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 교회사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20) 중세의 여명(AD 400-590)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20)
중세의 여명(AD400-590)

Justinian Roman Emperor & Wife Theodora, One of history's greatest power couples
Justinian Roman Emperor & Wife Theodora, One of history’s greatest power couples

Justinian Roman Emperor & Wife Theodora, One of history’s greatest power couples

1. 교회로 밀려들기 시작한 세속의 물결
2. 야만족들의 침입
3. 수도원 운동과 초기선교
4. 아일랜드를 복음화 한 패트릭
5. 유럽 선교의 전진기지가 된 아일랜드
6. 이태리반도의 수도원운동 태동
7. 교리논쟁의 점화

8. 유스티니안 로마 황제(Justinian, 482-565)

유스티누스(Flavius Iustinus, 450–527, 재위 518-527) 로마 황제의 뒤를 이은 유스티니안(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482–565, 527-565 재위) 로마 황제는 아리우스주의적 야만인들에게 정복당한 제국의 영토를 수복하고 자신이 정통 신앙에 굳게 서 있다는 것을 과시하며 소위 기독교 황제로서 동서교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당시 유스티니안은 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있는 반달족과 이태리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동고트족을 정복하므로 이 지역의 야만족들의 아리우스주의의 영향을 종식시켰다.
이로 인해 동방 6교구에(Thraoe, Pontus Asia, ths Orient, Mynicum, and Egypt)에 서방 4교구가(Dalmatia, Italy, Africa, and Spain) 첨가되어 지중해 연안의 동서교회의 연합과 제국의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유스티니안은 그의 생애 동안 경건하고 성실한 기독교인으로 교회의 번영을 위해 충성을 바쳤던 황제라는 인상을 우리에게 남겼다. 물론 국가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기독교에 공헌한 그의 업적을 무시할 수 없다.

그의 업적 세 가지는 1) 법의 기독교화, 2) 성 쏘피아 성당 건축, 3) 아리안주의 야만족을 정복한 것이다. 학자들을 동원하여 만든 그의 법령집은 각 장의 본문에 우리 주 애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편집되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 가톨릭 신앙의 법의 기본정신이 표현되어 있다. 이 법령은 최초로 기독교적 정신이 법전에 성문화 된 대표적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월리엄 캐리는 이 대법전을 이렇게 말했다. “로마 제국의 법률들의 집대성이라 볼 수 있는 유스티니안 대법전은 동시에 기독교적 문서이기도 했다. 그의 추구하는 바는 최소한 이론상으로나마 기독교 국가로서의 이상(理想)에 그의 제국을 부합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때까지는 기독교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문화에 접목된 것에 반해 유스티니안 대법전의 등장과 함께 하나님의 법령이 묘목(苗木, parent plant)이 되어 이 근원으로부터 각 역사적 상황에 기본적 원칙들을 적용시키는 가지들이 뻗어나가게 했다.” 이 법령의 편찬은 교회에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첫째, 교회법에 영향을 미쳤다. 교회 법정에서는 이 법의 진행 방법과 원리들을 빌어서 사용하였고 차기 12세기에 교회법전의 다양한 요소들이 이 법전을 모델로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주로 교회에 의하여 로마의 법이 야만족에게 가르쳐졌다. 예를 들면 유언에 의한 토지 상속은 게르만족의 법에는 생소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그들에게 가르쳐졌고 주로 교회에 기부하도록 종용되었다.

둘째, 교회 문제들을 법제화한 것이다. 성직자 계급의 조직, 그들의 도덕문제, 수도원의 창립과 통치, 교회 재산관리, 성직자들에 대한 재판법 등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이단들에 대해서는 강력한 처벌법을 만들어 그들은 공직에 등용될 수 없고 자유업을 가질 수 없으며 그들 자신의 모임이나 교회를 가질 수도 없게 했다. 그리고 로마 시민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박탈하고 그저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만들었다.
정복자들이 언제나 그렇듯 유스티니안도 건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제위 초기에 니카 반란(Nika Revolt 532)에 의해 파괴된 콘스탄티노플을 웅장한 규모로 재건하였으며 왕궁과 원로원 건물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수도원, 공중목욕탕과 극장까지도 예술품으로 설계하였다. 이 중에서 성 소피아 성당(Hagia Sophia – Holy Wisdom, const.)은 그의 걸작으로 꼽힌다. 5년간에 걸쳐 만여 명의 노동자들과 백 명의 감독들이 동원되었고 건축비만 해도 서로마 제국을 수복하기 위해 소비된 비용과 맞먹었다.

537년 12월 27일 헌당식에서 그는 “솔로몬이여! 나는 그대를 이겼노라!”(I have beaten you, Solomon!)고 탄성을 발하였다. 이러한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문제에 있어서 그는 아내 데오도라와 상치되어 긴장 속에 있었다. 이 신학적 논쟁은 두 사람 사이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제국 내의 교권 싸움으로 심화되었다. 두 사람의 종교적 배경은 처음부터 상반되어 있었다. 유스티니안은 건전한 신앙이 보존되어 온 지역인 일리리안 산악지대의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정통 신앙이 강한 집안이었다. 이에 비해 그의 아내 데오도라는 쇼 단의 주역으로 일하면서 그의 삶에 무료함을 경험하던 중 20대 초반 단성론자에 의해 개종되어 평생 자신의 단성론 신앙을 버릴 수가 없었다.

문제의 발단은 유스티니안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정통 교회의 보호와 이를 위한 이단을 제거하면서부터였다. 유스티니안은 정통 신앙이 아닌 모든 이단적 기독교 종파들(유대주의, 마니교, 몬타니스트, 아리우스주의, 도나티스트 그리고 이교도들 등)을 없애려 했는데 특히 아시아 지역의 단성론 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단성론 자들이 정통 교회를 계속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에 유스티니안은 격렬하게 단성론 자들에 반대하는 논문을 쓰면서까지 그들을 박해했다. 비록 유스티니안은 자신의 종교적 열정과 종교로 인한 제국내의 분열을 방지한다는 신념으로 깃발을 들긴 했으나 단성론자의 경우에는 용이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동방에서 단성론자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아내 데오도라 자신이 단성론 자들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데오도라는 황제를 설득시켜 파문된 단성론 자인 안디옥의 세베루스 전 주교를 콘스탄티노플에 초청하여 단성론 자들과 회의를 갖게 하고
제노의 통합 칙령을 상기시키는 신앙 선언문을 준비시키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보호아래 단성론 자들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전파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내기도 하였다.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hagia sophia istanbul, 537)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hagia sophia istanbul, 537)

또 535년에는 교황 아가페투스가 파문시킨 단성론 자 안디무스를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세우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데오도라는 에뎃사의 이단 감독인 제임스 바라다이(James Baradai)를 지원하여 아시아와 시리아 지역에 단성론 감독들을 수임하게 하였고, 550년에는 안디옥에 단성론 주교를 수임시켰다. 이로 인해 야곱 교회로 알려진 단성론 교회가 오늘날까지도 건재하게 만들었다. 유스티니안 황제로서는 이러한 정황에서 단성론 자들을 끝까지 밀어붙여 시리아와 이집트 등을 제국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유스티니안은 성 사바스와 같은 여러 저명인사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팔레스틴 지역의 오리겐주의자들을 박해하게 되었다. 그는 오리겐에 대한 반박 논문을 통해 오리겐과 그의 추종자들의 오류들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박해에 맞설 만한 영향력이나 힘이 없는 이들은 데오도라의 도움을 받아 황제의 공격을 우회토록 하였다. 그들은 유스티니안이 박해 대신에 제국 내의 모든 기독교인들을 화해시키는 것이 교회와 제국을 위해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임무를 더 잘 수행하는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특히 단성론 자와 화해를 통해 정통 교회로 돌아오게 할 수만 있다면 더욱 더 그러하다고 하였다.
이에 설복당한 유스티니안 황제와 항상 단성론 자들의 보모 역할을 하던 데오도라는 둘 다 네스토리우스를 공격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결국 네스토리우스를 공격하는 것은 단성론 자와는 화해를 의미하는 것으로 서방교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단성론 자들에 대한 저주의 화살이 네스토리주의자들에게로 향했을 때 유스티니안이 취한 방법은 루이 14세가 얀센주의자들을 대항해서 취한 것과 대동소이했다. 즉 네스토리주의자들의 교리 중의 어떤 부분을 잘 택하여 그것을 공격하면 그것이 바로 전체를 파괴하게 된다는 원리였다.

그러므로 유스티니안은 네스토리우스주의의 거장들인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레(Deodore of Mopsuestia), 시릴의 대적이었던 테오도렛(Theodoret) 그리고 에뎃사의 이바스(Ibas of Edessa)등 세 사람의 저서들로부터 세 가지를 선택하여 그들을 정죄했다. 그래서 이를 삼장(三章) 파문이라고 한다. 유스티니안은 이렇게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함으로 단성론 자들도 위협을 느껴 쉽게 정통 교회로 돌아오리라는 계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안이 정죄한 이 삼장은 이미 칼케돈 회의에서도 문제가 되지 아니했고 도리어 단성론 자와 타협하는 결과가 되었다.

서방교회의 전체는 이 결정을 반대했지만 당시 황제와 황후의 도움으로 교황이 되었던 비길리우스(Vigilius, 538-555)는 콘스탄티노플에 강제로 이송되어 삼장을 공식적으로 정죄하였다.(548) 이 결과 아프리카와 일리리쿰의 감독들이 비길리우스의 결정에 항의하였고 온 서방 교회가 반대하고 일어섰다. 그러자 553년 유스티니안은 삼장 파문을 제국 내 교회의 공식 교리로 승인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에 전체 종교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서방 교회의 반대로 딜레마에 빠진 비길리우스는 이러한 황제의 결정에 반대했다. 겁쟁이 비길리우스는 교회로 피신하였고 이에 병사들이 몰려 와서 그의 발과 머리와 수염을 잡아끌고 나가려고 했다. 겁에 질린 비길리우스는 제단을 꼭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제단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렇게 교황을 비롯하여 서방교회의 대표자는 아무도 참석하지 아니한 채 황제 유스티니안의 뜻이 관철되었다. 이로 인해 소위 황제 교황주의(Caesaro papism)가 탄생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정리하면 중세교회의 여명기에 중세교회가 중세교회로 자리 잡고 발돋움할 수 있도록 작용했던 여러 가지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콘스탄틴 대제 이후에 기독교화 된 로마 제국으로 야만인들이 접근해 오면서 개종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야만족들인 게르만 민족들의 민족이동이 기독교를 접하고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야만족들에게 로마가 점령당함으로 로마는 정치적인 공백상태에 빠졌다. 국가권력의 공백상태에서 야만인들의 침략에 맞서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줄 수 있었던 유일한 힘 있는 기구는 교회 즉 로마 가톨릭교회 밖에는 없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정황 가운데서 자연적으로 정부를 대신해서 대내적으로는 국민들의 어려움을 돌봐주고 대외적으로는 이교도들과 맞서서 대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총체적으로 책임지게 된 인물은 자연히 로마 가톨릭교회의 감독이나 교황과 같은 대리자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로마 가톨릭교회가 중세교회의 정치, 사회, 문화를 관장하는 토양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셋째, 중세교회가 탄생하게 된 동인은 초대교회의 교리논쟁이 마무리되면서 이로 인한 공교회의 유대와 정체성을 확보한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리우스 논쟁 이후에 지속된 신학논쟁은 그레고리 1세의 교황청 집권 전에 결말을 맺게 되었고 교회는 일체의 분리를 허용하지 않는 중앙집권적인 구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앙집권 세력의 확보에 상승작용을 한 역사적인 동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교권과 감독권의 강화는 정치적인 정황에서 뿐 아니라 교회 내적인 이유로부터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넷째, 중세교회가 기독교사회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원인은 영국 초기선교였다. 복음이 일찍 영국에 전해졌고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 이전에도 어느 정도 기반을 갖고 있었다. 314년 프랑스 아를르(Arles) 종교회의 때 3,4명의 영국 대표들이 참석할 정도였다. 그리고 5세기경 아일랜드의 사도라 불리는 패트릭(Patrick)에 의해 아일랜드를 중심으로 수도원이 번영하기 시작하였고, 이곳에서 출발한 수도원을 통한 선교가 영국과 대륙으로 이어지면서 중세 초기에 로마의 정통기독교를 전파하는 중심세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글쓴 이 / 심창섭(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