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29) 중세 중기의 역사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29) 중세 중기의 역사
3. 십자군 운동과 동서교회
1054년 서로 결별했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이슬람의 침략으로 다시 한 번 통합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특히 서방기독교는 동방제국을 위협하던 이슬람을 물리치고 비잔틴제국을 구원하며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어진 교회의 재결합의 꿈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이러한 노력을 통해 구원을 얻고자 하였다. 이러한 제국의 이상 아래 십자군 원정은 시작되었다.
특히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슬람의 세력은 7,8세기 때의 모습으로 돌변하여 로마제국의 영토를 줄기차게 침범하고 있었다. 이슬람 군대들은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에게 해 연안까지 침략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을 당했다. 물론 이들은 무슬림으로 개종한 터키족(셀주크 터어키족)들이었다. 동방제국의 이러한 정치적인 상황은 유럽의 기독교 순례자들이 성지순례 하는 데 큰 방해가 되었다. 난폭한 터키인들은 순례자들에게 도둑행위 등 불편을 주었으며, 시리아의 촌락을 지날 때는 통행세를 징수하기도 하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순례자들이 토로한 고난과 불평의 이야기는 유럽에 펴져 나갔고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야만족과 같은 이방인들에게 거룩한 성지를 탈환해야 한다는 종교적인 열정으로 연결되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동방의 황제가 된(1081년) 알렉시우스 콤네누스(Alexius I Comnenus, 1048-1118)는 서방교회에 도움을 청했다. 황제는 사절을 보내 교황의 지원을 호소했다. 이 요청에 응해 당시의 교황 우르반 2세(Pope Urban II, ?-1099)는 1095년 클레르몽에서 공회의를 소집하고 자신이 직접 동방 황제의 호소에 지원 연설을 함으로 유럽인들의 성지 탈환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동방에 있는 형제들과 성지를 이방인들의 지배에서 해방시키자는 호소는 회의에 참석한 자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Deus Vult)이라고 응답했다.
당시 유럽 전역은 전염병과 가뭄으로 인해 종말론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이런 시기에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원정에 부름 받는 일은 귀천을 막론하고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수세기 동안 잠자던 종말론적인 환상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혜성들과 천사들 그리고 동쪽의 지평선 위에 나타난 성스러운 도시(the Holy City)의 환상을 보곤 하였다. 이들은 신앙적인 열기와 용기만 가지고 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은 채 은자 피터(Peter the Hemit)의 안내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러나 피터를 따라 나선 자들은 전혀 훈련되지 않은 이상론 자들이었기에 도중에 실패로 끝났고 살아남은 자들은 잘 조직된 십자군과 합류하여 원정의 길에 올랐다. 십자군은 여러 경로를 통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황제 알렉시우스는 십자군에게 융숭한 대접을 했다. 십자군들은 비잔틴 군의 도움으로 먼저 터키인들의 수도인 니케아(Nicea)를 점령하였다. 그 다음은 안디옥을 점령하는 문제였다.
안디옥의 탈환은 힘든 작전이었다. 당시 십자군들은 오랜 원정에 지쳐 있었고 식량이 바닥나있었기에 사실은 위험수위에 달해 있었다. 차라리 전쟁에 지는 편이 굶는 것보다 나을 지경이었다. 마침 성안에 있던 아르메니아 출신 기독교인이 성문을 열어주어 십자군들은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함성과 함께 진군하여 터키 군을 물리치게 되었다. 그러나 4일 후에 터키의 대군이도착하여 반격하였고 잔류해 있던 터키인들도 사기를 얻어 합세함으로 십자군은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진퇴양난의 정황에 처한 십자군은 성창(聖槍, the Holy Lance,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을 본 환상에 힘입어 반격에 나선 터키 군들을 다시 용감하게 물리치고 터키 진영에서 많은 여인을 사로잡았다. 전쟁 중에도 십자군이 지켰던 경건성(敬虔性)을 한 증인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자랑은 십자군들이 가졌던 신앙의 아이러니한 단면을 보여준다. “우리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악한 짓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을 모조리 창으로 찔러 죽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십자군 총사령관 아드헤마르 주교가 전사했기 때문에 에부용의 가드프리가 새로운 군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1099년 6월 7일 그들은 드디어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당시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었던 군대들은 이집트 출신의 파티마족 아랍인들이었다. 다행히도 당시에 무슬림들이 아직은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전이었다. 십자군은 장기간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식량공급을 차단하였으며 주위의 농토를 불태웠다. 그리고 모든 우물에 독약을 풀어버렸다.
그러나 7월 초에 대규모 아랍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접한 십자군은 맨발로 성을 돌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참회의 찬송을 불렀다. 십자군의 공격은 시작되었고 성벽 한곳이 무너지자 곧 전체수비가 와해되면서 성의 수비병들이 도주하였다. 십자군은 성안으로 진군하여 그토록 염원하던 예루살렘 성을 1099년 7월 15일 점령했다. 그런데 십자군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함과 동시에 참혹한 살인과 강간 그리고 유아들을 성벽에 던져 죽이는 비극이 일어났다. 십자군들의 만행을 피해 회당 안으로 숨은 유대인들마저 십자군은 회당에 감금한 채 불을 질렀다. 당시의 참상이 얼마나 비참했던지 한 증인의 기록에 의하면 솔로몬 행각 근처에서는 피가 말의 무릎까지 차올랐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되어 예루살렘은 십자군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라틴 왕국의 건설이 잠시나마 성취되었다. 그리고 십자군 운동의 시나리오는 지속되었다.
그리고 십자군 사령관이었던 부용의 가드프리는 성묘의 수호자(Protector the Holy Sepulcher)라는 칭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을 다스렸다. 그러나 사명을 다한 십자군 군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원했는데 이슬람 군의 재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지속적으로 군대의 주둔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일반 평민들의 십자군 지원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병역보충이 있긴 했으나 이들은 또한 장기간 머무르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단기사역과 무장하고 성지를 순례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순진한 어린아이들이 십자군 원정에 뛰어들기도 했다. 하나님이 순진한 이를 사랑하시므로 어린이 십자군이 동원되면 효과적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떼를 지어 동방으로 무모하게 행군하다가 도중에 죽거나 노예로 잡혀가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원정은 연속적으로 일어났지만 편리상 시차와 특징을 고려하여 제2차 혹은 제3차 십자군 원정이라는 명칭을 주게 되었다.
제2차 십자가 원정은 1144년 알프포의 술탄에 의해 에데사가 함락되면서부터였다. 제2차 원정은 클레르보의 버나드의 설교가 민중을 동원하는데 결정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버나드는 아무런 준비 없이 나선 원정을 비난하면서 예루살렘 왕국의 구원을 위해서는 정규군의 조직과 이들을 통한 원정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드디어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드 3세가 군대를 동원하여 20만에 달하는 군대가 성지를 향해 진군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준비된 터키인들의 공격에 의해 도중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예루살렘은 한때 번창하여 아말렉 1세 아래서는 카이로까지 영역을 확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예루살렘을 재탈환할 계획으로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집트의 지도자 술탄 살라딘(Saladin)이 1187년 예루살렘을 다시 함락했다. 살라딘에 의해 예루살렘이 다시 정복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구 기독교권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그레고리 8세는 십자군의 동원을 외쳤다.
그래서 제3차 십자군 원정은 3개국의 국왕에 의해 시도되었다. 독일 황제 플레드릭 바바로사(Frederick Barbarossa), 영국의 리차드(Richard the Lionhearted of EngIand), 그리고 프랑스의 필립 2세 아우구스투스(Philip Ⅱ Augustus)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의 원정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프레드릭은 도중에서 익사하였고 그의 군대는 해산되었다. 리차드와 필립은 2년에 걸친 원정 끝에 아크르를 함락시킨 것이 고작이었다. 필립은 리차드의 부재를 이용하여 그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미리 귀환하는 등 서로간의 갈등과 반목이 심화되었다. 리차드는 영국으로 귀환하던 중 독일 황제에게 잡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나는 등 전혀 원정의 동료로 여겨지지 않았다.
제3차 십자군 원정의 실패 이후에 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 1198-1216)에 의해 행해진 4차 원정은 훨씬 더 큰 실패로 마무리되었다. 이들은 원래 목적과는 전혀 다른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집트의 살라먼을 공격하려했으나 도리어 동방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플랜더즈의 볼드윈(Baldwin of Flandas)을 콘스탄티노플 황제로 임명하므로 콘스탄티노플에 라틴제국을 건설하였다. 이 제국은 반세기 이상이나 지속되었으며(1204년-1261년), 이때는 총대주교도 라틴 대주교로 임명되어 형식적으로나마 동방과 서방의 재결합이 이루어졌던 시기였다.
이노센트 3세는 자신이 파송한 십자군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반대했으나 그러나 그도 결국은 교회연합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라틴 인들의 정복에 대해 비잔틴 인들의 감정은 날로 불만스러워 갔다. 이들은 쉽사리 승복하지 않았으며 오랜 투쟁을 통해 결국 1261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서방교회로부터 탈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의 감정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고 동방의 서방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깊어졌다. 이는 동방교회의 서방교회에 대한 적개심을 고조시키는 데도 한 몫을 했다.
제5차 원정은 예루살렘의 왕(King of Jerusalem)이 이집트를 공격하는 선에서 별 성과 없이 종결되었고, 제6차 원정은 교회로부터 파문당했던 독일 황제 프레드릭 2세가 군대를 동원하여 일으켰다. 이 원정 결과 술탄은 예루살렘, 나사랫, 베들레헴, 아크로르 같은 성지로 통하는 도로를 프레드릭에게 양도하였다. 그리고 프레드릭은 예루살렘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를 지켜본 그레고리 9세는 자신이 파문한 자가 성지의 왕좌를 차지하는 데 대해 분노하였으나 유럽인들은 그의 승리를 기뻐하며 환영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해방 자(Liberator of Jerusalem)라고 불렀다. 그리고 제6차 원정 이후에 진행되었던 제7차, 제8차 십자군 원정은 프랑스의 루이 9세에 의해 이뤄졌으나 별 성과 없이 종결되었다.(1270년)
이상 개략한 십자군 운동은 무려 8차에 걸쳐 약 200년 동안 성지탈환을 위한 소위 ‘거룩한 전쟁’으로 불렸다. 십자군 운동은 원래 목적인 성지 탈환과 동방과 서방교회 통일은 실패했으나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다. 유럽문화가 발달하게 된 것은 십자군을 통한 동서간의 교류의 영향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형성된 상업도로의 길목을 따라 지중해 연안, 북부 이탈리아, 라인 강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되었다. 또 십자군운동으로 인해 봉건제도가 무력화되고 유럽이 근대국가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되었다. 십자군 운동은 동방의 지적인 학문이 유입되어 중세시대 최고의 학문인 스콜라주의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의 발생과 발전을 가져왔고, 예술 등의 진보를 가져와 이 시대는 앞 시대보다 개화와 진보를 가져온 시대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무모한 종교적인 열정으로 시작된 십자군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가정을 파괴한 종교전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성지 탈환의 신앙적인 열기 속에서 사람들은 금욕적 신비주의 사상의 영향을 입은 경건한 수도원운동과 타 세계를 지향하는 신앙의 열기가 증대되어 갔다. 더군다나 십자군들에 참여했던 자들이 무분별하게 유입해온 성(聖) 유물들은 유럽교회의 성(聖) 유물 숭배신앙에 일조하였다. 성(聖) 유물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십자가 조각들과 성자들의 유품과 성경에 나타난 유물 등이 있었다.
십자군 원정은 또 경건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경건운동이 시토 수도회와 같은 새로운 수도원 운동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영적인 갱신운동을 위해 수도원적인 신앙 갱신운동들이 나타났지만 혼란한 사회적인 분위기를 틈타 반사회적이고 이단적인 종파의 성격을 가진 무리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1096년 시작되었던 십자군 운동은 1291년까지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다.(이하 편집자 추가)
– 귀족들이 전사를 하게 된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왕권신장의 결과를 가져왔다. 근대 절대 왕권형성의 밑바탕이 되었다.
–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었다. 십자군전쟁은 클루니 개혁운동으로 교황 권이 절정에 올랐을 때 시작되었으나 십자군전쟁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가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1309년부터 1377 년까지는 교황청의 바빌론 유수기이다. 교황청이 남프랑스의 아비뇽 으로 옮겨가서 프랑스왕의 지배를 받던 시기이다. 그리고 1378년부 터 1417년까지는 교회의 대분열 시기이다.
– 자신을 인문주의자로 자처한 타락한 교황이 나왔던 르네상스 교황 의 시기이다. 십자군전쟁 이후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존경을 받을 만한 교황 가운데 인물이 한명도 없었다. 그래서 공공연하게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공격을 받았다.
–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이미 일어나고 있었던 상업의 발전 및 도시 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유럽 사회가 봉건 사회에서 시민사회로 발전하는데 공헌하였다. 또한 유럽 사람들의 정신적 지평을 확장 시 켜주었다.
– 4차 십자가 전쟁 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콘스타티노플에 있 는 동방의 서적들과 학자들이 서방으로 유입되었다.(*) 글쓴 이 / 심창섭 (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