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

예정과 인간의 책임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

예정과 인간의 책임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
한 학생이 내게 질문했다. “교수님, 예정에 대해 설명 좀 해 주세요. 예정이 정말 성경에 있습니까? 성경에 있다면 어디에 있습니까? 제 친구는 예정이 맞는다면 전도는 왜 하느냐고 질문을 해서요.” 아마 오늘 날 장로교 교인들과 감리교 교인들이 대화를 하면서 가장 충돌이 많은 부분이 예정교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학생도 감리교 교인과 대화 후에 이 같은 고민에 빠져 내게 질문한 것이다.

성경은 예정에 대해 뭐라고 가르치는가? 성경은 예정교리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나는 에베소서 1:4,5의 말씀을 찾아 보여 주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셨다고 가르친다. 여기뿐만 아니라 로마서 8:29,30에도 예정교리가 나온다.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들을 미리 아셨고 미리 정하셨고 또 그들을 부르셨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또 로마서 9장에는 하나님이 야곱은 선택하시고 에서는 버리셨다고 말씀하는데 이는 분명한 예정교리를 입증하는 실례이다. 야곱과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는 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래서 이런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어거스틴이나 칼빈 등은 예정교리를 믿었다.

그런데 우리가 예정교리를 말할 때 조심할 점이 있다. 만약 예정 교리를 숙명론적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이 이미 믿을 사람과 믿지 않을 사람을 정하셨으니 전도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실제로 미국교회 역사에 있었던 일이다.

19세기 미국의 한 교단은 세계에 선교사들을 파송하면서 아시아 지역에는 선교사 파송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예정교리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예정한 사람은 믿을 테니 선교사를 파송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생각이 성경적인가? 아니다. 성경은 가서 말씀을 전하여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명하고 있다.(마 28:18-20) 침례교단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이 명령에 잘 순종하여 세계에 선교사들을 열심히 파송했다. 그래서 사실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는 침례교회가 많다. 단 아시아 국가 중에 한국만이 예외적이다.

우리가 예정교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예정교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전도할 필요가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예정한 사람은 다 믿을 테니 내가 전도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라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은 성경을 한쪽 면만 강조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예정하셨지만 우리 인간은 누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거절했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의 예정에 없는 사람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그가 나중에 예수님을 믿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그 사람이 마치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처럼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성경은 복음을 전하라고 수없이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이는 예정 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외 없이 누구나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만 예수 믿고 구원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을 미리 예정하신 동일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선을 다해 말씀을 전하도록 명하시고 동시에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기를 원하신다는 사실도 말씀하셨다. 우리가 전도할 때는 이런 말씀을 기억하고 최선을 다해서 전도해야 한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면 그 영혼이 구원을 받을 것처럼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에 분명한 이 예정교리를 반대하여 구원이 인간의 결정에 달렸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가 있다. 성경 중 어떤 말씀은 인간의 구원이 인간 자신의 결정에 달린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예정교리를 믿는 장로교 교인이 알미니안 교리를 믿는 감리교 교인과 대화하면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내게 질문한 학생도 자신과 대화를 나눈 그 감리교 교인이 “만약 모든 것을 예정한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까지 말했단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모순처럼 보이는 교리를 접근해야 하는가? 해결책은 성경대로 믿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한다. 한편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미리 작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즉 성경은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복음 전파를 위한 인간의 노력 둘 다 강조한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교리적인 시각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성경을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달렸다고 본다.

예정교리는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시각에서 설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를 예정하셨다고 가르친다. 이 예정은 자연적으로 유기를 수반한다. 그런데 후자는 구원을 인간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구원은 자기가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린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말한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예정하셨다면 예수를 믿게 될 겁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마치 복음을 듣는 자가 결정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처럼 복음을 전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말씀 전도의 방법으로 택하신 자들을 예수 믿고 구원 받도록 그 방법을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그러므로 나는 장로교 교인으로서 내가 분명하게 믿는 것은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외치지만 복음을 듣는 자가 마음 문이 열리는 역사는 반드시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이다.(고전 12:3)

개혁주의 기독교 변증학자 반틸(Conelius Van Til, 1895-1987)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제한 개념’(limiting concept)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우리가 성경 말씀 중 하나님의 주권만 보고 인간의 책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경 말씀 중 인간의 책임만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의 주권을 침범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성경이 동시에 가르치는 교리이다. 반틸은 이렇게 이 두 개념이 서로에게 제한을 가한다고 해서 ‘제한 개념’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만 강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전도할 필요가 없다고 오해하게 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 받기 때문에 구원이 마치 인간의 선택에 달린 것처럼 주장해서도 안 된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말씀하고 있다. 동시에 성경은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행16:31)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구원도 없다.

성경에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모든 것을 아신다고 했다. 그러면 기도할 필요가 없는가? 그런데 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명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지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성경의 어떤 교리는 이처럼 외관상(apparent contradiction) 모순처럼 보인다고 반틸 교수는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생각을 유한한 인간의 머리 안으로 집어넣어 제한하려는 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글쓴 이 / 김진규 교수(백석대학교 구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