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순교사화(15) 가톨릭의 핍박이 시작되다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쇠꼬챙이에 꿰어 죽임당한 개신교인들
3. 스페인과 포르투갈 종교재판소의 만행
(1) 프란시스 로마네스의 순교
(2) 로커스의 순교
(3) 어린 소녀를 기만한 종교재판관
(4) 허다한 순교자들
(5) 성경 소지(所持) 죄로 800여 명이 순교
페르디난도(Perdinando)라는 한 개신교도 초등학교 교장이 학생들에게 개신교의 원리를 가르친다고 재판관의 명령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심한 고문을 당한 뒤에 불길에 싸여 숨졌다.
줄린아노(Juliano)라는 스페인의 로마 가톨릭교도가 독일로 여행을 갔다가 개신교로 개종했다. 그는 자기 나라로 많은 성경을 나르는 일을 맡아 성경을 나무 통속에 감추어 포도주처럼 포장했다. 그는 성경을 배부하기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개신교도 인체하는 사람이 그에게서 성경을 산 뒤 그를 배신하고 종교 재판소에 그 사건을 고발했다. 그들은 줄리아노를 체포했고 온갖 수단을 써서 성경을 산사람 800명을 붙잡았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무참한 고문을 받았고 그들 대부분은 여러 가지 형벌을 받았다. 줄리아노는 화형 당했고, 20명은 쇠꼬챙이에 꿰어 구워졌고, 몇 명은 종신 징역 언도를 받았고, 몇몇은 많은 사람 앞에서 채찍질을 당했고, 많은 사람들을 배로 보내 노를 젓게 했으며, 석방 된 사람은 두어 명에 불과했다.
수녀원에 있던 한 젊은 여인이 절대로 베일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고는 수녀원을 떠나면서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였는데 그것 때문에 그녀는 체포되어 불속으로 던져졌다. 또 의사며 철학자였던 크리스토퍼 로자다(Christopher Losada)는 로마 가톨릭교의 잘못을 지적하고 개신교의 교리를 신봉한 것 때문에 종교 재판관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는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아무리 심한 고문으로도 그가 로마 가톨릭교회만이 참된 교회라고 고백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화형 선고를 받았고 그것을 그는 아주 모범적으로 참아내면서 자기의 영혼을 창조주께 의탁했다.
마리아 드 코시카오(Maria de Coceicao)라는 젊은 여인이 오빠와 함께 리스본에서 살고 있었는데 종교 재판관에게 체포되어 고문대에 올려졌다. 그녀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자기에게 요구하는 대로 고백하고 말았다. 쇠사슬이 풀어지고 그녀는 다시 감방으로 보내져서 어느 정도 팔다리가 회복될 때까지 거기 있었다. 그녀는 다시 재판정에 불려 나가 그녀가 고백한 것을 재인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녀는 그것을 완강히 거부하면서 그녀가 전에 고백한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억지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답에 화가 난 재판관은 그녀를 다시 고문대에 눕히라고 명령했고 그녀는 다시 한 번 연약한 본성에 못 견뎌 그 전에 한 고백을 또다시 하고 말았다. 그녀는 즉시 감방으로 보내졌다.
세 번째 재판관 앞에 불려나온 그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한 고백에 서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번에도 전과같이 대답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나는 내 육체의 연약함에 두 번이나 지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고문대에 있는 동안 또다시 약해져서 그렇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내게 100번 고통을 준다 해도 고문대에서 풀려나오자마자 나는 고통으로 인해 억지로 고백한 사실들을 다시 부인할 것입니다.” 그러자 재판관은 그녀를 세 번째 고문하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고문에서 그녀는 아주 꿋꿋하게 고통을 견디고 그녀가 질문에 대답하도록 절대로 설득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용기와 절개가 이토록 강하자 재판관은 그녀를 죽이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거리로 끌고 가면서 매질을 한 뒤 10년 동안 추방시키도록 했다.
세빌의 한 귀족출신의 제인 보호르키아(Jane Bohoroquia)라는 여인은 개신교 신앙을 공언했다고 해서 고문을 당하고 불에 타 죽은 언니의 진술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녀의 언니는 고문대 위에서 강제적인 자백에 따라 자기 동생과 개신교 신앙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했다고 말함으로 그녀도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그녀는 너무나 심한 고통을 당한나머지 며칠 뒤에 숨지고 말았다.
학식 많은 의사 아이삭 오로비오(Isaac Orobio)는 한 무어인 하인이 도둑질을 해서 매질을 했더니 그 종이 그가 유대교를 신봉한다고 고소하여 종교 재판관은 그 주인을 체포했다. 그는 자기가 어떤 일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조금도 모른 채 3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 그러고 나니 그는 다음과 같은 여러 형태의 고통을 당했다. 거친 융코트를 입혀 놓고 끈을 너무나 바싹 조여서거의 혈액 순환이 정지되고 숨이 막힐 지경이 되었다. 그런 뒤에 끈을 갑자기 늦추면 공기가 너무 급히 뱃속으로 들어가고 피가 돌아 그 고통은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집행관은 그의 팔목을 밧줄로 단단히 묶어서 마구 잡아 당겼다. 그의 발을 벽 쪽으로 세운 채 눕혀 놓고 세차게 잡아 당겨 끈이 뼈까지 뚫고 들어 갈 지경이었다. 그는 마지막 세 번의고문을 당하고 나서 상처가 아물 때까지 70일을 누워 있었다.
톨데도의 한주민은 아주 멋있는 글씨 견본을 만들기 좋아해서 그것으로 그의 집을 여기 저기 장식해 놓았다. 그 능필 가운데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과 십계명이 적힌 액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눈에 잘 띄는 곳에 걸려 있었는데 종교 재판소에 속해 있던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다가 계명의 숫자가 로마 가톨릭교에 따른 것이 아니라 개신교에 따른 것임을 발견했다. 이 사실은 즉시 종교 재판소에 알려졌고 그 신자는 단지 자기 기술의 견본으로 집을 장식한 것 때문에 체포되어 화형 당했다.
4. 종교재판소의 패악이 들어나다.
스페인의 왕권을 놓고 각각 통치권을 주장하는 두 왕자가 경쟁하고 있을 때 프랑스가 한 왕자를 지지했고 영국은 다른 왕자를 지지했다. 영국에서 퇴위한 제임스 2세의 사생아 베릭 공작은 스페인과 프랑스 사람으로 된 연합군을 지휘하여 알만자 전투(The Battle of Almanza, 25th April 1707)에서 영국을 대패시켰다. 그 후 군대를 둘로 나누어 한 편은 베릭 공작이 지휘하는 스페인과 프랑스사단으로 구성된 군대로 카타로니아로 진격해 나갔다. 프랑스 사람으로만 구성 된 다른 한 군대는 오르레앙 공작의 지휘 하에 아라온을 항복시키려고 진격했다.
군대가 아라곤 성으로 가까이 가자 총독들이 나와서 열쇠를 오를레앙 공작에게 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거만한 태도로 그들에게 반역자라고 말하면서 성을 뚫고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열쇠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성벽을 대포로 뚫고 그리로 전 군대를 이끌고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법령을 만든 다음 다른 곳을 정복하러 떠났고 그의 사령관 엠 드 리갈의 지휘 아래 강력한 요새를 남겨 놓았다. 이 신사는 비록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미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큰 재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아주 용감하고 훌륭한 신사인 동시에 노련한 장교이기도 했다.
공작은 떠나기 전에 이 도시에 많은 기부금을 부담시켜야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군대가 수녀원과 수도원의 원장들에게 갔을 때 그들은 선뜻 돈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부과된 기부금은 다음과 같았다. 가톨릭 예수회 대학 2,000피스톨(스페인의 옛 금화), 카르멜 수도회 1,000피스톨,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1,000피스톨, 도미니쿠스 수도회 1,000피스톨 등이다. 엠 드 리갈은 가톨릭 예수회 대학에 즉시 돈을 지불하라는 명령서를 보냈다. 가톨릭 예수회 대학 학장은 성직자가 군대에 돈을 지불한다는 근거를 알지 못한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엠 드 리갈은 용기병 4중대를 보내 대학 내에 진을 치고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당신이 돈을 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해서 나는 4중대를 당신 대학으로 보내노니 당신이 행동할 방향을 정하는 데에 더 이상의 권고가 필요 없게 되길 바란다.”
이에 크게 당황한 가톨릭 예수회는 그들과 같은 파인 왕의 고해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속달을 띄웠다. 그러나 용기병들은 더 빨리 그 속달 편지를 빼앗고 밀사를 혼내주었다. 그러자 가톨릭 예수회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알고 밀사가 돌아오기 전에 돈을 지불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와 카르멜 수도회는 예수회에 일어난 일을 보고 자진해서 돈을 지불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군대식 근거와 용기병들이 그들을 가르쳐줄 화를 모면했다.
한편 종교재판소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도미니쿠스 수도회(Order of Dominicus)는 자기들만은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미니쿠스 수도회는 사령관에게 자신들은 가난해서 기부금을 낼 돈이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재산은 교회에 설치한 사도들과 성자들의 은상(銀像) 뿐이며 그것들을 철거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이기 때문이오.”라고 했다. 이 교활한 암시에는 프랑스 사령관을 위협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종교 재판관들은 그가 감히 고귀한 우상들을 갖겠다는 이단적인 생각은 못할 것으로 상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령관은 그 은상들은 돈을 대치할 만한 훌륭한 것이었으며 도미니쿠스 수도회에서 갖는 것 보다 자기가 가질 만하다고 이렇게 전했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현재처럼 그것들을 소유한다면 그것은 인류에 아무 유익도주지 못한 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쓸모없이 벽 속에 처박혀 있을 뿐이오. 그러나 그것들이 내 것이 된다면 나는 그것으로 은전을 만들 것이며 그것은 성도들과 같이 여행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오.” 종교재판관들은 이 회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왕으로부터도 그러한 표현을 들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고귀한 은상들을 엄숙한 과정을 통해서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사람들을 흥분시켜 반란을 일으키기를 기대하며 도미니쿠스 수도사들은 매우 슬픈 태도로 촛불을 밝히고 “이교야! 이교야!”를 계속 외치면서 리갈의 집으로 행진해 갔다. 엠 드 리갈이 그렇게 행진해 온다는 말을 듣고 보병 4중대를 풀어 그의 집으로 오는 길 양편에 늘어서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모든 보병들로 한 손에는 딱성냥 한 손에는 촛불을 들고 서 있게 했다. 군대가 힘이면 힘으로 격퇴할 것이고 광대극 같은 의식이면 나도 광대극 같은 웃음거리로 응수하겠다는 의미였다. 이처럼 엠 드 리갈은 절대 타협 불허의 태도로 나오자 기가 죽어 은상들은 엠 드 리갈의 집으 로 전달되었고 그는 것들을 화폐 주조소로 보내 은전을 만들게 했다. 그러자 종교 재판소는 그가 만약 화폐 주조소에 감금된 그들의 고귀한 성자 은상(銀像)들이 녹아 없어지기 전에 그 은상들을 석방하지 않는다면 엠 드 리갈을 파문시키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달했다.
그러나 프랑스 사령관은 종교 재판관들이 보낸 파문장을 듣고도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우상들을 석방하지 않았다. 종교 재판소 서기는 일부러 아주 큰 소리로 파문장을 프랑스 사령관에게 분명하게 그리고 천천히 읽어주었다. 프랑스 사령관은 큰 인내를 가지고 그것을 다 듣고 있다가 아주공손하게 다음날 답변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종교 재판소 서기가 떠나자마자 엠 드 리갈은 자기 서기에게 종교 재판소가 보낸 것과 꼭같은 형식의 파문장을 준비시켜 거기에 자기 이름대신 종교 재판관들의 이름을 써 넣으라고 했다. 사진 / 개신교 핍박자 도미니쿠스 수도회 창시자 도미니쿠스
다음날 아침 무장한 그의 4연대의 군대는 종교 재판소에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로 엠 드 리갈이 재판관들에게 내린 판결문을 읽었다. 재관관들은 드 리갈을 이단이라고 외치며 그의 그러한 처사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모독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놀란 것은 그들이 당장 현 주거지에서 떠나야 한다고 판결문 내용이었다. 이유는 그 장소가 도시에서 가장 편리한 곳이므로 프랑스 사령관이 그 곳에 군대를 주둔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에 재판관들은 아우성을 쳤지만 그들은 삼엄한 호위 하에 도시에서 추방되었다. 재판관들은 즉시 마드리드로 가서 왕에게 가장 비통한 불평을 했다. 그러나 왕은 그들에게 아무런 손해 배상을 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손해를 입힌 것은 프랑스 왕인 자기 할아버지의 군대며 그는 그의 도움으로 자기 왕국을 굳게 지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한편 엠 드 리갈은 종교 재판소의 모든 문을 열어 죄수들을 다 석방시켰는데 그들은 도합 400명에 달했다. 그 가운데는 세 명의 으뜸가는 재판관의 후궁으로 밝혀진 60명의 젊은 여인들도 있었다. 이 사실은 종교 재판관들이 얼마나 부정부패로 썩었는지 온 세상에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였다. 이에 크게 놀란 대주교는 엠 드 리갈에게 그 여인들을 자기에게 보내주면 돌봐주겠고 동시에 거룩한 종교 재판소를 조롱한 모든 행위를 문책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 사령관은 대주교에게 도리어 그렇게 잔악하고 더러운 짓을 한 종교 재판관들이 도리어 수치와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회답했다.
스페인 왕 필립 2세의 아들이며 황제 찰스 5 세의 손자인 돈 칼로스는 종교재판소를 폐지하려 했지만 왕이 되기 전에 죽고 말았다. 돈 칼로스는 자기 아버지와 달리 할아버지의 좋은 점만 가지고 타고 났다. 그는 지혜가 있어 로마 가톨릭교회의 죄악을 보았고 종교 재판소 자체를 아주 싫어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그 기관을 비난했고 재판관들의 필립 2세(1527–1598) 경건한 체하는 외식을 비웃으며 그가 왕위에 오르면 종교 재판소를 폐지하고 모든 악행을 근절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이 같은 왕자의 언행은 종교 재판관들을 화나게 했고 그들은 왕자를 증오하고 대적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없애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모든 기관을 총동원해 교활한 수단으로 왕자에 대한 중상모략의 말을 퍼뜨렸다. 결국 재판관들의 거짓말에 온 나라가 시끄러워지자 아버지 필립 2세는 왕자 돈 칼로스를 제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판관들은 왕자가 과거 네덜란드 개신교도들에게 큰 호의를 베푼 일을 문제 삼아 개신교도들은 다 이단인데 그러므로 그들을 도운 왕자역시 이단 중 한 사람이라고 공포했다.
그러자 돈 칼로스 왕자의 아버지 필립 2세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종교 재판관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천륜(天倫)을 버리고 아들 왕자에게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내렸다. 왕자에게는 자신의 죽음의 방법을 선택할 특권이 있었다. 왕자는 욕탕 물속에서 피를 홀리며 서서히 죽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하여 왕자는 그의 팔다리의 상처로부터 피가 계속 흘러나오는 가운데 서서히 죽어갔다. 그는 악독한 종교 재판관들과 비정한 아버지로 인해 이렇게 순교한 것이다.(*) 출처 / 기독교순교사화(존 폭스 원저, 머리 킹 편저, 생명의말씀사)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