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청교도의 작품을 읽어야 할 유익한 열 가지 이유

청교도의 작품을 읽어야 할 유익한 열 가지 이유

여러분이 청교도 작품들을 읽기 시작하면 ‘영적인 의미에서’ 다소 고독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책을 읽고 흥분하겠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여러분이 생각하는 차원의 깊이와는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 생각이 빈약한 이유는 책을 거의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서(讀書)는 우리로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지금 글자문화 대신 사진, 비디오, 스마트폰, 영화 등 시각문화(視覺文化) 속에 살고 있다. 그 안에 우리가 해야 할 사고(思考) 작용이 이미 이미지화(imagination)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굳이 개념을 이해하려고 씨름할 필요가 없다. 이미 누군가가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내용을 해석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교도 시대에는 책 속에 있는 사상들을 이해하기 위해 씨름해야만 했다. 그래서 청교도 지도자들은 대부분 지독한 독서가들이었다. 그 결과로 청교도 지도자들은 위대한 사상가들이었다. 이제 이들의 작품을 읽을 때 우리가 얻는 유익이 무엇인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1) 하나님께 대한 우리 생각을 높이 고양(高揚)시켜 준다.

청교도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정도까지 높여주며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와 찬양을 받기에 진실로 합당한 분이심을 보여 준다. 제레미아 버로스는 ‘복음적 예배’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적당히 예배하는 이유는 성경대로 하나님을 잘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2) 우리를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청교도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토머스 굿윈, “만일 내가 천국에 가서 그리스도가 거기 계시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면 나는 즉시 떠날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 없는 천국은 내게 지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을 천국답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임재 때문이다. 진정한 성도는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며 그리스도만을 원하지 않는다. 새뮤얼 러더포드, “그리스도의 달콤함은 내게 우주만큼 크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부족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걸 채워 주신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의 샘이다.”

(3) 우리로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그리스도가 만유(萬有)시고 만유 안에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문제 해결을 위해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제레미아 버로스,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분이심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더더욱 다른 어떤 영혼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분임이 확실하다!” 프로이드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이미 한 청교도가 현대의 심리적 혼란의 문제를 이미 해결했다.

(4) 우리의 삶과 경건에 성경만으로 충족함을 보여준다.

청교도는 성경에 기초한 참된 상담자였다. 최고의 상담은 강단에서 하나님 말씀이 열리고 해석되고 적용될 때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했다. 300여 년 전 아이작 암브로즈는 ‘그리스도인 군사’에서 성경으로 충만하지 않은 사람에게 조언받는 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이렇게 말했다.

“상처 때문에 위로받고자 하는 영혼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영혼의 의사도 아닌 불신자에게 당신의 병을 고백하는가? 영육이 모든 병을 고치는 하나님께로 가라. 하나님은 진정으로 당신을 고치신다. 바울이 성령에 의해 회심했을 때 바울은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즉시로 하나님께 순종했다. 혈육과 의논하지 마시라.”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창조하시고 영혼을 구속(救贖)하시려고 죽으셨기에 우리 영혼 다루는 법을 가장 잘 아신다. 그래서 하나님과 가장 친숙한 사람들이야말로 영혼을 치료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람들이다. 사실상 청교도는 ‘영혼의 의사’로 불린다. 토머스 왓슨은 ‘죄는 영혼의 질병이다. 그리스도는 영혼의 의사다’라는 논문을 썼다.

(5) 죄의 본성이 얼마나 무섭고 가증한지를 보여 준다.

성경의 ‘죄 교리’는 신학이라는 전체 스웨터를 풀어줄 실마리이다. ‘죄 교리’를 무시하면 다른 모든 교리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사람들은 죄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그러나 죄를 피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버로스는 죄가 지옥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죄가 지옥보다 더 나쁘다고 주장한다. 조나단 에드워즈, “모든 죄는 무한한 속성을 갖지만 범죄한 사람의 양심에 따라 죄가 더 가증스럽게 혹은 덜 가증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시므로 하나님께 대한 죄는 무한히 악하다.”    

(6) 우리의 삶의 실제에 삶의 지혜와 도움을 준다.

팀 켈러는 리처드 백스터의 ‘성도의 생활 지침서’를 ‘이제껏 만들어진 성경적 상담안내서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했다. 패커는 이 책을 기독교 서적 중에서 성경 다음으로 훌륭한 책이라고 평했다. 이 책은 삶의 모든 영역에 성경을 적용한 사람의 천재성을 보여 준다. 죄악된 영혼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던 심리학이라는 용어가 차츰 병든 마음을 고치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심리학은 영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목사들의 손에서 불신자가 대부분인 상담가들의 손으로 옮겨졌다.

루이스 베일리의 ‘경건의 연습’은 청교도의 경건 생활의 안내서의 모델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책의 기본 생각은 한 사람의 하루와 인생을 성경을 기준으로 규정해 보자는 것이다. 존 거스트너 박사는 이 책이 청교도 운동을 낳았다고 했다.

나다나엘 래뉴의 ‘고독, 경건한 묵상으로 향상시키기’는 영적인 묵상에 관한 청교도 작품 중에서 고전으로 손꼽힌다. “여러분이 홀로 있는 시간조차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 묵상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을 선하게 사용함으로써 그 시간을 거룩하게 향상시킬 수 있다.” 만일 청교도들에게 열한 번째 계명이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시간을 낭비하지 말지니라.”였을 것이다.

(7) 우리로 성경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늘날 잘못된 복음 전도는 대개 인간 중심적이다. 그러나 청교도 복음 전도는 하나님 중심적이었다. 오늘날 거의 상실된 교리가 청교도들에게 있었는데 ‘구도’(求道) 또는 ‘구원을 위한 준비’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수단과 방법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이 같은 수단만 사용해야 한다.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고 한다면 누군가가 그리스도에 관한 정통교리를 설교하는 것을 들어야만 한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고자 하신다면 하나님의 정상적인 수단은 그 복음 설교일 것이다.

그들은 “만일 여러분이 올바른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면 올바른 마음을 갖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라고 할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구도’(求道)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인간 아무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구원’을 찾는 것이다. 그 누구도 ‘구도’(求道)로 구원 얻는 것은 아니나 ‘구도’(求道) 하지 않고 누구도 구원 얻을 수는 없다.

(8) 우리로 삶의 올바른 우선순위를 알게 해 준다.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어떤 청교도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미소는 나의 가장 큰 상급이요, 하나님의 찡그리심은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함께 보내는 사람과 비슷해진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청교도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영원에 대한 투자가 될 것이다.      29

제레미아 버로스의 ‘복음 경외’는 올바른 삶의 우선순위에 관한 책으로서 이사야 66:2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떠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일곱 편의 설교를 담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떠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9) 우리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맺는 법을 가르쳐 준다.

솔로몬 스토다드의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의 의로 나타나는 것은 든든함’은 전가(轉嫁)된 그리스도의 의(義)에 관한 책이다. 전가된 의와 주입(注入)된 의(義) 사이의 영원한 차이에 대해 바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오늘날에 이 책은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 둘의 입장의 차이는 로마와 제네바의 문제가 아니라 천국과 지옥 문제다.

(10) 성경 말씀을 신적 권위로 높여 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작성한 청교도 거장들은 이렇게 말했다. “성경의 권위는 반드시 믿어야 하고 복종해야 하는 것으로 인간이나 교회의 증언에 의지하지 않고 그 자체로 진리이시고 모든 권위의 원인이신 하나님께만 온전히 의지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져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

설교자가 하나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 명령이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고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딛 2:15) 우리는 성경에 신실한 사역자의 말이 곧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버린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이유는 순종하라고 주신 것이다.    

토마스 테일러, “하나님의 말씀은 그 위엄과 권위가 영원히 보존되도록 전달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대사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때는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듯이 말해야 한다. 말씀의 권위에 저항하거나 그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무서운 죄다. 하나님은 자기의 일꾼들이 거절당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

신명기 30:20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을 동일시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청교도들이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성경에 대한 경외심에서 왔다. 만일 우리가 청교도들이 하나님을 알던 것처럼 하나님을 알려면 우리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 한다. 이 사랑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지런하고도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청교도들의 글을 읽는 것이 그 다음으로 좋다. 사실상 청교도들의 글을 읽는 것은 교회 역사상 가장 훌륭한 지성인들이 있는 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같다. ‘여러분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을 닮는다.’라는 말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청교도들의 글을 읽는 것은 시간을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이다. “오, 우리가 청교도들처럼 하나님을 가장 높이 경배하고 찬양하기를 소원합니다.!”(*) 글쓴 이 / 돈 키슬러(Don Kistler, 1949- ) 참조, ‘청교도 작품을 읽어야 하는 10가지 이유’,(서울, 부흥과개혁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