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30) 중세 중기의 역사
평신도를 위한 세계교회사(30) 중세 중기의 역사
4. 기독교 이단들의 등장
기독교 이단(異端)들의 등장은 이상하게도 교회가 유럽사회를 지배할 때 발생했다. 이런 이단 등장의 조짐은 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 1198-1216) 때부터였다. 이들은 수도원의 개혁 즉 클루니 수도원의 개혁과 그레고리 7세의 개혁운동 그리고 뒤를 잇는 시토회의 개혁 등을 통해 만족을 얻지 못한 부류들이었다. 특히 당시 사회적인 대 사건이었던 십자군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 중에서 니콜라스와 스테반이 주도한 5차 십자군 운동(1212년)은 정말 재앙과도 같았다. 어린 소년들이 십자군에 동원되어 무참하게 살상당하거나 노예로 잡혀가는 참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십자군끼리 내분을 통한 약탈과 인명 피해는 적들이 입힌 피해보다 더 심각했다. 또 이 와중에 성직자들의 도덕수준은 악화되고 있었다. 교회가 세상을 정치적으로 다스리려다가 휘말린 꼴이 되고 말았다. 전쟁에서 돌아오지 않는 귀족이나 영주들의 토지는 수도회에 헌납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수도회는 점점 부하게 되었고 이것이 수도회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여러 이유 때문에 영적인 새로운 운동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기존의 교회 질서를 비난하거나 거부하여 교황청의 인정을 받지 못한 자들은 가차 없이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현세의 부정직한 모습을 비판하다보니 초대교회의 이단들처럼 이원론적 사고에 의하여 자신들 스스로 신앙관을 형성한 이단들이 속출하였다.
전자(前者)의 예를 들면 리용의 상인이었던 피터 왈도(Peter Waldo, 1140-1218)를 들 수 있다. 왈도는 어느 유랑 시인의 노래를 듣고 청빈생활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자신의 전 재산을 이웃에게 다 나누어 준 뒤 자신은 거지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성직자들의 치부와 부도덕을 공격했고 복음서를 자국어로 번역했다. 그는 자신의 설교권을 교황에게 호소했으나 주교들과의 마찰로 파문당했다. 그는 부도덕한 사제들의 성사 집례는 무효라고 하며 성경의 문자적인 순종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논리를 펴기도 하였다. 그는 맹세를 거절했고 전쟁 참여를 거부했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극단론은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으며 결국 위협적인 존재가 되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는 보고밀파(Bogomiles) 혹은 알비파(Albigensianism)라고 불리는 영지주의 이단 카타리파(Cathars)이다. 알비파란 명칭은 프랑스 남부의 도시 알비 일대에 추종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알비파라 고 불렀다. 또 보고밀파도 불가리아에 추종자들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보고밀파라 불렀다. 이들은 초대교회의 영지주의 이단과 같은 자들이었다. 말시온파나 마니교와 같이 이원론적인 사상으로 세상물질은 악한 것이며 영(靈)은 선한 것이라고 했다.
또 구약성경과 구약의 하나님을 배척 했고 화체설을 철저히 거부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이원론사상으로 물질은 악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악한 물질인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들의 성찬식은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기념하는 것뿐이었다. 또한 그들은 남녀 성관계를 악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성관계를 통해 악한 물질인 육체의 탄생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물론 육식(肉食)도 거부했다. 이들은 교회를 부패시킨 교황들은 베드로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비난했다. 교황들은 교회를 부패시킨 콘스탄틴 대제의 후예들이라고 외쳤다.
이에 분개한 당시의 교황 이노센트 3세는 틀루즈의 백작 레이몽을 보내 이러한 이단들을 박멸하라고 명령했다. 특히 교황은 1179년 십자군 전쟁을 위해 준비시킨 군대를 동원해 40일간 알비파의 거점 도시들을 공격하고 불태우는 등 대대적인 핍박을 했다. 그러나 이 이단 박멸운동은 20년의 전쟁이 치러진 후에야 진압되었고 알비파의 주요 거점이었던 프로망스는 초토화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종말론적인 이단 사상을 가진 플로라의 요아킴(Joachim of Fiore, 1135-1202)이라는 사람이 또 등장했다. 그는 역사를 성부시대, 성자시대, 성령시대로 3분하여 각 시대를 다시 7기로 나누는 이설(異說)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시대가 3기의 마지막 시대인 성령(聖靈)의 시대로 보았다. 그는 성령의 시대로 종말이 왔으며 가시적 지상교회는 이제 사라지고 비가시적 교회시대가 도래(渡來)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계시록에 나타난 숫자로 이해했다. 계시록 12장에 여인이 일곱 머리 달린 용에게서 도망쳐 1천일 동안 광야에 숨어 지내는 날을 종말의 연대로 생각하고 곧 교황청이 역사적인 소임을 종식하고 더 위대한 계승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기독교 이단들의 발생으로 교회의 피해가 심각해지자 이를 소탕하기 위해 중세교회 종교재판소(Inquisition)라는 교회 무기가 등장했다. 종교재판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는 어거스틴의 이단에 대한 이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즉 이단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영혼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의미에서 강력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이론이다. 어거스틴은 벌금과 구금 정도의 엄한 형벌을 두고 말했으나 중세교회는 교회가 피 흘리는 것을 가증(可憎)이 여기기 때문에 목을 졸라 죽이는 방법을 제외한 잔혹한 방법으로 처벌하였다. 화형(火刑)이 대표적인 이단에게 적용한 형벌이었다.
이단들의 죄는 반역죄나 존속 살해죄 그리고 화폐 위조의 범죄보다 더 엄중하게 다루었다. 이단으로 몰려 잡혀오면 종교재판의 재판관들은 협박, 고문, 감금 등의 방법으로 죄를 허위 자백하도록 만들었다. 고문에 못 이겨 그들 신앙을 고백하면 화형(火刑)은 면했지만 대개 종신형이었다. 이단들을 처단하기 위해 종교재판의 제도는 그 뒤에 교회와 교황청이 그들의 지배에 반대하는 자들을 다스리는 중요한 핍박 수단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5. 제3의 물결
이단들이 중세교회에 큰 영향을 주면서 극단적인 배척운동을 당할 때 반대로 극단적인 청빈과 경건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교황의 지지와 보호를 받으며 중세 교회의 새로운 방향을 위한 물결이 되었다. 이 운동의 주체 세력으로 등장한 사제 집단은 도미니칸회(Dominican)와 프란시스회(Franciscan)였다.
그들은 중세의 대학을 중심하여 지적으로 앞섰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단들의 횡포와 사회의 부패에 영향을 받고 헌신, 금욕주의, 열정, 청빈을 내세우며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은 설득력 있는 설교로 대중들에게 호소하면서 사도적인 청빈 사상을 강조했다. 이들의 운동은 서민적이고 제도권의 수도원 운동에서 탈피한 수도원의 문화를 도시인들에게 적용했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의 영향으로 발달한 도시 중심의 상업주의는 반대했다. 더 이상 수도원에 은거한 은둔자로서가 아니라 수도사들이라는 권위와 굴레를 극복하고 사람들을 형제라고 칭하면서 순회전도를 하였다.
(1) 도미니칸 수도회
도미니칸의 창시자인 도미니크(St. Dominic, 1170-1221)는 스페인 카스틸의 칼라로가 사람으로 1170년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의 주교였던 아케베도의 디에고(St. Juan Diego Cuauhtlatoatzin, also known as Juan Diegotzil, 1474–1548)를 모시고 카타리파 이단이 창궐한 프랑스 남부를 여행하는 동안 이단들의 헌신적인 삶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수도사들이 이들보다 화려하게 살면서 사치스럽게 치장하고 말을 타고 다니는 생활로서는 이들을 로마 가톨릭교회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스승 디에고(St. Juan Diego)가 카타리파에서 개종한 여자들을 위해 수녀원을 짓는 등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던 것을 기억하고 스승의 사후 자신이 이 사업을 추진했다. 도미니크는 전쟁을 통한 이단의 박멸에 회의적이었고 청빈의 삶과 더불어 이들을 설교로 감화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1215년 도미니크는 자신의 설교권을 공인받기 위해 제4차 라테란 공회의에 참석하여 교단 신설을 당시 교황에게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216년에 교단 신설의 허락을 받게 되었다.
그는 설교자를 길러 내어 사람들을 감화시키기 위해 당시의 고등 교육기관이었던 파리, 로마, 블로냐 등의 대학에 젊은이들을 보냈다. 1220년 볼로냐에서 제1차 교단총회를 개최하였고 여기서 프란시스회의 걸식수도(Mendicant)의 영향을 받아 그들도 걸식수도(乞食修道)의 형식을 채택했다. 사람들은 새로 탄생한 이 같은 수도회에 매력을 느꼈고 1221년 도미니크가 사망한 해에는 수도원 수가 60개로 늘어났다. 그리고 프로망스, 툴루스, 프랑스, 름바르디, 로마, 스페인, 독일, 영국 등 유럽의 8개 지역에 정착되었다.
도미니크는 설교와 교육을 강조했으며 특히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도미니크 출신으로 중세 대학에서 학자로 명성을 떨친 지도자들이 많았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신비가 에크하르트, 타울러, 사보나롤라 등이다. 특히 사보나롤라는 유명한 종교 개혁자였다. 그의 제자들은 비록 사회의 상류층에 속하는 지도자로서 명성을 떨쳤으나 도미니크의 가르침과 정신은 언제나 청빈과 금욕생활을 통해 모범을 보이며 영혼의 기갈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찾아나서는 것이었다.
(2) 프란시스회(Franciscan monks)
당시 도미니크회보다 더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던 수도회는 프란시스회였다. 프란시스(St. Francis, 1182-1226)는 1182년 중부 이탈리아의 아시시의 옷 장사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평민들 편에서 귀족들과 싸우다 1년간 감옥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변화를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는 중병을 않고 난 후였다. 그 후 아풀리아 원정군에 가담했다가 귀환 후 그의 변화는 더 심화되었다.
무도회에 참석했던 어느 날 프란시스가 갑자기 바닥에 주저 않았다. 놀란 친구들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프란시스는 “La Donna Poverta!”라고 대답했다. 즉 나는 가난과 결혼했다는 말이다. 흥청망청하는 인간들의 삶에 회의를 가졌던 프란시스는 하루 먹고 살 만큼의 구걸을 하면서 사는 구도자의 길을 택했다. 그는 농부들이 버린 헌 옷을 주어 입고 다녔으며 음식이 너무 맛이 있으면 재를 뿌려 먹었다. 그러나 프란시스의 가난은 단순한 견유학파(犬儒學派)의가난이 아니었다. 마음의 평정을 얻고 근심에서 해방되려는 그리고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훈련을 위한 가난이 아니었고 사회갱신을 위한 전략이었다.
프란시스는 서로 가난을 추구함으로써 물질에 대한 전쟁을 막는 것이 대성당 건축보다 하나님의 평화와 휴전에 이르는 빠른 길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단처럼 창조된 물질세계가 악이거나 경시해도 좋은 것이기 때문에 가난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도리어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본 자였다. 그는 한센 병자를 껴안고 목욕시키고 농부들과 함께 일하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기존의 클루니수도원이나 시토수도원처럼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래서 탁발(托鉢) 수도사들이 받아오는 과일이나 기부금이 곳간에 쌓이지 않도록 했다. 그는 아낌없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뿐 아니라 교회를 보수하는 등으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가운데 1210년 프란시스는 교황 이노센트 3세에게 교단 형성의 인허를 받았다.
프란시스는 도미니칸과는 달리 신학을 논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전파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죄와 통회와 구주의 수난의 공로를 통한 사죄의 은총에 중점을 두어야한다고 가르쳤다. 프란시스회 형제들은 12명이 한 그룹을 형성하여 도시, 시골, 시장, 농장, 한센병자들의 집 어디든 찾아다니며 전도했다. 이런 프란시스의 이상에 동조하는 자들이 날로 증가했다. 그는 조직에 약했으나 그의 헌신적인 정신에 감동을 받은 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프란시스회는 성장과 더불어 문제도 노출됐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걸식하면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프란시스의 주장인 검소가 세월이 지나면서 이완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두개의 분파가 형성되었다. 프란시스처럼 그대로 하자는 극단적 청빈파와 어느 정도 재산의 소유를 인정하자는 온건파로 나뉘게 되었다.
비록 프란시스는 학문적인 명상이나 설교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당시 대학의 많은 지식인들이 그의 이상을 따랐다. 그래서 프란시스의 교훈을 따른 학자들도 배출되었다. 이들 중 중세 스콜라신학자들은 피터 롬바르드, 보나 벤투라, 헤일즈의 알렉산드 그리고돈 스코투스 등이 있다. 이들은 대학을 중심으로 도미니칸의 신학자들과 함께 중세신학의 대명사인 스콜라 신학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중세의 역사 가운데 새로운 교회갱신을 위해 일어난 제도권 밖의 물결로 등장했으나 여전히 제도권의 간여를 수용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중세대학의 지속적인 발달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16세기 종교개혁의 인물들을 배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글쓴 이 / 심창섭 (목사/교수) 출처 / 기독교 교회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2004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