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31) 소요리문답 강해

웨스트민스터(31)
소요리문답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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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6 문 칭의, 양자, 성화와 함께 받는 성도의 유익이 무엇 입니까?

답 :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아는 것과, 양심이 평안한 것과, 성령 안에서 얻는 기쁨과(1) 은혜의 증진과(2) 끝까지 굳게 참는 것입니다.(3)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 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 5:1,2,5)
(2)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8)
(3)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 받는 길이 꼭 칭의(의롭다 하심), 양자(자녀 삼으심), 성화(거룩하게 하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왜 요리문답은 칭의, 양자, 성화를 더 강조하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칭의, 양자, 성화는 구원에 절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 은혜가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모든 성도는 의롭게 되었고 양자가 되었고 성화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모든 성도가 이 같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칭의, 양자, 성화의 은혜 외에 또 다른 은혜들도 모두가 다 항상 꼭 같이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기쁨, 평안, 치유, 은사, 구원의 확신 등 구원 받은 성도의 또 다른 여러 가지 은혜들이 칭의, 양자, 성화에 동반하거나 혹은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기쁨, 평안 등의 은혜는 독립된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위에 언급한 칭의, 양자, 성화의 은혜들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구원 받은 성도가 갖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확신을 생각해 보자. 성도라면 누구나 다 언제나 이 구속이 주는 유익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최소한 두 가지 경우를 보면 명백하다.

(1) 회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사람임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그가 이것을 알기에 충분할 정도로 성경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격려해 주는 말씀들이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힘써 너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확신)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확신케) 하려 함이라.”(요일 5:13)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자마자 누구나 그 즉시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2) 베드로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부인하였고 다윗이 간음죄를 범한 것을 보면 이 같은 자신의 죄와 허물 때 문에 스스로 자신의 구원에 대해 의심할 수도 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2)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 51:8) 시편에는 이러한 확신의 결핍에 대한 표현이 많이 있다. 그러나 거듭나 회개하고 의롭게 되고 양자가 된 사람들을 하나님은 결코 버리시지 않기 때문에 구원 받은 사람도 어떤 때는 잠시 동안 구원의 확신을 잊어버리나 다시 그것을 회복 할 수 있다. 즉 힘써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함으로써 다시 구원의 확신이 회복 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성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의 책임 사이의 중요한 관계를 본다. 하나님은 어떤 참 신자가 일시적으로 마땅히 할 바를 하지 못한 때라도 그를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 그러나 잘못을 범한 성도 자신이 자신의 길을 돌이키려고 힘쓸 때까지는 그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확신을 일시적으로 갖지 못 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2. 구원의 확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또 하나의 유익은
양심의 평화와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때, 자신의 양심의 증거와 내적인 기쁨을 말했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딤후 1:3)

성도의 양심은 평화스럽다. 왜냐하면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고 서서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도에게 기쁨을 준다. 우리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의 형벌을 갚으셨다는 것 보다 더 큰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도가 부지런하고 충성스러울 때 구원의 확신으로 얻게 되는 모든 유익들이 더 풍성해 진다.

반대로 성도가 신앙생활에 부지런 하지 못할 때는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어느 기간 동안 잃어버릴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다윗이 죄에 빠겼을 때 그는 일시적으로 구원의 확신을 잃었을 뿐 아니라 양심의 평안과 성령 안에서의 기쁨도 잃었다. 그 때문에 그는 “당신의 구원의 기쁨을 내게 돌이키소서.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했다.(시 51:10,11)

3.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도 타락할 수 있는가?

다윗이 죄에 빠겼을 때 일시적으로 구원의 확신과 양심의 평안과 성령 안에서의 기쁨을 잃었다는 말은 참 성도도 타락할 있다는 말인가? 대답은 참 성도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 성도도 하나님께 충성하는 가운데서도 타락할 수 있다. 그러나 또 우리는 동시에 “아니다. 참 성도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서 결코 떨어질 수 없다.”고 대답해야 한다. 예를 들어 큰 배를 타고 가는 어떤 사람이 주의하지 않는다면 배 갑판 위에 넘어져 다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배는 매우 크고 안전해서 그는 결코 바다로 떨어지지는 않는다.(스펄전의 비유)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참 성도라 할지라도 그의 생활 속에 때로는 넘어지고 죄를 지어도 항상 주의 은혜가 끈이지 아니하며 끝까지 인내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렇게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구원의 서정의 여덟 번째 단계인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of the Saints) 교리이다.

4.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1) 성도의 견인교리(堅忍, 참고 끝까지 붙듬)

하나님이 한 번 선택하여 부르시고 중생시켜 회심하여 칭의 된 양자는 결코 하나님의 버림받지 않는 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붙잡고 있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9) 그러므로 한 번 하나님의 자녀 된 자는 궁극적으로 반드시 구원의 완성에 이른다는 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자녀 된 자가 할 일이 있다. 성도 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 주신다(견인교리) 해도 우리가 끝까지 참고 견디며 싸워 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직도 육체를 가지고 있는 성도가 사는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기에 세상과 싸워 이기도록 하나님이 성도의 믿음을 강화하며 증진시키기 위해 때로는 의도적으로 시련과 고난을 주시거나 허용하시기 때문이다.

(2) 그러나 성도의 견인교리가 눈에 보이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무조건 다 구원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도의 견인교리는 또 눈에 보이는 가견(可見)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다 끝까지 인내 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니다. 교회의 일원이었으면서도 가롯 유다처럼 결국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회가 나간 것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라.”(요일 2:19)고 말했다.

이 말은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자가 ‘은혜 밖으로’ 떨어져 나간 것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은혜를 받은 자들이 아니라 단지 사람들을 속이는 그들의 거짓 행동이 일시적으로 사람들에게 참 성도처럼 보였고 은혜 안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3) 성도의 견인교리는 성도가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뜻도 아니다.

왜냐하면 요리문답이 말하듯이 성도의 견인이란 반드신 칭의, 양자, 성화와 함께 따르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회개하지 앉았거나 성령이 그의 속에 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끝까지 붙드심(堅忍)은 결코 그런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리고 진정으로 회개한 성도가 예전과 같은 죄 가운데서 계속 생활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속에 성령이 거하는 성도가 죄와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죄와 대항하여 싸우게 된다. 왜냐하면 성도가 자주 넘어진다고 해도 다시 일어서서 죄와 대항하여 싸워 이기기까지 참 성도는 결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4) 성도의 견인교리는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도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물론 구원 받은 성도는 구원을 이루기 위한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 한다. 또 자기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 위해 힘써야만 한다. 또 거룩하게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으로 볼 수 없다. 참 성도는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이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행하지만 그 또한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다. 또 은혜 가운데 인내할 때에 전적으로 찬양받아야 할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사망에 이르는 죄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후 다시 그리스도로부터 돌아서는 사람들의 죄이다. 이런 죄를 참 신자는 결코 범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낳으며 그를 지키시며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요일 5:18) 그리고 홀로 찬양을 받아야 마땅한 분은 분명히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신자가 자신을 영구히 지킬 수 있는 은혜(새로운 의지와 능력)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칭의, 양자, 성화와 함께 받는 유익한 은혜들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굳게 하기 위하여 성도 개개인이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이렇게 구원함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굳게 하기 위하여 힘쓰고 열심을 다 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글쓴 이(편저) / 정은표 목사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