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개혁주의 설교학 강의(4) 설교자의 기도 생활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5. 설교자의 기생활

– 설교자는 기도의 사람이어야 한다. –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설교자가 성경 말씀에 정통해야 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동시에 설교자는 반드시 기도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 역시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주님의 교회를 돌보는 목양 사역에서 목회자의 말씀 사역과 기도 사역은 이미 성경에 기록된 사도적 전통이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 안에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의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을 때 사도들은 스스로 자신들 사역의 우선순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 6:4) 구제(救濟) 사역이 그들에게 무가치하거나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 사역이 구제 사역보다 앞선다는 것을 인식했다.

필자가 약 20여 년 전에 목사고시를 볼 때 헌법에 명시된 목사의 직무를 보고 적지 않게 놀란 적이 있다. 목사가 되면 당연히 설교 사역이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했으나 양무리 된 ‘교인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고 설교하는 일보다 우선적인 목사의 직무로 제시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목회 전반에 있어서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기도 사역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사도행전 6:4의 순서를 따른 것이었다.    

특히 사도행전 6:4에 기록된 사도들의 직무는 구약의 선지자 사무엘의 공적인 선언에 나타난 직무만 아니라 그 순서도 매우 유사하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예시한 구약과 신약 구절은 모두 기도의 직무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교훈하는 일에 앞서고 있다.

목회 사역에 있어서 단순히 기도와 설교의 순서상의 우선순위를 고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목회자의 기도 생활은 설교 사역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16세기 청교도 설교자인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는 ‘예언의 기술’에서 설교자의 두 가지 의무를 언급한다. “예언자(말씀의 봉사자)는 오직 두 가지 의무를 지닌다. 하나는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퍼킨스는 설교자의 설교 사역과 동등한 위치에 기도 사역을 두었다.

설교학자 블랙우드(A.W. Blackwood, 1882-1966)는 모든 설교자가 자신의 방법으로 메시지를 준비해야 하고 때때로 그의 목적과 재료들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야 하지만, 결코 예외가 있을 수 없는 하나의 규칙을 언급하였다. 그것은 바로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진행하고 기도로 마무리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한 설교자의 기도는 설교 사역 전반에 걸쳐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할 절대적 필요조건이다.

설교자가 설교 준비를 위하여 서재에서 성경을 연구할 때 그는 성령 하나님께서 그 뜻을 밝히 비추어주시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왜냐면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그 손에 들고 있다 하더라도 성령 하나님께서 그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그 말씀을 결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시편의 성도처럼 기도해야 한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개역한글)

동일한 맥락에서 16세기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도 ‘기독교강요’에서 설교자의 성경 이해는 오로지 성령의 사역에 의존한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비취는 태양 빛과 같다. 하지만 그 태양 빛도 눈먼 자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모두 본성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내면의 선생인 성령님이 빛을 비춰주심으로 그 길을 예비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우리의 지성을 뚫고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므로 옛적에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영감으로 구원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오늘날 설교자의 지성과 마음을 조명하시지 않는다면 설교자는 구원의 진리에 관하여 어둠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먼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성령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는 설교자의 기도는 단지 설교를 준비할 때만 아니라 준비된 설교를 회집 한 성도들에게 전달할 때도 필요 필수 조건인 것이다.

기독교 최초 설교학 교과서인 ‘그리스도교 교양’(De doctrina christiana)을 저술한 힙포(Hippo)의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은 기독교의 설교란 설교자의 언변이 아닌 경건한 기도로 수행되기 때문에 설교할 때에 반드시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

“자신을 위해서 또 연설할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함으로써, 그는 발언자(發言者)이기에 앞서 탄원자(歎願者)가 되는 것이다. 말을 해야 할 시간이 임박하여 혀를 놀려 설교하기에 앞서 자신의 목마른 영혼을 하나님께 들어 올릴 것이니,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 마신 바를 내놓을 수 있고 가득 채운 바를 퍼줄 수 있는 것이다.”(XV, 32)

고전 수사학에 능통하였던 어거스틴은 수사학적 기법보다 기도를 더욱 강조하였다. “에스더 여왕이 임금 앞에서 자기 백성의 현세적 구원을 위해 말씀을 드리기 전에도 기도를 올렸다면 사람들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한 사람은(딤전 5:7) 이런 은혜를 받고자 얼마나 많은 기도를 올려야 하겠는가?”(XXX, 63) 

이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기도의 사람’이어야 한다. 기도를 소홀히 여기는 설교자는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1834-1892)이 지적한 것처럼 마치 ‘절름발이’와 같다. 그의 기도가 그의 설교보다 짧기 때문이다.

기도에 관한 깊은 통찰력으로 교훈을 주는 바운즈(E.M. Bounds,  1835–1913)는 ‘기도의 능력’(Power through Prayer, 1954)에서 기도의 사람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뿐만 아니라 ‘기도가 없는 설교’는 ‘영혼을 죽이는 설교’라고 바운즈는 거침없이 폭로한다. 왜냐면 기도의 골방에서 영혼을 살리는 진정한 설교자가 빚어지고 기도의 골방에서 비로소 진정한 설교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17세기 네덜란드 개혁주의 신학자 푸치우스(G. Voetius, 1589-1676)는 서재의 수많은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더 바르게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동일한 맥락에서 스펄전 역시 기도의 골방을 강조한다. “우리의 모든 책과 학문은 우리의 기도의 골방에 비하면 그저 헛된 것에 불과하다.”

필자가 이것을 언급한 이유는 설교자에게 학문과 연구가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설교를 위한 주석과 학문에만 의존한 채 기도로 촉촉이 적셔지지 않은 메마른 설교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기도의 중요성은 교회 역사를 통해서만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설교자에게 기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출애굽기 34:29에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이 기록된 두 번째 돌 판을 들고 내려올 때 자신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라고 기록했다.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난 까닭은 모세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현상이었다. 즉 모세는 여호와와 대면하여 말하였기에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 얼굴 피부에 하나님 영광의 광채가 난 것이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설교자는 십계명에 기록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전하기에 앞서 홀로 하나님과 대면하는 기도의 골방이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봉사하기에 앞서 하나님과의 은밀한 기도의 교제를 가져야 한다. 기도의 골방을 지난 설교자는 비록 스스로 깨닫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이같이 자연스럽게 배인 거룩의 체취가 묻어나게 된다.      

이처럼 기도란 설교자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함에도 왜 많은 설교자가 기도에 실패하는 것일까?

어떤 면에서 지구촌 여러 나라의 목회자들과 달리 매일 새벽기도와 정기적인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로 한국의 설교자들은 기도에 실패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규적 기도시간이 우리의 기도의 영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가 기도에 실패하는 이유가 다양할 것이다. 목회 사역의 분주함, 게으름, 쳇바퀴 돌듯 파묻힌 일상의 삶, 등등이다.

하지만 설교자들이 기도에 실패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름 아닌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기도의 영적 내면적 특성에 있다. 목회자의 여러 가지 외적인 활동은 사람들의 눈에 가시적으로 드러나나 기도는 그 영적인 특성상 내면적이기 때문에 아무도 설교자 기도의 영성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실상 목회자의 삶 가운데 가장 잘 보이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의 영성인 것이다. 모세가 여호와와 대면하였기에 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듯 기도의 골방을 지난 설교자는 비록 자신이 깨닫지 못할지라도 그의 설교를 비롯한 모든 사역 가운데 거룩의 영성이 자연스레 묻어나는 것이다. 기도의 향기는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고 숨길 수 없다.

바이올린 연주자들 사이에 잘 알려진 금언이 있다. “연주자가 바이올린을 하루 연습하지 않으면 연주자 본인이 알고 이틀 연습하지 않으면 지도 교수가 알고 사흘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 섬세한 음을 연주하기 위해 정확하게 손가락을 짚어야 하는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훈련이 필요하다면 사람들 영혼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짚어야 하는 설교자에겐 더더욱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아야 할 것이다.

설교가 결코 사람의 ‘설득력 있는 지혜로운 말로’ 성취되지 않고,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시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성취된다면(고전 2:4,10), 설교자는 성령의 은혜를 갈구하는 기도의 사람이어야 한다.          

설교 사역이 사람의 노력이나 재능에 의존하는 인간적 경영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the unction of the Holy Spirit)으로 수행되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라면 설교자는 겸손히 무릎 꿇는 사람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기도의 골방을 통과한 사람이어야 한다.

6. 설교자의 독서 생활

– 설교자는 언제나 ‘학생’이어야 한다. – 

우리는 앞서 설교자란 모름지기 자신이 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하고 정통한 사람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은밀한 기도의 골방을 지키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우리는 설교자의 ‘독서 생활’을 살펴보자.

설교자의 DNA 가운데 하나는 책 읽는 습관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올라 기도하신 것처럼 설교자는 습관을 따라 기도의 골방뿐만 아니라 서재에 들어가 독서 해야 한다.

목회자의 서재는 많은 스승을 모신 학문의 전당이요, 때때로 새롭고 낯선 논제에 대하여 치열하게 토론을 펼치는 정신적 씨름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단순히 전통에 매여 앵무새처럼 옛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 시대에 걸맞게 창조적으로 새롭게 사고(思考)해야 한다.

이런 주장은 전통과 옛것을 무조건 진부(陳腐)하다는 이야기로 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과 옛것을 성경의 빛에 비추어 우리 시대의 새로운 도전과 환경에 적합하게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 바빙크(H. Bavinck, 1854-1921)가 말하는 개혁주의의 올바른 정신이다.

신학이란 본질적으로 과거에 뿌리를 둔 보수적인 동시에 미래를 지향하는 진보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 교회의 유구한 역사 가운데 앞서간 신앙 선조들의 지혜의 어깨 위에 서는 특권만 아니라 동시에 오고 오는 후세대를 위하여 신뢰할 만한 든든한 어깨 받침을 놓는 사명과 특권을 지닌 개혁신학의 후예들이다.

목회자의 독서를 이야기하면서 필자가 이처럼 거창하게(?) 개혁신학을 운운하는 것은 진정한 독서 없이는 결코 참다운 목회란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앞서 ‘목회자는 말씀에 정통한 학자여야 한다’는 제하에서 16-17세기 영국 청교도 목회자들의 ‘학식 있는 목회’(learned ministry)를 소개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언제나 ‘학생’(學生, student)이어야 한다.

‘학생’이란 라틴어 ‘studere’에서 기원한 것으로 ‘애써 노력하다’, ‘열망하다’, ‘헌신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애써 노력하지 않거나 열망하고 헌신하는 자세가 없다면 ‘학생’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학생으로서의 목회자는 능동적으로 책을 읽고 연구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D.M. Lloyd-Jones, 1899-1981) 목사는 목회자가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신학 수업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커다란 실수라고 지적하면서 지속적인 독서 생활을 충고한다. “설교자는 그의 생이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신학 서적을 읽어야 합니다. 많이 읽을수록 더 좋습니다.”

필자의 친구 가운데 책을 유난히 좋아할 뿐 아니라 학문적 실력도 갖춘 한 친구는 한 권의 책에서 단 한 줄이라도 배울 것이 있다면 책을 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끌려 필자는 한동안 많은 책을 구입하고 수집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간 흐른 후 필자는 생각을 180도 바꾸었다.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좋은 책 한 권을 반복해서 읽고 소화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임을 깨달았다.

교회와 목회에 관하여 하루에도 수십 가지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기독교 출판의 홍수 시대에 더욱 분주해진 목회 환경으로 인해 제한된 시간을 지닌 현대의 목회자들에겐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적용할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자는 각종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 빠져 익사하고 만다. 그러므로 한 권의 좋은 책을 택해 완전히 내 것으로 삼기까지 반복해서 읽는 일이 필요하다.

더구나 필자는 개인적인 경험 즉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을 번역하면서 좋은 책이 주는 큰 유익을 발견하였다. 좋은 책이란 하나의 주제를 성경적으로 신앙고백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개괄할 뿐만 아니라 그 주제의 실천적 적용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다양하고도 많은 자료를 하나의 논지에 맞게 배열할 뿐만 아니라 또한 비평적으로 살펴서 그 장단점을 가려 분별력을 길러주는 것이 바로 좋은 책이요 훌륭한 책이다. 따라서 좋은 책을 읽고 나면 마치 사상의 깊은 샘에서 길러낸 차가운 냉수를 마신 것처럼 시원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독서가 속된 말로 ‘설교에 써먹기’ 위한 독서라면 이는 고치기 힘든 ‘목회자의 직업병’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 성경을 읽기보다 단지 설교하기 위해 성경을 뒤적이는 목회자의 ‘직업병’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이다. 실상 독서의 진정한 목적은 루이스(C.S. Lewis, 1898-1963)가 지적했던 것처럼 정보와 지식의 습득과 축적을 넘어 독자의 사고를 자극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편하게 소파에 앉아 읽기 쉬운 에세이(essay)보다 단순한 책상과 딱딱한 의자에 앉아 깊은 사고와 분석적 작업을 요구하는 무거운 책을 읽는 것이 더 낫다. 이것은 필자가 에세이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도 아니고 독서의 즐거움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필자는 회중들의 영혼을 돌보아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은 설교자가 씨름해야 할 주된 작업인 신학적 주제를 전제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가벼운 책을 읽기보다 무거운 책을 선호해야 한다. 이에 대해 로이드 존스 목사의 권면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독서를 계속하고, 대작(大作, the big works)들을 읽으시오.”(*) 글쓴 이 / 박태현 교수(총신대학교 설교학), 건국대학교(B.Sc.), 고려신학대학원(M.Div.equi.), St. John’s College(Nottingham, MAMM), Theologische Universiteit te Apeldoorn(Drs.Thd.), Theologische Universiteit te Apeldoorn(D.Theol.)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