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

칼빈과 예배 찬송의 개혁

칼빈과 예배 찬송의 개혁

교회 예전 이단의 극복

칼빈의 제네바 시편 찬송가 86편(Genevan Psalter 86) 1604년

이단을 생각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교리와 관련된 중요하고 심각한 오류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개신교의 교회개혁은 교리상의 문제만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교회개혁이 시작될 무렵 주요 이슈는 기독교 예전(禮典, liturgy)의 문제였다. 교리적 이슈들은 중세교회 예배 개혁이 절실히 필요할 때 나란히 발생한 것이었다.    

교회개혁의 발단(發端)이 된 루터의 95개 토론 논제(論題)는 죄 용서와 설교에 초점이 있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교황이 면죄부를 팔아서는 불가능하기에 교회개혁이 필요했다. 선포되어야 할 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와 죄 용서였다. 따라서 그 당시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라틴어로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했기에 모든 사람은 자신의 모국어로 찬양해야 했다.

교회개혁은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첫 문장의 진술에 충실했다. “보편적인 신앙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삼위로 계신 한 분 하나님과 연합해 계시는 삼위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러므로 본 글에서는 기독교 예전(禮典, liturgy) 이단과 참 예배를 회복하려는 칼빈에 집중하려고 한다.

1. 시편과 성경적 예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시고 사울을 왕으로 허락하셨다.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웠을 때 사울은 악기를 가지고 노래하던 일단의 선지자들을 만났다. 사무엘상 10장에서 보듯이 사울은 그 노래에 빠졌고 그 노래를 듣고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이것은 기름 부음 받은 왕으로서 사울은 이 선지자들을 오케스트라와 찬양대로 조직하고 그들을 위하여 예언적 시편을 작성해야 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을 쓰고 레위인 찬양대와 오케스트라를 조직한 사람은 사울의 뒤를 이은 다윗이었다.    

시편은 제단 주위와 언약궤에 있던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서 영광 스런 음악의 후광(後光, halo)으로 불린다. 50년 후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했을 때 음악 하는 사람들이 시편을 부르려고 성전 뜰에 모였다. 여기서 하나님이 물리적이며 가시적인 성전 안에 등극하시기 전에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 등극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 – 집’이며 ‘물리적인 집’이 아니다.

시편은 인간끼리 화답하는 방식으로 읽도록 기록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시편은 연주용 음악과 더불어 쓰여졌다. 그리고 시편은 악기의 연주에 맞추어 불리기 위해 쓰여졌다. 악기 종류로는 심벌즈, 나팔 그리고 다수의 수금과 고대 판 기타였다. 물론 몇몇 통회(痛悔)하는 시편들은 더 조용한 음악과 더불어 불렸겠지만 대부분 시편이 우렁차고 열정적인 음악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시편은 성령님의 능력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기록되었다. 성령님은 어둠을 몰아내실 때 시편을 사용하신다. 악령이 사울을 괴롭혔을 때 다윗이 악기를 연주하며 시편을 부르자 악령은 쫓겨났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것을 믿지 않으면서 우리의 예배를 단순한 찬송으로 채우며 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이토록 어둠이 많은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존 칼빈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시편에 있는 성령님의 능력을 파악했다.  

‘새 언약’에 사는 우리에게 물리적 상징적 성전은 없다. 우리가 이제는 제사장들만 들어가고 나올 수 있는 그런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필요도 없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며 하늘에 있는 성부의 보좌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다. 히브리서가 말씀하듯이 우리는 이제 가장 거룩한 곳 안으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늘 성전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가? 계시록을 읽을 때 우리는 천사들이 악기와 더불어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모습을 본다. 우리는 선창(先唱)과 후창(後唱) 하는 큰 천사의 무리를 본다. 우리는 하늘로 초청되어 그 예배에 동참하는 성도들을 본다. 우리가 주기도로 기도할 때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하고며 하나님 나라가 악기 연주와 열정으로 불린 시편 찬송 안에 나타나는 것을 본다. 우리는 또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데 우리는 하늘의 예배가 무엇과 같은지 알 수 있다.

사도시대 교회는 이 사실을 이해했다. 신약 서신들은 반복해서 교회가 새 성전이며 우리 모두 제사장이라고 말씀한다. 단지 가르치고 기도하는 곳인 회당과 달리 우리는 오직 성전에만 바쳐졌던 빵과 포도주 즉 주의 살과 피를 가지고 있다. 더욱이 악기 없이 노래만 불렀던 회당과 달리 교회는 악기를 동원하여 노래했다.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이 기록한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주님을 향해 당신의 마음으로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며’이다. 바울은 중심부가 “찬양하라! 주님께 수금으로 노래하라! 수금과 노랫소리로 찬양하라!”라고 하는 시편 38편을 단순히 바꾸어 말하고 있다. 바울은 ‘노래하며 악기를 연주하며’라 했는데 여기서 수금은 줄을 뜯어 연주하는 악기이다.

초대교회는 하늘 성전 예배처럼 땅 위에서 예배했다. 물론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큰 범죄였다. 교회서 기념하는 떡을 나누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것은 교회야말로 이제 참 성전이며 옛 성전은 끝났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사도 시대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들 바로 앞에 계셨고 다른 사람보다 더 가까이 계셨으며 그들은 악기를 동원하여 노래와 시와 다른 찬송으로 그분의 현존에 열정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기독교 예전(禮典, liturgy) 이단이 슬그머니 교회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2. 기독교 예전 이단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公認)하자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았고 교회당으로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다수는 그렇지 않았으나 그 가운데 로마 문명에 젖은 고대 이교주의가 사라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교회 예배에서 발생한 것은 예배가 점점 더 로마 제국의 법정 의식(儀式)을 닮아 갔다. 그리고 만유의 통치자이며 왕이신 예수님은 더욱더 멀리 떨어져 있는 분으로 보였다.    

그리고 인간이 예수님과 성도 사이를 중재했다. 이들 가운데는 성경이 아닌 영지주의 사상으로부터 나온 이상하고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 즉 기괴한 사제들도 있었다. 얼마 후 성자(聖者 saint)라 불리는 거룩한 사람들의 유물과 성상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로 여겨졌다. 예수님은 멀리 계셨으나 성상들과 성모 마리아와 다양한 성인들은 성도들 곁에 훨씬 더 가까이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 예수님이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신다는 새 언약의 가르침은 상실되고 말았다.

또 교회당 내부 구조가 이런 사상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사제(司祭)는 할 수 있는 한 회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의식을 집례했다. 그래서 멀리 떨어져 앉아 있던 회중은 구경꾼이 되었다. 회중이 나중에는 시편을 부르고 사제와 앞뒤로 하는 교창(交唱)도 그만두었다. 그 대신 이 모든 것을 회중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찬양대가 다 떠맡았다.

같은 시기인 주 후 4-5세기에 특정 이방 금욕주의 사상이 교회 안에 기세를 부렸다. 옛 창조 동안(즉 구약 시대) 잔칫날은 80일이었고 금욕(禁慾)의 날은 하루였다. 그러나 금욕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교회에 금식일은 점점 늘어났으나 잔칫날은 거의 없어졌다. 그리고 음식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 되었다. 그래서 심지어 성찬식조차도 위험하게 되었다.

교회는 매주 성찬식을 거행하던 사도들의 성경적 관습이 계속 시행은 되었으나 회중은 구경만 하고 사제 혼자서 떡을 다 먹고 포도주도 다 마셨다. 회중은 주의 떡을 먹고 잔을 마시기를 두려워했고 결국 나중에는 교회가 회중에게 적어도 1년에 한 번 부활절에는 주의 성찬에 참여하도록 요청을 해야만 했다. 이때도 포도주는 너무나 위험했기에 회중들은 빵만 받아먹었고 포도주는 여전히 사제의 몫이 되었다.

결혼은 놀라운 복이고 부부 생활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우리는 입다의 딸이 결혼 생활의 행복을 즐길 수 없었기에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중세교회는 이렇게 가르쳤다. “순결이 결혼보다 낫다. 결혼의 성생활은 정욕의 죄다. 마리아와 요셉은 결코 동침한 일이 없고 자녀도 없었다.” 그래서 사제들의 결혼은 금지되었다.  

성경에서 음악은 떠들썩하고 이를 위한 많은 악기가 있다. 성경에‘조용한 거룩’은 없다. 거룩은 밝게 비추는 빛과 흰옷 그리고 잔치 음악과 관련 있다. 천사들이 하늘에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찬양할 때 그 소리에 귀가 멍먹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음악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그리스 철학자들로부터 배웠다. 그래서 악기는 폐지되었다. 음악은 느려지고 신비주의적으로 조용해 졌다. 그리고 서구 교회에서 예전(禮典)은 오직 라틴어로만 거행되었다. 간혹 그 지방 언어로 설교하고 기도는 했으나 교회 예전은 항상 라틴어로 거행되었다.

3. 예배의 개혁

종교개혁이 있기까지 서구 교회는 1,000년이 넘게 이런 교회 예전의 이단적인 전통을 이어 시행해 왔다. 성경을 바로 깨달은 개혁자들이 얼마나 이에 놀라고 충격적이었는가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개혁자들은 결혼이 독신보다 낫다고 가르쳤다. 목사에게 결혼은 최선이다. 그들은 정상적인 결혼 생활의 부부관계는 죄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맥주와 포도주는 좋은 음료이며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즐길 수 있다고 가르쳤다. 특히 개혁자들은 예배가 회중에 따라 그들의 언어로 거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배 때 회중은 목사 주위에 가까이 모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예수님보다 더 우리 가까이 계신 분은 없으며 예수님을 등지고 마리아와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사악한 모욕을 주는 죄라고 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오직 예수만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이기에 지역 목사는 중보자가 아니라 회중을 위한 교사며 예배 인도자 그리고 지도자라고 가르쳤다.

개혁자들은 또 모든 회중은 반드시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개혁자들은 전통적인 사제 중심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예전을 회중 중심의 예전으로 바꾸었으며 기도서를 출판하여 회중이 그들의 몫을 읽고 암송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그들은 찬송을 작곡했고 시편을 음악용으로 작사했으며 찬송가집을 만들었는데 그 결과 회중이 예배 중에 다 함께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4. 존 칼빈과 찬송

종교개혁 초기에는 제네바에 칼빈의 모국 프랑스어로 된 예배 음악과 찬송과 시편 찬송이 없었다. 독일 교인들은 교회 밖에서 불리던 대중 찬송의 전통을 발전시켰는데 이를 받아들인 루터는 교회 찬송을 만들기 위해서 그것을 교회 전통 음악과 혼합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에게는 루터처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루터는 성직과 음악 교육을 받았으나 칼빈의 전공은 법률이었다. 칼빈은 음악적 배경이 없어서 처음에는 교회 음악에 관심이 없었다.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에 칼빈은 기도는 속으로 조용히 해야 한다고 했다. 기도를 종종 밖으로 크게 할 수 있다고 썼던 것 같지만 오직 기도가 속으로 완전히 느껴져야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 칼빈은 노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추측이지만 특별한 상황에서는 교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만약 마음의 감동과 연관되고 그 감동에 도움 된다면 말하는 것과 노래하는 것을 비난하지 않겠다.” 칼빈의 이런 초기 사상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에서 온 것이었다.

칼빈의 초기 저작들은 로마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에 관한 것인데 칼빈은 그의 초기에 키케로와 고대 사상가들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귀를 통해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며 우리는 그것에 반응하게 된다. 참 신앙은 우리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우리의 전인에게 충격을 가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다.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 1년 후 칼빈은 이전 견해를 완전히 뒤엎었다. 1537년 글에 그는 “시편을 부르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고양(高揚)하고 자극하는 힘이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라고 했다. 칼빈은 만약 우리의 마음이 둔하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시편을 크게 부르도록 만들어야 하고 이것이 우리의 마음에 불을 붙일 것이라고 썼다.  

‘기독교강요’ 초판은 칼빈이 어떤 실제적인 방식으로 교회와 예배에 관한 문제들에 관해 생각하기 전에 저술되었다. 그리고 ‘기독교강요’는 처음에 사적이고 종종 은밀한 그룹으로 모였던 그리스도인들을 돕기 위해 저술됐다. 아마도 그때 그들이 큰 소리로 찬양했다면 체포될 수 있었기에 큰 소리로 찬양하는 것은 그들에게 좋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 해 칼빈은 제네바교회 목회자가 되었다. 이때 그는 “어떻게 예배를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개혁할 수 있을까?” 고심하며 스트라스부르크의 개혁자 마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의 저서들을 탐독했다. 부처는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힘이 음악에 있다고 믿었는데 칼빈 또한 부처의 저서들을 읽고 난 후에는 그렇게 확신했다.

1537년 칼빈은 시(市) 의회와 성례 베푸는 문제로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다. 제네바 시(市) 관리들은 예배 중 어떤 음악도 반대했고 칼빈은 그들의 의견에 반대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로 갔는데 거기서 독일어로 불리는 운율 있는 시편 찬송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1539년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칼빈은 처음으로 프랑스어로 된 운율 있는 시편 찬송을 힘들여 만들었다. 이것은 19편의 시편과 십계명과 시므온의 노래 그리고 니케아 신경에 곡을 붙인 것이었다.

1541년 칼빈은 제네바로 다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1542년 그는 ‘제네바의 기도 양식을 위해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는 더 열렬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기 위해 사람의 마음을 고양 시키고 불붙게 만드는 엄청난 힘과 열정을 노래가 있음을 경험으로 안다.”라고 했다. 1537년에 칼빈이 이론으로 알았던 것을 이제는 그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열정적인 노래를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다. 칼빈은 새 노래를 위한 3가지 규칙을 세웠다.

  • 음악 스타일은 성도의 삶의 다른 부분들과 연관된 것으로 독특하고 구별되어야 한다.
  • 교회 음악은 천박하지 않고 무게 있고 장엄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시편 찬송을 느리게 부르라는 말이 아니다. 제네바 시편 찬송은 매우 리드미컬하고 율동 같은 멜로디로 가득하며 많은 시편 찬송이 빠르게 불렸다. 칼빈이 바랐던 것은 교회를 위한 음악은 교회의 고유 스타일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 어린이도 시편 찬송을 배워 한목소리로 회중과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칼빈이 예배 중 노래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마리아의 노래와 시므온의 노래 같은 성경의 다른 노래들도 좋아했고 요나의 노래, 한나의 노래, 하박국의 노래와 성경의 다른 노래들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또 십계명 노래하는 걸 좋아했다. 그러나 다른 찬송의 경우는 칼빈의 입장이 명료하지 않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칼빈은 교회가 시편 150편 전부 그리고 성경의 다른 노래들을 익숙하게 부르도록 배울 때까지는 다른 찬송을 만드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시편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작곡한 찬송은 대개 성경적으로 불충분하고 종종 이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칼빈은 “먼저 모든 시편을 배우라. 그 후에 우리는 찬송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가 부르는 찬송의 성경적 의미를 먼저 잘 알고 부르라는 교훈을 준다.

5. 칼빈의 제네바 시편 찬송

이제 칼빈의 제네바 시편 찬송의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자.

  • 각 시편에 구별되는 곡조와 다른 운율이 있어 각 시편은 자신의 구별 되고 독특한 느낌이 있어 더 쉽게 기억에 남아야 된다는 바람이 있었다. 사실 시편 찬송 125가지가 다른 선율과 운율을 가지고 있는 데 이것은 음악적으로 볼 때 놀라운 사실이다.
  •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칼빈의 이런 생각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는 교회전통을 충실히 반영했다. 오늘날 제네바 시편 찬송을 부르는 교회들은 찬송을 부를 때 악기를 사용한다.
  • 전 회중이 같은 곡조로 불러야 했다. 여기서 다시 칼빈은 보수적인 입장이다. 역대하 5:13에 “노래하는 자들이 한목소리를 내어 시편을 불렀다.”라고 말씀하기 때문에 교회는 이것을 그대로 가르쳤다.
  • 악기 없이도 찬송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제네바 시편 찬송이 중세 전성기(AD 1000-1300)의 리듬 있는 평범한 노래와 같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음이 단조롭고 조용하며 상대적으로 느린 그레고리 성가를 떠올린다. 그러나 중세 전성기 다른 교육 중심지는 그렇지 않았다.  찬송과 시편 찬송은 리듬 있게 열정적으로 불렀다. 칼빈과 그의 동역자들은 이런 스타일들을 회복하기 원했다.    
  • 비록 몇몇 제네바 시편 찬송이 새로웠으나 다수는 교회의 전통적인 그레고리 성가로부터 온 것이다. 프랑스 음악이론가 피에르 피두는 1962년에 출판한 ‘위그노 시편 찬송’에서 다수의 제네바 시편의 멜로디가 중세 교회서 사용된 교창과 층계송(層階頌) 그리고 그레고리성가집에서 발견되는 멜로디의 각색인 것을 발견했다. 물론 이것은 루터의 찬송에서도 발견된다.
  • 일부 조용한 참회 시편 외에는 열정적이고 무도곡(舞蹈曲) 같다. 구약     시편 자체처럼 음악은 ‘전쟁-춤’이다. 시편은 전투적이고 대적을 하나님께서 물리쳐 주시도록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부른다. 제네바 시편의 음악은 이 같은 시편의 문맥과 잘 어울린다.

제네바 시편 찬송이 프랑스에 보급된 이후 프랑스 개혁교회가 사용해 왔다. 다시 헝가리로 보급되어 오늘까지 헝가리 개혁교회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또 화란 개혁교회 예배의 중심이 되어 왔으며 캐나다 개혁교회와 기독 개혁교회(CRC) 그리고 본인이 협동 목사로 있는 개혁주의 복음교회연합(CREC)으로 퍼져갔다. 또 존 후스의 인도하에 종교개혁 이전에 시작되었던 체코 형제교회의 일부에도 채택되었다.

초기에 제네바 시편 찬송의 멜로디가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되었으나 결국 더 단조롭고 활기 없는 음악에 의해 압도되어버렸다. 나는 오늘날 그것을 사용하는 일본의 몇몇 개혁교회가 있다고 안다.

결론

시편을 즐겁고 열정적으로 부르도록 함으로써 칼빈은 회중을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찬양하도록 이끌었다. 루터 역시 시편과 찬송으로 그렇게 했지만 칼빈의 시편 찬송이 훨씬 더 완벽했다.

제네바 시편 찬송은 1,000년 동안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회중이 예배 중에 수동적이던 것을 간단하게 날려 버렸다. 또 제네바 시편 찬송은 하나님 백성의 영혼으로 강인함을 갖게 했다. 루터파와 성공회는 정치와 사회를 의미 있게 바꾸지 못하고 불충분한 개혁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시편 찬송은 사회적인 악과 억압을 외면하지 않으며 칼빈주의자들은 사회 변혁을 이끌었다.

칼빈주의 국가들에서 정치 경제적 자유가 번성해 왔고 독재가 사라져 갔다. 만약 우리가 제네바 시편 찬송에 하나의 비평을 가한다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둘째 행이 첫째 행을 보충하는 방식으로 시편을 행들을 기록하셨다. 그러므로 대개 운율적으로 작곡한 시편 찬송들은 하나님이 주신 시편의 형태를 파괴한다.

우리가 칼빈 자신의 원칙들과 칼빈주의의 “성경에 따라서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하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하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기록하신 방식대로 시편을 열정적으로 부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실제 시편과 설교와 같은 운율의 시편 둘 다 원한다. 우리는 칼빈의 원칙에 충실 하자. 그리고 하나님에게 바쳐져야 할 하나님의 노래를 하나님이 가르치신 방법대로 부르는 데로 돌아가자.(*) 글쓴이 / Dr. James B. Jordan(University of Georgia B.A.,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M.A.,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Th.M.,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Ph.D., Cavinism Theologians, Biblical Horizons ministries president)

 ㈜ 이글은 지난 2009년 10월 30일 고신대학교 비전관 4401호에서 있었던 고신대학교 개혁주의학술원이 주최한 ‘제4회 종교개혁기념학술세미나’에서 있었던 제임스 요단 박사의 강의 내용을 요약 편집한 것입니다. –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