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순교사화(26) 유럽과 아시아에서 핍박
기독교 순교사화(26) 유럽과 아시아에서 핍박
14. 피에몬테 골짜기의 핍박사건
프랑스에서 계속된 핍박으로 발도파(Waldensians) 사람들은 피난처를 찾아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여러 곳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피에몬테골짜기로 피난처를 삼았다. 거기서 그들은 성장하여 굉장히 번창했다. 그들이 조금도 사회에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하지 않고 로마 성직자들에게 십일조를 내는데도 불구하고 로마 성직자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을 추방할 길을 모색했으며 따라서 튜린의 대주교에게 발도파 사람들은 이교도라고 불평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내세웠다.
– 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믿지 않는다.
– 그들은 죽은 사람을 위한 헌금을 하지 않는다.
– 그들은 미사에 참여하지 않는다.
– 그들은 고해 성사도하지 않으며 면죄권도 받지 않는다.
– 그들은 연옥을 믿지 않으며 그들의 친구들의 영혼을 해방시킬 돈 도 지불하지 않는다.
이러한 고소에 따라 대주교는 발도파 사람들을 핍박하라고 명령했다. 레블에서 카테린 기라드(Catelin Gird)라는 사람이 화형을 당하기 위해 기둥에 묶인 채 집행관에게 돌을 하나 달라고 했다. 집행관은 누구에게 던지려는 줄 알고 거절했으나 기라드가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확언하자 집행관이 돌 하나를 집어 주었다. 그러자 기라드는 그 돌을 열심히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이 단단한 돌을 먹고 소화시킬 사람의 권한에 있을 때 내가 지금 고난을 받고 죽으려는 신앙은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은 결코 아니리라.” 그러고 나서 그는 돌을 땅 바닥에 던져 버리고 꿋꿋하게 불길 속에 자기 몸을 내어 맡겼다.
이와 같이 굉장히 많은 발도파 사람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혹은 사형을 당했다. 결국 고난에 지친 발도파 사람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정규부대를 조직했다. 그러자 여기에 대한 전적인 보복 조치로서 튜린의 대주교는 그들을 무찌를 대부대를 보냈다. 그러나 대부분 작은 충돌에서 발도파 사람들이 승리했다.
이때 필립 7세가 사보이의 공작이었고 피에몬테의 성주였다. 그는 자기의 권한으로 중재하여 이 유혈 전쟁을 중지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유혈 전쟁은 자기가 다스리는 성의 내정을 혼란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보이 공작은 교황이나 튜린의 대주교를 자극하기 원치 않았지만 그는 두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더 이상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이 고위 성직자들의 명령을 받은 군대로 짓밟히는 것을 원치 않으며 자신은 전혀 그 사건에 대해서 의논 받은 일도 없는데 자기 지역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뜻을 전했다.
공작의 단호함을 안 신부들은 그가 발도파 사람들에게 편견을 갖게 하려고 애를 썼다. 공작은 그들에게 비록 그 사람들의 신앙관이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근들이 언제나 조용하고 충실하고 순종 잘하는 것을 발견했으며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핍박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신부들은 그가 발도파 사람들을 잘못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발도파 사람들은 사악한 무리이며 그들은 방종과 더러움과 신성 모독과 여러 가지 혐오할 만한 범죄에 빠져 있다고 했다. 공작은 신부들이 아주 엄숙하고 진지한 태도로 말했지만 그 말에 속지 않았다.
그러나 공작은 사실을 직접 알아보기 위해서 믿을 만한 12명의 학식 있는 사람들을 피에몬테 골짜기로 보내서 발도파 사람들의 인격을 알아보도록 했다. 이 사람들은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며 여러 계층의 발도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 본 뒤 공작에게 돌아와 그들에 대해서 아주 좋은 보고를 했다. 신부들 앞에서 그들은 해를 끼치지 않으며 충실하고 친절하고 부지런하며 경건하다고 증언했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들이 정죄 받고 있는 그런 범죄는 아주 싫어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만약 어떤 개인이 타락해서 그러한 범죄를 하게 되면 그들의 법률에 의해서 모범적인 징계를 받는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공작님께 우리가 말한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남은 발도파 사람들을 대표하여 비록 자신을 방어하고 그들의 무자비한 적으로부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지만 공작님의 허락 없이 무기를 잡은 것을 사과하겠다고 하는 12명의 주민 대표들을 데려 왔습니다. 우리는 또한 공작께서 친히 판단하시도록 서너 명의 부인들과 여러 나이층의 어린이들을 데려 왔습니다.” 공작은 발도파 사람들의 대표 12명의 사과를 받은 뒤에 그들을 그들의 집으로 보내 주었다. 그러고 나서 공작은 신부들에게 공작 관저(官邸)를 떠나라고 명하고 그가 다스리는 영내에서는 즉시 발도파 사람들에 대한 핍박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이 덕망 있는 공작이 다스리는 동안 발도파 사람들은 그들의 안식처에서 휴식을 즐겼다. 그러나 그가 죽자 이 행복도 끝이 났다. 그의 후계자는 완고한 로마 가톨릭 교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작의 후계자는 발도파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이 그들의 교리가 순수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들의 성직자가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설교해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발도파 성직자들은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 추성된 회중에게만 사적으로 설교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발도파 사람들은 거절했고 새 성주는 크게 화를 내며 많은 군대를 골짜기로 보내 만약 로마 가톨릭의 신앙을 따르지 않으면 산채로 가죽을 벗겨버리겠다고 발도파 사람들을 위협했다. 그러나 성주의 군대 사령관은 자기가 데리고 간 군대로는 발도파 사람들을 제압한다는 것을 무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공작에게 나의 군대로 발도파 사람들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했다. 발도파 사람들은 자기들보다 그 지역에 익숙하고 무장을 갖추고 있고 스스로 방어할 준비를 잘 갖추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성주는 누구든지 발도파 사람을 잡아오면 상금을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누구든지 발도파 사람을 잡아오면 산 채로 가죽을 벗기거나 불에 태워 죽였다.
교황 파울루스 3세는 광폭한 고집쟁이로 교황으로 즉위하자 즉시 튜린의회에 가장 파괴적인 이교도로서 발도파 사람들을 핍박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의회는 이에 쾌히 동의하고 발도파 사람 서너 명을 붙잡아다가 불에 태워 죽였다. 체포된 사람 중에는 튜린에서 책방과 문방구를 운영하던 바돌로매 헥토르가 있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개혁교회 성직자가 쓴 논문을 읽은 후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오류가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튜린 시 의회에서 다시 회의가 열렸고 거기서 피에몬테 골짜기로 대표들을 보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1. 만약 발도파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의 품으로 돌아오면 그들은 집과 재산과 토지를 소유할 수 있으며 가족들과 함께 조금도 해를 받지 않고 살게 될 것이다.
2. 이를 순종하겠다는 증거로 발도파 대표 12명과 모든 목사들과 교사 들을 튜린으로 보내야한다.
3. 교황과 프랑스 왕과 사보이 공작은 이 사건에 있어서 튜린 시 의회 의 결정을 승인하고 그 권한을 인정한다.
4. 만약 발도파 사람들이 이 제안을 거절하면 그들에게는 오직 핍박과 죽음이 그 대가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이 적의에 찬 협박장을 받은 발도파 사람들은 고상한 답변을 했다.
1.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신앙을 포기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2. 우리는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훌륭한 지도자들을 가장 사악한 적들 의 손에 넘기는 데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3. 우리는 이 땅에서의 일시적 권세보다 천국에서 다스리는 왕 중의 왕 되신 그분의 권세를 더 높이 평가한다.
4.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몸보다 더 귀중하다.
짐작했던 대로 전적으로 거부하는 답변을 들은 튜린 시 의회는 화가 나서 펄펄 뛰었다. 그리고 그들은 더욱 더 열심히 발도파 사람들을 잡아다가 가장 잔인하게 살해 했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앙그로나의 목사인 제프리 바나글도 있었는데 그는 이교도라는 정죄를 받고 불에 태워 죽임을 당했다. 튜린 시 의회는 프랑스 왕에게 피에몬테 골짜기에서 개혁자들을 근절시키기 위한 많은 군대 지원을 요청했다. 그래 프랑스 군대가 막 출발하려고 할 때 독일의 신교도 왕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우리도 발도파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많은 군대를 보내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프랑스 왕은 나는 독일과의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지금은 군대를 보낼 수 없다고 튜린 시 의회에 전했다. 이 말에 살육을 좋아하는 시 의회 회원들은 크게 실망했고 점차 핍박이 수그러들었다. 그렇게 2,3년 동안은 잠잠했으나 그들은 교황 사절이 공무로 튜린에 오자 사보이 공작에게 다음과 같은 거짓말을 했다. “공작께서 아직도 피에몬테 골짜기에 있는 발도파 사람들을 근절시키지 못하고 그들을 로마 가톨릭교회로 돌아오게도 못한 것을 교황 사절이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사보이 공작의 이 같은 행동에 의심을 갖게 된 교황 사절은 공작이 의심할 바 없는 이교도의 수호자라고 교황에게 보고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교황 사절단의 이런 반응에 펄쩍 뛰면서 교황에게 잘못 보일 것이 두려워 공작은 교황 사절단의 그런 의심을 없애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죄 없는 발도파 사람들을 다시 잔인하게 핍박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즉시 공작은 자기 영지의 모든 사람은 무조건 미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다 사형에 처한다는 공고를 했다. 물론 발도파 사람들은 한 사람도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직접 큰 대군을 이끌고 피에몬테 골짜기로 향했다.
공작의 군대는 수많은 발도파 사람들을 목매달아 죽이고, 물에 빠뜨려 죽이고, 나무에 묶어 놓고 나무 꼬챙이로 찔러죽이고, 절벽에서 내던져 죽이고, 개에게 물려 죽게 하고,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은 배로 보내 노 젓는 어려운 일을 시켜 개종시키려했다. 이 원정에 공작은 아주 잔인한 세 사람을 동반했다.
1. 토머스 인코델 : 개혁신앙의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자기 믿음을 버 리고 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신봉하고 수도사가 된 배교자다. 그는 자유 사상가로 온갖 범죄를 임의로 저질렀고 발도파 사람들 약탈에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다.
2. 코르비스 : 매우 난폭하고 잔인한 성격으로 그의 본업은 죄인들을 수색하여 잡아들이는 것이었다.
3. 치안관 : 그는 욕심 많은 구두쇠였고 발도파 사람들을 사형 집행할 때마다 그는 더욱 더 난폭해지며 흥분했다.
이 세 괴물들은 가는 곳마다 끝까지 무자비했고 반드시 무죄한 사람들의 피를 흘렸다. 그러나 이 세 사람과 군대를 이끌고 여러 곳으로 다니며 공작이 저지른 잔인함 이외에도 여러 지방에서 야만적인 일들이 일어났다.
세인트마르틴 골짜기의 로마 가톨릭 주민들은 이웃 발도파 사람들을 온갖 방법으로 괴롭혔다. 그들은 발도파 사람들의 교회를 파괴하고 그들 집을 불사르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의 목회자들을 불 속에 던져 태워 죽였다. 그리고 사람들을 숲속으로 쫓아버려 거기서 야생나무 열매와 나무껍질 혹은 나무뿌리로 연명하게 했다.
또 피그네롤의 수도사들은 세인트 저메인 골짜기에 있는 한 도시의 목사를 잡으려고 악한들을 고용하여 그 목사를 잡아오도록 했다. 이들 가운데는 목사의 하인이었다가 배반한 사람도 있었다. 악당들의 앞잡이가 된 그 하인이 목사의 집 문을 두드렸다. 누구냐고 묻자 자기 이름을 댔다. 목사는 자기 하인이었던 사람이라 별 의심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악당들을 달려 들어가 목사를 붙잡았다. 목사의 가족은 그 자리에서 다 죽였다. 그리고 목사는 포로로 잡아 피그네롤로 향했다. 그 목사는 상당히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결국 화형을 당했다.
수도사들에게 속해 있던 악당들로 조직된 이 군대는 세인트 저메인에서 그 후에도 약탈을 계속했으며 많은 주민들을 살해하고 강탈했다. 이 소식을 들은 루세른과 앵그로나의 개혁자들이 그들의 형제를 돕기 위해 무장한 군인들을 보내었다. 이 무장한 군인들은 종종 악당들을 공격해서 쫓아내었다. 이에 깜짝 놀란 수도사들은 정규군대의 보호를 받을 때까지 얼마동안 피그네롤 사원을 떠났다.
그러자 사보이 공작은 자기가 처음 상상한 것만큼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보고 온갖 흉악한 범죄자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여 그들이 만약 무장하고 발도파 사람들을 근절시키는 것을 돕는다면 죄를 용서하고 석방시켜 주겠다고 야속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발도파 사람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재산을 감추고 골짜기를 떠나 더 높은 알프스 산맥 속에 있는 바위와 골짜기로 가서 숨었다. 마을에 도착한 공작의 군대는 마을을 불사르고 약탈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발도파 사람들이 용감하게 지키고 있는 알프스 산맥에까지 감히 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침략자들과 끝까지 싸우기로 결심한 발도파 사람들은 독일에 있는 신교도들과 도피니와 프라겔라에 있는 개혁파 교인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자 그들은 각각 군대를 보내 주었다. 이 같이 재정비 강화된 발도파 사람들은 겨울이 오면 살 수 없는 알프스를 떠나 공작의 군대로부터 자기들이 살던 골짜기 마을을 탈환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사보이 공작은 너무나 피곤하고 초조하여 많은 사람과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전쟁에 싫증이 났다. 그리고 발도파 사람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도 두려웠다. 그래서 공작은 발도파 사람들과 평화조약을 맺기로 약속하고 자기 군대를 튜린으로 돌려보냈다.
이 같은 공작의 행동은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평화조약을 인준하기도 전에 사보이 공작은 튜린에 돌아온 뒤 곧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임종 시에 자기 아들에게 자기가 의도했던 바를 반드시 이행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발도파 사람들에게 우호적으로 대할 것을 명령했다. 사보이의 뒤를 이은 공작의 아들 찰스 임마누엘이 아버지의 유훈을 따라 발도파 사람들과의 평화조약에 인준했다.(*) 출처 / 기독교순교사화(존 폭스 원저, 머리 킹 편저, 생명의말씀사)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