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

한국교회 복음주의와 개혁주의의 비교

이 표는 남포교회 담임 목사 박영선 목사의 ‘복음주의와 개혁주의’ 수양회 강의를 녹취한 것이다. 강사는 이 강의의 취지를 ‘복음주의’를 무시하고 ‘개혁주의’를 앞세우자고 주장하기 보다는 둘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복음주의만 너무 강조되고 개혁주의는 거의 사라져 가는 현실의 안타까움에 이 강의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편집자의 견해는 조나단 에드워드식 극단적 회심론과 개혁주의의 구원론이 서로 멀리 떨어진 대척점에 놓여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 둘의 거리를 서로 좁혀 가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인 것 같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남포교회 인터넷 홈 페이지를 참고 할 것)

복음주의 개혁주의 비교
1. 복음주의(Evangelical Movement)란 ‘인간의 열심’을 모토로 삼고 신앙의 주체가 ‘행위자’에게 있다. 오늘날 대부분 한국교회가 이 입장을 강하게 취하고 있다. 1. 개혁주의(Reformed Theology)란 ‘하나님의 주권’을 모토로 삼고 신앙의 주체가 ‘하나님’에게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이 입장을 아주 약하게 취하고 있다. 1. 서론 : 신앙의 주체가 하나님인가, 인간 인가?
2. 복음주의는 현재 대부분의 한국교회의 신앙 색깔인데 회심, 중생, 십자가, 구원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운동이다. 명칭은 ‘~주의(ism)’이지만 실제는 ‘~운동(movement)’에 더 가깝다. 그러나 이 운동은 점차 하나의 사상처럼 되어가고 있다. 2. 복음주의가 어떤 신앙 운동(movement) 이라면 개혁주의는 신학 논리(Theology)에 가깝다. 2. 복음주의는 ‘신앙운동’이고 개혁주의는 ‘신학논리’의 성향이 강하다.
3. 복음주의가 회심, 중생을 강조하다 보니 교인 숫자가 증가하는 부흥의 결과가 종종 나타난다. 교회사에서도 그런 현상을 보여 준다. 그래서 이런 숫자의 증가로 인해 복음주의가 더 탄력을 받고 자신감을 얻고 있다. 3. 반대로 개혁주의는 운동이(movement) 없다 보니 숫자가 증가하지 않고 화란, 한국 등에서 점점 쇠퇴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3. 교회의 숫적 증가와 쇠퇴
4. 복음주의의 부작용은 단지 방법론으로 전락해서 ‘이렇게 해 봐! 그러면 교회가 부흥할 거야!’ 이런 식으로 복음주의의 원래 의미와 다르게 하나의 어떤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내용이 너무 가볍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한 사람의 전 생애를 담아내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하고 간단하게 회심, 중생, 구원으로 끝내 버리는 어떤 극단적 형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4. (없음) 4. 성장하는 복음주의의 그 부작용이 염려 된다.
5.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큰 두 흐름으로 본다면 신령(감정)주의와 이성주의이다. 신령주의는(복음주의는 신령주의, 은혜주의에 포함 된다) 신학의 메마름과 공허함에 반기를 든 신앙운동이다. 즉 신앙의 역동성(vitality)에 역점을 둔다. 예를 들면 17C 독일의 경건주의(진젠돌프, 할레대학, 필립 스페너 등), 17C ~20C의 청교도운동과 복음주의운동, 20C에 일어난 오순절운동 등이다. 한 마디로 예수를 한 번 뜨겁게 제대로 믿어보자는 것이다. 5. 개혁주의는 신령주의와 반대로 신앙의 주체를 사람의 감정이나 느낌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에 둔다. 신령주의는 신앙의 역동성을 가지려면 어떤 동기부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내 마음에 뜨거운 확신이 오든가 아니면 외부적인 어떤 동인(체험, 신비 같은 행동의 자극)이 주어져서 내 역동성의 모터가 돌아가야 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이것은 신앙의 출발점이 인간 이전에 먼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쉽다. 5. 교회 역사 속에 나타난 신앙의 두 흐름은 신령(감정)주의와 이성주의다, 그러나 신령(감정)주의가 지나치게 강조 되면 신앙의 균형을 잃고 인간중심의 신앙으로 왜곡될 수 있다.
6. 신령(감정)주의에 속하는 복음주의가 회심을 강조하고 십자가의 구원을 신앙의 중심에 놓는 다면 산의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신앙과 같다고 할 수 있다. 6. 개혁주의는 운동이 아니고 교리와 신앙논리이기 때문에 신앙 전체를 볼 수 있는 숲과 같다고 할 수 있다. 6. 나무만 보거나 숲만 보지 말고 숲과 나무 둘 다 볼 수 있어야
7. 복음주의의 우려 점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복음주의, 청교도주의가 신앙의 흐름의 주류를 이루면서 체험과 확신을 강조하는 가운데 신앙의 주체 자이신 하나님과 그의 뜻이 점점 약해지는 데 있다. 복음주의의 강조점이 중요하나 지금처럼 신앙의 주체를 자꾸 사람으로 몰고 가면 여러 가지 신앙의 왜곡이 올 수 있다. 7. (없음) 7. 개혁주의를 부르짖는 이유는 한국교회의 복음주의 편중으로 인한 부정적 요소가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8. 하나님의 예정과(개혁주의) 인간의 책임은(신령주의의) 그 둘 사이의 경계선을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우리가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겨야 하지만(신령주의) 뒤돌아보면 하나님이 다 이루셨다는(개혁주의) 고백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올바른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역사(개혁주의)’와 ‘인간의 반응(복음주의)’ 이 둘이 다 100% 역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8.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둘 사이의 조화와 균형이 필요하다.
9. 복음주의(신령주의)는 아무리 기독교가 좋고 진리라 해도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내가 공감해야 한다.’는 인간의 느낌, 인식, 확신 등을 강조한다. 9.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이 말씀은 신구약 전체에 연속적으로 나오는 주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주권 등을 강조한다. 즉 개혁주의는 하나님이 나를 먼저 찾아오셔서 당신을 알리시고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내가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9.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적인 면이 강하다.
10. 복음주의는 ‘내가 예수를 믿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해서 믿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10. 개혁주의는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시려는 그 하나님의 작정, 의지, 신실하심에 내가 붙잡혀 믿게 되었다고 믿는다. 10. 이렇게 복음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를 작게 보면 작은 것 같으나 크게 보면 큰 것 이다.
11. 복음주의는 자신의 논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선택을 강조함으로 책임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유리하다. 그러나 단점은 신앙이 자신의 상황, 기분, 감정에 다라 춤을 춘다. 신앙의 근거(주체)가 자기가 되기 때문에 신앙이 매우 불안정하다. 내가 기분이 좋을 때는 하나님이 내편이신 것 같은데 다음 날 내 기분이 좋지 않으면 하나님도 내 편이 아니신 것 같다. 11. 신앙이 하나님의 주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내 기분, 환경, 기분 따라 춤을 추지 않는다. 내가 신앙생활을 잘 할 때나 비틀거릴 때나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변치 않고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구원은 어떤 자격이나 내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징계는 받을 지라도 나의 구원이 왔다 갔다 하지 않는다. 11. 신앙은 그 근거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춤을 출 수도 있고 반대로 흔들리지 않고 견고할 수도 있다.
12. 복음주의(신령주의) 보다 개혁주의 신앙의 안전장치가 더 확실하기 때문에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사실이기 때문에 개혁주의 구원론을 믿는 것이다. 큰 그림으로 신앙의 숲을 보면 내 구원이 내 행위에 다라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을 인간처럼 행위가 예쁜 사람만 잘 봐주시는 그런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면 안 된다. 12.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행위나 자격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의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은혜에 따른 것이다.
13.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신가?’ 이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신령주의는 이것이 약하다. 신앙의 주체가 자기에게 있기 때문에 내가 뜨거울 때는 하나님이 믿을 만한 분이시지만 내가 식을 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낀다. 내 기분에 따라 하나님도 나에 대해 달라지시는 것처럼 생각한다. 신앙에 있어 인간의 열심과 행위를 강조할 때 이런 잘못에 빠지기 쉽다. 13. 개혁주의는 신앙의 주체를 하나님께 두기 때문에 하나님은 항상 믿을만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된다는 것도 성경 전체의 일관 된 흐름이다. 그래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항상 변함이 없으신 것이다. 인간의 행위의 잘하고 잘못한 것에 따라 하나님이 반응하시지만 그러나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13. 개혁주의의 강점은 이처럼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다.
14. 성경은 성도의 세세한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우리 아이가 아플 때, 또는 내가 사고를 당했을 때 성경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구체적인 답이 없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 믿을만한 분이시며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추상적(?)인 이런 말만 계속 나온다. 그런데 신령주의는 이런 성경 말씀의 ‘삶에 적용’을 무리할 정도로 강조하여 나무는 보는 데 숲은 보지 못하는 것처럼 성경이 전체적으로 말하는 신학(교리)는 무시하고 있다. 성경 전체는 우리의 삶에 세세하게 적용하도록 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교회에 이런 신령주의가 만연되어 있다는 것이 대단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즉 기독교가 점점 내용이 없는, 좋은 말로 표현하면 지나친 현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14. (없음)
15. 신앙 초기에는 대부분 신령주의로 빠지게 되어 있다. 믿는 다는 것이 자가가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선택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15. 신앙이 점점 깊어지면 이러한 신앙은 어떤 한계에 달하게 된다. ‘구원의 확신’도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신앙이 성숙할수록 도리어 아리송하게 된다. 15. (없음)
16. 20,30년 전에는 한국에서 수련회만 했다 하면 ‘구원의 확신’이 그 주제였다. 그래서 엉엉 한 바탕 울고 그 은혜에 빠진 사람은 합격이고 전혀 그런 울음이 없는 사람은 따로 모아서 그들도 그렇게 울 때까지 특별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수련회에서 학생들이 그렇게 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도 무조건 우는 것은 별로 찬성하지 않는다. 이렇게 감성을 자극해서 울도록 하는 것은 부작용으로 면역력만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야곱의 얍복 강 체험을 주셔서 우는 것은 괜찮으나 구원과 은혜 받는 근거가 내 감정에(울음)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불을 끄고 오르간을 치고 이런 것은 질색이다. 하나님을 감동하시도록 하여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울리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인위적인 분위기 조성이 싫은 것이다. 그러나 나와 방식이 다르다고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뜨거운 마음으로 찬양을 하고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한 설교자가 동시에 가슴이 뜨거워지게도 하고 이성적으로 공감을 갖게 하기는 어렵다. 16. (없음)
17. 나는 복음주의의 거목인 빌리 그래함이나 요한 웨슬레가 이 신령주의의 대표자들이라고 본다. 이들은 성도의 ‘완전한 성화’의 삶을 강조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인간의 완전한 성화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17. 그러나 개혁주의는 ‘완전한 성화’보다는 날마다 자기를 ‘성찰(개혁)’하는 삶이다. 성도의 완전 성화가 불가능 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성화의 삶을 추구해 가다 보면 어느 시점에 가면 한계에 달하게 되며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라고 고백하게 된다. 이 때 구원은 내 행위에(내 의지나 선택) 있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음을 믿고 개혁주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다. 17. 성화에 대한 관점의 차이
18. 신령주의 신앙은 숲속의 나무만 보는 것과 같으며 집으로 생각하면 집 안의 가구와 같다. 이는 신앙의 작은 틀이며 그래서 복음주의(신령주의)는 개인적인 신앙의 삶과 헌신 등 이런 것들이 특별히 강조 된다. 18. 개혁주의 신앙은 산의 숲을 보는 것과 같으며 집의 지붕과 같다. 지붕 없는 집은 가구를 아무리 잘 해 놓아도 비가 오면 다 젖는다. 그래서 큰 틀이(지붕) 필요하다. 칼빈도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였다기 보다는 신학의 큰 틀 즉 신앙의 지붕을 세원 것이다. 그래서 개혁주의는(칼빈주의) 태생적으로 신앙생활의 현실적용에 약할 수 있다. 칼빈주의는 신앙의 큰 틀(원리)이기 때문이다. 한국장로교회가 출발은 개혁주의로 시작 했는데 점점 인간 중심의 복음주의 쪽으로 편중되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8. 지붕과 가구의 비유
19. 다시 말하지만 신령주의는 신앙생활 과정에서 신앙이 무너질 때가 있고 흔들릴 때가 있다. 이것은 신앙의 근거가 자기에게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은 모래 위의 집일 수도 있다. 19. 개혁주의는(칼빈주의) 신앙과 구원의 근거를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과 신실하심에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인간적인 흔들림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신앙이 반석 위의 집이 될 수 있다. 19. 모래 위의 집과 반석 위의 집 비유
20. 복음주의는(신령주의) 신앙공동체와 사회 전체보다도 자기 개인적인 신앙을 더 강조한다. 그리고 타락한 세상과 성도가 구별 돼야 함을 강조 한다. 20.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창조영역(자연,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전반에 걸친 ‘하나님의 다스림’을 강조한다. 이 세상을 성도가 뛰어 들어가야 할 하나님의 창조영역으로 본다. 즉 성도는 빛과 소금이 되어 타락한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대로 회복시켜야 됨을 강조한다. 20. 세상을 대하는 관점의 차이
21. 오늘날 다원주의(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각 개인의 가치와 판단이 신격화 되고 있다. 이런 시류의 풍조가 ‘개인 신앙의 가치’를 강조하는 신령주의 신앙과 합작이 되어 부정적인 방향으로 활발하게 성장할 수 있다. 성공주의 신앙, 번영의 신학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 왜냐하면 개인이 신앙의 근거와 출발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음주의(신령주의) 신앙은 오늘날 유행하는 시대사조인 다원주의와 개인주의라는 공통점 때문에 기독교 복음이 쉽게 변질 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21.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인 개혁주의만이 오늘날 이런 개인주의가 극대화 된 시대적인 조류와 세속주의로 인해 기독교가 변질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다. 21. 신령주의와 다원주의는 개인 중심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서로 손을 잡기가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