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 십자가 부착금지
장로교회(합동) 강단 십자가 부착금지
그 이유와 신학적 의미
2015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제100회 총회 결의사항 가운데 과거 총회가 결의한 ‘강단에 십자가 부착을 금지’를 재확인한 것을 놓고 여러 말들이 많고 생각들이 많다.
처음 한국 장로교 강단에는 십자가가 없었을 텐데 이것을 도입하는 교회가 생기자 1957년 9월 부산중앙교회에서 열렸던 제42회 총회는 교회당 강단에 십자가를 부착해서는 안 된다고 결의했다. 후론(後論)하겠지만 그것은 그 시대의 교회가 그래도 개혁신학에 어느 정도 충실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결의였다.
그러나 신학적 고려에 근거한 이 같은 결의에도 불구하고 일부 대형 교회들이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설치하고 그것을 따라하는 군소 교회가 많아지자 총회 산하 일 부 노회가 강단에 십자가를 세울 수 있도록 허락 해 달라는 헌의가 있었다. 이는 교회가 신학적 고려 없이 현실에 근거하여 과거 총회의 올바른 결정을 고쳐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를 총회가 다시 논의하였으나 이전 총회에 이어 이번 총회에서도 1957년 제42회 총회의 결의를 재확인한 것이다. 이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가 최근 결정한 일 가운데 대단히 잘한 올바른 결정이었다. 그러면 왜 그런지 이제 그 이유를 논증(論證) 하고자 한다.
1. 논증의 전제 : 십자가를 믿는 믿음은 중요하다.
기독교는 구속(救贖)의 종교이다. 구속(救贖)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 믿음의 기초이다. 개신교 교인이라면 누구나 십자가에서 일어난 주님의 이 구속을 믿으며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고,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고,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 구원의 모든 것이 주님 십자가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기독교는 십자가를 중요시한다. 이것이 이하 나의 논증의 출발점이고 전제이다.
2. 믿음을 가시적 형상화하려 할 때의 문제점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는 그 십자가, 우리의 구속이 이루어진 그 십자가,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형상화(形象化)’할 때에 문제가 일어난다.
타락한 인간들은 항상 육(肉)의 눈에 보이는 이런 형상화를 지향(志向)한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지시해 주신 것 외에는 그 어떤 형상(形象)도 만들지 말라고 금하셨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5)
그럼에도 천주교는 미사(라틴어 Missa) 할 때 반드시 그리스도의 형상(形象, icon)이 부착된 십자가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도들 가운데 하나님을 형상화(形象化)하는 것에 찬성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형상화 반대에 예수님의 상(象)이 제거된 ‘십자가 형상’도 포함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생각한 교회는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어느 정도 진행되던 영국 교회였다. 철저한 종교개혁을 원하던 청교도들 중 일부는 예수의 형상(形象)이 없는 ‘빈 십자가’도 예배당 안에 설치하는 것을 금했다.(No! a bare cross or a simple cross or the unadorned cross.)
이것은 예배당 마다 십자가가 설치되어 있던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이것은 철저한 청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자신이 참석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해 달라고 했을 때 그 교회당에 십자가가 부착되어 있지 않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한 청교도가 아닌 주교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철저한 성경적 입장을 지닌 사람들은 항상 예배당 안에 가시적 형상으로서의 십자가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빈과 그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 또한 항상 이런 입장에 서 있었다.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생각에서 그리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거의 모든 예배당 안에 이미 설치되어 있는 십자가를 제거했다. 성경말씀에 따르기 위해서 말이다. 성경에 따른 바른 예배를 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리한 것이다.
‘스코티쉬 신앙고백서’(1560) 20장에는 미신을 조장할 수 있는 모든 의식들을 버리라고 했고 심지어 십자 성호를 긋는 것까지를 금했다. 이는 모든 형상화를 거부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1566)도 고대 교회의 이런 전통을 따라 의식을 더하는 것을 금했는데 이 역시 같은 입장을 표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는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에 근거해서 제시한 개혁신학을 따르는 교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칼빈과 개혁신학을 그렇게 잘 알았던 것도 아니고 철저하게 칼빈을 따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개혁신앙을 따른다는 1950년대 말의 한국 장로교회는 개혁자들의 그 같은 신앙의 전통을 따라 예배당에 십자가 형상(形象) 부착을 허용해 달라는 청원을 거부했던 것이라고 판단된다.
3. 그런데 왜 이 청원이 다시 나타났는가?
그런데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설치하게 해 달라는 청원이 오늘날 다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실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이미 십자가를 설치한 예배당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의 모든 예배당 안에 십자가가 있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과거의 결정이 이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결정을 철회하든지, 그것을 무시하고 현실을 인정해서 예배당 안에 십자가가 있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요구대로 과거 올바른 결정을 총회가 번복하면 예배당 마다 십자가 형상을 부착하게 된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실제적으로 오늘날 많은 교회의 예배당 안에 십자가가 부착된 이런 현상의 배후에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원인(原因)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역사의식(歷史意識)의 부족이다.
과거의 장로교회가 과연 어떤 과정을 겪어서 형성됐고, 심지어 피 흘리면서까지 장로교 교인들이 천주교적 예배당을 개신교회의 예배당으로 바꾸었는지에 대한 의식이 없거나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과거의 역사를 잘 의식한 분들은 결코 과거로 회귀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둘째, 교회들 간의 다양한 접촉 때문이다.
이를 개 교회 에큐메니즘의 실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게 되어 교인들이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때로는 루터파 교회에 참여도 해 보고 때로는 영국 성공회에 참여해 보고 또 때로는 미국의 감독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이들 교회의 예배당 안에 십자가가 부착되어 있는 것을 좋게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아무런 신학적 의식이 없는 이들이 교회당에 십자가를 부착하기 시작했고 또한 예배당을 새로 건축하면서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부착하게 된 것이다.
교회 예전(禮典)의 통일을 앞장서서 유도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운동에 열심인 교회들은 이 같은 현상이 더 일반화 되어있다. 그런 교회들은 교회 당 안에 십자가 형상뿐만이 아니라 강단에 촛대가 등장하기도 하고 다른 예전적인 장식물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있게 된 것이다. 점차 그런 교회들이 늘어 가고 또 교회들 간의 교류가 많아짐에 따라 한국의 거의 모든 교회들이 비슷한 양식을 지향한 결과가 오늘날과 같이 한국 장로교회 예배당 안에도 십자가가 있게 된 것이다.
셋째, 신학의 다양화 현상 때문이다.
심지어 개혁신학을 지향한다는 장로교회 안에서도 과거의 칼빈 등이 제시한 그 신학에 꼭 따라야만 하는가 하는 회의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칼빈의 견해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견해도 참조할 수 있지 않는가 하면서 다양한 권위들이(authorities) 한국 장로교회 안에 들어 와서 급기야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일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암묵리에 한국 교회 안에는 예배당 안에 십자가가 있는 것이 아주 일반적인 것이 되어 심지어 예배당 안에 십자가가 없는 교회는 이 교회는 이단 교회가 아니냐고 질문하는 일이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청원이 거의 매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WCC 운동에 열심인 교단들에서는 이런 청원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에게는 거의 기정사실 화(化) 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적 개혁신학을 따르는 교단에서만이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총회에서 이전 총회의 결정을 그대로 따르기로 한 것은 잘 한 것이다. 그러나 언제 상황이 바뀔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 교회사적 고찰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다.
4. 십자가 형상에 대한 성경적 고찰
예배당 안에 십자가가 있어도 좋다든지 있으면 더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십자가 형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니 별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니 좋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논의가 예배당 안에 다양한 상(像, images, icon)을 세우고 있던 천주교회의 논의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예배당 안에 다양한 상(象)에 대한 천주교의 변명(辨明)은 이렇다. “교회 내의 상(象, icon)들에게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이 있는 것도 그 앞에 절하는 것도 사실은 그 상(象)에게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象) 배후에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니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한다. 즉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latria)를 드리는 것이니 예배당 안에 상(象)이 있고 심지어 그 상(象)에 절을 하고(dulia), 성자들을 존숭(dulia)해도 그것은 하나님께만 돌려 드리는 영예를 조금도 다른 데로 돌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한국 개신교도들 가운데 십자가에 예수님의 상을 붙이자고 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러므로 이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교회당 안 십자가 부착을 찬성하는 그 배후 논리가 상당히 이와 비슷하다는 데 주의해야 한다. 천주교회는 상(象)을 통해 그 상 배후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이고 헌의 자들은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상(象)이 없는 십자가 형상’을 통해 그 배후의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게 되니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 우리의 선배들이 왜 이것이 문제라고 여겼는지, 왜 어떤 것을 보면서 그것 배후의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 자체도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이러한 주장에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첫째,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과 천주교가 주장하는 십자가 형 상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우리가 십자가 형상이 있어야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형상이 없이 영적으로 참으로 오직 영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예배당 안에는 하나님에게 우리가 영적으로 나아가는 데 지장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둘째, 예배당 안에 십자가 형상이 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수 없이 많은 악용과 오용의 문제들이 있다.
물론 이것은 부차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에 있어서는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천주교처럼 십자가 형상이 있으면 그것 앞에서 하는 기도가 더 효과적이고 생각하는 오용이 나타날 수도 있고, 중세 사람들이 그리하였듯이 그것을 붙잡고 기도하면 더 효과가 있다고 생각 할 수도 있으며, 그와 같은 수 없이 많은 오용들이 나타나기 쉬운 것이다. 천주교는 현재 바로 이런 상태에 있다.
이렇게 잘못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과거의 종교개혁자들은 처음부터 그런 문제가 발생할 소지를 차단하려 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 시대의 그들 자신이 형상(icon)의 오용과 영적 폐해(弊害)를 뼈저리게 경험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런 문제가 일어날 일이 없다고 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인간의 부패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을 보면서 이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나가면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를 무한히 사랑한다.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 영어 표현 자체가 그것을 의미하듯이 십자가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갈보리 언덕의 그 십자가에서 일어난 구속의 사건은 구속사의 절정이요 핵심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십자가 형상(形象)이 우리의 이 믿음을 나타내는 상징(象徵)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예수님이 진짜 못 박혔다고 주장되는 십자가일지라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왜냐면 교회 역사를 보면 천주교는 주님이 달리셨던 나무 십자가의 조각이라는 것들을 우상처럼 받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이런 우상화 된 십자가 형상(形象)을 없애기 위해 피를 흘려 순교한 것을 생각하자.
십자가(十字架) 형상(形象)이 없는 예배당, 그 안에서 성경이 직접 언급하는 예배의 요소들만을 가지고 하나님께 십자가의 구속(救贖)의 공로에 의지하여 성령님 안에서 바르게 예배하기 위해 저들의 생명과 재산과 그야말로 모든 것을 바쳤던 개혁파 선조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우리들은 또 다시 천주교처럼 예배당 안에 십자가(十字架) 상(象)을 설치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강조한다. 우리에게 십자가는 중요하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이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 형상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부디 십자가의 형상이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구속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올바른 십자가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소원한다.(*) 글쓴 이 / 이승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