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주권

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 연구(14) 유기와 하나님의 주권(4)

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 연구(14) 유기와 하나님의 주권(4)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4) 하나님의 예정과 유기에 대한 반론과 변증

(81호에서 계속) 로마서 9장이 유기(遺棄, reprobation) 교리를 가장 분명하게 말하지만 유기 교리를 말하는 구절은 이 외에도 또 있다. 그 가운데 한두 구절만 간략하게 살펴보자.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롬 11:7)

여기서 두 그룹이 날카롭게 대조를 이룬다. ‘택하심을 입은 자’와 ‘남은 자들’이다. 한 그룹은 ‘얻었고’ 나머지는 ‘우둔하여졌다.’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을 인용해 보자. “엄숙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람과 사람을 나누며, 택하신 자와 남은 자들을 나누며, 선택된 자들과 버려진 자들을 나누며, 품에 안긴 자들과 거부당한 자들을 나

눈다. 여기서 ‘남은 자들’은 불택자(不擇者)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면 이 둘을 대비시키면 선택(選擇)하신 자가 한쪽에 있고 나머지 또 다른 한쪽에는 불택자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살전 5:9)

여기서 하나님이 아무도 진노(노하심)에 이르도록 ‘하지’(정하지) 않으셨다면 이 구절은 전혀 무의미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하나님은 우리를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지 않으셨다. KJV 직역)라는 말은 이와는 반대로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신 자들이 있다.’라는 뜻이 분명하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교리적 선입견 때문에 마음이 몽매하지 않다면 이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8)

여기서 ‘이렇게’는 ‘그것으로’라는 뜻이며 말씀과 자신의 불순종에 걸려 넘어지는 자들을 말한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불순종에 이르도록 준비된 자들이 있음을 분명하게 확증하신다. 여기서 ‘정하신’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데살로니가전서 5:9에 사용된 단어와 같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의무는 이것에 관해 논하는 게 아니라 성경에 머리 숙이는 것이다. 우리의 첫 번째 의무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이해하기에 앞서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 당하며”(벧후 2:12)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의 분명한 가르침마저 회피하려 애쓴다. 이런 거짓 선생들은 이 구절이 하나의 유비(類比)라고 말하며 비록 ‘이성 없는 짐승’이 ‘잡혀 죽기 위하여 난’게 맞을지 모르나 그래도 이 말이 여기서 ‘이성 없는 짐승’에 비유된 인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통찰력 부족을 논박하기란 어렵지 않고 이렇게 묻기만 하면 된다.

유비의 초점이 ‘이 사람들’과 ‘이성 없는 짐승’ 사이의 어디에 있는가? 핵심 단어는 ‘같아서’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중략)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분명히 이성 없는 짐승 ‘같은’ 이 사람들은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자들’이다. 끝부분은 같은 생각을 되풀이해서 표현함으로써 이것을 확증해 준다.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 당하며’(KJV)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 4)

지금까지 다른 번역 대신에 이 구절의 의미를 회피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개역 개정역은 이 구절을 이렇게 옮겼다. “그러나 몰래 기어들어 온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이 판결을 받도록 옛적에 미리 기록되었다.” 이렇게 수정된 번역이 우리의 감각에 아주 혐오스러운 것을 제거하지는 않는다. 이 번역에서도 이런 물음이 생긴다. 이들이 ‘옛적에 미리 기록된 곳’ 그곳이 어딘가?  

이는 구약성경을 가리키지 않는 게 분명하다. 구약성경의 어디에도 사악한 자들이 기독교 공동체들에 몰래 기어든다는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기록되었다’가 프로그라포(prographo)라는 헬라어 단어의 가장 적합한 번역이라면 이들이 기록됐을 법한 책은 하나뿐이다. 하나님의 비밀스럽고 미리 내려진 결정들을 기록한 책이다. 어느 번역을 선택하든 어떤 사람들은 심판에 이르도록 하나님이 ‘옛적에’ 표시하셨다는 사실을 회피하지 못한다.

“죽임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

이것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있음을 확인 해주는 분명하고 확실한 진술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은 영원히 버림받도록 미리 결정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열 개의 구절을 함께 살펴보았다.

이 구절들은 다음 몇 가지를 확인해 준다. 악인들은 악한 날을 위해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은 미리 확정된 자신의 영원한 결정을 통해 이들을 멸망에 이르도록 객관적으로 준비하신다. 이들은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과 같다.(이 판결을 받도록 옛적에 작정되었다.) 

그러므로 이 구절들을 토대로 진심으로 단언하건대(거의 20년간 이 주제에 대해 세밀하게 기도하며 연구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은 ‘예정’(豫定, predestination)과 ‘유기’(遺棄, reprobation)를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하게 가르친다. 칼빈 말로 표현하면 “영원한 선택은 어떤 사람들은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멸망에 이르도록 하신 하나님의 예정이다.”  

지금까지 성경이 대로 ‘유기교리’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유기교리의 오용과 그릇된 추정을 막기 위해 깊이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 유기교리는 하나님이 무죄한 피조물을 취해 악하게 만들어 멸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전 7:29) 하나님이 죄악 된 피조물을 창조하신 것은 이들을 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죄를 하나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죄에 대한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하나님의 유기 계획은 타락하고 죄악 되며 부패하고 유죄 한 인류를 고려해 세워졌다.

타락한 인류로부터 하나님은 소수를 구원하시기로 정하셨는데 이들을 자신의 주권적 은혜의 기념비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멸하기로 결정하셨는데 이는 자신의 공의와 준엄함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이들을 벌하기로 결정하시는 중에 이들에게 그릇 행하신 게 전혀 없다.

이들은 아담 안에서 이미 타락했다. 아담에게는 인류의 대표권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죄악 된 본성을 갖고 태어나며 하나님은 이들을 자신들의 죄 가운데 버려두신다. 따라서 이들은 불평하지 못한다. 이것이 이들이 원하는 바다. 이들은 거룩에 대한 갈망이 없으며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다.(요 3:19)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들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두어도(시 81:12) 전혀 불의한 게 아니다.

둘째, 유기교리는 하나님이 진심으로 구원을 구하는 자들을 구원하길 거부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사실 불택자들에게는 구원자에 대한 구원의 갈망이 전혀 없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아름다움을 전혀 볼 수 없다. 이들은 전혀 그리스도께 오려 하지 않는다.(요 3:19,20)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들을 강제로 오게 하셔야 하는가? 하나님은 자신에게 오는 자는 하나도 내쫓지 않으신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들의 정당한 멸망을 미리 결정하신 게 어디가 불의하단 말인가? 그 누구도 타인의 죄 때문에 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러한 하나님의 절차가 어디가 잔인하단 말인가?

기억하라! 하나님은 악인들을 창조하셨으나 이들의 악을 창조하지는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들을 존재하게 하셨으나 이들의 죄의 근원은 아니시다. 하나님은 마치 달리려 하지 않는 말에 박차를 가하듯이 악인들에게 죄를 짓도록 강제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러한 점에 대해 칼빈주의자들이 잘못된 비난을 받아왔다. 하나님은 실제로 ‘그냥 놔두라’는 무서운 말씀 하실 뿐이다.(마 15:14 참조) 하나님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시지 않을 뿐이다. 그러면 인간이 아주 빨리 확실하게 자기 의지로 자기 죄악에 걸려 넘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유기 계획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의 성향을 방해하지 않으며 인간의 죄의 책임을 덜어 주시지도 않는다.

셋째, 하나님의 유기 계획은 그분의 선하심과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택함을 받은 자들과 같은 방식이나 같은 정도로는 아니더라도 불택자들도 하나님의 선하심의 혜택을 여전히 누린다. 불택자들도 세상의 좋은 것들을 하나님의 자녀들과 다름없이 누리며 더 많이 누릴 때가 아주 많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이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의 좋은 것이 이들을 회개로 인도하는가?

아니다. 사실 이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자주 멸시하며 “네(자신)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 도다.(자신에게 쌓는다.)”(롬 2:4,5) 그러니 영원히 그분의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을 누가 무슨 타당한 근거로 불평하겠는가? 더 나아가 마귀와 결탁한 죄지은 타락한 천사들을 벌하신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과 전혀 모순되지 않았다면(벧후 2:4 참고) 타락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인간을 벌하시는 게 왜 문제가 되겠는가?

넷째, 아무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누가 유기된 자인지 절대로 알지 못한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우리는 그가 살아 있는 한 유기된 자라고 판단하면 안 된다. 우리가 아는 가장 흉악한 죄인이 하나님이 택하신 자일지 모른다. 따라서 어느 날 은혜의 성령께서 그를 살리실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에게나 전도해야 하며 이 명령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모두에게 복음을 전하라!” 이 명령을 행할 때 우리의 양심은 깨끗하다. 그러나 복음을 듣길 거부하면 그들의 피는 그들에게 돌아간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후 2:15,16)

(5) 하나님의 예정 성구에 대한 잘못된 해석들

 다음은 하나님의 예정을 나타내는 성구를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멸망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게 아니라고 잘못 해석하는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겔 18:31)

톱레디(August Toplady, 1740-1788)는 이렇게 말했다. “이 구절이 마치 전체 교리를 한 방에 산산조각낼 망치라도 되는 듯이 알미니안들은 이 구절을 아주 빈번히 그러나 아주 잘못 강조한다. 즉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도 죽임(멸망, 즉 유기)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말하는 ‘죽음’은 인간의 ‘영적 죽음’도 ‘영원한 죽음’도 아니다. 에스겔 18장 전체의 주제를 볼 때 이것은 아주 분명하다. 여기서 에스겔 선지자가 의미하는 ‘죽음’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죽음’이다. 다시 말해 민족의 번영과 평안과 안전의 죽음이다. 이 질문은 사실 이런 뜻이다.

“무엇이 너희로 유수와 추방과 나라의 붕괴를 사랑하게 만드느냐? 너희의 악행을 버리고 의의 영을 새롭게 하면 하나님이 너희로 이러한 재난을 면하게 하시고 다시 한번 너희로 존경받는 나라가 되게 하시리라. 왜 너희가 죽으려 하느냐? 왜 이스라엘 족속으로서 하나의 정치적 주권 국가로서 죽음을 맞으려 하느냐?”

선지자는 바로 이것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렇게 덧붙인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2) 이것은 몇 가지를 말해 준다.  

  • 하나님은 유수(幽囚, 포로가 됨)를 전혀 기뻐하지 않으셨다.
  • 우상숭배서 돌아서고 거짓 신상을 버리면 적국에서 죽지 않고 고향에서 평안히 살며 독립된 백성으로서 자유를 누릴 것이다.

우리는 오거스트 톱레디의 주장에 이렇게 덧붙이고자 한다. 에스겔 17:31,32이 말하려는 것은 정치적 죽음이 분명하며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은 영적으로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위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멸망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게 아니라는 주장에 자주 인용된다. 사실 이것은 유기 교리를 논박하는 데 사용되는 주요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강조하는 단어는 ‘위하여’가 아니라 ‘마귀’이다. 이 구절의 목적은 잃은 자들을 기다리는 심판의 엄중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구절의 의도는 영원한 불에 들어갈 자들에 관해 가르치는 게 아니라 영원한 불의 무서움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 구절은 “그 불이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 된 것이라면 얼마나 견디기 힘들겠느냐?”라고 말한다. 심판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대적이 들어갈 이러한 영원한 고통의 자리에 던져질 것이라면 그곳이 얼마나 무서운 곳이겠는가!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똑같은 질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만 구원받도록 선택하셨다면 왜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고 하시는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다’(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세상의 도덕적 통치자로서 당연한 요구를 강조할 뿐이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거슬러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이보다 덜 하시겠는가? 더욱이 하나님은 모든 곳의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명하신다는 사실은 인간이 그분 앞에서 책임 있는 존재임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모든 곳에 회개를 주시는 게 하나님의 결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행 5:31 참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주신다고 믿지 않았다. 그가 디모데후서 2:25에서 한 말이 이것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3,4)

이번에도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는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만 구원받도록 작정하셨다면 왜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라고 말하는가?

이 질문의 답은 ‘모든 사람’이라는 용어가 ‘세상’이라는 용어처럼 일반적이고 상대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는 것이다. 다음 구절을 세밀하게 비교해 보라. 그러면 이 주장이 참이라는 게 증명될 것이다. 마가복음 1:5, 요한복음 6:45, 8:2, 사도행전 21:28, 22:15, 고린도후서 3:2 등이다. 이상의 말씀들에 비추어 볼 때 디모데전서 2:4은 하나님이 온 인류의 구원을 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만약 그런 뜻이라면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기’(욥 23:13) 때문에 온 인류가 구원받을 것이다.(*) 글쓴 이 / Arthur Walkington Pink 출처 / ‘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 지은이 아더 핑크, 옮긴이 전의우(서울, 요단출판사, 2014.)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