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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기념 주일설교 / 종교개혁 시작을 기념

종교개혁기주일설

종교개혁 시작을 기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함께 계시던 것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옵고 우리를 떠나지 마시오며 버리지 마시옵고 우리의 마음을 주께로 향하여 그의 모든 길로 행하게 하시오며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게 하시기를 원하오며”(왕상 8:57,58)

Nederland Apeldoorn Prof dr HJ Selderhuis rector Theologische Universiteit Christelijk Gereformeerd 17-09-2020 Foto Jaco Klamer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 여러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책, 여행상품, 전시회, 강연들이 차고 넘칩니다. 루터 맥주, 루터 와인, 루터 플레이모빌, 루터 우표, 심지어는 루터 양말까지 시중에 나와 있습니다. 그 양말에는 루터가 한 유명한 말 “저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저는 달리할 수 없습니다.”라고 쓰여있습니다.(사진, 설교자 Prof. dr. Herman Johan Selderhuis) 

이는 아주 용감한 말입니다. 루터는 황제 앞에서 바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지요. 그런데 아쉽게도 루터는 이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는 전설과 같은 것입니다. 양말에 그려진 루터의 늠름한 자세와 어울리는 영웅담이지요. 하지만 실제의 루터는 양말에 그려진 것 같은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무릎 꿇고 구걸한 거지였습니다. 거지라는 말을 제가 임의로 사용하는 게 아닙니다. 루터가 한 말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머물렀던 방에서 발견된 편지들이 이를 보여줍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구걸하는 거지들입니다. 우리는 불쌍한 죄인에 불과하고 주님만이 은혜로 충만하시니 우리는 하나님만을 꽉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구걸하고 탄원하며 요청하고 기도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솔로몬이 백성들에게 행한 강복(降福)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시옵소서!” 솔로몬은 서 있지 않았습니다. 먼저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릎을 꿇는 것이야말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우리가 의당 취해야 할 자세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오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예배에서 우리는 솔로몬의 강복을 따라 “하나님 우리와 함께 계시옵소서!”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고백(과거)

열왕기상 8장은 하나님 백성들의 역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완성되었습니다! 주께서 드디어 주님의 거처를 가지셨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만나고 백성들 서로가 만날 수 있는 거룩한 장소를 얻었습니다.    

완성된 성전은 우리의 상상을 능가하는 웅장한 건물이었습니다. 그것은 거대하고 근엄하고 값비싼 건축자제로 건축되었습니다. 그러함에도 가장 중요한 점은 이 하나님의 집에서 이 성전에서 제사 드려진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전 낙성식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표인 언약궤가 성전 안으로 운반됩니다. 제사가 드려집니다.

성전은 제사의 장소입니다. 감사의 제사뿐만 아니라 죄와 용서를 말하는 은혜와 화해를 말하는 속죄제가 드려집니다. 땅 위에서 평화 곧 하나님의 평화를 말하는 제사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과 화해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가 평화로워집니다. 성전은 화해의 장소며 이 화해는 희생 제사를 통해 죄가 씻겨진 후에 이루어집니다.

오늘의 교회는 이 성전의 연장입니다. 여기 이 설교단에서 화해의 직무가 실행됩니다. 여기 이 설교단에서 하나님의 평화가 선포되고 수여되고 전달됩니다. 이 화해의 직무는 우리를 위해 죽은 유월절 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제사로 가능해졌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이 열립니다. 오직 그분을 통해 심판에서부터 자유롭게 되고 오직 그분을 통해 우리 모두 하나님을 다시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언약궤가 그 안에 있습니다. 제물이 준비되었습니다. 길이 열리고 솔로몬이 그 길을 걸어 들어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솔로몬은 제사 드리며 백성들을 위해 중보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금도 성부 하나님 옆에서 우리를 위해 늘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는 그분의 십자가 희생 제사에 근거합니다.

솔로몬은 강복기도로 마무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옵고” 그런데 이 강복기도에서 솔로몬은 우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먼저 고백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함께 계시던 것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옵고” 솔로몬은 역사를 되돌아보며 단 한마디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아담과 하와, 노아,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야곱 그리고 다윗과 밧세바 그 외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들의 믿음뿐 아니라 불신앙도 보게 됩니다. 이들의 선행뿐 아니라 죄도 보게 됩니다. 선조들은 자주 그리고 심각하게 죄를 지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언행에서 하나님을 자주 떠났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성전이 완공되었고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지고 하나님과의 화해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걸 한 마디로만 설명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오늘 지나간 종교개혁의 역사를 돌이켜 봅니다. 루터, 칼빈 그리고 츠빙글리와 같은 위대한 개혁자들의 이름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했던 수많은 사람과 그들의 뒤를 이은 또 다른 수많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세기를 거듭하며 종교개혁의 가치를 따라 사람들은 살기를 원했고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기 원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이라는 고백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 역사에는 우리의 선조들도 있었고 우리의 어머니들도 있었고 수많은 여성도 있었습니다. 대다수의 이름을 우리는 알지 못하나 그 수많은 무리 신실한 일꾼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들의 때에 자신들의 교회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목사님들만이 아닙니다. 평범한 교회의 성도들 형제와 자매들이 젊은이와 노인들이 분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에 훌륭한 업적이 있는가 하면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있으며 동시에 그릇된 역사도 있습니다. 루터가 말했듯이 인간은 의롭다 함을 받았음과 동시에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교회가 기업이었다면 진작 파산했을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사교 모임이었거나 연합회였다면 이미 문을 닫았을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선조들과 우리가 행한 그릇된 것들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셨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선조들과 함께 계셨듯이 우리와 함께 계시옵소서!”

우리의 선조와 함께하신 하나님은 누구셨습니까? 그분은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셨고, 용서의 하나님이셨으며,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줄 수 있도록 이 교회 안에서 힘과 능력을 허락해 주셨고, 남자들에게 교회의 직분 자로 교회 공동체를 건실하게 세울 수 있도록 능력을 더해 주신 분이시며, 여자들에게 그들의 재능과 기도를 통해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힘과 지혜와 인내를 허락해 주신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교회가 위태로울 때도 설교자들이 실망스러웠을 때도 신학자들과 성도들의 야단법석에도 화해의 봉사와 말씀의 선포가 지속이 될 수 있도록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해야 하는 바는 우리가 지금 모여있는 이 훌륭하고 웅장한 교회 건물을 바라보며 우리가 해왔던 것에 대해 자랑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되돌아보며 하나님 그분만이 신실하셨던 것을 고백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그분께서 행하시며 지옥의 문이 교회를 이기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현재)

그런데 솔로몬은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근엄하고 화려하게 치장된 성전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물을 바쳐 제사 드리는 것과 성전 봉사자들이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참으로 본질적인 것은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는 것임을 솔로몬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백성들을 향해’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말합니다. “주님,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소서!”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거야말로 오늘 설교의 중심이요 동시에 교회와 신앙의 중심입니다.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십니다. 이는 믿음이요 회개입니다. 우리는 신앙과 관련된 많은 모임 외에도 교인들의 집을 심방 하고 예배드리고 선교에 열심 다하며 복음전파에 힘을 쏟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신앙의 행위에도 불구하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께로 향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루터가 발견한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루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로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당시 교회의 복음이었으니까요. 당시 복음은 “사람은 스스로 수고로이 노력해야 하고 하나님은 그 나머지를 메우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였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였습니다.

이것은 루터에게 믿음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고 충분히 노력하지 않고서 죽을 때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때 루터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하셨다는 걸 성경에서 발견합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십니다. 그분께서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을 그분에게 돌이키게 하십니다.

또 솔로몬은 “우리를 떠나지 마시오며 버리지 마시옵고”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혹 하나님께서 우리를 물리치시거나 버리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이 나라 네덜란드에서 봅니다. 캄펜에서도 이전의 교회 건물이 다른 용도로 바뀌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모인 이 웅장한 교회당 건물도 언젠가 아파트가 되거나 전시관이 되거나 서점이 되거나 슈퍼마켓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까운 즈볼러 시내의 그 웅장한 교회가 이미 서점이 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저는 그 교회 건물을 좋아하나 이제는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 우리가 하나님께 “주여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옵소서!”라고 더 이상으로 기도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으로 은혜를 구하지 않는 곳에 사람들이 더 이상으로 은혜의 말씀을 선포하고 듣고자 하지 않는 곳에 하나님은 더 이상으로 계실 수가 없고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이와 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건물들이 화려해도 아무리 영광스러운 역사를 자랑할 수 있어도 아무리 예배가 활기차도 아무리 설교가 뛰어나도 그런 경우 하나님은 물러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힘을 다해 전달되지 않고 들려지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리고 은혜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켜 주셔야 함을 되뇌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은 떠나십니다.    

루터는 복음을 ‘호우’(豪雨)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를 우리에게 쏟아부어 주십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는 다시 거두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주께로 향하여!” 이 기도가 이제 여러분에게 적용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께로 돌리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시기를 원하심을 알고 경험하는 거야말로 은혜입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셔야 한다는 기도에서 우리는 종교개혁의 두 가지 핵심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선택’과 ‘믿음의 체험과 훈련’입니다.

먼저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심 가득한 마음 어느 때는 만족하나 그러나 어느 때는 차가워진 마음을 우리가 스스로 노력하고 애써 하나님께로 돌려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기를 원하셨습니다. 또 우리가 이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있어 전적으로 그분께 의존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너무나 큰 위로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믿음의 체험과 훈련’입니다. 이것은 교제의 중심이며, 갈등의 중심이고,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마음’과 직결된 것입니다. 마음 안에서 온갖 것들이 일어납니다. 울기도 웃기도 하며 믿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주께서 이러한 마음을 주님의 손에 붙잡으십니다. 복음의 선포가 이 마음에 전달됩니다.    

‘믿음의 체험과 훈련’은 이성적인 강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일이며 이것은 마음을 죄책과 의심의 감정으로 가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쉼과 확신을 찾도록 합니다. 바로 이 마음을 루터와 칼빈의 로고에서 우리는 발견합니다. 루터파의 심벌인 ‘루터의 장미’에는 마음과 십자가가 함께 나타납니다. 칼빈의 로고는 ‘손으로 마음을 하나님께 밭쳐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체험과 훈련’을 설교하는 강단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강조하며 동시에 온 마음을 다한 ‘헌신’을 북돋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왜냐면 사람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종교개혁의 가치를 따라 우리는 신앙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야훼 하나님께서, 언약의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를 헛되이 돌려보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자신을 그와 같은 분으로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 그는 우리의 하나님 곧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 나의 하나님, 나의 마음을 주께로 향하게 하소서! 이를 주께서 나에게 약속하셨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우리’라고 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한 개인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한 교회의 하나님 한 공동체의 하나님이십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회가 이같이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몸이라는 것을 재발견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채우시고 우리의 공동체를 채우시어 우리가 오직 하나님께만 향하게 하소서!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힘입어 여기에 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죄책과 후회 근심과 슬픔과 걱정과 죄로 가득 찹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만 향하게 돌이키시어 우리로 쉼을 얻게 하시고 기쁨과 은혜를 발견하게 하소서!”

이것이 우리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 공동체에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돌이켜 있습니까? 여러분의 전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까? 잠깐 멈춰 서서 우리는 자문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생각을 잠시 멈춰 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가? 나의 마음이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있는가? 나는 마음으로 종교개혁의 전통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가? 교회가 변해야 하고 타인이 변해야 한다는 것은 쉽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더욱 정직하게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길을 걸어감(미래)

그런데 어째서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까? 솔로몬은 전심으로 다음과 같이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그의 모든 길로 행하게 하시오며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게 하시기를 원하오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새롭게 출발합니다. 성전이 그 출발점입니다.

이 성전에서 제사 드려 자신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였고 하나님으로부터 화해를 선물 받은 자들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매일의 삶에서 만나는 실천적인 질문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한 자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주일의 선포는 어떻게 월요일에 적용될 것인가? 오늘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이 던져집니다. “우리는 이제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2017년 우리는 종교개혁이 끝난 것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던 것을 기념합니다.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오늘의 교회도 큰 도전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굳게 서서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며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

이 세속화된 세상에서 우리는 질문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젊은 세대에게 전수해 줄 것인가?” 수많은 질문과 난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확신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을 말합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선조들에게 주신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킬 것을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주의 깊게 보십시오. 솔로몬은 선조들이 한 모든 것을 따라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선조들이 그들에게 준 계명을 지키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보수주의도 아닙니다. 과거의 것 옛것만을 지켜가라는 훈계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들의 선조들에게 주신 계명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전통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초상화를 보면서 미소 짓고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의 사진을 보고 그들의 의복을 보고 그들이 사용한 언어를 읽으면서 미소 짓습니다. 우리는 이 전통을 단지 미소 짓고 즐길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켰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의 언약을 통한 ‘선택’과 ‘믿음의 체험과 훈련’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과 우리의 선조들이 발견한 계명이요 가치입니다.

우리도 이를 지켜가야 합니다. 우리는 선조들이 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선조들이 했던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찬송합니다. 우리는 선조들과 다른 방식으로 옷을 입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500년 전에 발견한 이 계명과 이 가치가 오늘날 꼭 같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교회로써 우리는 죽은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 모이기를 힘쓰고, 형제자매를 사랑으로 돌보고, 하나님의 길을 함께 걸어가도록 서로를 돕고 기도하고, 서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대화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는 거야말로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그러기에 종교개혁의 후손들이 서로 분리되어 나누어져 있다는 것은 500주년을 기념하는 우리에게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서로를 향해 돌이키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서로서로 도와 하나님의 말씀과 종교개혁의 신앙고백에 교회가 굳건히 서서 하나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그리고 또한 서로를 향해 돌이키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솔로몬 왕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옵소서!”라고 축복하며 기도한 것은 우리를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니다. 그분은 임마누엘 곧 그분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골고다로 이끕니다. 거기에서 ‘언약’과 ‘선택’은 하나가 됩니다. 이 골고다가 ‘믿음의 체험과 훈련’의 근원이요 경계입니다. 골고다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확인하고 그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만납니다. 골고다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서로를 만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말씀이 우리 모두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며 이스라엘의 성전이 아니라 교회에 나와 있습니다. 바로 여기 하나님과의 화해가 일어나는 설교단에서 우리는 은혜로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