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이 쓴 기독교강요 요약 제1권(6)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칼빈이 쓴 기독교강요 요약 제1권(6)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 제1권 : 창조 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
제1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의 상관관계는 어떤 것인가?
제2장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이 하나님 인식의 목적은 무엇인가?
제3장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지성 속에 심겨져(씨 뿌려져) 있다.
제4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무지 혹은 부도덕에 의해 질식당하고 있거나 부패되어 있다.
제5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주만물의 조성과 이에 대한 지속적인 하나님의 만물 통치에 나타나 있다.
제6장 창조주 하나님을 알려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성경이 반드시 필요하다.
제7장 성경은 성령의 증거에 의해 확인되며, 성경의 권위는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하여 확립된다.
제8장 인간 이성의 한도 내에서도 성경의 신빙성을 증명할 수 있는 확고한 증거들이 충분히 있다.
제9장 성경을 배격하고 직접 계시에 이르려고 하는 광신자들은 모든 경건의 원리들을 파괴하고 있다.
제10장 성경은 이교도의 신을 능가하는 참 하나님만 보여줌으로 모든 미신적인 신앙을 바르게 고쳐준다.
제11장 하나님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합당치 않으며, 우상을 만드는 사람은 참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것이다.
제12장 하나님은 우상들과 어떻게 다른가? 그 차이점이 분명해야 우리는 참 하나님에게만 완전한 경외와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제13장 성경은 창조 이래 하나님이 한 본질과 세 위격(三位格)이심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계속)
제 13 장
성경은 창조 이래 하나님이 한 본질(本質, one essence)과 세 위격(三位格, three persons)이심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삼위일체 교리)
(1) 하나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27호 제13장의 계속)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의 사도들의 증언도 동일하다. 구약에서 예언자들이 영원하신 하나님에 관하여 예언했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역시 예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한다. 이사야 6:1의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의 환상은 요한복음 12: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에서 인용된다.
이것들 외에 신약에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외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함이라.”(고후 5:10),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등이 있다.(제1권 xiii.12) 더욱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시 하면서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한 데 있었다.(요 5:18)
그리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이적행위에 의해서 증명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병 고치는 능력을 부여하셨다.(마 10:18 막3:15,6:7) 그리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16)고 하였다.(제1권 xiii.15) 또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2)라고 했는데 신약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다.(행 7:59, 9:13,14)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여호와 곧 하나님이시다.
끝으로 로마서 1:7, 고린도전서 1:3, 고린도후서 1:2, 갈라디아서 1:3 등에서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은혜로 간구하듯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혜를 간구하고 있다.
(2) 하나님 되시는 성령님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되심을 논한 다음 칼빈은 다음으로 성령이 하나님 되심에 대하여 논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에서 하나님의 신(神)을 성령으로 본다. 그리고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사 48:16)에서 그 신을 삼위일체의 한 위격인 성령을 가리킨다고 한다.(제1권 xiii.14) 바로 이 성령이 “인간과 우주에 확산되어 있고, 이 모든 것을 지탱하고, 성장케 하고, 생기 있게 한다. 이 성령은 인간과 우주만물의 본질, 생명과 운동 밑에 내재되어 있다.”(제1권 xiii.14)
또 중생(重生)과 영생(永生)에 이끄는 힘으로서 성령을 말한다. 이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신다.(고전 2:10) 이 성령은 지혜와 언어의 출처요(고전 12:10), 이 성령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시키며, 능력과 성화(고전 6:11), 진리와 은혜 그리고 모든 좋은 것의 출처이다.(고전12:11) 선물과 은사는 여러 가지이나(고전 12:4) 모두가 다 동일한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하고(고전 3:16,17,6:19 고후 6:16),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聖殿)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전(고전 3:16,17, 고후 6:16)과 성령의 전(고후 6:19)을 동일시한다. 그리고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였다고 할 때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고 한다.(행 5:3,4) 이사야가 만군의 여호와가 말씀하신다고 할 때, 말씀하신 분은 성령이라고 한다.(사 6:9, 행 28:25,26) 하나님의 성령이 근심하신다고(사 63:10) 할 때 이 성령은 하나님이시다.(제1권 xiii.15)
그러므로 인간과 우주만물은 성자의 작품인 동시에 성령의 작품이기도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창조역사와 구속역사 및 섭리와 종말사건에 있어서 성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일하게 역사하신다.
(3) 한 분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할 때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마태복음 28:19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신 말씀에서 이 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신 안에서 자기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셨다. 그래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확정된 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과 성령이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라고 결론지어야 한다.”(제1권 xiii.16)
(4) 삼위(三位)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이 세 위격(位格)을 지니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칼빈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의 삼위와 일체성(一體性)의 연관에 대하여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의 말을 인용한다. 즉 “내가한 분 하나님을 생각하자마자 나는 곧 삼위 하나님의 광채에 휩싸인다. 그리고 삼위로 분별하자마자 나는 곧 한 분 하나님으로 돌아간다.”(제1권 xiii.17)
그리스도께서는 성부(聖父)와 자기(聖子)를 구별하신다.(요 5:32,8:16) 즉 자기에 대하여 증거 하는 다른 분이 있다고 한다. 이미 논한 대로 성령(聖靈)이 아버지에게서 나왔다고 하심으로 성령과 아버지의 위격을 구별하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4:16에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하셨을 때 성령도 위격(位格)상 자기와 다르다고 한 것이다.
이미 논한 대로 성부는 말씀을 통해서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셨다.(요1:3, 히 11:3), 또한 “땅위에 내려오신 분은 아버지가 아니요 아버지가 보내신 자이다. 죽었다가 부활하신 이는 아버지가 아니요 아버지가 보내신 자이다.”(Ibid)라고 칼빈은 말한다. 이처럼 성부와 아들의 위격상의 차이는 성육신 하신 후 부터가 아니라 태초의 아버지의 품속에서부터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5:26에서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왔다고 하심으로 성령과 아버지의 위격을 구별하셨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영원하신 분들로 ‘한 하나님’ 이시다. 하나님은 물론 시간적인 전후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부를 먼저 부르고, 그 다음 이 성부에게서 나온 성자를 부르며, 끝으로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 성령을 부른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이 사실이 분명하다. 즉 동일한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9절) 및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킨 자의 영(11절)이라고 불려진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후서 1:21에서 예언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예언했는데, 이 그리스도의 영이 또한 아버지 하나님의 영이라고 성경은 말한다.(제1권 xiii.18)
그래서 칼빈은 성부, 성자, 성령을 정의하기를 “성부는 행동의 시발자요 만물의 원천이고, 성자는 지혜, 경륜, 만물의 질서요, 성령은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실현하는 능력이요 효력이다.”라고 했다.(Ibid)
이 같이 성부, 성자, 성령은 상호 유기적인 관계 속에 있다. 성자는 성부와 더불어 동일한 성령에 동참해 있고, 성령은 성부의 영이요 성자의 영이시다. 각 위격은 전적인 신성을 가지면서, 각 위격은 각각 자기의고유한 특질을 갖는다.(제1권 xiii.19)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계신다.”(요 14:10)
칼빈은 이 삼위일체의 유기적 관계와 유기적 통일성에 대하여 관계론적인 입장을 가진 어거스틴의 글을 인용한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시고, 성부와의 관계에서는 성자이시다. 성부는 자기 자신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시고, 아들과의 관계제서는 아버지이시다. 성부께서 아들과의 관계에서 아버지라고 불릴 때에는 그는 아들이 아니다. 그리고 성자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아들이라 불릴 때에는 그는 아버지가 아니다. 성부는 자기 자신에 관하여 하나님이시고, 성자 역시 자기 자신에 관하여 하나님이시다.(제1권 xiii.19)
그러므로 보통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는 성자, 성령도 성부와 동일한 하나님이다. 즉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는 성부, 성자, 성령 각 삼위 상호간의 관계성을 생각지 않고 일체로서의 하나님 그리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도 될 수 있다.(제1권 xiii.20)
고린도후서 12:8에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에서 주님은 그리스도도 되시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도 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대답에 뒤이어 고린도후서 12:9에는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요엘 2:32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에서 주님 역시 여호와 하나님도 되시고 그리스도도 되신다.
끝으로 요한복음 4:24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영(靈)’이라고 한다. 즉 이 ‘영(靈)’이 곧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막연히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이는 성부, 성자, 성령 그 어떤 분에게도 해당된다. 그러나 그 관계성은 생각지 않는다.
(5) 삼위일체 논쟁
이상의 삼위일체 교리는 니케아 회의에서 결정되고, 콘스탄티노플에서 성령론이 확립 된 이래 니케아 신조(filioque 포함한 서방교회의 것)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루터, 쯔빙글리, 부처(Bucer) 등도 같은 노선이다. 그러나 칼빈의 특징은 철저히 성경의 증언에 의하여 재확인 했다는 사실이다. 본서 제 1권에 나오는 루터의 경우도 마찬가지 인데 쯔빙글리, 부처 등 개혁자들 역시 칼빈과 더불어 칼케톤의 기독론(AD 451)을 넘어가지 않고 있다.
이처럼 칼빈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은 모두 중세 기독교가 인정하고 고백해 왔던 것이다. 칼빈의 특징은 이미 언급한대로 이미 있던 교회의 고백을 성경에서 그 증거를 찾아 재확인 하였다는 데 있다.
그런데 칼빈이 삼위일체론을 논할 때 예수님의 신성을 증명하는데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 이유는 유대교, 이슬람,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더불어 삼위일체를 반대하고 단순한 유일신(唯一神) 주의에로 돌아가려던 (Ante-Nicene Period에로) 셀베투스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칼빈이 이미 1531년에 셀베투스(Servetus)가 쓴 ‘삼위일체 의 오류에 관하여(On the Errors of the Trinity)’ 를 의식하면서 그의 1559년판 기독교강요를 썼을 것으로 볼 때 칼빈이 특히 예수님의 신성 (神性)을 증명하는 일에 집중한 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셀베투스는 ‘신(新) 군주 신론(Neo-Monarchianism)’ 내지 ‘양태론적 군주 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에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그의 요지는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신적인 신분을 가지시지 않았고, 인간 예수가 지닌 어떤 신적 능력 때문에 이 예수님이 신격화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주장으로서 그 근본 동기는 유일신주에 있다.
니셀(Niesel) 교수는 칼빈이 삼위일체 교리를 논하는 목적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칼빈은 셀베투스의 주장을 반론하는 ‘성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전통 신앙의 변화’라는 작품에서 그 제목이 말하는 것만큼 니케아 전통신조를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셀베투스치 기독론을 반박하는 데로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 칼빈은 구원론적 전제와 추론을 중요시 한다.
이상의 삼위일체 교리는 신구약 성경이 증거 하는 기독교의 하나님으
로서 물활론(物活論, 精靈信仰, animism은 자연계의 모든 사물에 생명이 있다고 보고, 그것의 영혼을 인정하여 인간처럼 의식, 욕구, 느낌 등이 존재하다고 믿는 신앙), 다신론(polytheism), 범신론(pantheism), 이신론(理神論, deism), 유신론(theism) 및 심지어는 유대교와 이슬람의 유일신론(monotheism)과도 상이(相異)하다. 출처 /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년), 저술 및 요약 / 요한 칼빈, 라틴어판 번역 / Paul T. Fuhrman, 한국어판 번역 / 이형기 교수, 크리스천 다이제스트사, 1986.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