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서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32) 구원의 조건 아닌 믿음의 열매 선행

제 24 주일(문 62-64)

요절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 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문 62 :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가 될 수 없으며 의의 한 부분도 될 수 없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답 :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설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 며 하나님의 율법에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고 또한 완전히 일치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생에서 우리가 행한 최선의 행위라도 그 모든 것은 불완전하며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문 63 :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에 대하여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상주시겠다고 약속하였는데, 그래도 우리의 선행은 아무 공로 가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답 : 하나님의 상은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문 64 : 이러한 교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무관심하게 하고 또한 사악 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답 : 그렇지 않습니다. 참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사람들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23주일에는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얻는 유익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24주일에서는 ‘믿음과 선행’에 관해 심도 있는 교훈을 다룬다. 과연 믿음과 선행은 구원의 도리로서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62번~64번의 질문들은 바로 이 주제 즉 ‘바른 믿음과 행위와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1. 세 가지 질문

이 세상 모든 종교는 선행을 강조하며 그에 따라 합당한 보상이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성경도 예외가 아니어서 선행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 가르치는 선행에 관한 교훈의 차원과 성경이 가르치는 선행의 차원은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 그러면 성경은 선행문제를 구원문제와 관련하여 어떻게 가르치는가? 요리문답에서는 믿음과 선행의 관계에 대하여 세 가지 질문과 답변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 공부를 통해 구원의 조건으로서 행위가 아닌 믿음의 열매로서의 행위임을 배우게 되며 또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과 결정적인 관련으로 인하여 되어지는 것임을 배우게 될 것이다.

첫째, 신자는 행위가 아닌 은혜로 구원받음(62문)
둘째, 우리의 행위에 따라 심판 받지 않음(63문)
셋째, 행위가 없는 사람은 바르게 믿는 사람이 아님(64문)

2.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는 선행

(1) 선행에 대한 이성적인 질문들

62문은 “우리의 선행(善行)은 왜 하나님 앞에서 의(義)가 될 수 없으며 의의 한 부분이라도 될 수 없습니까?”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치는 데 그럴 경우 “인간의 선행은 죄로부터 놓임을 받아 구원 얻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으로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는 엄청난 선물인 구원을 얻는데 “인간이 그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하는 전제하에서 하는 질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며 ‘오직 은혜(sola gratia)’라는 말의 의미를 고민하게 한다.

63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에 대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상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그래도 우리의 선행은 아무 공로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선행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왜 우리의 선행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지 못한다고 하는가?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질 않는가?(히 11:25,26) 상급을 바라보고 한 이 행위는 모세의 행위에 대한 공로가 아닌가!”라고 반문(反問)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행위 여부를 평가하시고 그에 대한 보상의 차원에서 그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만약 그렇다면 어느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참고, 눅 18:26,27) 이런 주제와 함께 선행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다.

64문에서 “이러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무관심하고 사악하게 되지 않겠는가?”라는 이 질문은 매우 현실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원칙에 따라 선을 행한 자에게 보상을 하는 것은 당연하기에 이신칭의(以信稱義)로 교육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쉽게 실증내고 또한 무시하며 오히려 이러한 가르침에 대하여 반발하고 나아가 더욱 사악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도전적인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들 모두가 그럴 듯하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당연히 갖게 되는 의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에 의하여 나온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은 인간이 이성적으로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이 진술하고 있는 바에 따른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질문들에서 배우게 되는 것은 성경은 우리의 선행이 우리의 구원에 공헌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2) 선행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종교개혁 당시 부패한 로마 가톨릭의 교훈과 신앙지침에 대한 반발로 주어진 것이다. 천주교도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또 선행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하나님이 은혜로운 사역을 행하시지만 인간 역시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인간 구원에 있어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하여 공동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으로 오늘날 교회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는 교훈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도리가 전혀 아니다. 물론 이런 진술에 대해 혹자는 야고보의 변론을 들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고 반문할 것이다. 사실 이와 관련하여 야고보는 심지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라고까지 행함의 중요성을 구원의 요건인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야고보의 이 교훈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주제(主題)의 보완적인 말씀이지 절대적인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신앙고백은 이런 종류의 교훈을 배격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의 도리는 행위와 믿음이 서로 다른 분리 된 개념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개념으로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롬 5:14a) 이렇게 아담으로부터 죄는 모든 사람에게 전가(轉嫁)되어 그 어떤 선행으로도 원래 창조 받은 상태로 복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라고 했다. 이러한 기조는 이사야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결국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전가된 사망에 이르게 하는 그 죄로 인해 그 어떤 선행으로도 전혀 구원받을 여지가 없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구원의 도리이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서만 가능하다.

3. 구원에 대한 다양한 믿음의 형태들

믿음과 행위 그리고 구원과의 관계를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구원에 있어 행위만을 강조
둘째, 구원에 있어 믿음만을 강조
셋째. 구원에 있어 믿음과 행위를 함께 강조
넷째, 구원에 있어 행위를 믿음의 결과로 강조

(1) 구원에 있어 행위만을 강조

이것은 믿음의 내용 보다는 선행을 통해 그 대가로 구원이 주어진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그러했다. 그들은 헌금을 하면 영혼이 연옥에서 천당으로 올라간다고 가르쳤다. 해서 당시 교인들은 죽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헌금이라는 행위를 해야만 했다. 이 교훈은 선한 행위를 하면 그에 따른 보상으로 구원이라는 것을 준다는 식이다. 얼마나 합리적인 이해인가?

이러한 지침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비슷하게 나타난다. 불교는 불공, 수도, 많은 시주 그리고 미생물까지도 죽이지 않는 선행을 하면 그 보상으로 구원 즉 극락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게 오늘날 많은 교회가 선행을 강조한다면 이름만 다를 뿐 불교와 같은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가르침은 유대주의자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들은 육체의 할례를 받아 선민 된 증거의 표를 간직하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참고, 갈 3:12) 그래서 이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마침내 구원받은 백성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성경을 보면 갈라디아 교회의 일부 유대주의 자들이 그러했다.(참고 갈 2:4)

회심 전에는 바울도 그런 유대교 전통에 누구보다도 열심이었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 때 그런 생각을 버렸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 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구원의 도리를 바로 알게 될 때 이전 자신의 생각과 열성적인 행위들이 완전히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이는 질문 63에서 말하는 그 어떤 선행의 일부라도 전혀 구원 얻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2) 구원에 있어 믿음만을 강조함

이것은 소위 믿음 지상주의로 오직 믿기만 하면 된다는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에서는 그 어떤 선행도 요구되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 이단인 구원파의 주장으로 자기들은 이미 믿음으로 구원 받았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저질러도 절대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집단에서는 자신들만의 믿음의 내용과 규범이 있어서 이에 따르면 되는 것이지 그 어떤 선행을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하였던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이들에게서는 방임과 무책임한 빈약한 믿음 행위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들은 마땅히 감당해야 할 믿음의 행위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믿음 지상주의자들에 대하여 일침을 놓았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 2:16,17) 즉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있는바 믿음과 행위는 분리될 수 없기에 단순하게 믿기만 하면 된다는 가르침은 많은 오해와 점검이 필요한 가르침이라 하겠다.

(3) 구원에 있어 믿음과 행위를 함께 강조
이는 믿음도 갖고 행위도 필요하다는 병행론이다. 이것은 무엇을 믿느냐 하는 바르고 확실한 믿음도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위도 알지 못하고 단순히 종교적 신념과 확신으로 선을 행하면 이것이 믿음으로 간주되어 구원받는 다는 주장이다. 이는 믿음 따로 행위 따로 믿음과 행위의 불일치이다. 이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믿음은 믿음이고 세상에서 요구하는 방식의 행위를 나타내려는 이중적 행태를 보이는 것은 세속적 신앙인의 전형이라 하겠다. 즉 자기 편리대로 상황에 따라 믿음의 모습도 보이고 행위도 보이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믿음의 행위를 자신의 이익으로도 삼으려는 세속성도 보이곤 한다.

초대교회 때에 사도 베드로의 능력적인 사역을 목격한 시몬이라는 마술사는 돈을 주고 성령을 사기 원했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 8:18-20) 사도 베드로는 이런 사람에게 저주 받을 것을 경고했다. 이 사건을 통하여 결코 믿음은 돈을 주고 살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믿음도 갖고 행위도 강조하는 것은 성경이 보여주는 구원의 도리는 결코 아니다.

(4) 구원에 있어 행위를 믿음의 결과로 가르침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 인간의 비참한 본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사 64:6,7a) 이는 본질상 죄로 인하여 타락한 모든 사람은 비참 가운데 빠져있는 존재임을 전제한다.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만 그 비참 가운데서 구출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구원은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만 주어지는 것”(참고 행 2:21, 롬 10:13)으로 이는 말씀을 통하여 전달되며 이 말씀을 듣는 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마침내 구원을 얻게 된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8-10)

이는 말씀을 듣고 믿어 그에 따른 순종의 행위로 구원이 주어지게 됨을 말씀하고 있다. 즉 믿음은 행위의 원인이며 행위는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열매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원리 속에서 믿음을 주시는 성령께서는 반드시 아름다운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고 역설하였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4. 행위와 믿음과의 관계

예수께서는 이 문제에 관하여 아주 쉬운 예로서 설명해 주셨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 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이 말씀은 행위와 믿음은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열매와 뿌리와의 관계이다. 뿌리 없는 나무는 죽은 나무요 살아있는 나무는 싹이 나고 꽃피어 열매 맺는다. 그런 양상은 바로 그 나무의 뿌리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줄기를 튼튼히 하고 아름다운 꽃을 꺾어 놓아도 뿌리가 살아있지 않다면 그러한 작업(행위)은 의미가 없다.

여기서의 문제는 열매를 일부러 맺으려고 애쓰면 그에 대한 대가가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착각이요 환상이다. 확실한 믿음의 뿌리가 없는 그 어떤 선행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구원의 원리도 동일하다. 예수께서 그러한 원리로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 주셨다. 주께서는 산상 보훈 마지막 부분에서 이 진리를 극명하게 드러내어 설명해 주셨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 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16-21)

5. 믿음과 행위에 대한 바른 이해

64문에 “이러한 교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무관심하게 하고 또한 사악하게 하지 않겠는가?”라고 묻는다. 믿음과 행위와의 관계가 과연 어떤 연관이 있기에 이러한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일까? 우리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4:4,5)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말씀과 같이 뿌리가 살아있고 가지가 줄기에 붙어 연결되어 있을 때 그 나무에서 열매가 절로 맺히는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진리를 온전히 믿는 참 믿음이 있을 때 그에 따른 선한 행위는 저절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은 거꾸로 부르심에 합당한 행위가 나타남이 없는 신자의 삶은 그 사람의 믿음 자체를 점검하게 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성격을 갖는다. 즉 선한 행위의 열매가 없는 교인은 자신의 믿음의 뿌리를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가끔 믿는 사람에 대한 비난의 소리를 듣는다. 심한 경우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부끄러운 일들을 서슴지 않고 행함으로 그런 말을 듣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은혜의 말씀을 통해 확실하게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진리를 믿는 성도는 더욱 더 분발하여 그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살려고 애써야 한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엡 4:1,2)

6. 성도의 믿음의 행위와 보상

한편 63문에서 제기하는 믿음의 행위와 보상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성경은 선행의 보상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시 18:20) 주님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이 보상은 일한 결과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결코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없다.(엡 2:8,9)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 받은 자들은 아무리 수고 할지라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 17:10)라고 고백할 뿐이다.

결 론

구원의 진리를 확실하게 깨달은 성도는 자신이 전적인 은혜로 받은 구원이 이미 넘치는 보상이기에 항상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고 고백하게 된다. 이처럼 구원의 원리를 잘 아는 자는 결코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과 교회 그리고 성도들을 섬기게 된다.

구원의 은혜를 바로 깨달은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사도 바울은 참으로 어떤 자격이나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받은 것도 주님의 충성스러운 종으로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수고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가 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이와 같이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충만한 자는 항상 주님의 은혜만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무익한 종에 불과 함을 인식하여 더욱 그 은혜 주심에 감사하며 충성할 뿐이다.(*) 글쓴 이 / 박병은 목사(덴버 둘로스장로교회 담임)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