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 교회사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25) 중세 초기 유럽의 역사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25)
중세 초기 유럽의 역사

The Filioque Controversy(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필리오쿠에 논쟁 )
The Filioque Controversy(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필리오쿠에 논쟁 )

4.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분열

(2) 필리오쿠에 논쟁

동(東) 로마 황제로부터 인준을 거절당한 사를마뉴(Charlemagne, ?-814) 대제는 비잔틴의 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동방교회가 필리오쿠에(Filioque)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이 필리오쿠에의 의미는 ‘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뜻이다. 원래 니케아신조에는 필리오쿠에라는 단어가 없었다. 성령 하나님에 관한 문장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나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를 받고 함께 영광을 받을 생명의 공급자요 주가 되신 성령을 믿는다.”

동방교회는 이 같은 원문을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고백했으나 그러나 서방교회(로마 가톨릭)는 이를 수정하여 ‘성령이 아버지와 그리고 아들로부터 나온다.’(Filioque)고 삽입했다. 이런 변화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 스페인에서 아리우스주의를 대항하는 가운데 유래한 것 같다. 스페인 교회는 589년 제3차 톨레도(Toledo) 종교회의에서 필리오쿠에(Filioque)를 삽입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프랑스로 전달 되었고 독일로 유입되었으며 사를마뉴 대제에 의해 794년 프랑크푸르트의 반 성상 숭배 회의(Semi-Iconoclast Council)에서 채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36282이 문제에 대해 필리오쿠에를 사용하지 않는 동방교회를 처음으로 비난한 것은 사를마뉴 대제의 법정 기록자였다. 실제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전형적인 보수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필리오쿠에를 사용하지 않고 원문대로 니케아신조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황 레오 3세는 808년 이 문제에 대해 사를마뉴 대제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비록 필리오쿠에의 사용이 건전하지만 신조의 문건을 쉽게 상황적으로 바꾸는 것은 신중해야 하며 실수를 유발할 수 있다고 피력했다.

레오는 독일과 비잔틴사이에 이 문제 중재역을 했다. 그러나 850년 이후 이 문제에 대해 전격적인 논란이 시작되었다. 먼저 동방 정교회에서 강하게 두 가지 이유로 필리오쿠에의 사용을 반대하기 시작했다.

첫째, 에큐메니칼 회의들은 신조에 어떤 종류의 수정이나 변화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식으로 종교회의의 결정이 수정되기 시작하면 모든 회의의 결정들이 수정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종교회의의 신조는 전체 교회들의 결정이기 때문에 일부 교회가 마음대로 수정할 권한이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서방교회가 동방교회와 상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신조를 수정한 것은 범죄 행위이며 교회의 일치를 거스른 죄를 범한 것이라고 했다.

둘째, 정교회는 필리오쿠에가 신학적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성령은 아버지 한분으로부터 오며 아들로부터 온다는 것은 이단적인 행위라고 하였다. 동방정교회서는 이 문제가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교리를 두고 보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교리문제에 예민한 동방교회는 필리오쿠에가 작은 이슈가 아니었다. 필리오쿠에는 성(聖) 삼위 하나님의 균형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거짓으로 빠뜨릴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슈 외에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서로 갈등을 가져올 수 있는 차이점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교회의 관행과 예전의 전통에 대한차이점들이었다. 예를 들면 희랍 정교는 성직자들의 결혼을 허락했다. 그러나 서방교회는 성직자의 독신을 주장했다. 금식 습관도 달랐고 성만찬 때에 사용하는 빵도 다른 종류를 사용했다. 희랍 정교는 유교병을 사용했지만 로마 가톨릭교회는 무교병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850년경까지는 그래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교제를 계속했으며 하나의 교회로 인식했다. 그들이 갖고 있던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갈등은 있었지만 여전히 분파의 개념은 없었다. 그러나 850년 이후로 분파주의(schism)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데오도라의 섭정 하에서 성상숭배 정책이 승리를 거둔지 15년이 경과한 858년 포티우스(Photius)가 콘스탄티노플의 새로운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가 주교직에 오른 후 교황 니콜라스 1세(NicolasⅠ, 858-867)와 논쟁이 붙었다. 논쟁의 발단은 전임 총대주교였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 문제 때문이었다. 당시 황제가 이그나티우스를 파면시켰지만 이그나티우스의 지지자들은 포티우스에 의해 이그나티우스의 총대 주교직이 박탈되었다고 반발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교황 니콜라스 1세는 포티우스를 인정하기 전에 일단 사건을 관망하기로 했다. 그리고 861년에 콘스탄티노플에 그의 사절을 파송했다.

그러나 포티우스는 교황과 분쟁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교황사절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그들로 콘스탄티노플의 종교회의를 주재하게 했다. 그들은 회의의 결정에 따라 포티우스를 합법적인 주교로 인정했다. 그러나 사절들이 로마로 왔을 때에 니콜라스 교황은 사절들의 결정이 그들의 권한을 초월한 것이었음을 지적하고 무효화 시켜 버렸다. 그리고 863년에 자신의 사회로 로마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이그나티우스를 총대주교로 결정하고 포티우스를 파면시켜 버렸다.

이로 인해 서방교회(로마 가톨릭)와 동방교회(콘스탄틴) 사이에 공개적인 반목이 시작됐다. 결국은 이런 반목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로마 교황과의 교권투쟁으로 연결됐다. 교황 니콜라스Ⅰ세는 포티우스와 이그나티우스의 분쟁에 개입해 사실은 자신의 절대적 통치권을 동방과 서방교회에 행사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포티우스가 자신의 허락 없이 사절에 의해 인정받음으로 자신의 통치권을 무시하고 비켜 갔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사절들의 결정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였다.

동방교회는 나름대로 서방교회(로마 가톨릭교회)의 허락을 받으려고 노력했으나 여기에도 함정이 있었다. 동방교회는 교황 자신의 허락보다는 사르디카회의(Council of Saradica, 343)의 법령 제3조(Cannon Ⅲ)에 의해 지역 감독의 임명과 퇴임 문제를 지역의 감독회의의 결정에 의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니콜라스 Ⅰ세의 이 같은 주장은 사실 법령의 범위를 넘어서는 월권적인 행위였고 이로 인해 다른 교구의 일에 관여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방과 서방교회는 필리오쿠에가 분쟁의 이슈로 재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와 연관하여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선교지에서도 몸살을 앓게 되었다.

(3) 동서교회 선교지에서의 갈등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선교지에서의 갈등은 슬라브족의 개종에서 일어났다. 주된 분쟁의 지역은 구체적으로 불가리아(Bulgaria) 선교지역이었다. 이 지역에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양편 선교사들이 선교하였다. 서로 다른 신앙의 전통과 정치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 두 종류의 선교사들은 갈등 관계는 피할 수없는 정황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당시 문제가 되었던 필리오쿠에는 선교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인 선교사는 서방교회를 대표하여 이문구를 사용하였고 반대로 동방교회 선교사들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로마(서방교회)와 콘스탄티노플(동방교회)은 이 불가리아 지역을 서로 자신의 선교지역으로 삼으려 경쟁을 하였다. 이러한 정황에 처한 당시 불가리아 왕 칸 보리(Khan Boris)는 처음에는 희랍정교회 쪽으로 기울어져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에게 세례를 받는 등 동방교회 편이었다.

그러나 불가리아교회가 독립교회로 되기 원하면서 불가리아 왕은 동방교회 지배를 거절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런 결정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불가리아교회 독립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불가리아 왕은 동방교회와 완전히 등지고 서방교회를 선호하게 됐다. 그러자 독일교회는 서방교회의 전통과 신학을 불가리아에 이식시키면서 동방교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실 로마 교황인 니콜라스 Ⅰ세도 그때까지 필리오쿠에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불가리아 지역에서는 상황을 감안하여 필리오쿠에를 독일교회에 의해 가르지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포티우스는 로마 가톨릭교회 세력이 자신의 영역이었던 불가리아 지배를 것을 경계하였다. 특히 불가리아가 동방교회의 본산인 비잔틴제국의 국경에 접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보다도 그에게 더욱 경계심을 유발시킨 것은 필리오쿠에의 사용이었다. 그는 동방의 주교들에게 교황의 서신(Encyclical Letter)을 보내면서 필리오쿠에의 사용을 금지시켰으며 이를 어기는 자를 이단으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교황 니콜라스 Ⅰ세를 파문하고 주님의 포도원을 침범한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은 순간적으로 뒤집혔다. 포티우스가 황제에 의해 파문되고 이그나티우스가 다시 총대주교직에 복귀했다. 그리고 로마와의 관계가 다시 회복됐다. 또86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종교회의가 열려 포티우스를 정죄하고 그를 정식으로 파문시켰다. 포티우스의 이 같은 파문으로 얼마 동안 지속된 동서교회의 소강상태는 불가리아 왕 보리스의 돌변으로 재발되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편으로 기울었던 보리스는 불가리아 교회가 독립은 했지만 그러나 로마 가톨릭으로부터도 동방교회 하에서보다 조금도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동방교회로 회귀했다. 그러자 독일 선교사들은 불가리아에서 축출게 되되었으며 동시에 필리오쿠에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이와 동시에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이그나티우스가 죽고 포티우스가 다시 집권하게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879년 총대주교로 재집권한 포티우스는 회의를 열고 자신에게 내렸던 이전의 종교회의의 결정들을 모두 폐지하고 동방교회의 실세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니콜라스 Ⅰ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된 요한 8세는 필리오쿠에를 강요하지도 않았고 동방교회와의 화해를 원했다. 그는 전임 교황 니롤라스Ⅰ세의 정책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일치에 얼마나 큰 장애였는가를 인식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서 동서교회는 외형적으로는 당분간 분쟁의 늪에서 벗어나 친화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054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결국 아주 갈라놓는 사건이 닦아오고 있었다.(*) 글쓴 이 / 심창섭(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