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신학의 대충돌 박형룡과 김재준의 성경관 논쟁

한국교회 신학의 대충돌
박형룡과 김재준의 성경관 논쟁

들어가면서

(1) 박형룡과 김재준의 성경관 논쟁

박형룡(朴亨龍, 1897-1978)의 신학을 한국교회사라는 문맥 안에서 구약 신학적 입장을 논하려면 김재준(金在俊, 1901-1987)과의 성경관에 대한 논쟁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이 논쟁은 김재준이 창세기 1장에 과학적 오류가 있다고 주장함으로 촉발되었다. 또한 박형룡과 김재준의 성경관 논쟁은 두 사람의 신학적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낸 계기가 되었고, 한국 장로교 분열 역사에 획을 긋는 논쟁으로 한국 교회 여러 교단으로 하여금 신앙고백의 정체성을 결단하게 만든 일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1)

그러면 이 논쟁의 핵심은 무엇인가? 우선 김재준 편에서 이 논쟁의 핵심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한신대학교의 주재용 교수는 이 논쟁을 ‘정통주의 신학’대 ‘자유주의 신학’의 논쟁이며 성경 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이 논쟁의 핵심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2)

박형룡 박사는 선교사들의 신학 즉 율법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 정통신학(미국에서 형성된 근본주의 신학)을 확보하려고 했고 그것을 통하여 한국 교회의 신학을 수립하려고 했다.3) 즉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은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과 같이 성서의 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그 신학 사상이 이대(二大) 근간 사상으로 삼고 발전되었다. 이것은 후에 나타나듯이 장로회 총회가 성서 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유일의 척도로 하고 새로운 신학 사조에 대한 검토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4)

이 신학 계열이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철저한 성경 문자 무오설에 입각하여 전통적인 신앙을 고수하는데 있다. 이것은 극단적 자유주의 신학을 막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자기 신학의 절대화로 계속적인 교회 분열을 가져오게 되며 그것은 비(非) 성서적이다.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화의 기록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의 신학적 입장이 성서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5)

결국 주재용은 박형룡이 극단적 자유주의 신학을 막은 공로는 있으나 박형룡의 성경 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며 율법주의이고 보수주의 정통 신학이 한국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다고 비판하고 있다. 주재용의 이런 평가는 한국 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 교단의 기본 입장임을 알 수가 있다.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www. changgong.or.kr/home.htm)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953년 한국 장로교의 분열은 성경 해석 곧 김재준 목사의 새로운 ‘성경연구 방법론’을 둘러싸고 일어난 순수한 신학적 이유 외에 더 많은 비(非) 본질적 요소들이 상승작용을 해서 발생한 불행한 사건이었다. 한마디로 교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비극적 교회사 사건이었다. 당시 교권주의자들이 신학적으로 ‘축자영감설’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신학을 내세우고, 새 시대 새로운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담으려 했던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 개신교의 ‘창조적 소수 집단의 신앙양심’을 다수라는 힘으로 단죄하고 추방시켜버린 결과로 기독교장로회 교단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신학교 설립정신과 복음주의적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독교장로회는 한국 장로교의 본류를 이어가는 교단이다.6)

이처럼 기독교장로회는 보수주의자들이 축자영감설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신학을 가지고 창조적 소수집단의 신앙 양심을 다수라는 숫자로 단죄(斷罪) 한 교권주의의 횡포로 보고 있다.
(2) 문제 제기와 논지 그리고 절차

주재용과 기장의 주장은 박형룡의 신학의 핵심인 성경 무오설과 축자적 영감설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며, 이런 박형룡의 율법주의적 정통주의가 교권주의자들과 함께 한국 장로교 교회 분열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과연 이들의 주장은 옳은가? 과연 박형룡의 성경 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닌가? 한국 장로교 분열의 원인은 박형룡의 성경관에 그 원인을 돌려야 하는가?

본고의 논지는 박형룡의 성경 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태도이며, 한국 장로교 분열의 원인과 책임을 만일 우리가 물을 수 있다면 오히려 정통 신앙을 고수하는 한국 교회를 성경 유오설(有誤說)로 흔들어댄 김재준에게 더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누구에게 한국 장로교의 분열의 원인과 책임이 있는지를 굳이 물으려 한다면 최소한 박형룡과 김재준 모두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 논고에서는 김재준이 박형룡을 공격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고 과연 박형룡의 신학이 그런 공격을 받을만한 성격의 것인지를 들여다 볼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미래 한국 교회를 위해 박형룡과 김재준의 성경관 논쟁의 아쉬운 점을 지적하려고 한다.

1. 김재준의 박형룡 비판

(1) 성경의 축자영감 주장은 불경건이요 비진리이다.

김재준은 박형룡을 비롯한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성경 문자 무오설’을 ‘기계적 영감설’로 이해하고 있다. 1949년 11월 ‘대전 전후 신학 사조의 변천’이란 제목으로 행한 ‘제1회 장로교 청년 전국대회 초청 강연’에서 김재준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정통주의 신학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최후까지 지키려는 아성은 ‘성경 문자 무오설’입니다. 즉 “성경이란 책은 하나님이 부르고 사람이 그대로 쓴 것인데 기계적인 영감에 의하여 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잘못 부를 리가 없고 사람이 잘못 썼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문자적으로 일점일획이라도 틀릴 수 없다. 이것을 믿지 않는 자는 신자라 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7)
김재준의 이 같은 오해가 박형룡에 대한 단순한 오해인지 아니면 후에 박형룡이 비판 한대로 승리를 쉽게 하기 위하여 짚 인형을 만들어 세우고 공격을 하는 것과 같은 모략8) 즉 의도적 전략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찌되 었든 김재준은 축자영감설을 기계적 영감설 과 동일시하는데 있어서는 상당한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김재준은 1950년 김재준(1901-1987) ‘십자군’지에 발표한 ‘축자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이라는 논문에서는 축자영감설의 기원을 접신(接神)으로까지 보고 있다.9)

하나님이 최대한 활동하고 사람은 최소한으로 활동하는 경우에 영감은 더 커진다고 믿는 것이 보통 민속적인 생각이다. 그렇다면 온전한 영감이란 것은 그 영감을 받는 사람이 아주 기계처럼 되어서 자기의 의식까지 잃어버리고 접신(接神)하였다는 무당같이 되는 것을 말함이다. 이런 생각에서 소위 축자영감설이 생겨난 것이니…10)

축자영감설의 기원을 접신(接神)으로 보는 이 같은 모습에서 우리는 김재준이 축자영감설에 대해 거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니 알레르기 반응을 넘어서서 축자영감설을 회화(誨化) 화하여 조롱하려고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김재준은 이렇게 축자영감설을 성경 자체에 근거하지 않은 학자들의 억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비판한다.

성서 절대 무오설 즉 성서의 축자적 무오설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성서의 기계적 영감설이 요청되며 따라서 축자영감설이 득세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의 비위에 맞는 어떤 학설을 전제로 하고 성경을 그 학설에 맞추어 보려고 억지로 애쓰는 것은 불(不) 경건한 태도임과 동시에 불(不) 진실을 초래할 것이다.11)

김재준은 축자영감설을 불경건한 태도요 비(非) 진리라고만 말한 것이 아니다. 김재준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사이비적 경건’12) ‘문자적 광신’13)이라고 맹비난하고 있다. 또한 김재준은 단순히 성경 무오와 축자영감설을 가지고 성경에서 교리만을 찾아내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일부 정통주의자들의 우매한 행동을 지적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성경 무오설과 축자 무오설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다.

왜 문자와 의문의 전통의 무거운 짐을 기어코 지우려는가? 성경 절대 무오설을 믿어야 그리스도교가 권위 있게 되고 교회도 잘된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성경 축자 무오설에 그리스도교를 붙들어 매는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교의 친구가 아니다.14)

김재준은 한국 장로교가 예장(예수교 장로회)과 기장(기독교 장로회)으로 분열하는 시점을 전후로 정통주의의 성경 무오설과 성경 축자영감설이 주(主) 공격 대상이었기에 비판의 강도가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김재준은 박형룡과 총회로부터 ‘자유주의자’로 정죄 된데다 교단이 분열되는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령 이런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김재준의 축자영감설에 대한 비판은 지나치게 감정적이요 공격적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어찌되었든 김재준은 한국의 보수 정통주의의 핵심인 성경 축자영감설을 극복하지 못하면 한국 교회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김재준은 성경의 권위를 어디에서 찾고 있는가? 김재준은 성경의 권위를 성경 문자 무오에 두기보다는 살아계신 인격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통주의 신학이 그동안에 그리스도교의 많은 근본적 진리를 보수해 온 공적이 크다 할 수 있으나 지금에 와서 성경 문자 무오설을 최후의 아성으로 삼아 성서의 권위를 만회하려는 것은 심한 오산일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기록의 무오에 두지 않고 살아계신 인격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수립하는데 성공한 오늘날에 있어서 승산 없는 옛 싸움을 반복하는 것은 자력 소모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근본적인 진리는 대개 다 신(新) 정통학파에서 시대적인 무기로 장비시켜 재 등용하였으므로 그리 격분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15)

김재준은 극단의 정통주의와 극단의 자유주의를 둘 다 배격하면서 소위 ‘신(新) 정통신학’의 성경관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이들(신정통주의자)은 성경 비판학을 전적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데는 추호도 동요 없이 확신합니다. 그것은 문자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중심으로 한 신앙적인 의미에서 그러한 것입니다.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그이들(신정통주의자)을 가리켜 신(新) 신학이라 부르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들을 사변적인 정통주의신학자라고 평합니다.16)

결국 김재준은 신(新) 정통주의의 성경관을 가지고 박형룡의 축자영감설을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정통주의의 사이비적 경건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2) 성경의 무오설은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

김재준은 또 축자영감설과 성경 무오설은 성경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947년 51명의 조선신학교 학생들이 김재준의 가르침에 대한 불만을 제33회 총회에 호소문의 형식으로 제출한 것을 보면 김재준이 성경 유오설(有誤說)을 강의실에서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 무오 한 유일의 법칙이니라.’는 신조 위에 조선 장로교회는 섰고 이 신조는 조선 교회 안에 영원히 보수되어야 할 우리들의 가장 순수하고 복음적인 신앙 고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타는 소명감에 모여 장로회 총회 직영 신학교인 조선신학교에 적을 두고 성경과 신학을 배우기 시작한지 수년 여에 우리가 유시(幼時)로부터 믿어 오던 이 신앙과 성경관이 근본적으로 뒤집혀지는 것을 느꼈습니다.17)

이에 총회는 8명의 진상조사위원회를 조직했고 이 위원회가 요구한 성명서에서 김재준은 성경의 절대무오를 받아들인다고 했다.18) 그러나 위원회 앞에서는 이 성경의 절대 무오는 문자, 자연, 역사, 과학에까지 무오(無誤) 한 것은 아니라며 성경의 무오를 신앙과 행위에 제한 시켰다.19) 결국 김재준은 성경 유오설(有誤說)을 주장한 것이다. 실제로 조사위원회와 김재준과의 문답을 보면 김재준은 성경의 오류(誤謬)를 강의 시간에 가르쳤을 뿐 아니라 성경의 유오성(有誤性)을 믿고 있었다.

문 : 김 교수 진술서에 의하면 성경의 오류가 있다고 하셨는데요?
답 : 있는 것을 없다고 하겠습니까?

문 : 어떤 부분에 오류가 있습니까?
답 : 창세기 1장에 “땅이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에 있고 신은 수면에 운행 하시다.”라고 하는 말이나, “땅에 기초를 두어 요동치 않는다.”는 말은 비(非) 과학적이 아닙니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성경의 무오설(無誤說)에 대해 비교적 수세적 공격의 모습을 보이던 김재준은 기장의 분열 이후부터는 성경 무오설(無誤說)을 주장하는 박형룡 박사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공세적 공격의 자세를 띄기 시작하였다.

이제 성경 무오설(無誤說)을 문자적으로 변증하기 위하여 애쓰신 박형룡 박사의 소론을 참고해 보기로 하겠다. 박형룡 박사는 “성경에는 과학적 오류가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는 여기서 의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성경이 과연 과학적으로 절대 정확하다면 왜 “성경은 과학 교본이나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라고 구태여 말할 필요가 있는가? (박형룡 박사는) “성경에 천문, 지질, 생물 등에 관한 문구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통속적 또는 시적 표현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오류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그의 본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그러나 여기서 그는 사유(思惟)의 범주를 혼동함으로 말미암아 용어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과학적’이라는 말과 ‘통속적’ 이라는 말은 같은 범주에 들어가는 용어가 아니다. 통속적으로 탓할 것이 아니라고 과학적으로도 탓을 하지 말아야 된다는 이론은 서지 않는 것이다.

가령 창세기 1장에 있는 대로 본다면 땅은 태초에 혼돈 무형한 원시해(原始海)로 싸여 있는데 하나님이 그 물 가운데서 궁창(딴딴한 유리 같은 물체)을 만들어 위로 떠받치니 그 원시해가 궁창 위엣 물과 궁창 아랫물로 갈라지고 궁창 아랫물은 한데로 몰려 바다가 되고 육지가 드러나게 되었으며 그 궁창 위에는 해와 달과 별들을 달아 놓아 땅을 비취게 하였다는 것이나 땅은 물 위에서 떠서 동하지 아니하며 궁창의 벽은 지주에 의지하였고 땅속에 음부가 있어 별세한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 가 있다는 등의 생각은 통속적으로는 별로 따질 것이 없으나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과학적으로 검토할 때는 결코 정확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통속적 의미에서 성경은 오류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과학자의 관심 밖의 일이니 그대로 통과할 것이나 (만일 누가) “성경에는 과학적 오류가 없다.”고 장담하면 그때는 천문, 지질, 생물 등 각 부문의 과학자가 각기 실증 과학의 척도를 가지고 잴 것이니 거기에 맞지 않는 때는 오류(誤謬) 딱지를 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통속적으로 “해가 동에서 떠나 서로 넘어간다.”고 하는 말은 사실이나 순정 과학적으로는 그렇 게 말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과학적으로는 오류(誤謬)인 것이다.20)

김재준은 “성경에는 과학적 오류(誤謬)가 없다.”고 말하는 박형룡의 주장을 “성경에는 과학적 오류(誤謬)가 있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변호와 변증이 아니라 마치 과학의 이치도 모르는 무지한 자의 억지 주장인양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박형룡은 과학의 이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 유오설(誤謬說)에 대항하여 성경은 오류가 없다는 것을 변증하는 자세로 성경 무오설(無誤說)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박형룡은 인간 이성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성경 내용을 오류(誤謬)라고 단정하기 보다는 ‘난제(難題)’로 본 것이고 또 과학 등의 인간의 지식이 발전되기까지 지켜보자는 태도로 성경에 대한 경외의 자세를 지속적으로 견지하자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재준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표현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성경에는 과학적으로 오류(誤謬)가 있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김재준은 성경에 오류(誤謬)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총회 조사위원회에서 뿐 아니라 조선 신학교 이사회 앞에 보낸 진술서에서도 이를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사 연구의 대가였던 김양선 목사는 김재준이 성경을 잘못 알고 있기는 했지만 자기가 믿는 대로 고백하는 학자의 양심은 지켰다고 인정하고 있다.

(김재준의) 동(同) 진술서는 주로 성경관과 교리문제에 대한 변해(辨解) 인데 될 수 있는 대로 일반의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매우 온건한 태도를 표시하였으나 자유주의 신학자로서의 (자신의) 태도를 엄폐(掩蔽) 하거나 부인하지 아니하여 학자의 양심을 지켰다.21)

김재준은 성경에 과학적 역사적 오류가 있다는 확신이 너무 컸기에 박형룡의 성경의 문자 무오설과 성경 축자영감설은 성경 정신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을 뿐 아니라 박형룡과 같이 이를 주장하는 것은 경건한 사기(詐欺)로 까지 보았다.22)

내가 성서 문자 무오설을 배격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를 정당한 기초 위에 수립하려는 것인 까닭이다. 성경 자체의 사실이 문자적 무오를 입증해 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구차스럽게 그 학설을 고집한다는 것은 ‘경건한 기만(欺滿)’이다. 또는 성경의 역사적 과학적 또는 문장적 오류가 다소 있다고 말한 데서 무슨 큰일이나 난 것 같이 야단 법석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23) 우선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자. 성경에 원본은 없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지금의 사본이 원본가 꼭 같다고는 못할지라도 크게 틀린 것은 없으리라고 믿고 보면 사실 성경에는 문자적 오류와 과학적 역사적 등 부분의 오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큰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오류는 오류인 것이다.24)

결국 김재준은 성경의 문자 무오설(無誤說)은 성경 자체의 사실과 다르기에 ‘경건한 기만(欺滿)’이라고 비판한다. 김재준은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변증하려는 것이 아니라 입증하려는 태도로 성경에 다가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변증적인 태도를 보이는 박형룡의 입장을 ‘경건한 사기(詐欺)’로까지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성경에 대해 확고한 무오설을 가지고 있는 박형룡을 학자적 양심으로 보기 보다는 경건한 사기로 본 것은 어떻게 보아도 지나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물론 박형룡의 공격으로 인해 본인이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기에 실제적으로 이런 것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일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같은 김재준의 공격은 도를 넘어서는 느낌이 든다.

(3) 김재준의 박형룡 비판 요약

김재준의 박형룡 신학에 대한 문제 제기는 다음과 같다.

– 박형룡의 축자영감설의 기원은 무당의 접신(接神) 같은 기계적 영감설 이며, 축자영감설은 거짓 학설을 성경으로 입증하려는 불경건한 태도 요 더 나아가 사이비적 경건이다.

– 박형룡의 성경 무오설은 오류가 분명하게 있는 성경 자체의 사실과 맞지 않는 이론으로 경건한 기만이기에 비(非) 복음적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는 정말 박형룡의 성경 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의 성경관이 김재준에게 이런 공격을 받을만한 비(非) 성경적이고 경건하지 못한 무당의 접신과 같은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2. 박형룡의 성경 무오와 축자영감설의 진의(眞意)

(1) 박형룡은 성경만의 유일한 권위를 강조한 것이다.

박형룡이 성경의 ‘무오’와 ‘축자영감’에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이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 정통 신앙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용납지 않으려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들 박아론 교수는 박형룡의 신학을 ‘성경 무오 사상에 입각한 비타협적 보수주의 신학’이라고 정의할 정도이다. 실제로 박형룡은 성경을 절대 유일의 무오(無誤) 한 진리 기준으로 삼았다

영원한 종교적 진리에 관한 최후의 단언을 내릴만한 권위는 절대적이요 불변적인 소위 인식학적 권위가 아니면 안 된다. 절대적인 인식학적 권위는 오직 천계의 영감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에만 있다. 순전히 성경에 따라서 거기 기초하고 거기 부합하는 종교적 의견이면 옳은 의견 즉 정통 신앙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교회의 교의(교리)를 제정함에 있어 다수인의 권위나 선생의 권위에 따르지 않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최고의 절대 권위(權威)는 항상 성경이다. 그 의견이 성경과 합하느냐 않느냐를 상고하여 성경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의견을 정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25)

이렇게 성경의 절대적 권위(權威)를 강조하는 박형룡은 성경의 절대 권위를 부정하는 김재준의 신학을 비판한 것이다. 물론 박형룡과 당시 교단 총회의 주장이 모두 다 성경의 ‘정통 신앙’에 부합하는 신앙과 행위였느냐 하는 문제는 쉽게 다룰 문제도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교회 역사가들이 판단할 문제이다. 여기서는 단지 박형룡은 최소한 성경에 가장 부합하는 것을 ‘정통 신앙’으로 보려하였기에 자신의 판단에 성경의 무오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론에 대해서는 정통주의 신학에 근거하여 자유주의로 판단된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2) 박형룡의 축자영감설은 언어의 영감을 강조한 것이다.

박형룡은 성경의 절대 권위(權威)를 확신하였기에 성경의 권위(權威)를 드러내는 성경의 축자영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박형룡은 김재준이 주장하는 대로 축자영감을 기계적 영감으로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기계적 영감으로 보는 것을 반대하며 그것은 오해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어떤 사람들에 의하면 (내가 주장하는) 성경의 축자영감은 필연적으로 기계적 영감을 의미한다고 하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성령의 지도가 용어의 선택에 미쳤다고 믿는 것은 완전히 가능하나 성령의 그 지도는 오히려 기계적 방식으로 공작하지 않았다.26)

한 걸음 더 나아가 박형룡은 축자영감을 기계적 영감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공격이라고 지적한다. 13

이것은 (성경관의 논쟁에서) 승리를 쉽게 하기 위하여 짚 인형을 만들어 세우고 공격을 하는 것과 같은 모략이다. 17세기의 어떤 루터파와 개혁파 신학자들이 이 같은 견해의 풍미를 가진 표현들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시인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기계적 영감을 재가(裁可) 하는 인정된 신앙고백서는 하나도 없다.27)

이렇게 김재준이 축자영감설을 기계적 영감설로 이해하고 공격한 것은 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의도적인 공격 전략이거나 최소한 박형룡의 성경관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근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박형룡이 성경 축자영감을 강조한 것은 김재준이 비판하는 대로 성경의 권위를 ‘살아 계신 인격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찾지 않고 ‘기록의 무오에 둔’ 것이 아니다. 살아 계신 인격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인 기록의 무오를 분리시켜 대조적인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박형룡은 그리스도와 기록의 무오를 대조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사상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문자가 영감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뿐이다.

축자영감의 교리는 견실한 성경적 증명뿐 아니라 상당히 확고한 추론적 증명을 가지고 있다. 영감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사상을 정확히 전달케 하기로 의도 된 것이며 문자의 정확한 사용이 없이는 사상의 정확한 표현이 있을 수 없다. ‘사상은 단어에 있다. 그러므로 사상과 단어 이 둘은 나누일 수 없다. 만일 제사(祭司), 제사(祭祀), 대속물, 보상, 화목제물, 피에 의한 정결 같은 말들이 신적 권위를 가지지 못하면 그 말들이 나타내는 성경의 모든 교리가 신적 권위를 가지지 못 한다.(Charles Hodge, op.cit., 164)’ 이처럼 사상과 문자는 불가분적으로 상호 연결이 되어 있어 단어의 변동은 사상의 변동을 의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28)

박형룡은 만일 성경이 어떤 의미에서든 영감되었다면 이는 언어적으로 영감된 것(verbally inspired)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성경의 내용을 기록한 양피 가죽이나, 종이나 아니면 성경 내용을 기록하는 데 사용한 잉크가 영감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영감된 것은 가죽이나 종이나 잉크가 아니라 거룩한 본문의 메시지이고 이 메시지는 다름 아닌 단어들을(words) 통해 전달된 것이다.

그런데 김재준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은 ‘주격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대신에 물상화(物相化) 한 의문(儀文)을 믿는 것’이라고 주장한다.29) 이것은 잘못된 대조다.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다. 문자적으로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 곧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아니다. 문자적으로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이 문자적으로 성경을 믿는 사람보다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더 잘 믿을 수 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필자가 보기에는 오히려 반대일 가능성이 더 크다.

박형룡이 축자적 영감을 강조한 것은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성경이 그 문자와 언어에 이르기까지 영감이 되어 무오하게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사실이다. “모든 성경(γραφη)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바울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inspired of God)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여기서 성경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그라페(γραφη; graphe)는 ‘쓰다’라는 헬라어 동사 ‘그라포’(grapho)의 명사형이다. 결국 ‘모든 쓰여진 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고대 기록에서 ‘쓰여진 것’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것은 단어들이다.

그러므로 단어들로 쓰여진 성경이 영감이 되었다면 결국 성경의 단어들이 영감 되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축자영감설은 성경의 성격과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주장하는 것은 경건한 사기(詐欺)라는 김재준의 말은 전혀 타당성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박형룡은 바울이 말한 성경 영감의 주장을 ‘유기적 완전 축자영감’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 박형룡의 글을 직접 살펴보자.

– 유기적 영감(有機的 靈感)

성경이 보여주는 영감의 방식은 유기적 영감(organical inspiration) 방식이다. 이 유기적 영감이란 말이 동력적 영감(dynamic inspiration) 이란 말과 교대적으로 사용되는 때가 있으나 그것은 정확한 용법이 아니다. ‘유기적’ 이란 말은 하나님이 성경 저자들을 기계적(機械的) 방식으로 사용치 않으셨고, 기록시키려는 단어들을 그들의 귀에 불어넣지 않으셨고, 오직 그들의 내면적 실유의 법칙과 조화되는 유기적 방식으로 동작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성경의 영감은 이처럼 생명이 없는 기계적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경 저자들의 성격, 성벽, 재능, 교육, 수양, 용어, 문체 들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신 유기적(organical) 작업이다.30)

– 완전 영감(完全 靈感, whole inspiration)

‘완전 영감’은 ‘성령의 충분하고 충족한 감화가 성경의 모든 부분들에 확장되어 성경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권위적 계시(啓示)로 만든 결과 그 계시는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통하여 오되 오히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31)

– 축자 영감(逐字 靈感, verbal inspiration)

‘축자 영감’은 성경 기록자들을 둘러싼 신적 감화가 일반 사상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문자들에까지 끼쳐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사상들이 무오(無誤)하게 정확히 전달되었다는 말이다. 즉 성경의 기록자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전달했고 하나님의 기관(器官)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Boettner, Studies in Theology, 11) 32) *축자(逐字) : 글자를 하나하나 따름

박형룡은 하나님이 의도(意圖)하신 사상들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문자(文字)에까지 영감이 되게 하신 것으로 본 것이다. 언어적 영감이란 단어들의 실제 형태와 용도와 연관된 개념이다. 다시 말해 문장 안에 명사, 동사, 전치사, 정관사들을 사용하는 것과 연관된 것이다. 15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성경 기록자들을 감화하여 이들이 사용한 모든 언어적 문법적 형태와 문체까지도 조화롭게 신적으로 인도하여 진리의 세밀한 의미들을 전달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축자 영감이란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물론 ‘축자(逐字)’란 단어의 의미를 너무 기계적으로만 이해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신학적 입장에 따른 성경관
신학적 입장 성경의 무오성 성경의 영감
개혁주의 오류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is)
자유주의 오류가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 (include)
신 정통주의 오류가 있다. 성경 자체는 사람의 글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자가 읽을 때 감동을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become)

따라서 김재준이 “성경의 권위를 성경 문자 무오에 두기보다는 살아 계신 인격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두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제가 있다. 살아 계신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방법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바로 기록 된 성경 말씀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그 문자가 담고 있는 정신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닌가? 문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문자가 담고 있는 정신을 이야기할 능력이 있을까? 이런 점을 강조하는 용어로 ‘축자 영감’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누구나 문자에 기초하지 않고는 결코 성경 본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신 있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박형룡의 성경 무오설과 변증적 태도

박형룡이 성경에 과학적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김재준이 주장하는 대로 ‘경건한 기만’이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에 과학적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대한 변증의 자세에서 주로 나온 것이다.

성경에 오류가 많다고 하는 말은 성경의 정통적 권위를 부인하고 그 권위의 소재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자유주의 신학의 전용적 주장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또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은 성경의 과학적 오류라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는 성경의 자연 현상에 관한 기사가 현대의 자연과학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여 반 기독자들과 함께 성경을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자연과학과는 부합하지 않다는 그들의 주장을 그저 머리를 숙이고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33)

박형룡은 성경을 가지고 과학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성경에는 과학적 오류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자들이 성경에 과학적 오류가 없다는 그의 주장을 공격하니까 이를 변증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는 과학적 오류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구약의 어떤 구절들에 천문, 지질, 생물 등에 관한 문구들이 기재되었으나 그 기록의 본의가 과학적 해설을 시도하려는데 있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의 발현과 권능의 표현을 묘사함에 있어서 통속적 또는 시적 표현으로 사용된 것이다. 아무리 과학이 엄정하기로 이것을 이해치 못할 까닭은 없을 줄로 안다. 즉 성경은 과학과 더불어 충돌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이 아직 불완전하여 진리의 지경에 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성경이 말한바 자연관을 정당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과학이 현대 보다 좀 더 진보할 수 있다면 장래 어떤 시기에는 결국 성경과 합치하게 되리라고 관측하고 있다.34)

박형룡은 비판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서 문자적 의미가 과학적 진리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박형룡은 자유주의자들이 성경이 과학적 오류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성경이 과학서가 아니라는 점과 과학이 진보하면 후에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이 과학과 상충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가능하면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막아내려고 한 것이다.

김재준 교수가 계속 성경은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박형룡 교수가 성경은 오류가 없다고 하는 것이나 결국은 자신의 확신과 학자적 양심에 대한 표현이다. 김재준은 성경이 과학서가 아니니까 오류가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박형룡은 성경이 과학서가 아니니까 오류가 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오류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과학서가 아닌 성경을 가지고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김재준의 태도는 경건이고 반대로 과학서가 아닌 성경을 가지고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박형룡의 태도는 거짓이요 경건한 사기인가? 성경이 과학서가 아니기에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경건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과학서가 아닌 성경에 과학이라는 잣대를 가져다 대고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불경건하다고 볼 수 있다.

3. 창세기 1장과 과학

최근 구약 학자들은 김재준의 말대로 창세기 1장이 과학적으로 오류가 있다고 보기는커녕 오히려 과학적 연구를 지지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은 반복과 대칭의 문예적 기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이 사는 땅을 조화롭고 질서 있게 창조하였음을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과학적으로 오류가 있다고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과학적 연구를 지지하고 있다는 결론을 고든 웬함(Gordon J. Wenham)은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최근 창세기 1장은 자연과학 연구에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자연과학 연구의 전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일성과 질서 있는 논리적인 계획에 따라 세상을 통제하시는 한 분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창세기 1장이 되어야 한다. 이런 전제만이 과학의 경험적 방법들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세상이 서로 뜻이 다른 많은 신들에 의해 통제된다거나 단순히 우연에 지배된다면 경험적 방법에 의한 결과에서 어떤 통일성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어떤 과학 법칙도 발견될 수 없을 것이다.

창세기 내러티브가 창조주의 창조의 일관성과 목적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은 기법 즉 다양한 창조 행위들을 육일로 나눈 것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이해함으로서 서로 보완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과학과 성경이 서로 상충하는 것으로 만든 것은 불행한 일이다. 제대로 이해하면 창세기는 자연의 통일성과 질서라는 과학적 체험을 정당화시켜준다. 6일의 틀은 창조 안에 내장된 체계와 질서를 강조하기 위해 창세기 1장에서 사용된 여러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반복되는 공식과 단어들과 어구들은 열 혹은 일곱 개씩 나오도록 반복한 것과 키아즘과 인클루지오 같은 문예 기법과 창조 행위들은 서로 상응하는 그룹이 되도록 배열한 것 등이 다른 여러 수단들이다.35)

이렇게 본다면 김재준이 총회 조사위원회에서 “창세기 1장에 땅이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에 있고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다고 하는 말이나 땅이 기초를 두어 요동치 않는다는 말은 비과학적이 아닙니까?”라고 한 것은 위의 고든 웬함의 창세기 주석에 따르면 틀린 것이다. 김재준은 성경에 과학적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너무 빨리 받아들인 것이다.

김재준이 성경의 과학적 오류를 지적할 때는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문자주의적 해석을 하고 있다. ‘땅은 물 위에서 떠서 동하지 아니하며 궁창의 벽은 지주에 의지하였고 땅속에 음부가 있어 별세한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 가 있다.’는 식의 표현은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36) 자신이 그토록 비판하는 문자주의적 해석을 김재준 스스로 하고 있는 자가당착을 본다. 얼마든지 비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는 성경 본문을 굳이 문자주의로 해석한 후에 성경에 과학적 오류가 있다는 주장을 김재준이 공세적으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다른 면에서 그가 받아들일 수 없는 정통주의에 대한 반발이 기저에 깔린 것은 아닐까?

4. 김재준의 자가당착

김재준은 박형룡의 축자영감을 비판하면서 “성경이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다면 굳이 성경이 과학 교과서가 아니라고 말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라고 말한다.

그(박형룡 박사)는 말하기를 성경에 과학적 오류가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는 여기서 의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성경이 과학적으로 절대 정확하다면 왜 ‘성경은 과학 교본이나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라고 구태여 말할 필요가 있는가?37)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김재준이 이렇게 박형룡을 비판한 후 그의 논리대로라면 김재준 자신이 그와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 확립하자. 그리고 우리는 똑똑히 외치자! 성경은 과학을 가르치기 위한 교과서도 아니다. 성경은 철학을 가르치기 위한 철학 개론도 아니다. 성경은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를 지향 증언하는 책이다.38)

성경이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다면 굳이 성경이 과학 교과서가 아니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김재준은 성경이 과학 교과서가 아닌데 굳이 성경에 과학적으로 오류가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이 과학 교과서가 아니라 굳이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다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면 동일하게 과학적으로 오류가 있다고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성경은 오류가 있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성경에 과학적 오류가 있다고 적극적으로 이야기함으로서 성경이 과학 교과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의도인가?
5. 성경 무오는 성경의 자증(自證)

박형룡이 성경 무오를 강조한 것은 김재준이 이야기하는 대로 경건한
기만(欺瞞)이 아니라 ‘성경의 자증(自證)’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정통적 성경관에 무오(無誤)를 부여하는 것은 공연히 이것의 입장을 곤란에 빠뜨리는 과도한 처사인가? 아니다. 우리가 성경의 무오를 말함은 성경이 이것을 스스로 주장(主張) 하며 성경의 내용이 그 주장과 융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이 성경을 무오하게 하신 것은 무오가 필요하기 때문이었을 것이 분명하다.39)

김재준이 성경 축자영감설은 학자들이 자기 학설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을 끌어다 대는 억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최소한 박형룡을 오해한 결과임을 잘 보여준다. 김재준 자신이 주장하는 성경 유오설(有誤說)과 성경 목적 영감론이 성경에 맞는 이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박형룡 역시 축자영감설과 무오설이 성경의 자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성경에 대한 확신이 서로 맞부딪히고 있는 것이지 경건과 비(非) 경건, 진실(眞實)과 사기(詐欺)가 부딪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김재준이 박형룡의 성경 축자영감과 무오를 성경에 맞지 않는 경건한 기만이라고 한 것은 지나친 편견과 오만이라고 할 수 있다.

6. 오류가 아니고 난제일 뿐이다

박형룡은 무조건 성경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무식한 변증가는 아니다. 박형룡은 성경에 오류(誤謬)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성경에 난제(難題, hard sayings)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경의 오류는 난제일 뿐 입증된 오류가 아니라는 일관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앞장 끝단에서 성경의 완전 축자 영감의 교리는 성경의 오류가 많은 현상에 모순된다는 비평에 대하여 성경에 난관(難關)은 있으나 ‘입증된 오류’는 없다고 답변했다. 우리는 특별히 어떤 명제를 증명하는 증거가 반박되지 않는 한 제출된 이의(異議)는 난관에로 과도(過渡)하는 것이 논리의 원칙이라고 한 워필드의 변명을 인용했던 것이다.40)

성경에 대해 너무 쉽게 오류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오늘의 문화와 당시 성경 저자들의 문화 사이에 차이가 있기에 ‘난제(難題)’로 표현하는 것이 온당하다. 장신대 김중은 교수 역시 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성경에 역사적, 지리적, 과학적, 윤리적 오류(誤謬)가 있느냐 없느
냐 하는 논쟁은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판단하는 역사적 사실이나, 윤리적 기준, 과학적 법칙 등은 성경의 진술을 비평함에 있어서 결코 최종적이나 절대적일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라는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볼 때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 나타나는 역사적 과학적 등등의 오류는 사실상 오류가 아니며 성경 시대와 우리 시대 사이의 역사적 문화적 간격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난 차이점(differences)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41)

박형룡은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啓示)라고 믿는다면 최소한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존경과 순종이 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태도를 취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박형룡은 이런 성경의 오류에 대한 지적은 교회 역사에 오랜 현상이기에 마치 새로운 발견인양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라고 냉소를 보내고 있다.

금일에 ‘오류’(誤謬)의 혐의를 받는 어떤 성구들은 교회사의 진정에 줄 곳 존재하여 그 존재가 기독교의 친우들과 대적들에게 아울러 인식 되어 왔다. 소위 성경의 이 오류들은 금일 비평가들의 새 발견이 아니라 고대에도 잘 알려져서 켈수스와 폴리피 같은 초대 기독교의 큰 대적들의 때에 인용되었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참으로 오류가 아니라 난관들이기 때문에 복음의 전진에 하등 해를 주지 않았다.

만일 소위 성경의 이 오류들이 성경의 영감에 대항하는 정당한 반대들이었다면 어째서 오래전에 성경을 둘러엎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는가? 만일 이 오류들이 사실이라면 기독교회가 어떻게 오늘날과 같이 성장하고 확대되었으며 초대 교부들 같은 대(大) 사상가들이 계속하여 성경을 신뢰할만하고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을까? 그러므로 금일의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성경의 오류들이 현대 학구의 새 발견인 것처럼 교회에 대해 위협을 감행하는 것은 실로 가소로운 일이다.42)

이것은 김재준이 정통주의 신학자들을 ‘지적 패배를 감정적 잔인으로 보복하려는 자들’, ‘세계적인 지위에 오르지 못한 무지한 자들’이라고 비판하는데 대한 박형룡의 응수로 보인다.
7. 경외의 정신과 변증의 태도

박형룡을 반대하는 자들이 박형룡을 지나치게 엄격하고 경직된 사상의 인물로 본 것은 오직 성경만이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계시라는 확신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을 진정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성경을 대하는 태도는 우선 신앙의 태도여야 한다고 박형룡은 본 것이다.

경외(敬畏)의 정신과 변증(辨證)의 태도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에 대하여 우리가 가질 적정한 정신과 태도다. 이 정신과 태도를 가지는 자는 성경에 난관이 있음을 인정하되 그것을 오류라고 단정하지 않고 자기의 무식을 한탄하며 힘이 미치는 한 그것의 해명에 노력한다. 반면에 이 정신과 태도를 가지지 않는 자는 성경의 난해(難解) 한 곳을 볼 때마다 즉시 오류로 단정하고 자유자재로 파괴적 비평을 가한다.43)

박형룡은 성경의 난해한 곳을 볼 때마다 즉시 오류로 단정하는 것은 경외의 정신과 변증의 태도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결국 박형룡과 김재준의 논쟁은 박형룡은 김재준을 ‘경외의 정신이 부족한 자’로 비판하고 김재준은 박형룡을 ‘경건한 기만을 감행하는 자’로 서로 비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박형룡과 김재준은 성경에 대한 신념 대 신념의 논쟁을 한 것으로 보인다.

(1) 박형룡의 경외의 정신

모든 지식의 추구와 명철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것은 주도적 원리요 중심적 요소다. 여기서 떠날 때 인간은 스스로 진리를 다 깨달았다고 단언하고 암흑과 미로에 방황하여 받은바 교훈에서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한다.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그를 노엽게 할까 두려워하여 조심하는 사람은 실로 참 지식을 얻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갖는 경외감(敬畏感)은 모든 지식의 추구에 있어서 필요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계시의 영적 진리를 학습함에는 더욱 그렇다.44)

(2) 박형룡의 변증적 태도

경건의 정신으로 성경을 대하는 자는 성경에 난관이 발견될 때마다 이를 변증(辨證)하여 해명하고 해명이 곤란하거든 자기 무식을 자백하고 장차 해명될 때가 오기를 대망한다. 모든 경건한 성도들은 이 같은 태도를 취하

여 성경의 난해한 곳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한 건 두건 해명됨을 보고 마음에 만족하며 성경의 무오한 권위에 대하여 회의하지 않는다.

성경에 대한 경건의 정신이 없는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의 난해한 곳을 보면 즉시 오류로 지적하고 더 많은 오류들을 성경에서 찾아내기에 열중한다. 성경을 불신임하는 편견이 그들의 판단을 좌우하여 성경과 다른 증거들 사이에 충돌이 생길 때에는 오류가 성경에 있다고 단정하여 버린다. 또 성경과 외적 증거 사이에 충돌이 생기면 성경은 틀렸고 외적 증거가 옳다고 보며 성경의 증거보다 학자의 의견을 더 존중하여 후자로써 전자를 말살시킨다.

그리하여 성경의 오류를 많이 적발하여 자유자재로 비평하여 버린즉 성경에 신임할만한 진리적 요소는 많이 남지 못하게 된다. 처음에는 성경의 자구적 오류를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하나 다음에는 그 역사적 사상적 각종 오류를 발견하기에 매진하여 성경의 전면적 파괴로 종결한다. 이 일이 자유주의자들의 비평적 심리에는 만족을 줄지 모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의 신앙을 크게 파괴하여 원수 마귀의 악의에 또한 만족을 줄 것이니 어찌 위험하지 않으랴!45)

박형룡은 성경의 유기적이며 완전 축자 영감 사상을 조금이라도 수정하거나 양보하는 것은 ‘사도적 전통의 신앙’을 그대로 보수하는 것이 못된다고 본 것이다.

8. 분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흔히 한국 장로교회 분열의 책임을 김재준 측의 기독교장로회는 박형룡과 예수교장로회에 떠넘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한국 교회사 연구의 선구자였던 김양선 목사는 만일 김재준이 계속적으로 보수주의 신학을 강렬히 비판하지 않았다면 금일과 같은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46)

남을 정죄하는데 빠른 것은 한국장로교 역사를 볼 때 진보와 보수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간하배 교수도 한국 보주주의 신학이 그렇게 된 것은 교계와 신학계에 퍼져 있는 자유주의 세력들이 한국 장로교회의 보수주의를 공격함에 있어 초대교회 당시 보다 훨씬 더 강경한 논조로 비난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은 김재준 교수의 글을 읽어보면 잘 알 수가 있다. 김재준의 글은

한국 장로교 교단(고신, 합동, 통합, 기장) 분열 역사
분열 시기 분열 내용 주요 쟁점
제1차 분열 1952년 고신의 분립 신사참배 문제
제2차 분열 1953년 예장과 기장의 분열 신학노선(성경관)
제3차 분열 1959년 합동과 통합의 분열 WCC 가입 문제

날이 선 감정적 공격으로 가득 차 있다. 김재준은 성경에는 문자적, 과학적, 역사적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박형룡을 위시한 정통 신학자들을 계속적으로 맹렬히 비난했다. 그의 글을 읽어보면 그 비난의 정도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가 있다.

많은 배움이 있었으나 그곳(프린스톤 신학교)을 떠날 때 나는 극단의 정통주의 신학이 역시 막다른 골목에서 스스로 발악하는 고민상을 여실히 보았습니다. 지금도 물론 극단의 보수파 신학자들이 갖은 전술을 다하여 가까스로 악전고투하지만 대세는 이미 그들의 것이 아님이 확실합니다. 전
통적인 독단론만을 가지고 성경의 권위를 세우려 하면 할수록 성경의 권위는 더 떨어지고 학자적 양심에는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이지적(理智的) 패배를 감정적 잔인으로 보복하려는 데서 교권에 호소하기도 하고 수단 불택의 태도도 왕왕 취하게 된 것입니다.47)

김재준은 박형룡 못지않게 정통 신학에 대한 감정적인 공격을 서슴 치 않았다. 김재준은 1952년 ‘계시와 증언’이란 책의 ‘이단 재판의 성서적 근거’에서 이렇게 말한다.

교리논쟁 때문에 일방이 타방을 법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피적으로 분열을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바울 서신에 쓰여진 이단이 되고 만다.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의 성격도 그것이 교리문제 보다 윤리 문제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것을 자료로 하여 우리 교회 내에서도 자타 함께 상대방에 대한 심판 보다는 근본적인 자기 성찰에 치중하기를 기하여야 할 것이며, 소위 ‘정통과 이단’ 문제에 있어서도 근본적인 태도 전환이 있어야 할 것을 말해 준다.48)

이렇게 이단 재판에 대해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김재준은 박형룡을 ‘정통주의 이단’이라고 비방했다. 김재준은 이미 1946년에 ‘새사람’ 지(誌)에 “정통신학은 신(新) 신학 보다 더 교묘하게 위장된 실제적 인본주의요 정통적 이단이다.”라고 비판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 외에도 정통 신학에 대해서는 바리새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적이요, 저 문자주의자들은 바리새 적이라는 것을 적확히 알고 있으나 그 ‘가라지’를 갑자기 뽑으려고 하지 않는다.49) 오늘날에 있어서도 소위 ‘정통 신학’이니 ‘정통 교리’니 하는 것을 우리 앞에 걸어 놓고 각 개인의 양심적 판단을 억압하여 이에 기계적 일률적으로 행동을 감히 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율법 시대에 타락한 바리새주의를 답습하는 것이어서 온전히 비 복음적인 것이다.50)

김재준은 교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어서 ‘몸서리치는 악마적인 문구’, ‘살인마적 우상’이란 표현까지 동원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나는 교회사 가운데 가장 몸서리치는 악마적인 문구를 소위 ‘아다나시안 신조’라는 데서 발견한다. “누구든지 구원을 얻고자 원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가톨릭 신앙을 가져야 한다.(로마 가톨릭을 말하는 것이 아님) 이 가톨릭 신앙을 의심 없이 전부를 순수하게 믿고 지키는 자가 아니면 그는 영원히 멸망 받을 것이니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신조는 교회의 명령이요 신자 개인의 인격적 고백은 아니다. 이렇게 신조가 어떤 신학 사상을 보수하기 위한 교리의 도구로 타락하는 때 그것은 하나의 살인마적 우상의 역할 밖에 못하는 것이다.51)

여기서 우리는 박형룡과 김재준의 성경관 논쟁이 학자적 양심과 신념을 가지고 싸운 학문적 논쟁임에도 불구하고 논쟁을 거치면서 감정적인 대립을 넘어서 정치적 투쟁으로 바뀌게 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서양에서 기독교 신앙의 5대 근본진리를 둘러싼 격론 가운데 오직 성경 무오설에 대해서만 한국 장로교 안에서 논쟁이 일어난 것은 간하배 교수가 지적한대로 한국 신학계나 교계가 보수와 진보를 떠나 성숙한 학문적 논쟁 보다는 정당한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투쟁한 결과인지 모른다. 또한
단 몇 개의 중요한 교리에 치중한 나머지 모든 기독교 교리를 그 몇 개의 요소에다 축소시켜 버릴 수 있는 위험을 한국 교회는 주의해야 한다.52)

박형룡이 자유주의의 침투를 두려워 한 것이나 김재준이 정통주의의 고집을 두려워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것은 불완전한 인간으로
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박형룡 박사에게만 교단 분열의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동안 초대 한국교회가 믿고 있었던 ‘성경의 무오’와 ‘축자 영감’에 대한 김재준의 비판은 감정적인 요소를 넘어서 적대적인 태도가 적지 않았음을 주목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박형룡의 ‘성경 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태도라고 단언할 수 있다. 한편 앞의 논의를 통해 한국 장로교 분열의 원인과 책임은 만일 우리가 물을 수 있다면 오히려 정통 신앙을 고수하는 한국 교회를 ‘성경 유오설’로 흔들어댄 김재준에게 더 물어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아니 역사를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겸손한 자세에서 장로교의 분열의 원인과 책임이 어디 있는지를 굳이 물으려고 한다면 최소한 박형룡과 김재준 양자에게 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장로회와 한신대학교 측 인사들은 조금 더 공정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가면서

박형룡이 성경 ‘축자영감설’을 끝까지 지킨 것이 한국 교회를 분열시킨 요인으로 지적되어서는 안 된다. 박형룡이 정통주의의 신학자로서 지나치게 심하게 김재준을 대했는지는 교회 역사가들이 판단할 몫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보면 박형룡은 최소한 학문적 논의에 있어서는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김재준을 날카롭게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기독교 장로회에서는 박형룡 만을 근본주의자요 한국 교회 분열의 주범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온당하지도 않고 정직하지도 못한 것이다.

특별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하는 자유주의자들과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나날이 많아지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성경 전체가 문자의 수준에서 완전 영감 되었다는 성경 교리는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장로교 교인들을 포함해서 복음주의적 교인들이 지켜야 할 마지노선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완전 영감’은 복음주의 기독교인과 진보적 자유주의 기독교인으로 나누는 신학적 쉽볼렛(theological shibbolet)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서 신학적 쉽볼렛은 다른 이를 정죄하고 죽이기 위한 수단
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학적 신앙고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고백하는 수단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신학적 쉽볼렛이 교권을 위한 교회의 정치 수단으로 쉽게 변질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고백하는 것은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한국 교회의 박형룡의 탁월한 공헌을 볼 수 있다.

한철하 박사는 박형룡의 ‘축자적영감설’에 대해 잘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 ‘축자영감설’이 의도하는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성경의 한 말씀 한 말씀을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중히 여기고 거기서 진리를 찾자는 것이다. 도대체 문장(文章)이란 것이 단어(單語) 하나하나로 구성되는 것이 아닌가? 단어 하나의 뜻이 모호(模糊) 할 때 전 문장의 뜻이 모호하게 되지 않는가? 그러면 단어 하나하나를 중시하지 않고 어떻게 전 문장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겠는가?

또 성경의 문장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종교의 신앙 내용 전체가 이에 관련되는 것으로서 참으로 광대하고 오묘하고 다양하고 또 거의 무수한 사실로서 구성된다. 물론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 발원되며 또 성령의 역사하심이 그 모든 것에 편만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통일하시는 중심으로 서 계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 되시는 분들도 어떤 신학자가 좁은 두뇌로서 통일시키는 따위로 다 헤아려지는 것이 아니고 다만 성경에 증거 된 대로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대로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53)

탈무드에 “문자(文字) 한 자의 빠지고 더함이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 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이나 성경 본문(本文) 밖에 구원이 없다는 말은 마찬가지이다. 성경 본문의 문자를 떠나서는 우리가 성경 본문이 전달하려는 내용이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상을 전달하는 용기(用器, 성경의 문자를 의미)가 영감 (靈感)되지 않고서야 어찌 그 용기(用器)가 담고 있는 내용을 영감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점에서 박형룡은 한국 교회 안에 자유주의의 물결이 들어오는 일제(日帝) 시대 후반기와 해방 직후에 성경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성경 ‘축자영감설’과 ‘무오설’을 강하게 주장한 것이고 여기에 그의 독특한 한국 장로교회에 대한 교회사적 공헌이 있는 것이다.(*) 글쓴 이 / 김지찬 교수(총신, 구약학) 원제 : ‘박형룡의 성경관과 한국 장로교, 김재준과 벌인 성경관 논쟁을 중심으로’

성경의 영감에 대하여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다.(딤후 3:16) 이 말은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실 때 인간 기록자들로 하여금 오류 없이 당신의 뜻을 계시하도록 성령을 통하여 간섭하신 것을 가리킨다. 이것을 성경의 영감이라고 한다.

1. 영감에 대한 성경의 언급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쓰여졌으므로 믿음과 행위의 표본이 될 수 있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 3:16), ‘성령의 가르치신 것’(고전 2:13),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신 것’(고후 13:3), ‘하나님의 말씀’(렘 36:27, 겔 21:8, 살전 2:13)이다. 또 성경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기록되었다.(출 17:14, 민 33:2, 사 30:8, 렘 30:2) 고로 인간의 임의대로 해석할 수 없다.(벧후 1:20,21)

2. 영감의 성질

(1) 기계적 영감설

정신 활동이 중단된 성경의 기록자가 성령이 불러 주시는 그대로 기계적으로 받아썼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성경 가운데는 기자들에 따라 독특한 문체, 개인적 경험 등이 나타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의도적인 자료 수집이 이루어 졌으므로(왕상 11:41, 4:29 대상 29:29, 눅 1:1-4) 이 주장은 타당치 않다.

(2) 동력적 영감설

하나님이 성경 기록자에 대하여 영감을 주셨으나 그것은 심적, 영적 활동에 대한 고무에 불과한 간접 행위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성경 오류 발생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특별 영감의 영역이 없어지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3) 유기적 영감설

성경의 기자는 각 개인의 성격, 교육 정도, 문체 등이 고려된 성령의 유기적 영감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성경 기록 당시 성령께서는 항상 기자를 감동시켜서 그들의 능력이 죄의 영향에 의해 잘못됨이 없도록 심지어는 용어 하나에 이르기까지 간섭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기록자의 개인적 특성과 시대적 특성을 포함하고 있으나 오류에 이르지는 아니하였다.

3. 영감의 범위

영감의 범위는 성경이 영감 될 때 1) 사상만 영감 되었는가, 언어까지 영감 되었는가? 2) 언어가 영감 될 때 부분적으로 영감 되었는가, 전체가 영감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된다.

(1) 사상 영감설

사상은 영감 되었으나 언어는 인간 기자의 선택에 따랐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언어는 사상을 표현하는 수단이며 사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언어의 영감을 제외한 사상의 영감만을 독립해서 수용할 수 없다.

(2) 부분 영감설

성경 가운데 어떤 부분(교리적 문서, 도덕적 문서, 신약 성경)은 영감 된 반면 다른 부분(역사적, 과학적, 연대적 부분, 구약 성경)은 영감 되지 않았다는 설이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들은 상호간에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므로 부분만이 영감 되었다는 주장은 성경 영감 설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3) 완전 영감설

성경 전체가 영감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는 성경 모두가 영감 된 것이라는 바울의 진술(딤후 3:16)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는 용어, 문체, 표현에 대해서도 영감이 되게 하셨으므로(축자영감설) 성경의 어느 한 부분, 어떤 단어 하나에 이르기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마 22:43-45, 요 10:35, 갈 3:16)

< 참고 문헌 >

김양선, 한국 기독교 해방 십년사, (대한 예수교 장로회 종교 교육부,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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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축자영감설과 무오설에 대하여,” 장공 김재준 전집 제 1 권 (한신대학교 출판부,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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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룡, 교의신학 서론, 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 1 권 (한국 기독교 교육 연구원,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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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하배, “해방 후의 한국 장로교 보수 신학,” 신학지남 1975 년 가을.
한철하, “김재준의 성경관과 신정통주의신학,” 신학 사상 50 (한국 신학 연구소, 1985)
Gordon J. Wenham, Genesis 1-15, WBC (Word Books, 1987)

< 미 주 > 30

김양선, 한국 기독교 해방 십년사, (대한 예수교 장로회 종교 교육부, 1956), 189-191: “한국
교계에 있어 박형룡 박사의 보수주의 신학 사상의 전형적인 인물인 것처럼 김재준 교수의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자인 것은 세인의 주지하는 바이다. 제24회 총회에 문제되었던 창세기 저작 문제와 여자 문제에 대한 총회의 답안은 실은 박형룡 박사에 의하여 작성된 것이었다. 이것으로 보면 초대 선교사들의 보수 신앙에 기초하여 성립된 한국 교회는 제 1 희년에 이르러서는 한인 보수주의 신학자에 의하여 지도되고 있음이 역연(歷然) 하게 되었다. 그러나 또한
희년을 계기로 한국 교회에 다른 한 한인 신학자 김재준 교수에 의하여 자유주의 신학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 사실은 한국 교회만이 세계 신학 사조의 피안에 설수 없다는 확증인 동시에 한국 교회에도 세계의 다른 모든 교회들의 경험한 바와 같은 시험기가 닥쳐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기술한 바와 같이 선교사들 중에 2,3 의 자유주의 신학자가 있었고 그들과 동역하던 한인 선교사 중에 약간의 자유주의 신학 경향의 인물이 없지 아니하였으나, 그러나 그들은 결코 자유주의 신학의 대변자로 지적될만한 신학자는 아니었음으로 보수주의 신학 사상에 대립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창도하는 것과 같은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주재용, “한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의 박형룡의 위치,” 신학 사상 25 (1979), 266.
주재용, “한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의 박형룡의 위치,” 271.
주재용, “한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의 박형룡의 위치,” 274.
주재용, “한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의 박형룡의 위치,” 280.
참조, 사단법인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 사업회 홈페이지의 장공의 삶과 정신 항목 안의 “생애와 사상”을 참조하라. http://www. changgong.or.kr/main_b3.htm (검색일: 2006.10.15). (1/2 Bar).
김재준, “대전전후 신학 사조의 변천,” 장공 김재준 전집, 1 권, (한국 신학 대학 출판부, 1971), 81.
박형룡, 교의신학 서론, 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 1 권 (한국 기독교 교육 연구원, 1983), 321.
김재준, “성서 비판의 의의와 그 결과,” 십자군 (1950.2), 13; 김재준,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 십자군 (1950.3), 13.
김재준, “축자 영감설과 무오설에 대하여,” 장공 김재준 전집 제 1 권 (한신대학교 출판부, 1971), 93.
김재준, “축자 영감설과 무오설에 대하여,” 94.
김재준, “그리스도교 신앙 내용의 규정 문제,” 장공 김재준 전집 제 1 권 (한신대학교 출판부, 1971), 144 (1952 년 7 월 십자군에 실었던 논문) : “바리새교인들의 실패는 그들이 성경을 소중히 여긴다는데서 성경 제일주의로 되어 마침내 성경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몰라보고 그를 살해한데 있는 것이었다. 오늘에도 이러한 사이비적 경건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의 심정이 짓밟히고 불의와 불법이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일이 우리 눈 앞에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김재준, “한국 교회의 신학 운동,” 장공 김재준 전집 제 1 권 (한신대학교 출판부, 1971), 180 (1960 년 1 월 기독쇼 사상에 실었던 논문): “이것으로 우리는 정통주의자의 성경에 대한 축자적인 광신을 피함과 동시에 자유주의자의 희박하고 방자한 막연성을 막는다.”
김재준, “축자 영감설과 무오설에 대하여,” 103.
김재준, “대전 전후 신학 사조의 변천,” 87.
김재준, “대전 전후 신학 사조의 변천,” 84.
김양선, 한국 기독교 해방 십년사, 216-217.
김재준 교수의 성서관에 대한 성명서는 김양선, 한국 기독교 한국 기독교 해방 십년사, 227 에 실려있다: “(1)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앙과 본문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는 데 변함이 없음. (2) 신구약 성경에 계시된 영생의 말씀은 곧 구속의 결론인데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며, 이 계시로서의 신구약 성경은 절대 무오함을 믿음. (3) 본인의 강의를 들은 일부 학생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물의를 초래한데 대하여 교수로서 삼가 진사의 뜻을 표함. 상을 성명함. 김재준.”

김양선, 한국 기독교 해방 십년사, 239; “그리고 성경 무오를 주장하는데 있어서 그 입장을 표명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구속주의 출현과 구속함 받고 영생 얻는 길을 계시하는 것이 그 목적임으로 그 목적 달성에 틀림없으면 성경은 틀
림 없는 것이요, 자연 과학이나 역사 과학의 순 지식적 부분에까지 성경이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김재준, “축자 영감설과 무오설에 대하여,” 99.
김양선, 한국 기독교 한국 기독교 해방 십년사, 214-215. 31
김재준,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 96.
김재준,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 101.
김재준,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 101. 김재준은 이점에 자기 모순을 보이고 있다. 김재준은 “대전 전후 신학 사조의 변천” 이란 강의 후에 나눈 질의 응답에서 성경 원본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냉소적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문: 그러나 성경 원본 만은 문자 그대로 절대 무오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답: 그것은 사람이 제 욕심대로 지어낸 학설일 것입니다. 사실상 원본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성경은 곧 가장 권위 있다고 비판하여 판정한 사본 뿐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이 곧 우리의 성경이오 이 성경에 기록적 오류가 있다면 그저 그런 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인정하고서도 얼마든지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세울 수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참조 김재준, “대전 전후 신학 사조의 변천,” 91-92.
박형룡, 기독교 현대 신학 난제 선평, (은성 문화사, 1975), 18.
박형룡, 교의신학 서론, 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 1 권 (한국 기독교 교육 연구원, 1983), 321.
박형룡, 교의신학 서론, 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 1 권 (한국 기독교 교육 연구원, 1983), 321.
박형룡, 교의신학 서론, 320.
김재준, “그리스도교 신앙 내용의 규정 문제,” 147.
박형룡, 교의신학 서론, 324.
31) 박형룡, 교의신학 서론, 328.
32) 박형룡, 교의신학 서론, 328.
박형룡, 기독교 현대 신학 난제 선평, 32.
박형룡, 기독교 현대 신학 난제 선평, 33-34.
Gordon J. Wenham, Genesis 1-15, WBC (Word Books, 1987), 39.
김재준, “축자 영감설과 무오설에 대하여,” 99.
김재준, “축자 영감설과 무오설에 대하여,” 99.
김재준, “축자 영감설과 무오설에 대하여,” 99.
박형룡, 교의신학 서론, 347.
박형룡, 교의신학 서론, 349.
김중은, “고등 비평을 한국에 처음 소개한 것은 누구인가,” 363.
박형룡, 교의신학 서론, 350.
김재준, “대전 전후 신학 사조의 변천,” 82.
박형룡, 교의신학 서론, 364-365.
박형룡, 교의신학 서론, 366.
성서 유오설을 끝까지 주장하여 자유주의 신신학의 대변자로 알려진 김재준이나, 성경무오설로 끝까지 전투적으로 맞서서 한국의 메이첸이란 이름을 얻은 박형룡이나, 명분은 성경관을 내세운 진리싸움이었으나, 사실은 자기의(自己義)를 위한 다툼이었다. 김중은 교수
김재준, “대전전후 신학 사조의 변천,” 장공 김재준 전집, 1 권, 81-82
김재준, “이단 재판의 성서적 근거,” 장공 김재준 전집 제 1 권 (한국 신학대학 출판부, 1971), 128.
김재준, “이단 재판의 성서적 근거,” 117.
김재준, “양심의 성서적 위치,” 장공 김재준 전집 제 1 권 (한국 신학대학 출판부, 1971), 129-130.
김재준, “그리스도교 신앙 내용의 규정 문제,” 장공 김재준 전집 제 1 권 (한국 신학 대학 출판부, 1971), 148.
참조, 간하배, “해방 후의 한국 장로교 보수 신학,” 신학지남 1975 년 가을, 49, 52, 53.
한철하, “김재준의 성경관과 신정통주의신학,” 신학 사상 50 (한국 신학 연구소, 1985), 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