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세계교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세계교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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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도 박사(1935-2014)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기독교는 놀라울 정도로 급속히 변질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기독교는 성경 적인 기독교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질되어 가는 오늘날의 기독교의 실상을 깊이 살펴보고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본래의 초대교회와 같은 기독교와 신앙으로 회복되기를 힘써 간구하며 노력해야 하겠다.
I. 정통 기독교의 기본 교리

– 정통 기독교의 기본 교리는 신구약 성경(聖經)이다.

성경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하나님께 받아 기록한 계시(啓示)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啓示)와 인간의 이성(理性)을 분별해야 한다. 세상에 종교라 불리는 것이 많이 있고 또 자칭 ‘계시종교’(啓示宗敎)라는 것들이 많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계시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모르몬교의 모르몬경이나 이슬람교의 코란경 등이 신(神)의 특별한 계시로 기록되었다고 하나 연구해 보면 그것들은 다 인간의 이성(理性)으로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

모르몬교의 모르몬경은 하나님이 성경을 직접 기록하신 후 New York 주 Palmyra라는 곳에 묻었는데 Joseph Smith가 천사 모로니(Moroni)의 계시를 받아 가서 파보니 거기 애급의 회형문자(繪形文字, hieroglyph)로 기록된 경전이 있었고 이를 판독하여 오늘의 모르몬교의 경전이 되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 모르몬경에 나오는 지명들이 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짓 이름들이라는데 있다. 미국의 Smithsonian 박물관에 문의해도 그런 경전이 Palmyra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슬람의 코란경도 마찬가지다. 기원 7세기 모하마드(Muhammad, 570-632)라는 사람이 알라 (Allah) 신(神)의 계시로 기록한 것이 코란(Quran)경이라고 한다. 그들은 코란경도 기독교 성경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지만 두 경전은 서로 판이하게 다르다. 많은 사람들은 아랍 사람들이 기원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 마치 이스마엘과 에서의 자손들이 아랍 인종인 듯 생각한다.

문제는 고고학적 문헌에 보면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 이미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 지방에 오늘 날 아랍 사람이라고 불리는 인종들이 살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이들이 점점 생업을 위해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Robert Morey 저 ‘Islamic Invasion’ – 이슬람의 침략, 책 참고)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무관하다. 그리고 므하마드가 계시를 받아 기록했다는 것도 실상은 이성으로 기록한 것이다.
안식교도 마찬가지이다. 안식교는 1844년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 1782-1849)라는 침례교 목사로부터 시 작되었다. 그는 다니엘 8:14 말씀의 2,300 주야를 중심으로 에스라가 성전 재건의 명을 받은 해를 관련시켜 주님 의 재림이 1843년에 있다고 예언하여 많은 성도들이 이에 미혹되어 그 날을 기다렸으나 거짓말이 들어나자 계산이 잘못되었다고 변명하고, 다시 이번에는 1844년 봄에 주님이 다시 소신다고 했다가 실패하자 그는 실망하여 신병으로 죽었다.

그 후 그의 여제자였던 와이트(Ellen G. White, 1827-1915)가 환상을 많이 보았는데 어떤 문헌에 의하면 죽을 때까지 무려 200여 회의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Anthony Hoekema 저 The Four Major Cults 나 Walter T. Rea 저 The While Lie 라는 책 참고) Hoekema 박사는 과거 칼빈신학교 교수였다. 특히 Walter T. Rea는 안식교에 몸담고 있다가 나중에 진리를 깨닫고 탈퇴한 사람으로 그의 책 ‘The While Lie’는 안식교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래서 토요일에 안식을 지켜야 하고, 먹을 것을 지금도 구약 때처럼 가려서 먹어야 하고,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잠잔다고 가르치고(요즘은 수정하여 달리 가르치는 분들도 있음), 지금도 예수님이 하늘의 지성소에서 사람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잘못하면 지옥에 내려 보낸다는 소위 ‘조사심판’(Investigative Judgment)을 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이런 모든 것들은 기독교 정통 신앙이 아니고 계시종교(啓示宗敎)도 아니다. 이들은 계시를 빙자한 인간의 생각에 불과 하다.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도 계시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많은 데(은사운동) 성경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이처럼 그릇된 종교 집단의 공통 된 특징은 모두 교주가 계시를 보았다고 하며 사람들을 우롱하고 온갖 비기독교적인 교리를 가르친다. 사이비 부흥사들 거의 모두가 이런 부류의 설교 일색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의 계시는 이미 종결 되었다고 믿는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 계 22:18,19, 히브리 1:1) 또한 성경의 기적은 반드시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 Redemptive History of God)의 측면에서 해석해야 하며 그런 기적들은 우리가 모방하여 반복하라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 아니다.

– 그러면 참다운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우선 기독교를 생각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기독교의 세 가지 주요 교리는 창조, 타락, 구속 세 가지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인간이 타락하고, 예수님이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시어 재창조(recreation)하셨다는 말이다. 기독교는 이 세 가지를 다루는 종교이다. 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 이 세 가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제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 올바른 신관(神觀)

조직신학의 신론(神論)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치며 성경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있다. 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로 알고 믿어야 한다.

–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우리가 믿는 창조 주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아무 것도 없는 중에 말씀으로 창조하시고(creatio ex nihilo), 흙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입김을 불어넣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생령(living soul)이 되게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도록 문화명령(文化命令, Cultural Mandate)을 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고 사용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 하나님은 절대주권 자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만물을 주관하시며 예정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시며 어떤 피조물에도 예속되거나 의존하지 않고 독립하여 계신 분이며 천상천하의 대 주재(主宰)이다. 그러므로 개혁신앙은 하나님의 전제 주권(專制主權, 또는 절대주권)을 가장 중히 여긴다.

–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다.

하나님은 한 분인데 삼위이시다. 세분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분 안에 삼위로 계신다는 말이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삼위가 서로 조화되어 계시며 본체는 하나이시다.(oneness in essence) 다시 말해 홍길동, 김막동, 박문수 같이 서로 성격이 다른 분들이 그 안에 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이 문제로 오랜 동안 많은 이단 논쟁이 있었다.
가령 로마교회의 장로로 추측 되는 Sabellius(217년 경 활동)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일위인데 그 분이 때로는 성부로, 때로는 성자로,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난다.”고 가르치다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출교(黜敎) 당했다. Sabellius의 이런 주장을 신학적으로 양태론(樣態論, Modalism)이라고 한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은 본질이 같고 각각 하는 일이 다르다. 성부 하나님은 믿을 자를 창세전에 택해 주셨는데 우리가 미리 믿을 것을 아시고 그것을 근거로 택해 주신 것(예지예정)이 아니고 무조건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택해 주셨다. 이것을 하나님의 예정(豫定, predestination)이라고 한며 또 무조건적 선택(無條件的選擇, Unconditional Election)이라고도 한다.

또한 성자 예수님은 그 택하심을 입은 자들만을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어 주셨고,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적용하여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 받아 예수를 구주로 믿어 구원 얻게 하신다. 이처럼 삼위는 각각 다른 일을 하시지만 서로 상치(相馳)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 속에서 우주를 운영하고 또한 인간을 통치하신다.

(2)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

사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 1:27) 이것이 사람이다. 성경은 시편 8:5에 인간은 천사 보다 좀 못하다고 하였으나 나중에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고린도전서 6:3에 말한다.

– 인류의 근원은 하나이다.

모든 인간은 인종(人種)과 상관없이 한 조상 아담과 하와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形象)대로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인종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유색인종이 생긴 이유는 바벨 탑 사건(창 11장) 이후 인종이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기후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유대인들은 원래 백인이었으나 애급에 내려가서 430년간 살면서 애급 사람들에 의하여 피부색이 변하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백인이나 흑인이나 누구나 한 핏줄에서 나온 것이다. 사도행전 17:26을 읽어보면 분명 하나님이 한 혈통으로 인하여 모든 인류를 만드셨다.

–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난다.

모든 인간은 아담에서 나왔고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치 않아 타락하였으며 그 타락의 결과는 모든 인류에게 그 죄가 오염되게 하여 인간은 모두가 죄인으로 태어난다.(시 51:5) “그런데 그 옛날 아담의 죄와 오늘 날의 내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한다. 그 이유는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였기 때문이다. 김 씨 성(姓)을 가진 사람은 그 조상이 김 씨이기 때문에 자손 대대로 김 씨 성(姓)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이 에덴동산의 아담은 ‘첫째 아담’으로 육적인 인류의 대표자(代表者)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계약적으로도 인류의 대표자였다.

– 죄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워 진다.

한편 예수님은 ‘둘 째 아담’ 혹은 ‘마지막 아담’으로 모든 믿는 자의 대표자가 되신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성도 자신의 의(義, righteousness)나 공로(功勞) 때문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가 우리에게 전가(轉嫁, imputation)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보아주셔서 되어 진 일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을 위해 피 흘려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이루신 그의 의가 그의 택함 받은 백성에게 전가되고 죄인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공로 없다 함을 얻은 것이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이중전가(double imputation, 二重轉嫁)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도라도 실제 의로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외롭다고 인정 해 주신다는 것이다. 세상 재판정에서도 재판장이 “무죄!”라고 선언하면 그 사람은 죄를 지었어도 무죄가 된다. 그런 이치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5:12-19에 이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 모든 인간의 실상과 유일한 구원 자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죄의 대가(代價)는 죽음이라고 로마서 6:23에 말한다. 타락한 인생은 지(知. intellect), 정(情 emotion), 의(意, volition)가 모두 다 타락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일들이 모두 빗나가 선을 행할 인간이 한 사람도 없다고 시편 14:1, 58:4-6, 로마서 3:11, 3:23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런 인간은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죄인은 스스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망이 없는 이런 인간이 영생의 소망을 얻어 새 사람으로 재창조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고후 5:17)

(3)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

앞서 말한 대로 성경의 가르침은 세 가지 즉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제 세 번째 범죄 한 인간 즉 죄인이 살 길인 구속(救贖)에 대해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다. 죄에 빠져 죽게 된 인간이 어떻게 구속함을 받아 살 수 있는가? 어떻게 재창조 되는가?

타락한 인생은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 그렇다고 구원의 길을 스스로 찾지도 못한다. 사람은 선행으로 구원 얻지 못한다. 갈라디아서 2:16, 로마서 3:20이 이를 분명히 말해 준다. 구약 이사야서 64:6은 우리의 의(義)는 다 더러운 옷 같다고 했다. 이처럼 인간의 공로로는 죄 사함 받을 길이 없는데 하나님은 에베소서 1:4, 2:8 말씀대로 창세전에 성도들을 택하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구원해 주신다.

또한 인간의 죄 값은 사망이므로 누군가 내 죄 값을 대신하여 죽어야 하는데 보통 인간이 죽어서는 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가 용서되지 못한다. 죄인이 죄인의 죄를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 없으신 그리스도가 내 죄를 대신하여 내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이다.(갈 3:13)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지금부터 2000여 년 전이지만 그는 영원 전부터 성부 성령과 같이 계신 분이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preexistence of Christ)라고 한다.(창 1:26 요 1:1)

또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시리라는 것이 예수님이 출생하기 700여 년 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되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사 7:14) 예수님은 이 같이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의 몸에 탄생하셨다. 고로 그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가지신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시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의 인성(人性)의 죽음이며 그는 언제나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장사 된지 삼일 만에 죽음에서 육적으로 부활하시고 부활한지 40일 후에 승천하셨으며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 만국을 통치하고 계시며 최후의 날에 세상을 심판하려 재림하신다.

(4)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의 영(靈)이시다. 물론 이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 11세기 1054년 기독교는 동방교회(Eastern Church)와 서방교회(Western Church)로 갈라졌다. 동방교회는 오늘의 희랍 정교(希臘正敎, Greek Orthodox Church)와 러시아 정교다. 서방교회는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교회이다. 동방교회는 헬라어를 사용하였고 서방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하였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갈라지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1) 성직자의 독신(獨身) 문제

동방교회는 최고의 성직자만 독신을 지킬 것을 주장하는 반면에 서방교회는 모든 성직자는 독신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2) 성상(聖像) 문제

동방교회는 평면적인 그림을 숭상했으나 서방교회는 그림만이 아니라 입체상(立體像)도 숭상 했다.
3) 성령(聖靈) 문제

동방교회는 성령은 성부만의 영이라고 하고 서방교회는 성부 및 성자의 영이라고 주장한다. 이상 여러 가지 이유로 기독교가 둘로 갈라지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인데 성부는 구원받을 자를 택하시고, 성자는 성부가 택하신 사람들을 피 값으로 사주셨는데 그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친히 죽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성령 하나님은 성자가 이룩한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공로를 신자에게 적용하여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고 주님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게 하신다.

성령은 또한 율법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통제하여 질서를 유지하게 하시고, 밭에 씨가 심겨지면 열매가 맺는 것처럼 말씀의 열매 맺도록 하시고, 인간의 양심을 주장하시고, 믿는 자의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믿는 자에게 분량을 따라 은사를 주셔 교회를 세워나가도록 하신다. 은사에는 보통은사(ordinary gifts)와 특수 은사(extraordinary gifts)가 있으니 특수 은사는 성경을 기록하는 이들에게 일시적으로 주셨던 은사들이고(그러므로 임시 은사라고도 함)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특수 은사는 중단 되고 모든 성도들이 보통 은사로 교회에 봉사하도록 역사 하신다.

(5) 종말에 대한 바른 이해

종말(終末)은 일반(一般) 종말과 개인(個人) 종말 두 가지인데 일반 종말은 이 세상 끝 날에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일을 말하며 개인 종말은 각 개인의 죽음과 그 후에 이루어지는 일을 말한다.

일반 종말은 세상 마지막 날에 임하는 것이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모든 사람 즉 이 세상에 왔던 전 인류가 동시에 부활하여 요한복음 5:28 말씀대로 각각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된다.

사람은 영(靈)과 육(肉)으로 되어 있다. 이 세상과 장차 영원한 세계에서도 그러하다. 개인 종말인 인간의 죽음은 영과 육의 분리이다. 잠시 동안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것이다. 신자나 불신자나 죽은 후에 의식이 아주 없어져서 소멸되거나 잠자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신자는 죽는 즉시 그 영혼이 하늘나라로 올라간다.(빌 1:23, 고후 5:8) 하늘 하나님께로 올라간 영혼은 주님 재림 시에 다시 주님과 같이 재림하여 땅에 잠자던 영화로운 몸(Glorified body)으로 변화 된 육신과 연합되어 영과 육이 영원토록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게 된다.(벧 3:10) 이 세상에 살 동안 지니고 있던 성도의 몸은 썩을 몸, 병드는 몸, 죽을 몸이지만 부활하는 몸은 썩을 몸이 아니고 병드는 몸이 아니다. 영화로운 몸이다.(고전 15:35절 이하)

그러나 불신자의 죽음은 비참하다. 이 세상에서는 불신자들도 하나님의 보편 은혜(common grace)로 살아간다. 즉 하나님의 최소한의 은혜를 받으며 산다는 말이다. 공기를 마신다든지 물을 마신다든지 건강을 유지한다든지 모두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혜이다. 그러나 불신자가 죽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주 단절된다. 죽는 즉시 어느 곳에 머물다가 최후의 심판 날에 지옥에 던져져서 영원토록 의식이 있는 고통을 받는다.

이상 언급한 정통 기독교의 기본 교리는 주일마다 예배 시에 고백하는 사도신경(apostles creed)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직접 쓴 것이 아니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후세 사람들이 요약한 신앙고백서이다. 일반적으로 기원 6세기에 완성되었다고 믿고 있다.(Philip Schaff 저 Creeds of Christendom, 3 vols 참고)

성도가 믿는 기독교 기본 교리는 사도신경만 아니라 다른 역사적인 신앙고백서들 이를테면 기원 325년의 니케아 신경, 350년의 아다나시우스 신경, 381년의 콘스탄티노풀 신경, 451년의 칼게돈 신경, 1561년의 벨직 신앙고백서, 1563년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66년의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 1599년의 프랑스 신앙고백서, 1619년의 도르트 신경, 1647년의 웨스트민스터 표준 신앙고백, 1996년의 캠브리지 선언문(혹은 이를 ACE 신앙고백서라고 도 함) 등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II. 변질되어 가는 오늘의 기독교 모습

이상과 같은 정통 기독교 교리와는 달리 오늘 날에는 기독교의 진리가 많이 변질되어 가고 있다. 그러면 정통 기독교의 무엇이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지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도록 하겠다.
(1) 지옥이 없다고 가르치는 신학자가 늘고 있다.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이며 많은 보수주의 책을 쓴 학자가 있는데 요즘 새로운 주장을 펴고 있어서 기독교계의 정통 신학자들에게 빈축을 사고 있다. 그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사랑인데 어찌 그가 창조하신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겠는가 하며 지옥을 부인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지옥이 있고 꺼지지 않는 불 못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 가운데 누가복음 16장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말씀이다. 이처럼 오늘 날 지옥을 부인하는 학자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2) 하나님은 미래를 모른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미래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 어찌 하나님인들 미래를 알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 이들 주장이다. 이것도 전에는 없던 일이다. 물론 18세기 독일의 이성주의자들이 이렇게 주장한 것은 별로 놀랄 것이 없는 일이지만 오늘에 와서 이런 주장이 나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대표적 인물로는 Michigan 주 Bethel 신학교의 교수인 Gregory Boyd 박사 같은 사람이다. 또한 Clark Pinnock 박사 같은 교수도 신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친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은 불과 20년 전 까지만 해도 정통적인 신학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사상은 요즘 미국에 있는 대학 교수들 간에 많은 호응을 얻고 있는데 이와 같은 신학을 Open Theism이라고 부른다. ‘미래 불가지론’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이들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하는 사도신경도 믿지 않는다.

(3) 어떤 종교를 믿어도 구원 얻는 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모든 종교는 대등하기 때문에 사람이 선행을 행하면 어느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신학자나 목사들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람들은 1948년에 조직된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에 속한 기독교 지도자들이나 우리 눈길을 끄는 사람은 유명한 전도자 Billy Graham 목사다. 그는 1997년 5월 Garden Grove 소재 수정교회(지금은 없어짐) 담임이었던 Robert H. Schuller 목사가 진행하는 TV 프로그램 ‘Hour of Power’에 출연하여 하는 말이 “선행을 하면 어느 종교도 구원이 있다.”고 하여 큰 파문을 던진바 있다. 이런 사상은 요즘 소위 ‘종교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목사들 중에 상당히 많이 파급되어 있다.

(4) 개신교 목사들이 천주교를 따라가는 경향이다.

Canada Vancouver의 유명한 개신교 신학자 James Packer는 본의 던 본의가 아니던 1995년에 조직된 이른바 ECT(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라는 단체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 있는데 1996년 필자가 서한으로 Packer 박사에게 문의한바 자기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만 그 주동은 Charles Colson이었다고 대답했으나 개신교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거기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John Ankerberg 와 John Weldon 두 분이 공저한 ‘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라는 책을 참고할 것)

로마 가톨릭교회의 구원 교리와 정통 기독교의 구원 교리와는 타협될 수 없는데도 이런 운동은 요즘 개신교 목사들 중에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 여기서 부연하고 싶은 것은 개신교 목사 중 이 운동에 가담했다가 총회원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던 RPCNA 교단의 모 목사님은 즉시 서명을 철회한 사실도 있다. 그 분은 모 대하교의 총장으로 개혁주의 신앙을 꾸준히 전하고 있다.

2003년 2월 19일자 중앙일보 E-22 면에는 장로교 합동 보수파 소속 목사들과 전도사들이 충북 옥천에서 보은으로 가는 길가에 ‘나실 수도원’을 만들어 세상을 등지고 천주교식 의복을 입고 천주교식 수도에 몰두하는 기사가 실렸다. 필자는 기사를 작성한 기자에게 전자우편으로 경위를 문의했는데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이것이 정통 장로 교단에서 생긴 일이기 때문에 기사화한 것이지 만일 이단 집단의 사람들이라면 기사화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라는 것이 그 기자의 답변이었다.

이런 일은 미국 교회에서는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그것이 너무도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New York의 Cathedral of St. John the Divine이라는 개신교 교회에서는 천주교 신부, 이슬람교의 이맘(Immam, 이슬람교 지도자), 불교의 중, 일본 신토교(神道敎, Shintoism)의 사제(司祭) 등이 한 자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또 부활절에는 짐승들을 교회 본당에 끌고 들어와 축복해준다. 이유는 모든 종교는 하나이고 지구는 어머니 신(神)이기 때문에 지구가 낳은 모든 짐승은 우리의 형제자매이므로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식(人間意識)의 진화를 외치다 죽은 프랑스 천주교 신부 샤르뎅(Pierre Teilhard de Chardin)의 가르침을 교회에가 실천하는 현장이다. 이 교회의 목사였던 James Morton는 이 교회 일부에서 화재가 난 후에 교회를 사임하고 지금은 보다 차원 높은 ‘종교간 통일운동’ (Interfaith Movement)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데 유명한 Scotland에 있는 Find horn이라는 New Age 운동본부의 부장이었던 David Spangler 박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Morton 박사는 그의 종교간 통일 운동을 오늘도 열심히 전개하고 있다.(이 분야에 좀 더 알고 싶으신 분은 Samantha Smith 의 The Trojan Horse, Lafayette, La: Huntington House Publishers, 2001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5) 타 종교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늘고 있다.

그 근거는 “절대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내 주장만이 절대적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주장도 내가 주장하는 주장과 같은 비중의 진리가 있기 때문에 나의 주장을 다른 사람에게 수용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되며 그렇다고 남의 주장을 수용할 필요도 없으며 모든 사람의 주장은 대등하기 때문에 남의 종교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그러므로 기독교만이 절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전도’라는 방편을 통해서 “기독교만 진리의 종교이다.”라고 전도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미국 문화를 타락시키는 Postmodernism(후기 근대주의)의 기본 태도이다. 이런 범신론적 사상은 오늘 기독교를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독소(毒素, venom) 중의 하나이다.

(6) 화해를 중요 시 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하고 있다.

올바른 진리와 교리보다 사람이 ‘서로 사이좋게 서로 평화롭게 지나는 것이 더욱 생산적’이라는 견해다. 이런 사고방식은 오늘 어디를 가도 기독교 전반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앙상담을 하다 보면 놀랄 정도로 이런 사고방식에 성도들이 깊이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연실색(啞然失色) 하게 될 때가 많다. 이런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어떤 종교든 종교의 차이는 없고 누가 무엇을 믿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인정하고 화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며, 남을 고쳐 주려고 해서도 안 되며 남을 어떤 이유로든 대적해서도 안 되고 모든 종교와 모든 다른 의견들을 최대한으로 수렴하며 서로 서로 ‘화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에 대한 새로운 신학 용어를 만들어 냈는데 프랑스어로 ‘라프로쉬망’(Rapprochement)이라는 말이다. 이 말에 담긴 사상은 1967년 채택된 미합중국 연합장로교단(UPCUSA) 새 신앙고백서(The Confession of 1967)의 골자다. 이 새 신앙고백서에는 지옥과 천당, 삼위일체, 속죄 등의 말은 없고 오로지 인간 상호간의 ‘화해’만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이 새 신앙고백서를 일명 ‘화해의 신앙고백서’라고도 한다.

이 같은 ‘화해의 신학’은 요즘 널리 보편화되어 있다. 성경은 지상 교회를 전투적인 교회(Church Militant)라고 하는데 교회는 점점 이단과 싸우는 힘은 약해지고 교회가 점점 나약한 여성처럼(feminization) 되어가고 있다. 이들의 말을 들으면 “남을 이단으로 정죄하지도 말고 설혹 이단으로 판명되어도 비평하거나 고쳐 주려고 하면서 얼굴을 붉히지 말고 서로 감싸주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눈감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십자가의 군사로 마귀와 싸우면서 ‘선으로서 악을 대적하라.’는 성경 말씀에 부합하는 신앙 태도인가?

(7) 성경보다 경험 위주로 믿는 신앙풍토가 만연하고 있다.

오늘 날 많은 성도가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개인의 신앙 체험이나 이성으로 신앙생활을 한다. 그래서 예배도 하나님 중심의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가 아니고 소위 ‘열린 예배’(Seekers’ Service)라고 하여 예배 보는 사람들의 기분을 살려주는 인간 중심의 이른바 감정 위주의 예배를 드린다. 그러므로 자연히 예배가 말씀 중심이 아니고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연예 프로그램과 같은 예배로 변질 되었다. 그 결과 유명한 영화배우 간증 집회라고 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도 말씀 중심의 집회는 인기가 없다. 요컨대 진리의 말씀에서 귀를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디모데후서 4:1-8 말씀이 오늘 현대 교회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청교도들의 예배와 설교를 배울 필요가 있다. 1741년 7월 5일 오전 11시 Connecticut 주 Enfield라는 작은 마을에서 마침 본 교회 목사가 사정이 생겨 대신 설교할 목사를 찾다가 설교를 하게 된 Jonathan Edwards가 그 교회에서 한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 40분 설교 원고를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이 설교는 너무도 유명해서 이 설교만 따로 만들어서 P&R 출판사에서 $2.00에 팔리고 있을 정도다. 그 설교는 원래 40분 원고였으나 설교 중에 너무도 청중들이 울었기 때문에 설교 시간이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8) 성경 이외의 계시를 중요시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안식교의 Ellen G. White라는 여자는 평생에 200번의 환상과 계시를 보고 안식교 교리를 만들었고, 모르몬교의 Joseph Smith도 통일교의 문선명도 마친 가지다. 오늘의 빗나간 신앙은 예외 없이 모두 다 성경 이외의 계시나 환상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모세는 환상을 보았다는 사람이나 계시를 보았다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신명기 13장과 18장에 두 번이나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셨다. 신명기(Deuteronomy)라는 말은 헬라어로 ‘두 번째 율법’이라는 뜻이다. 그 신명기에서 환상을 보는 사람을 경계하라고 말하고 있다. 또 계시록 22:18, 히브리서 1:1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에 성경의 계시가 종결되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 날 기독교에는 계시 운동이 너무도 어지러울 만큼 많은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왔다고 하는 사람,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다는 사람, 수술대에 누워 육신을 떠나 내 몸을 보았다는 사람(이것을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OBE 라고 하는데 Out of Body Experience) 등이다.(좀 더 아시고 싶으신 분은 Shirley MacLaine 의 Out on a Limb 이라는 책과 Dancing in the Light 이라는 비교적 서적(秘敎的書籍, occult books)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반박한 사람이 말리부에 있는 페퍼다인(Pepperdine) 대학교 F. LaGard Smith 박사다. 그는 형법학 교수인데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이런 비교에 젖은 학생들을 카운슬링 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근자에는 은퇴하고 영국에 건너가서 저작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가 남긴 명저 ‘Out on a Broken Limb’은 바로 뉴에이지의 환상과 계시를 반박한 책이다.

(9) 번영 신학에 젖어 드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예수를 믿으면 무엇이든 다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제 4차원의 영적세계 같은 책들이 그렇게 주장한다. Kenneth Copeland, Charles Cabbs, Napoleon Hill, Robert Schuller, Norman Vincent Peale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가르친다. 사도 바울이 육신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한 바울의 경우를 보라.(고후 12장)

오늘 날 번영 신학이 TV 설교의 80%를 넘는다고 한다. 예수를 믿어도 암으로 고생할 수 있고, 교통사고를 당할 수 있고, 불신자가 당하는 고통을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이런 일이 없다고 샤머니즘적으로 설교 하는 목사 또 믿는 성도들이 오늘날 많다. 이러한 번영 신학은 분명히 성경적이 아니며 잘못된 것이다. 칼빈은 55세 때에 그의 몸에 27가지 병을 달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Robert Murray McChenye 목사는 26세에 목사가 되어 29세에 세상을 떠났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그의 오른 팔 격인 드로비모는 밀레도에 병들어 누워있었다.

(10) 뉴에이지 운동의 교회 침투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뉴에이지 운동은 오늘 도처에서 부활하는 옛 영지주의를 통해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활발하게 모든 교회에 침투하고 있다. 예배 형식, 설교 내용, 교회 행정은 물론 특히 교회 음악 등에 영향을 주어 교회를 비성경적으로 변질시키고 있다.(이에 대해 John Armstrong 박사의 ‘The Coming Evangelical Crisis’라는 책이나, Hank Hanegraaf 의 Christianity in Crisis, 혹은 Michael Horton가 편집한 ‘The Agony of Deceit’라는 책 또는 Herbert Pollitt 박사의 ‘Interfaith Movement; Invasion of New Age into the Church’라는 책들 참고)

III. 기독교가 변질되어 가는 근본 이유

(1) 성경 예언대로다.

누가복음 18:8에 “인자가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그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우리 앞에 이루어지고 있다. 성경 헬라어 원문에는 믿음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he)가 있으니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고 하나뿐인 믿음 즉 ‘성경적인 믿음’이 분명하다. 오늘 날 ‘믿음’은 많지만 보면 이 같은 ‘성경적 믿음’은 찾아보기 힘들다. ‘성경적인 믿음’이란 바로 하나님의 절대주권, 성경의 절대적 권위 그리고 성경의 생활화를 믿고 실천하는 개혁주의 신앙(The Reformed faith)을 말한다.

(2) 성경 권위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오늘 날 기독교가 변질 되어가는 가장 큰 이유는 많은 신학자와 목사들이 성경을 정확무오(正確無誤) 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고 성경의 권위(權威)를 인정하지 않는데 있다. 성경은 인간의 머리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감과 계시로 기록된 무오(無誤) 한 책이며 그러므로 모든 신자의 삶과 세계관에 최종 권위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과학이나 고고학적으로도 신뢰할 만하며 비(非) 과학적이 아니라 초(超) 과학적이다. 성경은 자연에서 관찰 가능한 참 과학과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참 과학을 하면 할수록 자연과 우주와 생명의 신비에 감탄하게 되며 초월적 설계자의 능력에 감탄하게 될 뿐이다. 성경은 40명이 넘는 저자가 1500년 이상에 걸쳐 기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놀랍도록 완벽한 일관성을 유지하는 성경과 창조주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성경 예언의 그 완벽한 성취들을 보며 성경이야 말로 창조주의 영감으로 기록된 참 진리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인류를 향한 언약들을 미리 선포 하시고, 역사 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언약들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경배하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해 그동안 진화론, 인본주의, 자유주의, 성경 비평 등의 공격으로 세상 사람들 뿐 아니라 심지어 일부 크리스천들까지도 그 성경 내용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바로 이 같은 현상이 오늘 날 성경적인 기독교와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의 변질과 배교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3) 옛 영지주의가 부활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는 기원 1,2세기에 왕성했던 반 기독교적 이론이고 이교도 철학 사상으로 이단이다. Valentus, Mani, Cerintus같은 사람들이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신약 성경 요한일서는 영지주의와의 싸움을 기록한 책이다. 초대교회 때 영지주의가 만연하여 성경적인 교리가 흔들려 교회에 큰 혼란을 빚었다. 이들은 그리스의 신비종교 이원론(二元論, dichotomy)을 도입하여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인성을 부인했다. Cerinthus는 예수님 세례 시 그리스도가 예수님에게 임했다가 그리스도는 죽을 수 없으므로 죽을 때 십자가에서 떠났다고 가르쳤다. 또한 금욕을 장려했는데 사람은 은둔과 금욕생활을 통해서 새로운 특별한 계시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신비적인 계시를 받으라고 가르쳤다. 우리 영혼은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혀있는데 예수님은 이를 해방시키려 왔다고도 가르쳤다.

이 세상에는 선(善)한 신과 악(惡)한 신이 있는데 선(善)한 신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 주고 악(惡)한 신은 그 이름을 Demiurge라고 하는데 그가 우주를 창조하였기에 마땅히 우주만물은 악할 수밖에 없고 구약도 악한 신인 Demiurge가 기록하게 했으므로 구약은 믿을 것이 없으리만큼 악하며 따라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Marcion같은 사람은 구약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고 신약 중에서도 가장 비유대교주의적인 누가복음 중에서도 예수님의 탄생기록은 제외하고 누가복음 4장부터 24장까지만 인정하고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의 13개의 편지 중에서 목회서신 3개를 제외한 10개의 서신만 인정하여 그의 정경은 누가복음 4장-24장과 바울의 10개의 편지(목회서신 제외)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 사도들과 속사도(續使徒)들과 그리고 교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이런 영지주의에 오염 된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이단들과 끝까지 싸웠다.

또한 이들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에덴동산에서 뱀과 여자는 현명한 지도자였고 하나님과 아담은 어리석은 자로 묘사한다. 왜냐 하면 뱀이 지혜를 여자에게 가르쳐 주었고 여자가 아담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는 뱀을 숭상하고 여자를 숭상한다. 뱀은 사탄의 상징인데 여기서 사탄숭배가 나오고 여성숭배가 나오게 된다. 여성숭배는 지구숭배(worshiping the Goddess of the Earth, or Gaia)로 비약하여 하늘은 하나님 아버지이고 땅은 하나님 어머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환경보호론 자들이 나오게 되고(환경 보호론이 뉴에이지와 관계없을 수도 있음) 그래서 지구에서 난 것은 모두 신성하므로 짐승들도 숭상되어야 하고 인간과 짐승이 다를 것이 없다는 진화론이 나오게 된다.

영지주의자들은 특히 은둔생활을 좋아하는데 이유는 특별한 지식이나 계시를 받기 위해서이다. 중세 수도사들이 이를 본받아 수도원에서 많은 세월을 보냈다. 성경은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고 봉사하라고 가르치는데 영지주의자들은 은둔생활을 강조하며 금욕을 강조했다. 육신은 악하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무분별한 금식행위가 성행(盛行)하게 된 것은 이런 영지주의에 기인한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볼 때 오늘의 기독교의 타락상이 어쩌면 그렇게도 옛날의 영지주의와 같은가 하고 탄복하게 되는데 과연 마지막 때에 옛 영지주의가 다시 되 살아나서 교회에 파고들어서 기독교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므로 성도들의 영적 경계가 필요하다. 이는 영지주의가 뉴 에이지라는 사탄의 운동을 통해서 세상의 문화는 물론이려니와 기독교 문화를 타락시켜 교회를 치명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실정이다.

(4) 사탄의 끈질긴 공격 때문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불법의 사람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이다. 사람마다 이 적그리스도가 과연 누구인가 하고 생각하지만 문맥을 보아서 사탄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마지막에 사탄이 성도들을 미혹하여 어느 것이 진정한 복음이고 어느 것이 거짓 복음인지 분간하기 어렵도록 역사하고 있다.

성도들을 미혹한다는 말은 성경 여러 곳과 마태복음 24장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교회를 파괴한다는 말이다. 사단의 목적은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으로부터 떠나게 하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진리인지 분간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오늘 날의 교회에서 그런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음을 영안(靈眼)이 열린 성도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IV. 기독교의 변질에 대한 대책

(1) 시대와 말씀을 분별해야 한다.

마태복음 18:1에 “천기는 분별하면서 시대는 분별하지 못하는가?”라고 말씀했다. 영적무장이 필요한 때이다. 사람들은 오늘의 교회의 현실을 외면하려고 한다. 때가 악하여 세상을 이길 지혜가 필요하다. 복음이 만방에 전파된다지만 진리의 복음보다 인본주의 복음이 퍼져나가고 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사도행전 17장 뵈레아 성도들처럼 “그것이 절말 그러한가?” 성경과 설교 내용을 대조 연구해 보라. 얼마나 잘 못된 교리들이 여과 없이 그냥 그대로 흘러나오고 있는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2) 체계(體系) 있는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

그릇된 스승에게 배우면 잘못될 수밖에 없다. 많은 신학교의 미 자격 신학교수 밑에서 배워 졸업한 후 안수 받고 남을 가르치게 되므로 필연코 이상한 교리를 가르치게 되어 많은 이단이 출현하게 된다. 신학교에 갈 분들은 신학교 선택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어떤 신학교에 가도 신학 공부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크게 잘 못된 것이다.

성경에 모순이 있다고 가르치는 학교에서 성경의 무오를 믿는 학생이 3,4년간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고역이겠는가? 신학교가 많지만 하나님의 절대주권, 성경의 절대권위, 성경의 생활화를 믿고 가르치는 신학교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잘못 된 신학교에 들어가면 잘못 된 신학을 배우고 바른 신학이 아니면 설교를 듣는 사람의 영혼을 독살하는 결과가 된다. 나쁜 공장에서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불량 제품만 생산할 뿐이다.

그리고 사명감 있는 사람만 신학교에 들어가야 한다. 부흥회에서 은혜 받고 즉흥적으로 신학에 뛰어 들면 반드시 나중에 후회한다. 신학은 모든 학문의 여왕 이라고 한다.(The Queen of Sciences) 올바로 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어렵다는 말이다. 신학을 바로 배우지 않고 적당히 졸업하여 목사가 되어 설교한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 심히 가증한 일이다. 신학생들은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으로 자만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은 신학생이 아닌 일반 성도들도 모두 하는 신앙의 기본이다.
나를 가르치신 교수님 중 한 분은 “If you do not want to read books, get yourself out of my sight.”라고 강의 때마다 말씀하셨다. 유명한 변증학 교수 Cornelius Van Til 박사의 말이다. 신학교에서 교수들의 책을 충분히 읽히지 않고 공부를 제대로 시키지 않고 학점을 주어 졸업시켜 적당한 목사고시로 목사를 만들면 목회 현장에서 회중에게 독약을 먹이는 결과가 되므로 결국 교수들과 신학교들이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의 진노를 무엇으로 감당할 것인가?(고후 5:10)

또한 일반 성도들은 내 영혼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 오늘 날 양의 옷을 입은 이리가 교계에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신학교는 많고 졸업생은 해마다 수없이 나오고 모두 전도와 선교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개척해 사역해도 신학과 목회자의 윤리와 도덕을 겸비한 분들을 만나서 성경공부 하기가 매우 어려운 시대이다.

(3)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한다.

성도는 항상 깨어 누구나 기도해야 한다. 깨어 있으면 세간을 늑탈 당할 염려가 없지만 잠을 자거나 졸면 세간을 도둑(사탄)에게 늑탈 당하고 생명까지 위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서 오늘이 나의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근신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원수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기 때문이다.

(4)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

이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언제인가 반드시 종말이 온다. 기독교의 종말관은 토인비의 말대로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고 일직선으로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을 맞는 일반 종말과 나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는 개인 종말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한다.

일반 종말의 징조는 ‘사람들이 믿음을 버리고 배교한다는 것’이 가장 분명한 주님 재림의 징조이고 개인 종말의 징조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성도는 인생대학을 졸업(죽음)하면 천국 초청장이 오게 마련인데 어떤 성도는 아주 젊은 나이에 어떤 성도는 중년에 또 어떤 성도는 늦은 나이에 찾아오지만 문제는 아무도 자기의 종말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하루 주님을 만날 그 날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일이 중요하다.

(5) 각 개인의 영적무장에 충실해야 한다.

지금은 각자 개인의 믿음을 지켜 나가야 할 때이다. 왜냐면 교파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교회법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말은 교회에 출석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교회는 주님 다시 오시는 세상 끝 날까지 존속해야 하며 성도는 “그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라”고 히브리서 10:25에 명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출석하여 예배드려야 한다. 문제는 교회에서 말씀이 바로 선포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 그 어느 시대보다도 어려운 때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말씀이 너무나 혼미하고 혼탁한 시대이다. 이런 일은 주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더욱 악화될 것이다. 성경은 이런 때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마태복음 24장에서 경고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잘 무장 된 성도만이 이 시대를 지혜롭게 이겨 나갈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영적 전재의 무기다. 성경을 모르면 속게 되고 넘어진다. 영적 전쟁에 패배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한다. 또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 말씀으로 구약의 모든 말씀이 신약에서 성취된 것처럼 성경의 모든 말씀은 반드시 다 성취되고야 만다는 진리를 믿어야 한다.

결 론

이 시대의 기독교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교회의 숫자는 늘어가고 성도의 수는 늘어간다고 하지만 반대로 성경적인 진리와 복음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우리는 지금 주님이 원하시는 참 복음은 듣기 어려운 때에 살고 있다. 성경대로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항상 깨어 기도하며 말씀을 통한 영적무장으로 비성경적인 잘 못된 교리들을 분별하고 말씀을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유 3)(*) 글쓴 이 / 김명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