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미국 건국이념 이해하기 청교도 신앙과 이신론

미국 건국이념 이해하기 청교도 신앙과 이신론

시작하는 말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기독교인들은 미국을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라고 한다. 이 말은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만 100% 맞는 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우리는 어쩌면 청교도들에 대해 너무 좋은 이야기만 많이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많다. 모든 건국신화는 과장과 거짓으로 구성되었으나 그걸 탓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청교도에게도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다. 악의적으로 청교도 신앙을 폄하는 이들도 나쁘나 청교도 신앙을 신화화하는 일도 조심해야 한다. 나는 좋은 면을 극대화한다는 긍정적인 면에서 청교도 신앙에 대한 강조를 지지한다.

1. 미국 청교도의 기원

1620년 11월 미국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Plymouth)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순수하고 철저한 신앙으로 하나님이 다스리는 ‘기독교 미국’을 세우려했다. 미국은 물론 세계의 생각 있는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인본주의로 변질이 되는 걸 안타까워하며 순수하고 철저한 청교도 신앙을 본받으려 한다. 순수한 기독교 복음이 심각하게 왜곡된 작금의 상황을 생각할 때 그 같은 노력은 참으로 귀한 것이다.

청교도는 영국의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후예들이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1534년 헨리 8세가 개인적이고 또한 정치적인 이유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결별을 선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교황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것을 영국 국왕을 영국 국교회의 수장으로 바꾼 것이다. 따라서 영국의 종교개혁은 교회의 수장을 교황에서 영국 국왕으로 바꾼 것 외에 별로 개혁된 것이 없다.

오늘날 미국에 있는 영국 성공회교회를 가보아도 여러 의식이 로마 가톨릭교회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국 국교회가 로마 가톨릭교회와 결별을 선언하므로 개혁을 시작했으나 그 개혁이란 신앙적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교파가 아니라 그저 ‘교황 없는 천주교’라고 할 수준이다. 그렇게 미미한 일부 개혁에 만족하지 못하고 철저한 개혁을 원했던 일련의 무리가 있었다. 그들이 바로 청교도들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I, 1533-1603)이 다스리던 1560년 청교도 개혁이 하나의 조직된 운동으로 발전하였으나 1662년에 추방령이 내려져 그들은 더 이상으로 국교회 안에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1688년에 명예혁명으로 청교도들에게 설교할 수 있고 독립교회를 세울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국교회 밖에서 청교도 활동은 계속되었다.

영국의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1688)은 영국 의회와 네덜란드의 오랜지공 빌럼(Willem III van Oranje or William III, 1650-1702)이 연합하여 제임스 2세(James Ⅱ, 1633-1701)를 퇴위시키고 윌리엄 3세를 왕으로 세운 일인데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명예롭게 이루어졌다.”라고 해서 명예혁명이라 이름 붙여졌다. 명예혁명은 영국의 의회 민주주의를 출발시킨 시발점이 되었다. 그 후 어떤 영국의 왕조도 의회를 무시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청교도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시기는 1564년으로 추정되는데 처음에는 영국 국교회에 비타협적인 개신교도들을 경멸과 적개심으로 부르는 호칭이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청교도란 ‘까다로운 사람들, 비판적이고 고집불통의 사람들’ 또는 ‘국교에 반대하는 비판적이고,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작당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순수하고 철저하고 열정적인 신앙인들이라는 영광스러운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2. 청교도의 신앙과 생활

오늘날까지 기독교 안에서 청교도 신앙에 대해 활발하게 연구하는 것은 그들을 통해 바른 신앙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열악한 형편에서 살면서도 효과적으로 복음사역을 하였고 또한 그들로부터 우리는 신앙에 유익한 신앙고백 표준 문서들을 물려받았다. 제임스 패커(J.I. Packer)는 청교도를 통해 우리가 배울 일곱 가지를 지적하였습니다.

‣ 그들은 성숙한 기독교인의 모델이다.
‣ 그들은 신학적 통합성을 추구했다.
‣ 그들의 영적 표현의 질이 뛰어났다.
‣ 그들은 효율적 행위에의 열정을 가졌다.
‣ 그들은 가정생활의 안정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다.
‣ 그들은 인간의 가치에 대한 지각이 있다.
‣ 그들은 교회 갱신의 이상을 가졌다.

그 외에도 청교도들을 통해 우리가 배우고 얻을 유익은 많다. 그들은 성경의 사람이라고 할 만큼 성경을 사랑했고 가능한 성경 속에 나타난 원리들에 적합한 교리와 교회의 규율과 행정조직을 갖기 원했다. 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언제나 개혁을 이루려고 노력했고 거룩과 경건을 생활의 절대적인 요소로 삼았다.  

청교도들은 종교개혁의 모토인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를 실현하고자 노력했고 영국 국교회 밖에서 개혁 운동을 주도했다.

그리고 청교도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것 중의 하나는 설교였다. 예배와 설교를 동의어로 사용할 만큼 설교를 중요하게 여겼다.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에 의하면 청교도 설교자들은 ‘언제나 그들이 하는 설교가 마지막 설교인 것처럼’ 선포했고,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한다는 의식으로 설교했다.

또 청교도들은 성경을 철저히 깊이 연구하여 설교했으며, 언제나 인생의 제일 된 목적인 하나님 영광임을 강조하고, 인간이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유일한 대상이 그리스도임을 제시하고, 성도의 삶의 방향이 거룩하고 경건한 것임을 강조하고, 각자 직업에 대한 철저한 소명의식을 일깨우고, 무엇보다 가정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건전한 가정생활을 하도록 가르치며, 세속적인 즐거움이나 쾌락과 사치를 금했다.

설교자들은 자신이 설교한 대로 살려고 노력했고 청교도 모두는 각자의 일상에서 설교자들의 가르침과 본을 따라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또 그들은 순수하고 바른 신앙이 가정과 교회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실현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영적 싸움을 싸웠다.      

청교도 설교자들이 항상 강조했던 것은 성수 주일, 예배, 기도, 경건한 가정, 거룩한 삶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은 이러한 내용을 다 포함하고 있다. 특히 장로교의 장로정치는 청교도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초기의 청교도들이 칼빈주의 전통을 따르는 장로교였으나 이후에 여러 개신교도 청교도의 신앙과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청교도들이 박해를 받게 된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Divine Right of Kings)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은 하나님께서 점지하셨기에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왕권신수설’을 거부하다가 박해를 받게 되었다.

박해를 피해 신대륙 아메리카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하나님만이 절대 왕이신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다. 영국에서의 청교도들은 비성경적인 영국 국교회와 왕들을 상대하여 싸웠으나 신대륙 미국에서는 성경과 경건을 철저하게 강조했다.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 청교도 신앙이 끼친 영향이 지대하나 지금은 그들의 유적만 남아 있을 뿐 청교도 신앙과 개혁 정신은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3. 미국 건국의 주도세력

미국 건국(建國)에 지배적 영향을 끼친 두 그룹 중 하나가 우리가 앞서 살펴본 북쪽 플리머스에서 시작된 청교도들이라면 또 다른 하나의 그룹은 1670년 남쪽 버지니아주에 처음 상륙하여 제임스 타운(Jamestown)에 정착했던 그룹이다.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서는 청교도들이 중심이 되었었고 이와 달리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은 영국 국교회(聖公會, Anglicanism, Episcopal Church) 교도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청교도들의 성격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이고 제임스 타운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한 그룹은 청교도들과는 신앙과 교리가 다를 뿐 아니라 순전히 상업적으로 돈을 벌기 위한 식민지 건설회사의 투자에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제임스타운을 중심으로 활동한 이들의 공헌은 산업을 개척하고 발전시키기도 하였지만 가장 중요한 공헌은 미국의 대의민주주의 기틀을 세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에 기여한 소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거의 신학적으로 이신론(理神論 또는 自然神論, deism,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등장한 철학과 신학 이론)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 이신론은 하나님과 기독교를 합리주의(合理主義)로 설명하는 이론이고 청교도 신앙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 넓게는 이신론과 청교도 신앙이 개신교라는 한 울타리 안에 속하나 신앙 내용에 있어는 너무나 크게 다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일반적으로는 기독교 국가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내용은 기독교 정신이나 가르침과 동일시할 수 없는 게 많음을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청교도들이라면 전혀 허용하거나 용납을 할 수 없는 합리주의(合理主義)와 실용주의(實用主義)는 미국인의 정신과 사상의 메인 스트림을 형성하고 있다.

미국의 청교도 정신이 미국이 합리주의나 실용주의가 지나치게 세속화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는 했겠으나 이신론의 기독교에서는 합리주의나 실용주의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신론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청교도들이 믿는 하나님이 아니고 이신론자들이 믿는 복음은 청교도들이 믿는 복음이 전혀 아니다.

북부 유럽에서 루터와 칼빈과 신교도들이 교리와 생활을 개혁하려는 문제로 씨름하고 있을 때 남부 유럽에서는 르네상스(Renaissance, 文藝復興)라는 또 다른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르네상스도 종교개혁과 같이 모든 생활에 대한 의미와 통일성을 줄 수 있는 기초를 발견하려고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는 동일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서로 반대되는 해답과 방향을 제시하였듯이 미국에 있어서 청교도 신앙과 이신론자들은 서로 반대되는 방법과 목적을 지향했다.

이러한 이신론자들은 미국 건국 초기에는 원주민 인디언(Indian, Native Americans)들과의 마찰과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는 일과 남북 전쟁 등 큰 문제들을 극복하는 일에 힘을 쏟느라 신앙의 정통성과 개혁 정신을 정진시키는 일에 관심을 둘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북쪽 청교도들의 순수 하고 개혁적인 신앙은 너무나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청교도 신앙을 공부하다 보면 그들의 철저하고 순수한 신앙이 너무도 급속히 인본주의적으로 세속화되고 말았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지금은 뉴잉글랜드 지방 어느 곳에서도 청교도 신앙을 찾아볼 수조차 없다. 거대한 로키산맥 어느 산골짜기의 이름 모를 실개천처럼 청교도 운동이 실낱같은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겠지만 미국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를 지배하는 사상은 이신론적 영향이 지배적이다.

지나치게 철저함과 지나치게 순수함은 인본주의가 될 위험이 아주 높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 자체보다 더 율법에 철저하려고 하다가 율법주의자가 된 것처럼 청교도들은 복음 자체보다 더 철저하고 순수하려고 하다가 인본주의로 변질이 되었다.    

이신론의 뿌리는 탈레스와 주전 6세기에 탈레스가 세운 밀레토스 학파다. 그들은 물질적인 자연 속에서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실재를 구했다. 이러한 자연주의 신념이 르네상스의 일반적인 사상과 본질에 영향을 끼쳤다. 르네상스 사상가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초자연적인 영역들을 철저하게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그 운동이 발전함에 따라 그동안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이신론적 신앙이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하나님은 인간과 세상을 일체 간섭 안 하시는 하나님이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온갖 거짓과 왜곡과 음모와 범죄까지 자기실현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필요에 따라 어떤 악이라도 주저 없이 저지르게 된다.

이 같은 이유로 인해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미국의 혼란스러운 가치 질서의 원인이 바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들에게 이런 복잡한 사상과 정신적 계보의 배경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눅 18:2-5)(*) 글쓴 이 / 황상하 목사(퀸즈제일교회,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M. Div.)  ㈜ 본 기사는 본지의 편집에 맞도록 재편집된 것으로 원문과 표현이 다를 수 있습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