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개혁주의 설교학 강의(3) 설교와 설교자의 소명

개혁주의 설교학 강의(3) 설교와 설교자의 소명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3. 설교자와 소명

– 하나님의 부르심은 설교자의 필수 조건 –

설교(說敎, preaching)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은혜의 방편(方便)이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이 구원을 위한 전도(케리그마) 곧 복음 선포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복음 전도자(傳道者)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전도자로 또는 설교자로 자기의 일꾼을 택하시고 부르시어 복음 전도의 사명을 맡기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사도들을 부르시고 세상 가운데 보내셨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시므로 복음을 전하도록 일꾼을 부르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서 말한 대로 설교의 권위가 설교자 자신의 인격이나 재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보내신 하나님께 있다.

그렇다면 설교자의 인격과 재능은 설교 사역에서 배제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설교 사역에서 설교자의 인격과 재능은 복음 전도를 위해 더더욱 요구된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집에서 주인의 손에 귀하게 쓰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언제나 깨끗하게 준비함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이 같은 맥락에서 마틴 로이드 존스(D. Martyn Lloyd-Jones) 목사는 “설교자에게 우선적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설교 원고 준비보다도 먼저 자신을 준비하는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즉 설교 사역에 있어 설교자의 신앙 인격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에게 인격에서 비롯된 삶의 열매를 밝히 가르치셨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20세기 개혁신학의 최고봉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역시 그의 대작(magnum opus) ‘개혁교의학’에서 이것을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사람의 행위는 그 사람의 됨됨에 근거한다.”(operari sequitur esse) 따라서 우리는 설교란 인격을 통한 진리의 선포이므로 강단에서 외치는 말보다 평소의 일상 행위가 더욱 큰 울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설교자가 아무리 훌륭한 설교를 한다 해도 자신의 잘못된 행위로 그 훌륭한 설교를 무너뜨리지 말아야 한다. 한 손으로 부지런히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면서 다른 한 손으로 허물어뜨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아 모르나 크리스천의 삶과 행동을 읽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복음 전파를 위해 부름을 받고 사명을 맡은 설교자의 인격과 삶은 더더욱 정결해야 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기에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목사였던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는 설교하기 위해 연구한 설교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전에 먼저 설교자 자신에게 설교하라고 조언했다.        

이같이 설교 사역에 있어서 설교자의 소명(召命)과 사명(使命)은 복음 전파의 핵심 사항 가운데 하나이다. 설교의 황태자라 고 불리는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1834-1892, 사진)은 자신의 책 ‘목회자 후보생들에게’(Lectures to My Students)에서 처음 석 장을 ‘목회자 자기 점검’, ‘목회 소명’, ‘설교자의 기도생활’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제일 먼저 자신이 거듭났는지 살펴볼 뿐만이 아니라 목회와 복음 전도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잘못된 동기에서 설교자가 되고자 하는 유혹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설교자가 된다면 빡빡한 직장생활에 시달리지 않고 시간적 여유가 느슨한 목회자의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출근할 필요가 없이 시간을 내 마음대로 계획하고 사용할 수 있다?” “교회가 제공하는 주택과 생활에 필요한 제반 재정을 도움받을 수 있다?” “게다가 교인들의 존경과 사회적 명예까지 얻을 수 있다?” 이런 생각들은 도무지 설교자로 하나님의 부르심과는 상관없다.

더구나 목회와 설교 사역은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에서 비롯된 희생과 봉사를 근간으로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설교자로서의 소명의 시금석 네 가지를 보여준다.

  • 성령 하나님의 강권적 부르심으로서의 내적 소명
  •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다른 사람들의 추천
  •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 나는 설교 말고 도무지 다른 일은 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

스펄전 목사 역시 “만일 소명 받은 여러분이 목회를 안 하고도 견뎌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여러분 마음속에 설교 사역에 대해 두려움으로 머뭇거리는 마음, 부족하다는 마음, 자기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확증이라는 것이다. 설교자는 반드시 설교 사역에 대한 압도적인 소명감과 강제적인 강박의식이 있어야 한다. 이것 없이는 설교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다.      

이같이 설교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 즉 말씀 봉사에로의 소명은 절대적 필수 조건이다. 왜냐면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그 사역의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소명은 참된 회개와 중생의 은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즉 목사로서 회개와 중생을 알지 못하는 자의 목회 사역은 허약하고 애처로울 뿐이다.

그러므로 조프리 토마스(Geoffrey Thomas) 목사는 존 웨슬리, 토마스 찰머 그리고 아브라함 카이퍼의 목회 사역 초기의 열매가 보잘 게 없었다고 지적한다. 현대 교회의 강단의 능력 부재는 다름 아닌 하늘로부터의 소명 없이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은혜 없이 설교 강단에 올라가기 때문이다. 오직 능력 있는 설교 열매 맺는 설교는 중생을 경험한 설교자의 사역에서 명확하게 나타나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교제에서 유지되며 더욱 풍성하게 증거된다.

더 나아가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설교사역의 열매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고난과 경멸도 견뎌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다. 느헤미야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금 수축하려 할 때 대적자들인 산발랏과 도비야는 느헤미야의 사역을 경멸하고 비웃었다.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느 4:3) 

설교자로서의 확고한 소명의식은 환난 앞에서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오히려 목숨까지 바쳐 충성하고자 한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확고한 소명의식의 한 실례이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24) 

그러므로 설교자가 설교 사역에 나서기 전에 스스로 자신이 하늘로부터 받은 소명이 있는지 점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위로부터 오는 소명을 확인하는 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그것은 내적인 증거와 외적인 증거이다.

(1) 설교자의 소명 확인 내적 증거

첫째,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실패한 베드로를 다시금 부르시고 목양의 사역을 맡기실 때(요 21장) 무엇을 요구하셨는지 주목해야 한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반복하여 질문하신 것은 “네가 내 양을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하신 질문이었다. 그러므로 소명의 시금석은 다름 아닌 설교자가 ‘주님을 사랑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둘째, 주님의 마음을 닮아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실 때 많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따라서 설교자는 주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오는 소명의 내적인 증거 두 가지는 먼저 주님을 사랑하고 또한 주님의 마음을 닮아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데서 확연하게 입증된다.

(2) 설교자의 소명 확인 외적 증거

사도들이 식탁 봉사를 위한 일꾼을 뽑을 때 요청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행 6:3) 사도 바울은 감독의 직분에 합당한 자격 조건으로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를 말했다.(딤전 3:7) 칼빈은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인을 근거 없이 비방하는 불신자들조차 그의 행위에서 허물을 찾지 못하고 도리어 의롭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의 열매를 가진 자라고 해설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신자들의 칭찬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비방하고 악담하기 좋아하는 불신자에게서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

약 30년 전 박희천 목사는 ‘나의 설교론’이란 책에서 복음 전파자는 반드시 두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하였다.

첫째,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구약 선지자들과 신약의 세례 요한 그리고 사도 바울은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사상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임한 하나님의 복된 소식을 전했다.

둘째, 설교자는 성령의 권능(權能)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은 반드시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만 한다.(행 1:8)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건설하고 보존하는 사역은 사람의 힘으로나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슥 4:6) 그러므로 박희천 목사에게 에스겔 1:3은 요절 중 요절이었다.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4. 말씀에 정통한 설교자

이제까지 설교자의 소명 즉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에로의 부르심을 살펴보았다. 이 소명이 앞서가고 그다음 설교자의 재능과 열심 그리고 노력이 뒤따른다. 그리고 이러한 설교자의 재능과 헌신은 다시금 앞서가는 하나님의 소명을 재확인하고 참된 것으로 인(印)을 친다.

하나님의 말씀을 봉사하는 설교자는 무엇보다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한 학자여야 한다.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귀환 시 자신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여겼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스 7:10) 총독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 중건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위한 하드웨어를 마련했다면 학사 에스라의 율법 연구와 준행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호와 경배를 위한 소프트웨어적 사역이었다.

구약 시대를 지나 교회사에 있어 16-17세기의 청교도들은 개인과 가정, 교회와 국가의 갱신(更新)을 위해 교회가 무엇보다도 ‘학식 있는 목회’가 되기 원했다. 그래서 개혁의 방편으로 귀족들은 일차적으로 학교를 세워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을 양성했다. 많은 대학이 즉 캠브리지의 엠마누엘대학(1584년), 시드니 서섹스대학(1596년), 그리고 더블린의 트리니티대학(1591-92년)은 일차적으로 학식 있는 목회와 경건한 평신도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대학들은 하나님 말씀의 봉사를 위한 ‘모판’으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월터 밀드메이 경(Sir Walter Mildmay)은 엠마누엘대학의 설립 목적을  1585년 학교 정관에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밝혔다.

“이 학교 설립에 있어 우리는 이 한 가지 목적을 정했는데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말씀과 성례의 거룩한 사역에 적합하도록 육성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신학교로부터 영국 교회가 사람들을 교육하고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필요한) 목사들의 의무를 떠맡게 될 인물들을 얻는 것이다.”

목사의 지식과 교육에 대한 청교도의 태도는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열정적이었다. 그들은 지성과 신앙이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고 이해했다. 하지만 학문과 지식은 목사의 경건 수단으로서 시녀처럼 봉사해야 했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학문의 습득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전하기 위한 도구요 방편이었다. 결코 자신의 학식을 자랑하거나 뽐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청교도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는 개신교 최초의 영어 설교학 교과서 ‘예언의 기술’(The Art of Prophesying, 1607)을 저술했다. 이 작품에서 퍼킨스는 설교자가 공중 앞에서 허세를 부려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며 라틴의 금언을 인용한다. “학문을 감추는 것이 학문의 핵심이다.”(Artis etiam celare artem)

18세기 영국과 신대륙 미국에서 부흥 운동의 선두주자였던 조오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청교도 정신을 이어받아 ‘경건과 학문’(pietas et scientia), ‘기도와 노동’(ora et labora)의 균형 있는 삶을 강조했다. 즉 설교자는 반드시 무릎(기도)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도 없이 연구하는 것은 무신론이며 연구 없이 기도하는 것은 뻔뻔스러운 짓이다.” 휫필드는 설교자들이 ‘학자이기보다는 성자가 되는 것’(saints more than scholars)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겼다.  

교회 역사가 이같이 가르쳐주는 것처럼 설교자는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바르게 응답하기 위해서 자신의 경건한 삶을 관리해야 한다. 사도 바울의 자서전적 고백은 오늘날 우리 개혁주의 말씀 봉사자의 자세를 정확하게 짚어준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6,27) 사도 바울은 상대방을 넉 다운(knock down)시키는 복싱이 아니라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천국 복싱’을 할 줄 아는 지혜로운 자였다.

설교자는 일차적으로 ‘오직 성경만’(sola scriptura)이 죄인을 구원하는 복음의 메시지임을 확신하고 학사 에스라처럼 오직 성경만을 그리스도의 회중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해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제 이슈들을 다루고 논평하는 건 참고로 할 일이요 그것은 설교자의 몫도 아니고 설교자의 부르심도 아니다. 설교자의 일차적인 부르심은 오직 성경을 정확하고 바르게 풀어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역에 있다.

설교자는 무엇보다 성경에 익숙한 학자여야 한다. 박희천 목사는 1995년에 있었던 한 목회자 세미나에서 설교자의 기본자세를 이렇게 밝혔다. “제 경험상 구약 백 번, 신약 백 번 읽으면 최소한 어느 정도 기초 수준은 됩니다.” 하루 4시간씩 성경 읽기를 문자적으로 23년간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48년간 준수했던 그가 겸손하게 실토했던 고백은 더더욱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내가 평생 성경을 읽었어도 그것은 태산의 ‘모퉁이만’ 긁은 것과 같았습니다.”(*) 글쓴 이 / 박태현 교수(총신대학교 설교학), 건국대학교(B.Sc.), 고려신학대학원(M.Div.equi.), St. John’s College(Nottingham, MAMM), Theologische Universiteit te Apeldoorn(Drs.Thd.), Theologische Universiteit te Apeldoorn(D.Theol.)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