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종교개혁과 그 후 우리의 역사적 과제
칼빈의 종교개혁과
그 후 우리의 역사적 과제
오는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된다. 그래서 루터의 제자 필립 멜란히톤(Philip Melanchton, 1497-1560)이 전무후무한 ‘유일한 신학자’(the theologian)라고 했던 존 칼빈(Jean Calvin, 1509-1564)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한다. 칼빈은 만 55세의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가 남긴 개혁신학의 업적은 아직까지도 개혁파 교회를 움직이는 큰 기둥이다.
이러한 칼빈의 신학과 신앙을 핵심적으로 살펴보면서 개혁신학과 신앙을 계속 이어 발전시켜 나가야 할 우리의 시대적 사명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칼빈의 신학과 신앙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데 첫째는 교리교육의 중요성이고 둘째는 칼빈 신학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이다.
I. 신앙고백 교육자로서의 칼빈
칼빈의 생애를 돌아볼 때 특별히 관심을 끄는 것은 그의 신학이 일평생 교회라는 목회 현장과 분리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칼빈의 저서와 목회 중심에는 항상 교육(instruction)이 있었다는 말이다.
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이요, 목회의 기둥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육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삶을 평생 지속해 나가는 것이 바로 신앙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1536년 3월
1536년 3월 ‘기독교강요’ 초판 발행 후 칼빈은 잠깐 다녀갈 계획으로 제네바에서 하루 밤 묵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순회 설교자로서 제네바 시(市) 개혁에 열정을 쏟고 있던 파렐(William Farel, 1489–1565)의 방문을 받고 그의 강권에 붙들려 그곳 제네바 교회를 섬기게 된다. 칼빈은 당시 제네바 교회의 상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름대로 열심을 내고 있었으나 개혁은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혼란 가운데 있었다.”
1536년 11월
칼빈은 먼저 21개의 짧은 조항으로 이루어진 ‘신앙고백서’를 제네 바 시의회에 제출하여 시민들이 복음의 본질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작업을 통하여 제네바 교회는 좀 더 구체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단절하게 되었고 칼빈의 입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개혁신앙을 전개할 수 있는 초석을 놓았다. ‘확실한 신앙고백’이 교회의 반석이라는 생각은 이미 이때부터 칼빈의 심중에 움직일 수 없는 확신으로 자리 잡았다.
1537년 1월 16일
계속해서 칼빈은 ‘제네바 교회 조직과 예배에 관한 소논문’을 제출함으로써 본격적인 개혁 교회의 형성을 시도하는데 이 문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강조하였다.
– 매주 성찬 시행을 위한 치리회의 구성,
– 교회에서의 시편 찬송의 확립,
– 어린아이들에 대한 신앙교육,
– 옛 교황주의(敎皇主義) 체제에 근거한 혼인에 관한 법률 개정
그리고 곧바로 세 번째 어린아이들에 대한 신앙교육의 구체적인 실천을 위하여 ‘신앙교육서’(Instruction in Faith)를 작성하였다. 불어로 작성된 이 신앙교육서는 33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내용에 있어서 기독교강요 초판의 사상이 많이 반영되었다. 칼빈은 또한 다른 교회들을 위해서 다음 해에 이것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신앙교육서의 본래 제목에 ‘신앙고백’(Confession)이라는 단어가 제시되고 있었던 점이다. 이는 ‘신앙고백의 중요성’과 ‘교육의 중요성’이 칼빈의 신앙에 있는 기저(基底)임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1538년 4월 23일
하지만 칼빈의 이와 같은 숨 가쁜 급속한 개혁 작업은 기득권의 반발을 초래했다. 제네바 시(市) 의회(議會) 측은 성찬용 떡을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가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사용하라고 지시한 자신들의 말을 칼빈이 거부했다는 이유로 시 의회는 칼빈 일행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후 제네바 시(市) 의회는 뒤늦게 칼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를 다시 초청하였다. 칼빈은 몇 번을 망설인 끝에 ‘신앙교육서’와 ‘치리서(治理書)’를 제정하는 것을 조건부로 제네바로 다시 돌아왔다.
1542년 초
이렇게 해서 칼빈은 오늘날 우리에게 ‘제2의 신앙교육서’ 또는 ‘제네바 교리문답’으로 잘 알려져 있는 새로운 형태의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어 제네바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교육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33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던 첫 번째 문서를 개정한 것으로 373개의 문답 형식으로 구성되었으며 1년에 1차례씩 교육하기에 편리하도록 55주일 분량으로 편성되었다.(참고 개혁신앙 27,28호 부록에 전문 수록 됨)
II. 교회와 신앙고백의 불가분리성
요즈음은 명확한 신앙고백을 하지 않아도 쉽게 교인이 될 수 있는 혼란한 시대가 되었지만 온전히 성경에 충실하고자 했던 칼빈의 입장에서는 명확한 신앙고백이 없이는 교회도 성립될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는 칼빈이 영국의 통일령(Act of Uniformity)을 발표한 왕으로 잘 알려진 에드워드 6세(Edward VI, 1547-1553)의 섭정(protector)이었던 서머셋 공작(the Duke of Somerset)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공작이시여! 하나님의 교회는 교리문답이 없이는 결코 보존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씨앗과 같아서 세세토록 증식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기독교는 ‘문자로 된 양식’으로 가르쳐져야 합니다. 그러한 교리교육은 일치를 도모하며, 목사들과 교육 관련자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사람들이 교만한 자들과 환상이나 기이한 것만을 탐구하는 자들에 의해 미혹되지 않게 해줍니다.”
이렇게 칼빈은 교리문답이 교회의 순결과 보존에 미치는 절대적인 중요성에 대해 역설한다. 칼빈의 이와 같은 정신에 따라 이후로 개혁파 교회에서는 신앙고백과 교리문답 작성이 일종의 전통을 형성하게 된다.
물론 신앙고백 교육에 대한 강조가 칼빈에게서만 드러나는 독창적인 특징은 아니다. 칼빈에 앞서서 개혁을 시작한 루터 역시 교리문답을 작성하여 신앙의 도리를 회중들에게 가르쳤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의 내용을 가르친다.’는 개념이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 이것을 교회의 정체성과 직결시켰다는 데서 다른 개혁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만의 특유의 독창성이 된다.
다소간 직설적인 지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느 사이인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교회의 정체성 혹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슬그머니 변질되어 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말씀의 순수한 선포, 성례전의 순결한 시행, 권징의 확실한 집행 등의 이 세 가지는 교회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절대적인 표식(標式)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세 가지 교회의 표식은 예외 없이 정확한 신앙고백 혹은 교리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소위 현실이라고 하는 편리한 상황은 어떠한가? 신앙고백 학습과 신앙고백 유지에 비중을 두고 교회를 생각하는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 스스로 덫에 걸리지 않았나 생각해보게 된다. 신앙고백이 흐지부지 되는 한, 우리가 그렇게도 열심을 내서 교회를 개척하고 부흥시키고 하는 등등의 일체의 사역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말을 하면 대개 이성적으로는 동의한다. 하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부정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덫에 걸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뉴질랜드 개혁교회의 경우 목사는 전통적으로 매주일 오후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으로 설교한다. 그러므로 한 교회에서 20년간 신앙생활을 한 성도의 경우 그는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설교를 무려 20년간이나 반복해서 듣고 배웠다는 결론이 된다.
이미 주지의 사실이지만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철저하게 칼빈주의 신학이 반영된 신앙교육서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정립된 신앙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참으로 정돈된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진정한 구원의 기쁨과 확신에 근거한 신앙인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개혁교회의 성도로서 종교개혁의 빛나는 역사적 유산을 계승한다고 할 때 진정 가져야 할 관심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을 때 바로 그의 그와 같은 신앙고백을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겠다고 선포하셨다. 칼빈에게 있어서의 교회개혁 혹은 참된 교회의 형성이란 이 ‘신앙고백’을 명확하게 확정짓는 일이었다. 칼빈은 온갖 방해와 핍박을 무릅쓰고 일평생 이 일에 매진하였고, 그의 설교와 저술과 기타 여러 서신들 역시 바로 이 참된 교회의 형성을 위한 수단들이었다.
우리가 종교개혁을 기념하면서 칼빈을 본받거나 기린다고 할 때의 의미는 이런 것이어야 좀 더 현실적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예정론과 같은 신학적 논쟁과 이론에 대한 추상적 논의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다소간 방향을 빗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III.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네바에서 추방된 칼빈은 바젤에 들렀다가 스트라스부르그로 옮기게
된다. 이곳에서 칼빈은 프랑스 난민 교회를 섬기면서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재판(1539)을 발행하게 되는데 초판(1536)이 총 6장이었던데 비하여 이번에는 3배의 분량인 17장으로 많이 늘어났다. 칼빈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각별한 인상은 그가 ‘한권의 책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 ‘한권의 책’이란 바로 ‘기독교강요’를 가리킨다.
그는 기독교강요를 무려 23년간에 걸쳐서 꾸준히 증보하고 또 증보해 나갔다. 따라서 1599년에 최종판(5판)이 나왔을 때는 단권(單券) 6장이었던 초판이 무려 4권(四券) 80장으로 늘어나 있었다.
하지만 칼빈의 이와 같은 저술 작업은 철저하게 계획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있으면서 또한 그의 최초의 주석인 로마서를 발간하게 되는데 기독교강요를 읽으면 자신이 앞으로 성경들을 왜 그런 방식으로 해석하게 되는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로마서 서문에다 밝혀놓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칼빈의 연구로 말미암아 후기 개혁파 교회는 신학에 있어서 큰 빛을 보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진 빚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아직도 기독교강요는 개혁파 교회 신학 권역(權域) 내에서는 불후(不朽)의 명작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나타날 좀 더 발전된 진리를 위한 원천 노릇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합동신학대학원의 조병수 교수는 “나는 칼빈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계속해서 쾌거가 일어난다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IV. 칼빈의 저술 활동과 교육적 동기
칼빈은 평생 기독교강요를 증보한 것 외에도 또한 평생토록 성경을 주석하였다. 그가 주석한 성경은 몇 권을 뺀 거의 전부이다. 그의 생명이 조금만 더 연장됐더라면 틀림없이 성경 전체를 주석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설교에 있어서도 거의 성경 전체를 설교했다.
게다가 그는 끊임없이 주변의 신학자들과 서신을 교환했는데 멜랑히톤, 불링거, 부처 등등의 사람들과 신앙을 논하기 위하여 쓴 편지는 무려 4,271통에 이른다. 끊임없이 괴롭히는 갖가지 병마와 55년의 평생을 싸워야 했던 칼빈의 건강 상태까지 염두에 두고 생각해본다면 그의 능력은 가히 초인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칼빈의 그와 같은 저술의 동기에 대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자 하는 교육적 동기가 그와 같은 방대한 저술 활동의 배경이다. 그가 기독교강요 초판을 발행할 때에는 당시 박해 속에서 모함을 받던 자국 동포들을 변증하기 위한 의도가 다분했지만 결국 그것 역시 ‘바르게 가르친다.’는 성격과 분리되지는 않는다. 변증이라는 개념은 자체에 이미 올바른 것을 제시함으로써 상대방을 설득하고자 하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칼빈의 교육적 동기 문제와 관련하여 간과되어서는 안 되지만 아쉽게도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오늘날 ‘눈높이’ 개념과 관련되는 것이다. 칼빈이 제네바 교회 사역 초기에 어린이들을 위한 ‘신앙교육서’를 작성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앞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신앙교육서의 내용이 어떠한가? 이 신앙교육서는 오늘날 우리네 교회의 형편에서 볼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당히 어렵다고 판단하리라고 여겨지는 그런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령, 신앙교육서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무리 미개하고 야만적인 인간이라도 종교에 대한 어떤 생각을 타고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우리의 창조자의 위엄을 인식하기 위하여 창조되었고….” 기타 신앙교육서의 내용에는 ‘죄와 죽음’(6절), ‘선택과 예정’(13절), ‘회개와 중생’(18절) 등등의 어려운 신학적 용어들이 거침없이 등장한다.
이와 같은 내용을 학습 받아야 하는 대상이 당시 대략 11세 전후의 어린아이들이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과연 오늘날의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이와 같은 개념을 거리낌이 없이 사용하면서 신앙교육을 시행할 수 있을까? 아마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부터가 이것들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칼빈의 교육적 안목이 부족해서 신앙교육서를 그렇게 어렵게 작성했을까? 그렇지 않다. 사실 칼빈은 신학자이기 이전에 어느 유명한 교육학자에도 뒤지지 않는 최고의 교육자이다. 그가 너무도 유명한 신학자이기 때문에 교육자로서의 그의 명성이 미처 빛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평생을 목회의 현장에 있었던 칼빈의 입장을 고려할 때 그의 신학과 교육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관계에 있어서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버슈백(Bernhard Buschbeck)은 “칼빈의 신학적 저술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교육 신학적 입장을 갖고 있다.”라고 했고, 로버트 화이트(Robert White) 역시 “칼빈의 교육은 신학적 목적에 봉사하는 하나의 신학적 작업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저명한 교육학자 톰슨(M. Thompson)은 칼빈을 코메니우스(Comenius), 페스탈로치(Pestalozzi), 존 듀이(John Dewey) 등과 같은 세계적인 교육학자의 반열에 두어야 한다고 했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인 순종의 대상이다. 다시 말하여 참된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에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수준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전달한다. 교사의 입장에서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지적인 정도를 고려하지 아니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반드시 지켜져야 할 한계가 있다. 교사가 학습자의 능력이나 수준을 고려한다는 핑계 하에 진리를 드러내지 않는다거나, 진리를 변경 시 키는 일은 결코 허락될 수 없는 것이다. 칼빈 은 이와 같은 원칙에 철저했던 것이다.
게다가 성령님만이 참된 생명의 진리를 가 르치실 수 있다는 차원까지 고려하는 칼빈의 입장에서 보면 어떠한 경우에도 말씀은 약화 되거나 변질되거나 감추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 다. 칼빈의 이와 같은 입장은 훗날 작성되어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교리문답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大小) 교리문답 작성자들에게서도 그대로 유지된 것을 볼 수 있다.
V. 칼빈신학에 대한 후기 개혁파신학권의 오해
개혁파 교회 안에서 개혁에 대한 논의는 끊임없이 전개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부패한 속성은 지속적인 자기 개혁으로부터 잠깐 눈길을 돌리면 바로 그 순간에 여지없이 ‘인간적인 종교심’을 발동시키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는 타락이라고 하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파 교회는 존 헤세링크(I. John Hesselink)가 지적했듯이 “개혁된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는 슬로건을 가지는 것이다.
교회가 개혁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것을 뒷받침해 줄 성경적 이론이 필요하다. 교회의 개혁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부단히 성립되려는 노력인 것이지 시시때때로 변하는 카멜리온처럼 유행을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변덕을 부리는 인간적 도덕주의의 향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끊임없는 자기 성찰에 결코 게을러서는 안 되는데 그럴 경우 ‘개혁의 필요성’ 역시 부단히 대두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도는 자연히 교회의 개혁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때마다 의당히 칼빈과 같은 개혁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칼빈에 대한 그릇된 인식 혹은 부족한 해석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새로운 문제와 부패가 발생하고 결국 진정한 개혁은 맛도 보지 못하고 시들어버리는 것이 지금까지 되풀이되어 온 한국 교회의 관행이 아닌가 싶다.
개혁파 교회의 중요한 교리 중 ‘예정론’(the theory of predestination)은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의 신학에 따라 칼빈 역시 주저 없이 예정론을 가르쳤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반드시 말해야 하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호기심조차 갖지 않는다는 것이 칼빈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칼빈은 성경에 근거하여 과감히 예정론을 가르친다.
하지만 그는 후기 개혁파 교회 신학자들이 다시 빠져든 스콜라적 학풍에서는 예정론에 관심이 없었다. 즉 칼빈이 성경에 근거하여 기꺼이 예정론을 가르쳤을 때 그는 오늘날처럼 ‘전 택설’과 ‘후 택설’ 같은 식의 예정의 시점을 캐고자 하는 논리적 사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아니하면 ‘전 택설’과 ‘후 택설’을 각기 주장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지지자로 칼빈과 그의 말을 끌어다 인용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정작 칼빈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예정론에 대한 관심은 좀 더 다른 차원에 있었다. 그는 예정을 가르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택의 거울’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즉 그의 핵심은 이것이다. 예정이란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하게 쐐기 박음이 되었다.’는 데 강조점이 있고 ‘인간이 생각으로조차도 닿을 수 없는 저 먼 과거의 어떤 시점’에 인간의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이라고 하는 중요한 사실과 접촉됨 없이 하나님의 작정의 때를 시간적으로 추론하는 데만 집중하는 일체의 논의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면서 결코 해결점을 찾을 수 없는 ‘이론 놀이’에 불과하게 된다.
마치는 말
우리는 개혁에 대한 논의를 할 수밖에 없고 그럴 경우 필경 칼빈에게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때 칼빈에게서 나타났던 실질적 신앙에 주목하고 더불어 그의 신학을 좀 더 제대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즉 그의 신학에 대한 주목에는 반드시 그것이 전개되어야만 했던 이면의 동기를 고려해야 한다. 그래야 칼빈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칼빈의 신학을 머리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진정한 개혁자가 아니다. 개혁교회 성도는 논리적인 머리만 가진 것이 아니라 가슴도 항상 뜨겁다. 칼빈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으로서 살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서 삶의 존재의의를 찾았다.
그래서 칼빈의 모든 글들은 그와 같은 실질적 신앙에서 나온 참된 ‘경건’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신학의 배경이며 목표’이다. 그에게서 경건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선행조건이요 동시에 결과이다. 그는 하나님을 머리만의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신학을 무척이나 경계한다. 현대 개혁파 교회 일부에서 유행하고 있는 ‘신 스콜라주의 경향’은 칼빈의 신앙과 거리가 멀다.
칼빈에게서 신학은 항상 가슴의 문제요,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순종의 문제였다. 신학은 신앙과 전적인 의탁 관계에 있고 신학은 기본적으로 경건을 요구한다.
이와 같은 경건이 구현되는 곳에서 비로소 성경적 교회도 나타난다. 이때 이 교회는 필연적으로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주류(主流)에 서는 모습을 취하게 된다. 계속해서 이 역사의 선을 거슬러 올라가 보노라면 거기에 기둥처럼 우뚝 서 있는 존 칼빈을 만나게 된다.
그는 단순히 여러 개혁자들 중에 속한 또 다른 한 사람의 개혁자가 아니다. 마치 다윗과 사도 바울이 성경 기록자로서 대표적인 인물로 언뜻 연상되는 것처럼 칼빈은 바로 그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동시에 그 성경이 가르치는 바대로 교회를 건설하였던 대표적인 인물로서 유일한 신학자(the theologian)이다.
칼빈을 다시 배우자! 칼빈을 제대로 배우자! 우리가 칼빈을 제대로 보고 그를 제대로 답습하게 된다면 바로 거기에 과거 역사 속에서 나타났던 개혁된 교회를 지금이라고 하는 시대에 계속 존재케 하는 놀라운 역사 창조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에 개혁교회는 그의 아들을 보내사 교회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글쓴 이 / 장수민 목사(칼빈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