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요약

칼빈이 쓴 기독교강요 요약 제2권(15)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살전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살전 4:16)

기독교강요 제2권

율법 아래서 조상들에게 나타나셨고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구속 주 하나님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제13강 그리스도의 구속자 직분
비하(卑下)와 승귀(昇貴)(기독교강요 2.16.1-18)

1. 구속자 그리스도

‘구속자(救贖者)의 직분’이 예수 그리스도께 맡겨졌다. 그분께서 ‘종내 구원의 종점까지 줄곧 이끄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속하신다. 그분께서는 자기 백성의 죄를 감당하기 위해서 오셨다.(마 1:21; 눅 1:31) 버나드가 노래했듯이 ‘예수의 이름은 입에 꿀이요 귀에 음악이며 마음에 기쁨이요 동시에 약이 된다.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강화(講話)는 향기가 없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그리스도께 구할 ‘목표’는 ‘그분 자신 안에 있는 의(義)와 해방(解放)과 생명(生命)과 구원(救援)’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푸는 방식과 방법’으로서 주님의 ‘무름’(贖良, redeem)이 요구된다.(기독교강요 2.16.1) 죄로 인하여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멀리 떠나 그분과 원수가 되어 있었다.(롬 5:10; 갈 3:10, 13; 골 1:21,22)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기꺼이 또 그저 베푸시는 자신의 관용’(寬容) 즉 ‘거저 베푸시는 호의로’ 우리의 구원이 역사한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부성적(父性的) 사랑’을 받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기독교강요 2.16.2)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자신의 것’을 찾으려고 하신다. 그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요일 4:19) 그리하여서 ‘우리에게 거저 베푸시는 순수한 사랑으로써’ 우리를 자신과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和睦)하게 하시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에게로 눈과 마음을 고정해야 한다.(기독교강요 2.16.3)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여 사랑하셨다.(엡 1:4,5)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어거스틴의 말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지 않은 것으로 그분을 거역했지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남은 자신의 형상의 불씨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시고 사랑하셨다.(기독교강요 2.16.4)

2. 그리스도의 비하(humiliatio)

통상 그리스도의 비하의 신분은 성육신(成肉身), 고난, 죽으심, 장사되심을 포함한다. 성육신과 고난에 관해서는 위격적 연합을 통한 사역의 장에서 다루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죽으심부터 논한다.

(1) 성육신하시어 대속의 제물로 죽기까지 복종하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호의와 자비를 베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의(義)’는 ‘그분 자신께서 복종하신 전체 여정(旅程)’에 미친다. “그리스도께서는 종(從)의 인격을 취하신 때부터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해방의 값을 치르기 시작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生命)을 ‘대속물’(代贖物)로 주셨다.(마 20:28) 그분께서 우리의 ‘화목자로’ 세움을 받았으며(롬 3:25)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되었다.(롬 5:10)

이를 위하여 그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려고 종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요 1:29; 빌 2:7,8) 그분께서 제물로서 제사장이 되셨듯이 양으로서 목자가 되셔서 목숨을 버리셨다.(요 10:15; 롬 4:25)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나심으로부터 죽으심까지를 고려하여 대속의 사역을 적합하게 고백한다. 그곳에 ‘완전한 구원의 총화’가 제시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셔서 순종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게 하셨다.(롬 5:19; 고후 5:21)

“우리를 위한 생명의 질료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다.” 도수장의 양과 같이 잠잠히 순종하심(사 53:7; 행 8:32; 마 27:12,14), 여기에 그리스도의 ‘필적할 수 없는 사랑의 본(本)’이 제시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한 ‘죽음의 종류’는 우리를 구속(救贖)하는 ‘값을 무르기 위해서’ 우리의 ‘정죄를 자신에게 옮기는 동시에 자신 가운데 우리의 죄를 수용하심으로써 우리를 해방하시는 죽음이셔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무름’(贖良, redeem)’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무죄하기 때문이 아니라 유죄하기 때문에 죽음이 마땅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다 전가(轉嫁) 받으셨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사 53:12) 그가 도둑질하지 않은 것이라도 우리를 위하여 무르셨다.(시 69:4) 그가 우리를 위하여 ‘갚으심’(compensatio)으로 ‘죄의 값’(piaculum)을 대신 치르셨다.(기독교강요 2.16.5)

(2) 제물이 되신 자신을 우리의 죄 값으로 내어주심

그리스도께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심은 이미 율법에 예시되었다.(신 21:23) 그분께서 ‘속죄(贖罪)’를 위한 ‘제물(祭物)’이 되어 주셔서(사 53:10) 우리의 ‘오점과 형벌’(macula et poena)을 감당하셨다. 그분이 우리의 불의를 ‘전가’(imputatio)받으셨다. 그리하여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시사 ‘죄의 값’을 치르셨다.(갈 3:13,14; 벧전 2:24) 그분이 우리의 ‘구속이며 속전이며 대속물’이셨다.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무르는 제물’이 되었다. 그분의 흘리신 피가 ‘배상금’이요 ‘우리의 때를 씻는 대야’가 되셨다.(기독교강요 2.16.6)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구속의 값’을 치르셨다. 그러나 그가 죽으심은 죽음에 삼키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정복하기 위함이셨다.(벧전 3:22)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사망의 권세를 물리쳐서 죽기를 두려워하여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 주셨다.(히 2:14,15) 이것이 그분의 죽음이 맺은 ‘처음 열매’(primus fructus)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은 우리의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의 의의 전가를 받아서 죄를 죽이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포함한다.(롬 6:4,5; 갈 2:19; 6:14; 골 3:3) ‘이중적 축복’(duplex beneficium)이 여기에 있으니, ‘우리를 결박했던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며 우리의 육을 죽이는 것이다.’(기독교강요 2.16.7)

(3) 칼빈의 지옥강하 해석

칼빈은 지옥강하(降下)를 교리의 요점으로서 중요하게 다룬다. 이곳에는 ‘신비’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사도신경에 이 교리가 포함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사도신경에는 ‘믿음의 완전한 개요’가 포함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지옥강하의 교리가 경시된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혜택이 많이 상실될 것이라고 하였다.(기독교강요 2.16.8)

로마 가톨릭이나 루터란들과 달리 칼빈은 지옥강하를 유형적이거나 인격적인 이동으로는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베드로전서 3:19의 ‘옥들의 영들에게 전파됨’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힘으로 그들에게 비추셔서 그들이 소망으로 맛보았던 은혜가 세상에 나타났음을 깨닫게 하였다.”고 하였다.(기독교강요 2.16.9) 나아가서 지옥강하를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값’으로서 자신의 ‘몸’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더 위대하고 훌륭한 값 즉 ‘저주 받고 버림받은 사람의 영혼이 겪는 무서운 고통들’을 당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보았다.(기독교강요 2.16.10)

칼빈은 지옥강하 교리가 그리스도께서 영혼으로 ‘고통들을 당하심으로써’(implicitum doloribus) 우리가 악마의 권세와 사망의 두려움 그리고 지옥의 고통을 이기게 하셨음을 가르친다고 강조하였다.(기독교강요 2.16.11) ‘참으로 그리스도의 영혼이 형벌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몸만을 위한 구속자가 되셨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무한한 고통을 당하셨다. 여기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영은 그분의 인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아폴리나리우스는 지옥강하의 교훈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기독교강요 2.16.12)

칼빈에 의하면 지옥강하 교리는 주님께서 사망으로 인한 영혼의 고통을 당하셨으나(요 12:27,28; 13:21; 마 26:37-39; 눅 22:43,44; 마 27:46) 그 고통에 매이지 않고 사망을 이기셨음을(행 2:24) 가르치므로 유익하다. 본 교리를 통해 우리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공로는 그분께서 육체뿐 아니라 영혼으로 당한 고통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이러한 칼빈의 입장은 개혁주의 신학자들 특히 바빙크에 의해서 충실히 계승되었다.

3. 그리스도의 승귀(elevatio)

(1) 그리스도의 승귀(昇貴)의 시작이 되는 부활

중보자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부활, 승천, 보좌 우편에의 재위, 재림을 포함한다. 우리의 믿음이 죽음을 이기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다. 부활의 권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죄가 말소되고 죽음이 말살되었으며, 그의 부활에 의해서 의(義)가 회복되며 생명이 소생했다.’(롬 4:25; 빌 3:10,11; 벧전 1:21)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부활을 묵상하 고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죽음을 묵상해야 한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지 교훈에 머물게 되고 죽음이 없다면 부활 은 허탄한 사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고전 15:17; 롬 8:34)
둘째,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는 ‘중생하여 의에 이른다.’ 그리하여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된다.(롬 6:4; 골 3:3)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로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기독교강요 2.16.13)

(2) 그리스도의 승천과 함께 열린 성령시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자신의 왕국이 참으로 상서롭게 시작되었다.’ 승천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부어주신다.(요 16:7; 행 2:33) 그분이 떠나심은 우리 속으로 오시기 위함이셨다.(요 14:18,19; 16:14) 그리하여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이루시고자 하셨다.(마 28:20; 요 14:16) 부활하사 승천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신 일을 이루시고 ‘더욱 현재(顯在)하는 능력으로’ 천지를 주관하시게 되었다.

또한 승천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를 항상 마음에 모시게 되었다.(기독교강요 2.16.14)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심이 통치의 시작이라면 보좌 우편에 계심은 다시 내려오실 때까지 계속적으로 다스리심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서(엡 1:20-22; 빌 2:9; 고전 15:27) 다스리신다.(기독교강요 2.16.15)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위(在位)의 은혜는 무엇인가?

첫째, 주께서 승천하심으로 아담 이후 닫힌 문을 여셨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로서 하늘 성소에 계신다. 그분이 화 목주로서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보좌에 가까이 갈 길을 얻었다.(히 7:25; 9:11,12; 롬 8:34)
셋째,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성결하게 하시고 각종 은사를 주셔서 성도의 삶을 살게 하신다. 그리하여서 종국적으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심을 완성하신다.’(기독교강요 2.16.16)

(3) 첫 창조세계는 마감되고 신천지가 열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스도의 승귀(昇貴)의 마지막은 재림(再臨)이다. 주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승천하신 때와 같이 보이는 모습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오신다.(행 1:11; 마 24:30) 그 때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 모두 변화되어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전 15:51,52; 살전 4:16,17) 주님께서 심판주로 오심이 우리에게 ‘놀라운 위로’가 됨은 그분께서 우리를 ‘자신의 영예에 동참하는 사람들’로 삼으시기 때문이다.(마 19:28) 그때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심판의 보좌에서 실행됨을 볼 것이다. 심판의 날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가 심판하고 계시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오직, 그리고 전적인 공로로 말미암아 낱낱이 사해짐을 세세히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아멘의 찬송을(고후 1:20) 그칠 수 없을 것이다. 그 찬송의 입술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삶 가운데 영원히 닫히지 않을 것이다.(기독교강요 2.16.17,18)(*) 글쓴 이 / 문병호 교수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