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요점(12)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요점(12)
< 1부 > 개혁신앙의 원리들
1. 오직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원리
2. 하나님 중심의 원리
3. 오직 믿음으로의 원리
4. 신자의 삶 강조의 원리
< 2부 > 개혁신앙의 핵심교리들
A. 성경론(계시론)
B. 신론(神論)
C. 인간론(人間論)
D. 기독론(基督論)
성경은 신자의 구원은 언약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다고 가르친다.(롬 5:12-21)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행위언약의 대표로서 모든 인류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이게 했던 것과 같이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은혜언약의 대표로서 그 분의 순종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1. 구약 성도들의 구원의 문제
그런데 여기에서 제기되는 첫 번째 물음은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살았던 구약 성도들의 구원은 어떻게 이뤄지는가’에 관한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므로 하나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그의 백성들의 구원을 베푸셨다고 생각하기 쉽다. 대표적인 오해 3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구약의 성도들 구원에 대한 3가지의 오해
첫째, 구약의 성도들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구원 받았다.
유대인들의 민족적 혈통이 그들의 구원의 근거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이란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들과의 집합적인 약속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성경은 육신의 자녀가 참 이스라엘이 아니고 약속의 자녀가 참 이스라엘임을 말한다.(롬 9:6 이하)
둘째, 구약의 성도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받았다.
이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을 오해한 잘못된 구원관이다. 율법은 그것을 온전히 지켜냄으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아 그러한 율법의 행위를 근거로 구원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이것은 인간이 무엇인가 행함으로 그 대가를 얻으려는 인간의 근본적인 성향 때문에 발생한 주장이기도 하다.
또한 이 입장은 인간은 하나님의 모든 율법들을 온전히 지켜낼 수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 외에도 ‘율법을 받은 모세 이전의 사람들의 구원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해결되어야할 과제이다. 그리고 좀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셋째, 구약의 성도들은 구약의 제사나 의식을 준행함으로서 구원 받았다.
이 입장은 좀 더 실제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구약의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들은 부분적으로 혹은 예표 적으로 죄 사함의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이다. 성경은 오직 예수님의 속죄 사역만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는 ‘한 영원한’ 제사가 된다고 가르친다.(아래 예수님의 제사장직에 관한 내용 참고하라.)
(2) 구약 성도의 구원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관점
성경은 구약 성도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2가지의 관점을 제시해준다.
1)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근거한 구원
신약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의 성도들도 그 근본적인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있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선택 교리를 취급하는 본문은 로마서 9장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이 실패한 것처럼 보였으므로 고민했으나 결국 하나님은 처음부터 육적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들 즉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들과 언약을 맺었었다고 가르친다. 즉 구원이란 언제나 인간의 조건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에서부터 시작하여 구약의 족장들의 모습들은 모두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준다. 아브라함도 우상을 섬기던 집안에 살았으나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삼으셨다. 이삭도 나이가 어렸지만 육신을 따라 출생한 이스마엘을 제치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 이삭의 아들들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도 그들이 어떤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의해 야곱이 택함을 입고 은총을 받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롬 9:10-13)
2)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 인간의 구원의 기초이지만 그 선택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방법은 인류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주어진다. 은혜언약의 대표이신 예수님이 성취하신 십자가의 구속사역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고 신약의 성도들은 오신 메시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다를 뿐 결국 모든 인류는 은혜언약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 언약은 창세기 3:15에서 처음으로 인류에게 제시된 이후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등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구약의 성도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 속에서 그 언약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제시되었다.
로마서 5:12-21은 이러한 언약적 행정원리를 설명해준다. 에덴동산에서 행위언약의 대표였던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에게 죄와 죽음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면 그와 같은 원리에 의해서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의 순종의 사역을 통하여 그의 은혜 언약 행정 안에 들어온 모든 백성들에게 의와 생명의 은총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서 자신의 죄가 그의 대표자 되신 예수님에게로 옮겨져서 그 분의 십자가의 형벌 속에서 속죄함을 받게 되고(죄의 전가) 또한 그 분이 획득하신 순종의 의는 그 분과 연합한 신자에게로 전가되어(의의 전가) 예수님 안에 있는 풍성한 영적 복들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위격(位格) – 참 하나님 , 참 인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仲保者)로서 구속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은 참 하나님으로서 참 인간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의 온전한 신성을 부인하거나 온전한 이성을 부인할 때 그 분은 인류를 위한 진정한 구세주가 될 수 없는 것이다.
(1) 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온전한 신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 탄생의 배경이 유대교였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유일한 하나님으로 믿어왔던 유대교의 전통 속에서 나사렛 청년 예수에 대해서 그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소유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신성을 왜곡시킨 역사상의 오류들을 만날 수 있는 데 대표적으로 에비온파 이단과 아리우스파 이단을 들 수 있다.
1) 에비온파(Ebionites)
에비온이란 단어는 ‘가난한’이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가난한 이들로 구성되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을 가리켰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단적인 성격의 유대교파를 가리켰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유대교의 전통을 고집하고 할례를 주장하는 무리들로서 유대교적 일신교의 입장을 강조하면서 예수님의 온전한 신성을 거부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정상적인 부부관계로 태어난 것으로 보고 동정녀 탄생은 부인했다.
2) 아리우스(Arius)
에비온파 보다 더 체계적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했다. 헬라 로고스 사상을 받아들여 하나님만이 홀로 절대자이신 신(神)의 속성을 가지고 계시므로 그의 본질이나 속성은 어느 누구와도 공유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예수님이 가장 존귀한 존재이지만 피조물 중 하나이시고 시작이 있으며 무죄하신 분은 아니라고 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아리우스는 성경을 여러 부분들에서 인용했다. 성자(聖子)가 피조물임을 말하는 듯한 구절들(골 1:15; 잠 8:22), 성부만이 참 하나님인 것으로 오해될만한 구절(요 17:3), 예수님의 연약하고 고통하시는 인간적인 모습들을 묘사하는 구절(막 13:32) 등을 인용했다.
그러나 정통 신학자 아다나시우스는 그의 주장들의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아리우스가 제시한 구절들은 올바른 성경 해석에 기초하지 못하며 특히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묘사하는 구절들만을 주로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만일 아리우스의 말이 맞는다면 초대 교회로부터 그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참 하나님이 아닌 자를 경배해 왔으므로 그들은 모두 우상숭배자들이 될 것이라고 반문했다.
무엇보다도 아다나시우스는 예수님의 참 신성(神性)의 교리를 구원론의 관점에서 지적했다. 예수님이 온전한 신성(神性)을 갖지 못하셨다면 그는 진정한 구세주가 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참 하나님만이 인류의 죄를 온전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의 교리는 기독교의 구원론이 서고 넘어지는 근본적인 핵심교리가 된다고 보았다.
3)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성경에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관한 수많은 증거 구절들이 있다. 미국의 개혁 신학자 워필드(B. B. Warfield)는 바닷물에서 소금을 찾을 수 있는 것 만큼이나 성경 속에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증거들이 산재하다고 했다. 신약에서는 특히 복음서에서 풍부하게 증거 되고 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이렇게 증거 하고 있다.
– 예수님의 선재성(先在性, 요 1:1-4, 3:31, 6:62, 8:32)
–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하나이시라는 점(5:20, 10:1)
– 도마의 고백(20:28)
– 요한복음의 기록동기(20:31)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이렇게 증거 하고 있다.
– 천사들과 제자들 및 마귀들의 증거(막 3:11, 마 14:33, 마 16:16)
–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자아의식(눅 2:41)
– 다른 이들의 경배를 받으신 모습(마 14:33)
– 구약에서 성부에게로 돌려졌던 호칭들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에게도 적 용하여 사용 되고 있는 점
(2) 참 인간(人間)이 되신 예수님
초대 교회가 처음에는 예수님의 온전하신 신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면 그 다음 찾아온 문제는 예수님의 온전한 인성(人性)이 논쟁의 주제였다. ‘온전하신 신성을 지니신 초월자로서 예수님이 어떻게 유한한 인간의 몸을 입을 수 있는가?’하는 물음이 제기된 것이다. 여기에서도 기독교 역사 속에서의 두 가지의 오해된 견해들을 살펴보고 성경의 가르침을 제시하려 한다.
1) 가현설(假現說, Docetism)
이 견해는 예수님께서 참된 인성(人性)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취한 것처럼 보였다는 주장이다. 영과 육(靈肉)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하는 영지주의(Gnosticism)의 영향을 받은 관점이다. 즉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은 거룩하고 고급한 것이고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저급하고 악한 것으로 보는 이원론(二元論)으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바라본 결과이다. 따라서 거룩하신 제 2위격의 하나님이신 성자(聖子)께서 저급하고 악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된 것이다.
2) 아폴리나리우스 주의(Apollinariaism)
가현설이 예수님의 참된 인성을 전면적으로 부인했다면 아폴리나리우스주의는 예수님의 인성을 부분적으로만 인정하는 오류를 범했다. 제 2위격의 성자께서 인성을 취하실 때 인간의 영혼 부분은 취하지 않고 몸(육체)의 부분만 취했다고 본 것이다. 마치 예수님은 실제로는 신적인 존재이나 외형적으로 인간의 몸만을 쓰고 계신 것처럼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럴 경우 수님은 신적 의지로만 행동하신 것이 되고 인성의 의지나 역할은 신성에 의해 삼켜진 형태가 되고 만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참된 인성을 소유하지 못한 것이 된다. 만일 예수님이 온전한 인성(人性)을 취하지 못하셨다면 온전한 대속의 제물이 되시지 못한다. 또 예수님은 인류의 대표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것이므로 죄인 된 인간을 대신 하는 속죄 사역을 수행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즉 예수님의 온전한 인성(人性)의 문제는 구원론의 주제에서 핵심적인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3) 예수님의 인성(人性)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성경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여러 가지로 증거 해 준다. 요한 일서 4:2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지적한다. 특히 워필드 교수는(B.B. Warfield) 예수님의 참 인성(人性)을 설명하면서 인간의 감정을 온전히 지니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요약해준다.
–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막 1:42; 8:2; 요 11:35)
– 기쁨과 즐거움(눅 10:21; 요 17:13)
– 인간의 고통과 시험을 당하심(히 4:15)
이런 구절들은 예수님이 우리들과 같은 전인격적인 인성(人性)을 소유하셨음을 증거 해 준다. 물론 여기서 주의해야할 한 가지는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인성(人性)으로 시험과 고통을 겪으셨지만 죄는 없으셨다는 사실이다.(히 4:15) 예수님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진 화목제물이셨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의 신분과 사역
(1) 예수님의 신분
예수님의 신분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성부 하나님과 함께 누렸던 영광의 자리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으로 낮아지셨던 비하(卑下)의 신분과 지상 생애를 통해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시고 인류의 죄의 형벌을 다 치르신 후 다시 영광과 존귀의 자리로 높아지신 승귀(昇貴)의 신분으로 구분한다.
예수님의 비하(卑下)의 신분 안에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에서부터 이 땅에서 겪으셨던 수난의 기간들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장사되심까지 생각해볼 수 있다. 지옥강하의 주제는 로마 가톨릭과 같이 문자적으로 받는 것으로 이는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단지 십자가에서의 주님의 고통이 지옥의 고통과 같은 심각한 것이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한다. 오히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와 같은 십자가상에서의 말씀들을 고려해볼 때 예수님이 죽음 후에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승귀(昇貴)의 신분에는 부활의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여 승천하심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과 마지막 날에 재림하시는 것까지 포함된다.
(2) 예수님의 3중 사역
일반적으로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3중직으로 이해한다.
– 선지자 : 하나님의 뜻과 영적 진리들을 알려주셨고,
– 제사장 : 심판과 저주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구속을 이루셨으며,
– 왕 : 성도의 삶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은 많은 인간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그들도 하나님의 뜻을 주의 백성들에게 전해 주었지만 그들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전한 선지자를 고대했다.(신 18:15-19) 그리고 그들의 그 같은 기대는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행 3:20-23) 예수님의 선지자 직은 3가지의 특징을 지닌다.
– 예수님은 권위 있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셨다.(마 7:28,29)
–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과는 달리 자기 자신에 대해 증거 하셨다.
– 예수님의 선지자 직은 전 포괄적인 성격을 지닌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자기 생애 동안만 사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시대 에도 (벧전 1:10-12), 지상 생애 동안도 승천하신 이후에도 약속하신 성령님 의 조명의 역사를 통해서 가르치시는 사역을 계속하신다.(요 14:26)
2)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백성들의 모든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기도하는 대언사역과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헌제사역으로 나뉜다.
– 헌제사역(獻祭使役)
예수님은 자신이 대제사장이시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드시셨다.(獻祭使役) 예수님은 구약의 대제사장과는 달리 자신을 위한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었었는데 그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죄 없으신 제사장이었기 때문이다.(히 7:26,27)
제사장뿐 아니라 제물 자체도 완전하지 않았던 구약의 제물들과 달리 예수님은 무죄한 어린 양으로서 온전한 제물이셨다. 결국 구약의 제사는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제사로서 인류의 죄를 온전히 사할 수 없는 제사였으나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린 예수님의 제사는 ‘한 영원한 제사’(히 10:12)가 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의 제사와 제사장직은 신약의 예수님의 온전한 제사와 제사장직을 예표였다고 볼 수 있다.
– 대언사역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서 변호하시고 대언해 주시는 보혜사로서의 사역을 수행하신다.(요 14:16; 요일 2:1) 오늘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 위해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대언사역의 은총으로 우리는 수많은 신앙의 늪지대를 통과할 수 있는 능력을 얻어 살아가게 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
예수님의 왕직은 영적 왕권과 우주적 왕권으로 나뉜다.
– 영적 왕권
예수님은 교회와 그의 백성들의 영적 삶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계신다. 예수님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성도의 마음과 생활을 다스리신다.(엡 1:20; 5:23) 이러한 예수님의 왕권은 현재적이면서도 미래적인 성격을 지닌다. 주님의 재림 때에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지만 주님의 통치는 이 땅에서 신자의 삶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눅 17:21 골 1:13)
– 우주에 대한 왕권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내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고 말씀하셨다.(마 28:18)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성육신하시기 전 누리셨던 본래의 왕권을 회복하신 것이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범위
예수님의 헌제사역(獻祭使役)의 핵심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속죄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일생 동안에 순종의 사역을 통해 대속의 역사를 이루시고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며 그들을 구속하시는 역사를 이루셨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복음주의는 ‘만인 속죄’를 주장하나 개혁신학의 가르침은 칼빈주의 5대 교리(TULIP)의 가르침을 따라 ‘제한 속죄’ 교리를 말한다.
성경을 보면 ‘모든, 다’(all, every)와 같은 단어들이 있기 때문에 만인 속죄론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는 문맥을 자세히 살펴볼 때 절대적인 의미에서 의 ‘모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의 구속의 효과는 제한적으로 택한 백성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설명한다.(마 1:21; 요 10:11; 행 20:28)
둘째, 로마서 8:30-34에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통한 속죄 사역의 대상 들은 곧 구속의 열매를 받는 대상들과 동일한 자임을 함축하고 있다. 즉 오늘 구원의 은총을 받아 누리는 자들은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서 위하여 죽으셨던 대상들이라는 의미이다.
셋째, 로마서 6:3-11에서도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한 이들은 곧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의 수혜자가 됨을 말해준다. 즉 주님의 대속적 죽음의 효과의 수혜자들이 곧 오늘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 성들이라는 말이 된다.
넷째, 또한 신학적으로 볼 때 최종적으로 만인의 구원을 말하지 않는 한 만인 속죄 교리는 성립 될 수 없다. 현실적으로나 성경의 가르침에서 볼 때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만인 구원론은 수용할 수 없는 관점이며 동시에 만인 속죄도 성립 될 수 없다.
만인 속죄론을 주장하면서 만인 구원론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말은 예수님의 의도가 좌절되고 만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즉 만인 속죄 교리가 일관성을 유지하려면 만인 구원설까지 받아들여야 하는데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만인 구원론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글쓴 이 / 김광열 교수(총신대 신대원 조직신학)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