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26) 근대화 중심의 기독교인들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26)
근대화 중심의 기독교인들

조선선교 초기 청계천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하층민들
조선선교 초기 청계천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하층민들

1. 초기의 중하층에 집중 전도

한국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을까? 한국의 천주교는 양반 중심의 공동체로 출발했으나 조상 제사금지와 신해박해(1791년)를 거치면서 차츰 그 중심이 중산층 중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천주교 역사가 문규현에 따르면 1784년부터 1791년에 이르는 기간 활동했던 권일신을 비롯한 12명의 천주교 지도층 인사 가운데 3분의 2가 양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791년부터 1801년 사이 활동했던 38명의 지도층 인사들 중 중산층 계급이 21명으로 55%에 달했으나 양반은 9명으로 24%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양반 중심의 구성이 점차 중인 계급으로 이동해 갔음을 알 수 있다.

 

 

조선선교 초기의 한 가난한 농촌 가정
조선선교 초기의 한 가난한 농촌 가정

그렇다면 한국 개신교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기독교(개신교)는 천주교와는 달리 주로 중산층과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점은 일본과도 대조를 이룬다. 일본에서는 기독교가 지식층이라 할 수 있는 무사(武士) 계급으로 유입돼 주지주의 경향을 띠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기독교는 중간계층과 하층민으로 유입돼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점차 상승운동을 통해 상류층으로 확산됐다. 물론 초기부터 소수 엘리트 그룹의 기독교 영입 운동이 없지 않았고 이들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2. 선교사들의 일차 전도대상

이런 점은 당시 선교정책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장로교선교공의회는 1893년에 모인 첫 회합에서 네비우스 정책에 기초한 10가지 선교정책을 채택했다. 이 문서는 한국에서의 기독교 전수통로(transmission)에 대한 선교사들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 중심 사상은 제1항에서 명시하듯이 ‘상류층보다 하류층을 일차적인 전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모든 신앙서적은 한글로 출판했다는 점이었다. 성경번역도 그러했다. 천주교는 처음부터 국문과 한문 혼용 성경을 발간했으나 개신교는 처음부터 순 한글로 성경을 번역해 한문을 알지 못 하는 이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물론 점차적으로 상류층의 입교자가 생겨났지만 처음 부터 중하층민이 선교의 주된 대상이었다.

한성감옥 시절 이승만, 기독교로 개종 후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한성감옥 시절 이승만, 기독교로 개종 후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초기 선교사들도 양반층 보다는 전도가 비교적 용이한 중하층 민에 우선 권을 두었다. 이것은 당시 보편화된 유가적(儒家 的) 가치체계에서 불가피한 모색이었을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설교도 제목 중심의 간명한 설교가 중심을 이루고 많은 예화가 사용되었던 것은 교회 구성원의 사회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한성감옥 시절 이승만, 기독교로 개종 후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구스타프 바르넥(Gustav Warneck)은 특정 계층을 주된 선교 대상으로 하는 것은 ‘건전한 국민 층’(die gesunden Volkselemente)’ 교회를 설립할 수 없다 하여 이상적인 정책일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으나 한국에서의 경우 중하층민 중심의 교회가 상당한 성장을 가져왔다. 이는 한국에서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1세기 개신교에서 볼 수 있는 동일한 현상이었다.(고전 1:26-29 참고)

독일의 파피루스 학자인 아돌프 다이스만(Adolf Deissmann)은 초기 기독교는 절대 다수의 하층민들로 구성된 교회였다는 점을 지적했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에 따르면 어떤 집단의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은 그 집단의 종교적 성향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는 하층 계급의 집단일수록 새로운 사상, 이념, 종교에 보다 적극적이고 수용적이라고 분석했다. 그것은 새로운 이념이나 가치를 통해 신분 상승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독교 신앙은 사회적 신분 상승을 추구하는 하층민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평양을 비롯한 관서지방이 서울과 경기 등 중부지방보다는 서울과 중부지방이 경상도나 전라도보다 복음에 대해 더 수용적이었던 것은 그 지역의 사회적 신분 집단과 무관하지 않다.

3. 기독교는 한국 근대화와 자주독립의 산실

기독교인이 된 후 조국 근대화에 힘쓴 서재필, 윤치호, 박영효(왼쪽부터)
기독교인이 된 후 조국 근대화에 힘쓴 서재필, 윤치호, 박영효(왼쪽부터)

초기 한국에서의 기독교 수용은 중하위 계층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초기부터 소수 엘리트 계층의 기독교 영입운동이 없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이들은 주로 조국 근대화를 바라는 개화 지향적 민족 자강론(自强論) 자들이었다. 급진 개화론 혹은 온건 개화론(東道西器論)의 전통을 잇는 이들은 기독교를 서구문화에 대한 통로로 보아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고자 했다. 이런 인식은 청일전쟁(1894-95) 이후 분명하게 나타났는데 기독교를 근대성(modernity) 혹은 문명의 기호(a sign of civilization)로 인식했다. 이런 인물들이 서재필, 윤치호, 박영효, 이승만 등과 같은 당시 사회적 엘리트들이었다.

기독교를 통해 입헌 민주국가를 건설하고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된 이후에는 자주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보았던 이들도 기독교를 가장 좋은 방편으로 인식했다.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을 중심으로 설립된 독립협회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 독립협회는 다수가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었고 안창호, 길선주 등은 평양지부에 속한 인물이었다.

1898년 11월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중심인물이 투옥되었는데 이승만, 이상재, 이원긍, 신흥우, 김정식 등 이들 중 대부분이 이 때 기독교를 받아들여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들 외에도 개화 지향적인 혹은 민족자립과 독립을 추구하던 조만식, 김구, 등 다수의 지도자들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처럼 기독교를 수용한 대표적인 두 집단은 다수의 중하위 계층과 개화지향의 민족자강을 추구하는 엘리트 그룹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