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순교사화

기독교 순교사화(21) 체코와 독일에서의 학살

로마 가톨릭에 의해 사지절단(四肢切斷)의 참형을 당하는 보헤미안 신교도 귀족들
로마 가톨릭에 의해 사지절단(四肢切斷)의 참형을 당하는 보헤미안 신교도 귀족들

5. 로마 교황의 독일과 보헤미아 핍박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보헤미안(Bohemian) 교회에 대해 가혹하게 굴자 977년 교회 회원들은 목회자 두 명과 평신도 4명을 로마로 보내 교황으로부터 보상을 받으려고 했다. 좀 지체된 뒤에 그들의 요구 조건은 수락되었고 그들의 불평은 보상을 받았다. 그들에게 특별히 두 가지가 수락되었다. 즉 자신들의 언어로 예배드리는 것과 평신도에게도 영성체의 잔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약속은 곧 깨지고 말았다. 뒤를 이은 교황들은 그들의 권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오히려 보헤미안들의 마음을 노예화시키려 했다. 그래서 보헤미안들은 그들의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크게 영적 갈등을 겪어야했다.
복음에 열정을 가진 몇몇 교인들이 A.D. 1375년 보헤미아 왕 찰스(Charles IV, 1316-1378)에게 교회 안으로 스며들어 온 폐습을 조사하고 개혁을 위한 회의 소집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한 찰스는 교황에게 조언을 부탁했다. 교황도 그 사건에 화가 나서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 불손한 이교도들을 벌하라!” 찰스 왕은 교황의 제안대로 오히려 개혁을 위한 회의 소집을 요청한 사람들을 국외로 다 추방해 버렸다. 그리고 교황에게 자기 열심을 보여 주기 위해 추가로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자들을 감금했다. 그런 와중에 존 후스(John Huss, 1369-1415)와 프라그의 제롬(Jerome of Prague, 1379-1416)이 순교를 당하자 개혁자들의 분노는 증가 되었고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처럼 두 위대하고 경건한 신앙의 사람들은 콘스탄츠 회의(Council of Constance)파에 의해 정죄되었고 그 때 58명의 보헤미안 귀족들이 그들 편에 서서 중재에 나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화형(火刑) 당했다. 그리고 교황은 콘스탄츠 회의파와 합동으로 전 지역의 로마 가톨릭교회 목회자들에게 그들의 의견을 채택하거나 그들의 운명에 동정하는 자들은 모두 파문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로 로마 가톨릭교도들과 개혁주의적인 보혜미안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고 보헤미안들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이 일어났다.

핍박은 프라그(Prague)에서는 특별히 심해서 결국 개혁주의자들은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스스로 무장을 하고 원로원을 공격해 대변인과 함께 12명의 회원들을 창밖으로 집어 던졌다. 이 말을 들은 교황은 플로렌스로 와서 개혁주의 보헤미안(Bohemian)들을 공개적으로 파문시켰고 독일 왕과 다른 왕들과 왕자들과 공작들을 흥분케 만들어서 그들도 무장을 갖추고 그 종족 전체를 근절시키겠다고 일어섰다. 그것을 격려하기 위한수단으로 한명의 보헤미안 신교도를 죽인 자는 아무리 사악한 자라 할지라도 그 모든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결과 유혈 전쟁이 일어났다. 몇몇 로마 가톨릭교도 왕자들이 정죄된 백성들의 근절을 맡았다. 한편 보헤미안들은 가장 용감하게 그들을 격퇴할 준비를 갖추었다. 쿠텐버그(Gutenberg) 전투에서 신교 군대를 이긴 가톨릭교도의 군대는 그들의 포로들을 그 도시 근방에 있는 세 군데의 광산으로 옮겨 한곳에 수백 명씩 던져 넣고 비참한 방법으로 죽여 버렸다. 페르디난트 1세 황제(Ferdinand I, 1503-1564)는 신교도들에 대한 증오가 한없이 끓어올라 그들을 압박하는 것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하고는 종교 재판소 위에 개혁자들을 재판하는 고등재판소를 세웠다.

고등재판소는 개혁자들이 여기저기로 옮겨져야 하며 언제나 군대에 의해 호송된다는 점에서 종교 재판소와 달랐다. 이 재판소의 구성 인원은 대부분 로마 가톨릭 예수회 파들로 되어 있었고 그들이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재심이 있을 수 없었다. 이 유혈 재판소는 군인들로 지켜졌고 보헤미안들로 방랑케 했으며 죄수들을 조사한다든가 알아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군인들은 자기들 멋대로 신교도들을 살해했으며 그러고 나서는 자기들 방식으로 그 사건을 보고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신교 교리를 신봉하고 라인 강의 팔라틴 지역 당선자인 프레더릭(Frederick V, Elector Palatine)을 보헤미아의 왕으로 지명하는 것을 지지한 모든 귀족들과 유지들을 모두 체포하라는 비밀 명령이 내려졌다. 이들 50여 명은 하룻밤 사이에 체포되어 프라그 성으로 끌려갔다. 또한 이들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그들은 법률의 보호를 박탈당한 자가 되었으며 그들의 이름은 불명예의 표시로서 공개적으로 교수대 위에 붙여 놓았다.

그 후에 고등재판소에서는 체포한 사람들을 심리하는 데에 나섰고 배교한 두 신교도가 그들을 조사하도록 지명되었다. 배교한 두 조사자는 불필요하고 건방진 질문을 너무나 많이 하여 어떤 귀족은 화가 나서 자기 가슴을 열어 보이며 소리를 질렀다. “여기를 잘라라. 내 마음을 조사해 봐라. 당신들은 종교와 자유에 대한 사랑밖에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내 칼을 빼는 동기이며 그것을 위해 나는 기꺼이 죽을 것이다.”

죄수들 가운데 아무도 그들의 믿음을 버리지도 자신들이 잘못했다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상고를 황제에게 제의했다. 황제는 그들의 이름과 그들에 대한 고소 제목들을 보더니 모두에게 판결을 내렸다. 그 판결 내용은 달랐고 4가지로 분류되었다. 즉 사형, 추방, 종신 징역, 유기 징역이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20명은 죽기 전에 로마 가톨릭 예수회 수도사나 신부를 불러 올 수 있었지만 신교도들과의 접촉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통고를 받았다. 그들은 그 제안을 모두 거절해 버리고 서로를 위로하려고 노력했다. 사형 집행 날이 되자 죄수들을 성에서 제일 큰 장터로 끌어내라는 신호로 대포가 울렸다. 거기에는 교수대가 세워져 있었고 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죄수들은 성을 떠나 위엄 있게 그리고 밝은 모습으로 군인들과 로마 가톨릭 예수파들과 신부들과 집행관들 그리고 이 순교자들이 나오는 것을 보려고 모여선 많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다음은 이 사건으로 고난 받은 중요한 사람들이다.

50세가량의 귀족 쉬릭(Schilik) 경은 네 동강(四肢切斷)이 되어 그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곳으로 흩어질 것이라는 말을 듣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덤이 없다는 건 별로 심각한문제도 아닌데…” 그러자 곁에 섰던 한 신사가 외쳤다. “주인님, 용기를 내세요!” 그가 대답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지… 그 분은 누구에게나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기에 충분하신 분이야. 죽음의 공포는 나를 괴롭히지 않아. 나른 적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전쟁에서 그를 대면했으니까.” 그리고 짤막한 기도를 되풀이하고 나더니 그는 사형 집행관에게 준비가 되었냐고 묻자 집행관은 그의 머리와 오른팔을 자르고 나서 그를 4등분했다.

또 한 사람의 희생자는 비스카운트 윈체스로스(Viscount Winceslaus)였다. 이 존경할 만한 귀족은 70여 세로서 그의 경건함과 함께 학식과 손님 접대로 유명했다. 그는 이 세상의 부귀에는 별 애착이 없어서 그의 집이 파괴되고 재산을 빼앗기고 모든 부동산이 다 몰수될 때도 아주 침착하게 이렇게 말한 분이었다. “주님께서 주셨고 주님께서 취하셨다. 나는 이제 나이를 먹었고 내 목숨을 내 놓기 원하며 내 나라를 삼키려는 마귀의 증인이 되지는 않겠다. 너는 오랫동안 내 피를 마시지 못해 목말랐구나. 어서 취하라. 하나님께서 나의 원수들의 보복 자가 되실 테니까.” 그러고 나서 그는 단두대로 다가가서 자기 잿빛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존경하는 머리카락이여, 이제 큰 명예가 네게 이르렀다. 순교자의 면류관이 네 차지란다.”

로마 가톨릭에 의해 단두대에서 참수형을 당하는 보헤미안 신교도
로마 가톨릭에 의해 단두대에서 참수형을 당하는 보헤미안 신교도

하란트(Harant) 경은 천부적인 여행가로서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중요한 곳들을 찾아 다녔으며 보다 세련되고 진보된 신사였다. 그는 신교도가 되어 라인의 선제후 프레더릭을 보헤미아의 왕과 동맹을 맺게 했다는 것 때문에 고소당했다. 그는 교수대에 올라가면서 말했다. “나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고 여러 야만국가도 다녀왔지만 우리나라 에서처럼 잔인한 짓은 본 적이 없구나. 나는 바다에서나 육지에서 말할 수없는 위험을 겪었고 모든 것을 다 극복했는데 아무 죄도 없이 고향에서 고난을 받는 구나. 내 피는 나와 내 조상들이 목숨과 운명을 걸고 지켜온 자들에 의해서 찾게 되리라.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단두대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크게 외쳤다. “오 주여! 당신의 손에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저는 언제나 당신을 신뢰했습니다. 그러니 저를 받아주옵소서. 나의 복되신 구세주시여!”

헨리 오토(Henry Otto) 경은 맨 처음 교수대에 오르자 매우 흥분한 것같이 보였다. 그는 마치 황제에게 연설이나 하듯이 말했다. “오 폭군 페르디난드여! 네 왕좌는 피로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네가 내 몸을 죽이고 내 지체들을 흩어 버린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다시 부활해서 너를 심판할 것이다.” 그러자 그는 잠잠해졌다. 그리고 잠간 동안 걷더니 다시 꿋꿋함을 회복하고 차분해져서 한 신사에게 말했다. “몇 분 동안 나는 침착성을 잃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 영혼이 소생함을 느낀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죽음은 이제 더 이상 공포의 왕으로 보이지 않으며 어떤 미지의 기쁨에 참석하라고 나를 초대하는 것 같구나.” 그리고는 단두대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 당신에게 제 영혼을 의탁하나이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것을 받아 주옵시고 그의 영광스러운 존전으로 보내 주옵소서!”
귀족 개스퍼 첩프리츠(Gasper Kaplitz) 경은 86세였다. 사형집행 장소에 이르자 제일 높은 장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비천한 노인을 보라. 하나님께 종종 이 사악한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는데도 이제까지 그 소원을 이루지 못했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이제까지 이 세상의 한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자신을 희생하도록 보전하셨기 때문이지.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한 장교가 그에게 그의 노령을 생각해서 용서를 구하기만 한다면 즉시 용서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용서를 구하라고?” 그가 외쳤다. “나는 내가 자주 죄를 범한 하나님께는 용서를 구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한 번도 죄를 범한 적이 없는 황제에게는 구하지 않는다. 내가 만약 용서를 구한다면 그것은 내가 이러한 처지를 당할만한 죄를 범했다는 의심을 받는 것이 정당하게 된다. 아니, 아니다. 나는 깨끗한 양심으로 아무 죄 없이 죽음으로써 나의 고귀한 믿음의 동료들과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기꺼이 자기 목을 단두대에 맡겼다.

크리스토퍼 초버(Christophter Chober) 신사는 교수대에 이르자마자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의 영광을 위해 죽으러 왔노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내 갈 길을 마쳤다. 그러니 집행관이여, 네 일을 하라.” 그 말을 하자 그는 즉시 순교자의 면류관을 받았다. 귀족 태생이 아닌 시므온 수시키(Simeon Sussickey)는 교수형을 받았다. 그는 죽는 것을 초조히 기다리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매 순간이 내가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을 지연시키는구나.”

나다니엘 워드니안스키(Nathaniet Wodnianskey)는 신교 교리를 신봉한다고 교수형을 받았다. 교수대에서 로마 가톨릭 예수파가 그의 믿음을 포기케 하려고 여러 말로 회유했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아들이 그에게 와서 말했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가 살기 위해 배교 한다면 나는 아버지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간청하는 바입니다.” 이 말에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내 아들아! 신앙을 지키라는 너의 조언을 들으니 만족스럽구나. 그러나 나를 의심치 말아라. 오히려 네 형제와 자매와 자녀들이 믿음에 굳게 서도록 노력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내 믿음의 절개를 본받도록 가르쳐라.” 그가 이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아주 꿋꿋하게 죽음을 맞았다.(*) 출처 / 기독교순교사화(존 폭스 원저, 머리 킹 편저, 생명의말씀사)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