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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개혁주의 예배의 이해

301051“진실로 예배의 본질과 내용과 방식은 예배의 대상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예배에 대해 이보다 명료하고 강력한 선언은 없을 것이다. 예배는 기독교의 꽃이며, 성경의 주제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수이며, 인생의 절정이며, 영혼의 잔치이며, 최고의 사건이며, 복 중의 복이다.

1.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이다.

예배의 관건은 무엇보다 누구에게 예배를 드리느냐에 달려 있다. 진실로 예배의 본질과 내용과 방식은 예배의 대상에 의해 좌우된다. 온 세상에 인간의 종교성이 발휘된 온갖 종류의 예배를 일별해 보라.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에 근거하여 우상숭배 가능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숭배의 대상이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물속에 있는 것들일 수 있겠고, 거기에 그것들을 숭배하는 주체의 다양성을 더한다면 예배의 종류는 천문학적 숫자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이렇게 선포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라!” 예배의 대상을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예배의 대상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생각할 때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속성은 육체가 아니라 영이시라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는 요구되는 예배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빈곤하면 비록 영이신 하나님을 경배한다 할지라도 ‘알려지지 않은(알지 못하는) 신(神)’에게 경배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경배의 진정한 개념도 애매해질 것이고, 예배의 합당한 방법에도 무지할 수밖에 없다. 바울은 이러한 ‘알지 못하는 신’에게 경배하는 아테네 지성인들의 빈곤한 신(神) 개념과 제단을 쌓고 사당을 세우는 그들의 인위적인 방식에 엄중한 경고를 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의 손으로 지어지거나, 영원 전에 계시지 않으셨거나,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을 그 이유로 설명했다.

2.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 드려야 한다.

아테네 이방인의 무지와 달리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에 대한 오해가 있었는데 예배의 유일한 처소가 예루살렘 지역뿐이라는 것이다. ‘백 투 더 예루살렘 운동’(Back to the Jerusalem Movement)도 어떤 특정한 지역에 과도한 종교성을 부여한 지역주의 맹신의 희생물이 아닐까 싶다.

사마리아 여인도 유대인의 ‘지역주의’를 듣고 오직 예루살렘 지역을 예배의 처소로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는 ‘여기서도 말고 저기서도 말고’ 즉 하나님은 물리적인 장소에 매이는 분이 아니시라고 하셨다. 이는 예배 장소를 어느 특정한 장소에 특별하고 신비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에도 계시며 누구와도 만나시며 언제든지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이다.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순서가 구비되지 않으면 예배가 불가능한 것처럼 어떤 인위적인 조건에 의존하는 분이 아니시란 말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분이시다. 이러한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지구상의 어떤 지점이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한다.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진리 안에서만 구현될 수 있는 일이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영적인 예배’와 ‘올바른 예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적 차원에서 영으로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신다. 그런데 영혼은 어떤 식으로도 꾸며지지 않는 곳이다. 예배의 무늬만 갖추는 가식이나 연출이 불가능한 곳이다. 우리의 타락과 비참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는 곳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자로 발견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 같은 우리 영혼의 추한 실상을 생각하면 우리에겐 도무지 예배자의 자격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절망의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필요는 없다. 우리를 하나님의 거처로 삼으시고 영원토록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이 계신다. 거룩한 영이신 이 성령 하나님의 내주 때문에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

이 같이 창조주 하나님을 피조물 인간이 예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가슴에서 터지는 감격과 눈물을 쏟아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히는 크고 무한한 은혜가 바로 예배인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만 강조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신비로운 황홀경을 예배의 지고한 경지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모든 것이 정지된 고요한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엘리야가 보여준 주님과의 신비로운 만남과 연합의 사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이시라 할지라도 영혼의 신령한 상태만이 예배의 전부가 아님을 예수님은 “진리 안에서”란 말을 추가하여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있다. 이 진리는 우리의 영혼에만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삶을 의미하는 우리의 몸과도 분리될 수 없다.

여기서의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이며 그 말씀이 육체로 오신 예수시며 성경 전체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란 방식은 결코 예사롭지 않으며 성경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이는 예배가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이면서 동시에 성경 전체와 관계된 것이라는 말이 된다. 나아가 성경은 그 전체가 우리의 신앙과 인격과 삶의 규범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의 전인격과 전 생애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결부되어 있다.

3. 성도의 삶이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라는 사도 바울의 권고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생각 해 볼 때 자칫 바울이 예수님의 예배에 대한 말씀에 무례한 대립각을 세우는 것 아니냐는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몸과 영을 서로 대립적인 쌍극으로 이해한 이원론적 사유에의 우리의 무의식적 적응이 빚은 선입견일 뿐이다.

인간의 영혼과 몸을 과도하게 분할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영과 몸은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서로 조화하고 상응하여 한 인격체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배제될 수 없다. 바울은 몸이 하나님께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지는 것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와 무관한 다른 예배가 아니라 ‘영적 예배’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몸의 배제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이해해야 한다.

몸은 우리의 삶을 의미하고 우리의 삶은 진리와 분리할 수 없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의 내용이 12장에서 밝힌 ‘몸의 산제사’를 가능하게 하는 성경 전체의 영적인 구속사적 가르침을 요약하고 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말씀은 영(靈)이다. 그리고 말씀은 우리의 몸과 영에 모두 관여하고 있다. 몸 또한 우리의 삶이다. 몸이 없으면 삶도 없다. 그러므로 몸이 거하는 모든 곳에서는 어디서든 예배가 드려질 수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루살렘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배에 대해 원천봉쇄 당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온 세상에 흩어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과 진리 안에서만 경배를 받으신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거하시지 않고 진리를 벗어나서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거룩한 영이 내주하시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드릴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영으로 믿고 알고 몸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만이 진정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이처럼 최고로 복된 삶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또한 예배이기 때문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살았어도 죽은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9

그런데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 전체가 거룩하고 영적인 예배라는 바울의 권고를 빌미로 삼아 오늘 날 유형의 교회와 예배 형식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즉 모이기를 힘쓰고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하는 기독교의 장구한 전통을 무시하고 예배의 처소가 장소적 제한을 받지 않는 다는 주님말씀을 핑계 삼아 자신의 기호와 편의대로 공적인 예배를 무시하고 계속 TV와 같은 영상물 앞에 앉아 예배드리기를 고집하는 것은 성경적인 바른 예배를 없애려는 사단의 속임수이다.

마치는 말

주일에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것은 성경에 뿌리를 둔 것이다. 그리고 주일이나 다른 날들에 드려지는 구별된 예배를 통해 우리는 영과 진리 안에서 몸으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의 본질과 범례를 배우고 익히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삶의 모든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영적 예배로 드려지고 있는지도 점검할 수 있다. 하나를 취하면 다른 것은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아무데나 아무 때나 적용하는 고질적인 악습은 이제 기독교에 발을 디디지도 못하도록 조속히 근절해야 할 것이다. 모순처럼 보인다고 버리면 기독교의 진리는 남아나는 게 거의 없을 것이다.

고로 먼저 영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않으면 누구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고, 성경 말씀의 의미도 모르고, 어떤 삶이 바른 삶인지도 모를 것이다. 기억할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예배하고, 진리를 깨닫고, 그만큼만 성도다운 삶을 살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이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 자가 되기를 항상 힘써야 할 것이다.(*) 글쓴 이 / 한병수 목사(Acts 교수,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