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38)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는 성찬(2)

제 28 주일(문 78,79)

요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문 78 : 떡과 포도주가 실지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됩니까?

답 : 아닙니다. 세례의 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그 물이 죄 자체를 씻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단만 그것은 사죄 에 대한 신적 표식과 확증에 불과합니다. 이는 마치 성찬에서 떡 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성찬의 떡 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리는 것은 성례의 성격과 본질에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문 79 :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이라고 하시고, 잔을 그의 피 혹은 그의 피로 세우는 새 계약 이라고 또 사도 바울도 그리 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 이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치 떡과 포도주가 우리 육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몸과 흘리신 피는 우리 영혼을 영생으로 이끄는 참 된 양식과 음료라는 것 사실을 가르치려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와 보증으로써 다음 과 같은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키려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가운데 거룩한 표식들을 받을 때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이 거룩한 표적을 우리의 입 으로 받아먹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의 참된 몸과 피에 분명 하게 참여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순종이 확실하게 우리의 것이 되어 마치 우리 자신이 직접 고난당하고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만족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하여 성찬에 대한 오해들을 점검하며 그 의미에 대하여 공부하고자 한다. 이러한 공부의 필요성은 앞서 배운 바 세례에서 사용되는 물에 대한 오해가 있듯이 성찬 시 사용되는 떡과 피에 대한 오해들이 여전히 상존하기 때문이다.

1. 두 가지 주장

그러한 가르침 가운데는 첫째, 성찬 시 사용되는 떡과 피가 실제로 예수님의 살이 되고 피가 된다는 화체설(化體說, Trans-substantiation)과 둘째, 성찬은 단지 기념일뿐이라는 기념설(記念說, memorialism)이 있다. 이 두 가지 주장들은 모두 초대교회인 고린도 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나타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성찬예식에 대하여 주 예수께서 친히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25)라고 말씀하셨음을 적시하면서 그 의미와 정신을 교훈하고 있다.
이때 화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앞부분만을 강조하여 가르치고 기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뒷부분만을 강조하여 교훈하고 있다. 전자는 문자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후자는 말 그대로 그저 기념만을 받아드릴 뿐이다. 이 같은 이론과 주장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려 한다.

(1) 화체설(化體說, Trans-substantiation)

화체설은 성례를 집례 하는 신부가 떡과 포도주를 높이 들고 “이것은 내 몸이니(hoc est enim corpus meum)” 그리고 “이것은 내 피니(hic est enim calix sanguinis mei)”라고 라틴어로 축성하면 그 순간 그 떡과 피가 실제로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주장이다. 비록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살을 씹고, 흡혈을 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떡과 즙은 신비스럽게도 실제 주님의 살과 피라고 무조건 주장한다. 그래서 신부들은 이렇게 거룩하게 된 살과 피를 매우 조심하여 다루며 집례를 행하여 떡은 평신도들에게 제공하지만, 피는 한 방울이라도 떨어뜨리면 안 되기에 신부끼리만 나누어 마신다.

천주교에서는 이 때 그렇게 살과 피를 나누는 그 자체가 주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러한 교훈에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신자들의 눈으로 보는 떡과 엄연한 포도주가 식인(食人)을 하고 흡혈을 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성경의 문자적인 강조는 될지 몰라도 미신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2)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

한편 화체설과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주장이 있다. 그것은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주장한 것이다. 이 주장은 루터가 화체설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반대하여 내세운 것으로 화체설을 주장하는 천주교회는 ‘바벨론의 포로 된 교회’라 불렀다. 그 이유는 마치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잡혀가 제대로 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게 된 것과 같이 신약의 교회가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하여 바른 성찬을 갖지 못하게 되었음을 빗대어 부른 말이다.

루터의 공재설은 성찬에 놓여있는 떡과 잔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기를 원하여 “그리스도 주께서 육체로 성찬 상위에 놓여있는 떡과 잔 안에(in), 그것들과 함께(with), 그리고 그것들 아래(under) 계신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역시 성경적으로 증명된 주장은 아니다.

(3) 기념설(記念說, memorialism)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쯔윙글리(Ulirich Zwingli, 1484-1531)는 성찬이란 단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일 따름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화체설 미신적인 것이니까 당연히 거부하며 루터의 공재설도 미신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 만큼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주께서 직접 “이것을 행하여 기념하라.”고 하셨기에 단지 문자 그대로 ‘기념’하는 것이 성찬의 의미라고 주장했다.

2. 성찬에서 ‘기념’의 의미

위에서 살펴본 성찬에 대한 주장들은 모두 성찬의 참된 의미를 드러냈다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주께서 제정하신 성찬을 시행함에 있어서 그 뜻을 제대로 드러내어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성찬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4-26)

이 구절에서 떡과 잔을 떼며 행하는 성찬 예식은 그를 행함으로써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며 이는 다시 주께서 오실 때가지 전해야하는 예식임을 알 수 있다. 즉 이 성찬예식은 성도들에게 성찬 상에서 떡과 잔을 나누며 다시 오실 주님을 맞아하기까지 지속적으로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의미가 담겨있는 예식인 것이다.

이는 세상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목적이 아니라, 이미 믿는 성도들을 성찬 예식에 참여시켜 그들에게 계속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으심을 전파하는 것이 성찬예식의 목적인 것이다. 즉 이는 과거에 벌어진 십자가 사건을 추억하여 기념하는 기념식도 아니고, 이미 죽으신 예수님을 추도하는 예식도 아니다. 즉 성찬 예식을 지속적으로 거행하여 기념할 것은 주님의 죽으심이다. 이 죽으심은 과거로 끝이 난 그 어떤 기념도 추모도 아닌 참여하는 성도들에게 성령의 역사 가운데 주님과 함께 주님의 죽으심에 참여하고 그 죽으심에 연합하는 것이다. 즉 성찬의 진정한 의미는 성찬을 행하면서 기리게 되는 주님의 죽으심에 참여하고 그 주님과 연합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 주 예수께서 성찬을 제정하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9,20)라고 하신 말씀은 몸이라고 말씀하신 부분과 기념하는 말씀이 따로 떨어져서 각각 강조해야 할 부분이 결코 아니다.

이처럼 성찬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며 추모가 아니다. 성찬은 성령의 역사 가운데 제정된 주님과의 언약에 참여하고 그 언약 속에 담겨있는 바 주님의 대속의 진리에의 참여와 주님과의 연합을 고백하며 더욱 더 깊이 주님과의 영적 교제를 나누게 하는 것이다.

3. 성찬의 교훈

79문에서는 두 가지를 가르치고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이 성찬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참된 양식과 음료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둘째는 성찬에서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주님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도 확실하다는 것과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이 우리에게 확실하게 주어져서 우리가 직접 죄에 대하여 고난을 당하며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 즉 죄의 값을 치르게 된다는 것이 확실함을 가르친다.

(1) 성찬의 두 가지 의미

이 점에 있어서 성찬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며 추모는 더더욱 아니다. 성도가 주께서 제정하신 새 언약식에 믿음으로 나아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에 성도들이 함께 참여함으로 마치 성도가 직접 주님이 당한 고난을 당하고 주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의 심판을 받으신 것과 같은 차원에서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서 성도는 고난의 주님에 참여하며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찬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놀랍고 신비스러운 은혜가 임하게 된다.

– 새 언약 안에서의 주어질 신령한 혜택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에게는 주께서 제정하신 새 언약이 신비스럽게 적용되어진다. 이는 그 예식에서 주어질 은총의 역사 속에서 구속의 은혜를 그가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신비는 떡이 살이 되고 잔이 피가 되어 진다는 화체설적인 미신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 속에서 참여하는 성도에게 주께서 베풀어 주실 은혜로운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신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가 주님과 연합하며 주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운 혜택을 받게 되는 비밀이 있다. 즉 그에게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된 성도(교회)가 연합하여서 구속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는 신령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신비스러운 은총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 실생활에서의 혜택

성찬에 은혜롭게 참여한 성도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신령한 신비스러운 은총을 주님으로부터 받게 됨으로 인하여 사죄 받은 확신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며 주께서 장차 완성하실 그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아 참여할 것에 대한 소망을 확신가운데 갖게 되므로 비록 이 땅에서 성도로서의 힘든 삶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기쁨과 담대함으로 죄와 싸워 승리하는 복된 생활을 하게 된다. 성찬에 참여함으로 그럴 용기와 담대함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는 미신적인 그저 어떤 종교적 제의(祭儀)에 참여한 것이 아니며 추도하며 기념하는 추모식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 가운데 신령한 은혜를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죄 값을 함께 치르고 고난에 참여하여 주님과 연합하는 신령한 은혜를 체득한 자로서의 확고한 믿음과 담대함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계기를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2) 성찬 참여 시 주의 점

그런데 초대 고린도 교회에서 시행되었던 성찬식에는 문제가 있었다. 당시에는 교회에 모일 때마다 만찬을 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성찬을 거행할 때 먼저 온 사람(대부분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음식을 먼저 다 먹어버림으로 나중에 온 이들(사회적 신분으로나, 경제적으로 약한 이들)이 먹을 것이 없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즉 공동체가 주 안에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연합되는 이 예식의 의미를 일부 교인들이 망각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성찬 예식을 행하는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고 또 그 예식을 경솔히 여기며 제멋대로 행하는 연약한 모습을 모였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지적하며 먼저 온 자들이 나중 올 사람들을 기다려 함께 예식에 참여할 것을 가르쳤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고전 11:30-33)

무슨 말씀인가? 주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성찬을 경솔히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함으로 정말로 병에 걸린다던 지, 죽는 일들이 발생하였던 것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가! 성찬식에 잘못 참여하여 병에 걸리고 죽기까지 하는 일들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성찬식을 바르게 알고 참여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27-33)

결국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바에 참여하며 함께 연합된 공동체 의식으로 주 안에서 하나 됨을 의식하고 참여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결 론

떡과 포도주는 그저 떡이며 포도주일 뿐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 물질들은 로마 가톨릭에서 믿고 가르치듯이 결코 실제 예수의 살이며 피가 될 수 없다. 그 사실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에서도 증명된다. 주님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 26:29)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성찬 예식을 다 마치신 후 주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즉 예수께서 마신 것 역시 당신의 피가 아니라, 당시 포도나무에서 나온 포도로 만든 포도주일 뿐이었다.

이것은 마치 세례를 베풀 때 물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가 아닌 물이기에 그 물로 죄를 씻어 버리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원리이다. 즉 세례 베풀 때 사용하는 물이란 죄를 씻어주는 물이 아니라, 그 영적 의미에 있어서 사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 물은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믿고 세례에 임하는 죄인을 향하신 사죄의 상징적 표적과 확인인 것과 같다.(참고, 엡 5:25-27)

이 같이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 역시 그 자체가 예수님의 살이며 피일 수 없다. 이 성찬에 사용되는 떡과 잔은 축복의 잔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찬을 통하여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며 또한 연합되는 것이다. “우리가 축복 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고전 10:16)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신대로 의식을 행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였으며 주께서 완성하신 구속의 진리를 계속하여 고백하여 주님을 기념하고 증거 했던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가르침을 생각하며 성찬예식에 참여하여 마치 떡과 포도주로 음식을 삼아 생명을 유지하듯이 우리의 영적 생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먹고 살며 영생을 누리게 되는 영적 진리를 나의 것으로 고백하게 하는 데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요 6:53-57)

성도는 주님의 이 말씀의 참된 의미를 성찬에 참여하며 경험하게 된다. 바라기는 성찬예식에 참여할 때 마다 성찬의 바른 의미를 알고 고백하여 예수께서 마련해 주시는 풍성한 영혼의 양식을 받아먹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성도들이 참여하는 성찬 때 마다 주님 안에서 주어진 언약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하신 은혜로 언약의 교제를 나누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한 몸 의식으로 성찬 상에 나와 감격과 감사드리고 소망 가운데 믿음으로 참여하기를 소원한다.(*) 글쓴 이 / 박병은 목사(덴버 둘로스장로교회 담임) < 다음에 계속 >

< 참고 > 칼빈의 영적 임재설(靈的 臨在說, spiritual presence) 칼빈의 입장은 성찬을 행할 때 루터나 로마 가톨릭처럼 물리적으로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영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영적 임재설이라고 한다. 즉 성례는 단순히 쯔빙글리의 주장처럼 상징이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 의식을 통해서 은혜가 임하게 되는 인치는 효과를 나타내는 은혜의 방도라는 것이다. 즉 성례란 그리스도의 은혜를 표하고 인치는 것이다. 표시도 하고 상징도 한다. 쯔빙글리의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맞는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더해서 인을 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 의식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에 인 쳐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