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22) 초기 한국교회 찬송가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22)
초기 한국교회 찬송가
1. 중국어 영어로 부르다 1892년 첫 한글 찬송가
기독교가 처음 한국에 소개되고 예배가 드려졌을 때 어떤 찬송을 불렀을까? 이번에는 이런 질문에 답하면서 한국교회 초기 찬송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기독교가 소개되던 초기에는 우리말 찬송이 없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한문으로 된 중국어 찬송가를 이용했다.
1887년 백홍준, 서상륜을 중심으로 시작된 새문안교회도 처음에는 중국어 찬송을 불렀다. 백홍준의 딸 백성관은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어렸을 때 나의 아버지는 만주에서 돌아와 매일 새벽이면 기도하시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쥬 예쑤 아이워(主耶蘇愛我)’를 부르시던 기억이 난다.” 아펜젤러는 자신이 편집한 찬송가 서문에서 “조선말로 찬미를 쓰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나니 조선교회에서 처음 얼마동안은 지나(支那) 찬미가를 써 보았으나 가사의 뜻을 잘 알 수 없었으며”라고 하여 한글 찬송이 보급되기 전에는 중국어 찬송이 사용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화학당이나 배재학당의 채플에서는 영어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한국교회가 한국어 찬송이 없어 외국어로 찬송을 불러야 했던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 이런 현실에서 한글 찬송가 편찬은 시급한 과제였다.
2. 한국 최초의 찬송가
처음에는 지역이나 선교부에 따라 각기 다른 찬송을 편집하여 불렀는데 우리나라 최초로 찬송가가 편찬된 때는 선교사가 입국한 지 8년이 지난 1892년이었다. 그것은 감리교 존스(George Heber Jones, 조원시, 趙元時, 1867-1919)와 로드와일러(L. C. Rothweiler)가 편집한 ‘찬미가’였다. 27편이 수록된 악보 없는 수형본(手形本) 찬송가였다.
2년 후인 1894년에는 장로교의 언더우드에 의해 117곡으로 편집된 ‘찬양가’가 출판되었는데 이 찬송가 상단부에 사성부(四聲部) 악보가 그려져 있고 하단부에는 가사를 기록한 형태였다. 이것이 한국에서 서양식 악보가 인쇄된 최초의 음악 책이었다. 이 찬양가는 주로 서울지방에서 사용되었다. 선교 초기에는 지역적으로 다른 노래가 불리기도 했고 편집된 찬송가가 널리 보급되지도 못했다. 말하자면 첫 10여 년 동안 통일된 찬송가 없이 예배를 드렸음을 알 수 있다.
1895년에는 장로교 선교사 그래함 리(Graham Lee)와 기포드(Gifford) 부인이 편집한 ‘찬셩시’가 출판 되었는데 54편의 곡이 수록되었다. 이 책은 서북지역에서 주로 사용되었는데 계속 증보되어 1902년에는 장로교공의회에 의해 공식 찬송가로 채택되었고 이후 개정 증보되어 1905년에는 이를 기초로 마펫이 ‘곡보 찬셩시’를 간행했다. 137곡을 수록한 이 찬송가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합동 찬송가가 출판되기 전까지 장로교의 공식 찬송가로 자리 잡았다.
감리교의 존스와 로드와일러의 ‘찬미가’도 계속 증보되어 1902년에는 207곡으로 늘어나 감리교회 찬송가로 자리를 잡았다. 흥미로운 점은 선교사와 무관하게 15편의 노래를 수록한 ‘찬미가’가 1905년 간행되었다는 점이다. 윤치호가 역술한 무악보의 이 찬미가의 제1장이 ‘황제폐하 송’이었고 14장은 ‘애국가’였다. 이 노래는 지금의 애국가와 거의 동일한데 곡은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에 맞추어 부르도록 표시되어 있었다. 후에는 찬송가에서 삭제되고 곡도 안익태 곡으로 바뀌었다. 이 찬미가가 교회의 공적인 찬송가로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1908년 재판까지 발행되었다. 국운(國運)이 기울던 당시의 충군애국적인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사랑하심을’ 찬송가 가사의 과거와 현재
한국교회 초기에 번역 되고 또 가장 많이 애창 된 찬송가는 무엇일까? 그것은 미국인 와너(A. B. Warner)가 1859년에 쓴 가사에 브레드버리(W. B. Bradbury)가 작곡한 ‘예수 사람하심’이었다. 이를 번역한 대표적 인물이 초기 한국교회 찬송가 보급에 크게 기여한 펜윅과 애니 배어드였다. 위 과거 가사는 1890년 번역한 것이다. 동방예의지국에 걸맞게 예수님을 ‘예수 씨’라고 번역한 것이 흥미롭다 당시 성경의 인물들을 바울 씨, 요한 씨, 베드로 씨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예수 씨’라고 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오늘 날의 가사와 비슷한 번역은 1890년대 후반기부터였다.
3.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 ‘찬숑가’
한국교회 찬송가 편찬에 기여한 인물은 펜윅(M C Fenwick) 침례교 선교사였다. 그는 14장의 찬송을 편집한 ‘복음찬미’를 1899년 독자적으로 발행한 바 있다. 이 찬송도 계속 증보되어 1939년 판에는 274곡을 수록하였다. 이 찬송이 동아기독교(침례교)의 공식 찬송가가 되었다.
한국에서의 주도적 두 교회인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연합과 일치를 위해 통일된 찬송가를 불러야 한다는 인식이 열매를 맺어 1908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의 ‘찬숑가’가 발행되었다. 262곡을 수록한 이 찬송가는 이전에 번역을 다듬고 세련된 가사로 개작했다. 6곡은 한국고유의 곡조로 부르도록 배려했다. 편집위원은 베어드부인(Annie Baird), 밀러(F S Miller)와 벙커(D. A. Bunker)였다. 1908년 초판은 6만부, 1910년까지 22만 5000부, 1911년 한 해 동안 5만부가 발행되었다. 이 찬송이 오늘까지 불리는 찬송가의 모태가 되었다.
(왼쪽) ‘애국가’ 가사가 실린 윤치호의 감리교 찬미가(1897), (오른쪽) ‘찬미가(讚美歌, Hymns of the Methodist Church, 1897) 미국 감리회 선교부에서 존스(George Heber Jones)가 펴낸 감리교회 최초의 찬송가이다. 맨 먼저 수록된 십계명에 이어 악보 없이 가사만으로 90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뒷부분에 주기도문, 사도신경이 수록되어 있다.
1892년 한국교회 최초로 찬송가를 펴낸 존스(George Heber Jones)와(왼쪽), 1905년 ‘찬미가’를 펴낸 윤치호와 그 ‘찬미가’에 수록 된 윤치호가 쓴 오늘 날의 애국가 가사
이 같은 초기 한국교회 찬송가들은 한국 서양음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교회는 서양 음악인을 키워내는 온상이었다. 최초의 피아니스트 김영환, 최초의 서양음악 교사 김인식, 현제명, 박태준, 안익태 등근대 한국 음악의 선구자들은 다 예외 없이 초기 한국교회가 배출한 음악가들이었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