급한 “예수께서 지옥의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벧전 3:19)는 가르침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칼빈은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망대(혹은 보통 번역하는 대로 ‘옥’)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9)는 전후 문맥으로 볼 때, 그 이전에 죽은 신자들이 우리와 함께 동일한 은혜를 나누게 되었다는 뜻으로 보게 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능력이 심지어 죽은 자들에게 까지(그들이 간절히 기다렸었던 그것이 실현되는 것을 경건한 자들의 영혼의 눈으로 보는 기쁨을 누리는 동안에) 미쳤다는 식으로 그 능력을 칭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베드로가 두 그룹 모두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똑 같이 인식했음을 가르치고자 한 것뿐이다.” 즉 칼빈은 베드로전서 3:19을 베드로가 예수의 죽음의 능력을 찬양한 구절로, 심지어 죽은 자들, 경건한 자든지 불경건한 자든지 그들에게까지도 그 능력에 침투하여 영향을 미침을 의미한다고 이해했다.

결 론

이 공부를 통하여 우리는 주님께서 지옥형벌을 당하면서까지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셨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성도는 참으로 엄청난 영적 유익을 얻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성도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게 하고, 더 이상 죽음의 세력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극복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그와 연합된 자로서 온전히 주께 헌신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헌신하는 사역을 하도록 이끌어 주신다. 이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크신 역사이기에 더욱 더 주께 충성하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글쓴 이 / 박병은 목사(덴버 둘로스장로교회 담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