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청교도 사상의 세 가지 핵심

청교도의 신앙과 삶을 이끈 청교도 사상의 세 가지 핵심

청교도를 청교도 되게 하고 청교도의 신앙과 삶을 이끈 세 가지 청교도 사상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주권’ 사상

청교도의 전통을 이어받은 아더 힐더샘(Arthur Hildersam, 1563–1632)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고통에 빠질 때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 위로를 구해야 한다. 죄 용서는 하나님의 큰 심판에서 구원보다 더 요구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하나님 은총 외에는 다른 소망의 근거가 없다. 왜냐면 우리가 죄 용서받는 것은 오직 주님의 긍휼에 있기 때문이다.

이같이 인간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고난에서 벗어나기 이전에 우선 하나님을 신뢰(信賴)하는 그것 그 자체가 소망이라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을 온전히 주권자(主權者)로 인정한 청교도 사상에 근거한 말이다. 존 오웬(John Owen, 1616-1683)도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의지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일반 원리로 확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성령의 신령한 도우심을 얻기 위한 계속적이며 열렬한 기도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에 대한 지식을 얻음에 있어 절대 필요 불가결한 수단이다. 이 지식이 없이는 다른 모든 것들도 얻을 수 없고 소용도 없는 것이다.

또 청교도 사상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예배를 설명하는 중에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도리에 대해 아주 명확히 논리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하나님에 대한 앙모, 신뢰, 기원, 감사가 요구된다. 앙모(仰慕, adoration)는 ‘각 개인이 하나님의 위대성에 머리를 숙여 공경과 경배를 드리는 것’이며, 신뢰(信賴, trust)는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굳게 믿으며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며, 기원(祈願, invocation)은 ‘고난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도우심만 의지할 것을 구하는 마음의 습성’이고, 감사(感謝, thanksgiving)는 ‘모든 선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태도’이다.

  청교도들의 예배 목적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에 있었다. 특히 아주 독특한 것은 어떠한 역경과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송축하고 찬양하는 태도를 잃지 않는 데에 있다. 그것이 감사함이든 의지함이든 기도함이든 모두 하나님을 높이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청교도들은 이처럼 칼빈의 성경적 사상을 잘 이어받아 그들의 예배관과 성경관 등을 잘 정립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 그 뿌리이며 토대이다. 칼빈 신학의 특징은 곧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청교도들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균형 잡힌 교리이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가 주의 말씀에 대한 사도들과 성도들의 순종과 헌신으로 세워진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전도와 선교는 모든 교회의 책무이다. 이러한 수고가 없이는 교회 성장도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신앙 원리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주권적인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순종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신다는 것이다.

그린힐(William Greenhil, 1591–1671l)은 “우리가 회심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에스겔 18:32의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라는 말씀으로 회심자의 적극적인 행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 청교도의 전통을 이어받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도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잘 드러내었다. 그는 죄인의 유일한 강구책은 무엇보다도 먼저 눈을 돌려 자신을 구원해줄 분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청교도들은 성화(聖化, justification)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설교하고 또 성경대로 순종하고 실천하려고 힘썼다.    

이같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선포하면서 ‘인간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 주장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지성적(知性的)인 논리가 요구된다. 그러하기에 청교도들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뜨겁게 기도하며 모든 일에 하나님을 주권자로 인정하는 삶을 살았다.

2.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

존 오웬(John Owen)은 계시(啓示)로서의 성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계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인 정보를 주는 전달이라 본다. 또 이는 성령의 역사로 인해 주어지며 그 메시지는 아무리 불가해 보일지라도 절대적인 신봉과 순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스스로 증거 하였다고 본다. 아담, 아브라함, 모세는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알았고 스스로 확신하여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행동했다.

‘청교도의 왕자’라 불리는 존 오웬은 성경을 신적(神的) 권위의 직접적인 하나님 말씀임을 확고히 주장했다. 그리고 그 신뢰에 대해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성경에서 그 증거들을 찾고 있어 성경이 절대적인 진리임을 선언한다. 그는 “성경의 권위는 그 신적 기원에 있다. 성경은 성경을 쓰신 분 때문에 권위를 갖는다.”라고 했다.(Works, 16:297, 309.) 

리처드 백스터와 존 오웬은 “성경에 어떤 오류도 없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토마스 왓슨(Tomas Watson)은 “당신이 읽고 있는 성경 한 줄 한 줄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라.”고 했으며(Packer, p19.) 존 엘리어트(John Eliot)는 ”성경의 글은 곧 하나님 말씀이다.“라 했다.(Carden, p4.)

청교도들은 자신의 경험을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성경 역사에 투영(投影)시켜서 읽었다. 성경이 그들의 상황을 향해 말씀한다고 확신한 청교도들은 그러므로 매일 성경 읽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청교도들이 성경을 이같이 행위의 근본으로 보게 된 원인은 성경이 개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 까닭이다.      

로버트 해리스(Robert Harris)는 “성경을 세심하게 읽어야 한다. 또 그것을 적용할 때는 우리 양심의 깊은 곳까지 적용해야 한다. 그러면 성경은 우리 마음을 능히 고친다.”라고 했다.(Rogers, A Treatise of the New, p. 385.) 인크리스 매더는 성경이 “마음에 감추어 둔 은밀한 생각까지도 추적한다.”고 했다. 굿윈(John Goodwin, 1594-1665)은 “이 능력은 마음과 영혼을 새롭게 하고 민첩하게 한다. 한마디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세우는 능력이다.”라고 했다.(Knott, The Divine Authority of the Scriptures Asserted, p. 36.) 

이처럼 청교도들은 전적으로 신적(神的) 권위를 두고 성경을 대했으며 이것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고 그것을 인생의 지침으로 여기며 살게 했다. 성경이 무오(無誤, Inerrance)한 진리의 말씀이며 불오(不誤, Infallibility)한 말씀이 아님을 그들은 정확히 인식하고 주장했다. * 성경무오 – 성경은 전체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주장이다. 성경불오 – 성경의 구원에 관한 중대한 내용에는 오류가 없으나 그 외 내용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결국은 성경에는 오류가 있다는 주장이다.  

3. ‘신행일치’의 삶

 제임스 패커는 청교도들의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의 기독교 신앙에 모든 것이 포함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생활 전체도 하나로 이루어졌다. 즉 지각(知覺)과 활동(活動), 개인 능력과 창조력에 있어 자신의 은사들을 바르게 인식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거룩 되게 함으로 하나님을 존귀케 한다는 단 한 가지 목적뿐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의 구별이 없었다. 피조물인 그들이 관계하는 모든 게 신성(神聖)했고 어떤 활동이든지 성별(聖別) 되어야 했다. 즉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져야 했다.

그러므로 청교도는 하나님 나라에 마음을 둔 열심 안에서 실제적이고 현실적이고 충만한 기도와 목적을 가지고 실천하는 질서의 남녀들이 되었다. 그들은 삶 전체를 하나로 보았기에 묵상과 행동이 하나였고, 예배와 일과 하나였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였고, 개인 정체성과 사회 정체성이 하나였고, 외적 행동이나 내적 양심이 하나였다. 그들은 이같이 성경에 제시된 그리스도인의 모든 의무 전체를 하나로 융합하는 데 있어 놀라운 조화를 이루었다.

청교도들은 성경을 그저 설교하고 어떤 고상한 지식으로 향유를 한 게 아니라 삶의 분명하고 절대적인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평등사상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섭리로 창조된 세상에 이원론적인 시각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는 확실한 구분을 두어서 지극히 성경적 인식을 하고 겸손히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예배와 삶의 분리에서 오는 로마 가톨릭의 은폐 된 고질적인 부패를 경험한 그들은 예배와 일(삶)을 하나로 조화(調和)시켜 인간의 모든 관계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개선해 나가는 놀라운 경건(敬虔)을 보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있어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그들은 천국에 마음을 두고 종말을 항상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도록 설교했고 실천했다. 즉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것처럼 진지하고 거룩하게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살았다.

자카리 그로프턴(Zachary Crofton)은 청교도적 입장에서 회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회개는 습관, 능력, 원칙, 샘, 뿌리 그리고 성격이다. 믿음은 속이 비고 단회적이고 순간적인 행동이 아니다. 회개 역시 단회적인 참회(懺悔) 행동과 다르며 구별이 된다. 회개는 한 시간 또는 하루의 일이 아니라 일생의 부단한 계획이며 과정이며 영혼의 성향이다. 태생, 양육, 교육, 교훈, 예술, 지식, 도덕적 권고, 친절한 충고 그리고 복음 사역 자체도 전능하신 성령의 직접적인 활동이 없다면 회개를 이룰 수 없다.

‘회개의 심령’을 주시는 것은 높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단독적이며 대가 없이 주시는 그의 특권이다. 회개는 율법의 결과가 아니라 순수한 복음의 은혜이다. 회개는 복음에 의해 전해지고 언약에서 약속되며 세례에서 보증되고 성령에 의해 산출되고 그리스도의 피로부터 독특하게 흘러나오는 것으로 모든 면에 있어 초자연적이다. 따라서 돌아오는 모든 죄인은 하나님께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렘 31:18)라고 기도해야 한다.(Zachary Crofton의 글 인용)

청교도들은 삶 속에서 항상 죄(罪)와의 싸움을 염두에 두고 살았다. 그들의 사상에서 회개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삶에 초점을 둬야만 가능하다. 그들은 죄의 성격을 잘 알았고 인간의 성향을 너무나도 잘 파악했다. 회개란 사실 그들에게 있어서 능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이유는 회개가 성령과 예수의 연합사역으로 성취되는 은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그것을 그냥 상투적인 문구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아주 독특한 것으로 생각하고는 회개를 감격에서 솟구쳐 나오는 의지로 실천했다. 여기서 그들의 성화 사상이 아주 핵심적으로 산출 된다.

청교도 신학자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는 믿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믿음은 머리에서 심령까지 이르며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 신뢰이다. 인간은 그리스도와의 약속을 통해 자신의 영혼이 쉬도록 자기 의존과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 이로써 그는 자기 영혼에 믿음의 기질을 표현하고 확립한다. 그리고 일단 확립된 믿음은 새 생활의 역동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믿음은 소망을 낳고 사랑으로 역사하며 인내로 자신을 단련하며 선행에 나서며 마음속에 자연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솟아나는 기쁨과 평안의 원인이 된다.

청교도들은 믿음도 사람의 의식과 마음속에만 자리 잡은 아무 능력도 성취도 없는 것으로 보지 않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삶으로 보았다. 그것은 삶과 연관되고 통합될 때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들의 이런 믿음은 소망을 낳고 사랑을 낳고 선행을 낳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항상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인간의 도리를 얘기하고 있다.

그들은 또 인간의 자유의지는 상처를 입었으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를 향한 믿음으로 성령께서 회복시키시고 선을 행하도록 인도하신다고 보았다. 그들은 그런 삶으로 많은 사람을 초대하고 있다.

이같이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창조주시며 구속 주로 시인하는 ‘하나님 주권’ 사상에 바르게 서서 그의 말씀인 성경을 온전 인정하고 절대적인 진리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항상 대면하듯 그리고 그 말씀을 최고의 지침으로 삼고 삶을 영위했다.

그리고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나 하나님의 능력 있는 권세를 믿고 의지했기 때문에 죄 앞에서 항상 담대하며 겸손(하나님 의지함)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그들의 자유의지(自由意志)에 관한 생각이다.

제임스 패커(J.I. Packer, 1926- )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도가 자유롭게 대담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 무서워하지 않는 어린아이의 담대한 ‘얼굴’을 닮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어린아이는 부모들의 사랑을 완전히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청교도들의 자유의지에 관한 생각은 이처럼 자못 순수하다. 어린아이를 예로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그 신앙이 순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으나 역대기에 나오는 다윗의 찬양대를 볼 때 하나님은 그 예배형식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고 송축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예배와 기도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자녀 된 인간을 통해서 일하시길 원하시며(창 18:21-33, 출 17:8-16, 딤전 2:1),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길 원하신다.(마 25:21-23, 엡 3:6) 청교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았으며 왕 같은 제사장(벧후 2:9)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길 몸부림을 쳤다.

청교도들은 또 ‘준비주의’(preparationism) 자들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들은 구원을 위해서 즉각적인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의무 사항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교회를 다니고, 설교를 듣고, 삶을 개혁하고, 십계명에 비추어 자기반성하고, 다가오는 대 심판 날에 대한 묵상하는 것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진리의 조명과 확신을 심어주는 모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할 수 있도록 지적해 주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회개의 긴급성과 필요성을 강조하며 즉각적인 구원을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권면을 고수한다면 이 양편 사이에 아무런 혼란이 없다. 이처럼 믿음의 방편과 즉각적인 구원을 받는 믿음의 효과는 모순이 아니고 상호(相互) 보완적이다.

또 그들은 인간의 책임에 대해 적극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그들은 은혜의 수단들(The Means of Grace)을 강조하는데 이는 ‘값싼 은혜’를 경멸하는 그들의 강한 생각에서 비롯한다. 즉 이것은 주권적인 하나님의 섭리로 믿음을 얻고 구원받았으니 자유의 삶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방종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사람들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또 연약한 인간들은 무언가를 의지하고 기대어야만 세상을 살 수 있다는 식의 반기독교적 이성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항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께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온갖 지성으로 개혁적인 청교도 신학을 이루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理性)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알게 되고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대단히 큰 자부심을 느꼈다.      

그들의 신앙은 결국 진리를 위한 투쟁이며 진리로 인한 헌신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연약한 비이성적인 자들이 아니라 참된 이성적인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존 칼빈(John Calvin)은 그의 ‘기독교강요’ 제2권 4장에서 자유의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 죄에 묶여 악 밖에 어느 것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은, 창조에 의해서가 아니고 본성의 부패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왜 신자들이 면류관을 받게 된다고 하는가?(딤후 4:8)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로 택함을 입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때문이지, 그들 자신들의 노력 때문은 아니다. 따라서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공적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 쓸데없는 공포는 떨쳐 버려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함과 관대함은 무궁무진하며 다양하기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마치 우리 자신의 공로인 것처럼 하나님은 그 은혜를 우리에게 상급으로 주신다.

이처럼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 은혜의 섭리 안에서만 정당화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철저한 이성과 지성으로 성경을 사고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뿌리를 이해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래서 우리의 자유의지란 그의 뜻을 힘껏 따르고 악과 대항하고자 하나님 편에 계속해서 매달리도록 애쓰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가능하다고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의 성화론은 결코 신인(神人) 협동이 아니라 ‘하나님 주권’ 사상에 기초한다.(*) 편집 / 정은표 목사(개혁신앙 편집 발행인)  참고, http://www.cyworld.com/hiswill2003/3717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