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사

교리를 알면 성경이 보인다(15) 은혜 교리와 칭의 교리

교리를 알면 성경이 보인다(15) 은혜 교리와 칭의 교리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않으니 곧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 5:15)

1. 초대교회의 은혜 교리 이해

 1세기에는 동방과 서방을 막론하고 은혜 교리가 언급되는 글을 찾아볼 수 없다. 속사도 교부들과 변증가들이 은혜 교리에 관심을 갖지 못한 이유 몇 가지 꼽아 볼 수 있다.  

첫째, 유대교적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율법주의적인 전통과 배경에서 산상보훈의 엄격한 윤리적 요청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건 보다 나은 의(義)를 성취하는 것이었다. 이런 뜻에서 교회서 행하는 참회(懺悔)를 ‘회개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둘째, 이와 전혀 다른 방향의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영지주의는 4세기 초까지 기독교를 위협하는 사상이었다. 영지주의는 물질을 악으로 보는 이원론(二元論) 사상이었으므로 교부들은 이에 대항해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고 변증했다.

그리고 영지(靈知) 즉 지식을 통해 구원 얻는다는 영지주의 논리에 대항해 사람은 선한 사업을 해야 한다는 것과 윤리적으로 새로운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밖에 고대의 신비주의와 금욕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과 짝해서는 안 되고 멀리해야 하며 금욕적(禁慾的)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상이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일반 종교적인 구원에 대한 이해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한 데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보다는 율법을 지키는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2. 동방과 서방 교부들의 은혜 교리 이해

속사도 교부들과 변증가들은 은혜 교리를 영지주의의 영향 때문에 철학적으로 이해했다. 하나님 이해와 그리스도 이해 즉 삼위일체 교리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까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 간의 긴장 관계에 초점을 두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본질(本質)과 하나님의 일하시는 능력(能力)을 구별했다.    

하나님의 본질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전제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음 단계로 ‘창조되지 않은 것’과 ‘창조된 것’을 구별하면서 ‘창조된 것’은 현실에 실재하는 모든 것이라 하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그의 능력을 통해 만나며 능력 안에서 우리는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실재를 만난다고 한다.

은혜 교리도 이런 테두리에서 이해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능력의 일이 곧 하나님의 경륜 즉 구원 사역이라 한다. 어의학(語義學) 연구에 따르면 동방의 신학에서는 ‘은혜’(χάρις, charis)는 ‘경륜’(οικονομία, ojikonomiva)과 같은 기능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의 모든 구원 사역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 한다.

초대 교부들의 은혜 교리를 더 면밀하게 이해하려면 ‘창조’와 ‘구원’ 사이의 구별에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구원은 창조에서 이해하고 창조는 구원에서 면밀하게 검토한다. 창조라고 하면 인간 창조를 두고 하는 말인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신의 경륜 속에서 단계적으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죄는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 형상을 흐리게 하며 일그러뜨리고 그로 하나님을 향하는 인간의 길을 차단한다고 한다.  

구원은 이러한 결과로부터 인간으로 자신을 회복하게 하며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 형상이 새로운 빛을 발하게 하는 걸 의미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로고스(λόγος, Logos)가 인간이 되시고 자신 안에서 하나님 형상으로서 인간의 상(像)을 충분히 나타내심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의 영(靈)을 통해 하나님 자신 안의 형상과 같이 될 수 있도록 회복하게 하신다고 한다.

그러므로 기독론에서 로고스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人性)의 관계를 규명하는 게 구원론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진정한 형상이 하나님 형상으로 드러난다고 한다. 이러한 ‘보편적 구원 과정’을 5세기 이후의 사람들은 ‘신이 되는 것’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이레니우스(Irenaeus, 130-202)부터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 296/298-373)를 거쳐 다마스커스의 요한((John of Damascus, 675-749)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인간을 신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는 뜻의 말을 여러 가지로 표현했다. 그렇다고 이 표현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구별이 없다는 말로 오해하면 안 된다.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라는 말은 곧 인간이 먼저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이 되는 것을 뜻한다.

동방 신학에서는 이를 가리켜 ‘하나님에 참여함’이라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 개념은 나중에 서방교회에서 논의한 은혜 교리와 무관하지 않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成肉)과 십자가와 부활과 종말론이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께 참여하는 것은 곧 영생불사(永生不死)를 의미한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그리스적인 교육이념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플라톤 이후 교육의 목적은 인간에게 자신의 진실한 본질의 상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가르쳤다.(딛 2:12) 또 하나는 이런 개념에서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인간의 공로 행위와 숨겨진 ‘형상’의 실현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경우 예전(禮典) 특히 하늘나라에 속한 예전이라는 성찬이 신학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어떠한 기능을 가지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고 한다. 즉 성찬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비밀이 숨겨져 있으며 그 성찬에서 신자들은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는 성령을 경험한다는 말이다. 그런 경험은 수동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건으로서 ‘은혜로냐 아니면 행위로냐?’의 질문과 전혀 거리가 먼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의 신성에 관심을 두고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하나로 파악하는 이해 즉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파약하는 이해와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하면 죄를 지향하는 인간의 형상이 어떻게 다시금 자유를 얻게 되며 빛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은 ‘신(神)이 되는 것’ 즉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거라고 한다. 인간은 이같이 ‘신에 참여함’으로 인간의 목적을 발견하며 인간이 된다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인간이 자기 본래의 형상을 발견함으로써 들어가게 되는 새로운 상황이라고 한다. 그것은 곧 예전을 통해 달성되며 그리스적인 교육 이넘(paideia)의 개념으로 표현한 거라고 본다. 다시 발하면 ‘신에 참여함’은 은혜의 초월성 즉 하나님의 존재와 일하시는 ‘에네르기아’(능력 또는 활동)를 창조와 비(非) 창조의 첨예한 구별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그러하다면 동방교회 신학자들은 오늘날도 루터를 그리고 나아가서는 바울을 이해하는 것이 분명 어려울 것이다. 서방교회의 구원 이해가 동방교회의 구원 이해와 다른 점을 먼저 서방교회에 속한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에게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특히 은혜에 대한 이해에서 동서 간에 현저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은혜에 대한 이해가 서방교회는 개인적이며 인간적인 구원을 말하고 있는 반면에 동방교회는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우주론적인 구원을 말한다. 서방에서는 인간의 치유와 삶의 실제를 말하는가 하면 동방은 피조물 전체의 회복과 세계의 의미를 말한다.      

4,5세기에 와서 인간의 성품에 대한 교리가 교회에서 중요한 주제로 부각이 되었다. 인간 창조와 타락 이야기 조명하에 인간 구원에 대한 희망을 밝히려 하였다. 당시의 지배적인 이단 사상은 육체를 악으로 간주하는 마니교(Manichaeism, 226-651년 페르시아 사산 왕조 시대 영지주의 종교 중 하나)였다.  

동서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대체로 인간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된 존재로 이해했으며 영혼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려고 깊이 생각했다. 오리겐(Origen, 185-254)을 따르는 오리겐학파는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 창조를 주장하며 영혼이 선재(先在)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영혼이 육체와 결합한 것은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한다. 디디무스(Didymus the Blind, 313-398)가 그렇게 가르쳤고 스페인의 이단 프리실리안(Priscillian, ?~385) 파가 그런 가르침을 따랐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 교부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다가 6세기에 이르러서야 이에 대한 교리가 정립되었다. 어거스틴은 몸이 감옥 역할을 한다는 데는 반대한다. 그리스 교부들은 말하기를 개개의 영혼이 몸에 결합 되는 순간에 개별적으로 창조된다고 했다. 서방의 힐라리우스(Hilarius, 300-368),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40?-397), 제롬((Jerome, Eusebius Hieronymus, 347?-420) 등이 같은 견해를 가졌으며 펠라기우스도 마찬가지로 이해한다.

3. 아타나시우스의 인간론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 296/298-373)는 인간이 다른 유한한 존재처럼 말씀으로 무(無)에서 창조되었다고 한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고 부패할 수 있어서 무(無)로 환원될 수 있는 존재이며 초월적인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된 존재이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보다 인간에게 너그러움을 보이셨다고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함으로써 초자연적인 지식을 갖게 하시고 이성적(理性的)이며 부패하지 않음과 영생불사(永生不死)를 주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런 상태를 보존하려고 그를 낙원에 두셨으며 인간의 원래 상태는 초자연적 축복 상태였다고 한다.

아타나시우스의 신비(神祕) 사상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영혼이 하나님을 닮아 가려는 갈망을 계속 새롭게 하며 명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계속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고 물질세계에 정신을 빼앗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 형상의 은혜를 박탈당하자 부패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본성이 무지와 우상 숭배로 실추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가르침을 받아 이런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비록 사람이 몸이 불사(不死)를 상실했다 해도 영혼의 불사(不死)는 그대로 남아 있어 자신의 의지도 자유롭게 유지한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지워져 없어지는 것도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유 의지를 활용해 말씀을 이해하는 일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한다. 또 사람이 가진 하나님 형상은 먼지로 뒤덮인 그림처럼 되었으나 형편없이 망가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또 아담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전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아담의 죄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다거나 혹은 도덕적인 정죄에 동참하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아타나시우스는 인간이 죄 없이 살 수도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와 세례 요한이 그런 인물이라고 한다. 아타나시우스의 이러한 견해는 4세기 동방교회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갑바도기아(Cappadocia) 교부들은 아담이 에덴에서 이방 신과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329-390)는 에덴동산을 플라톤주의자들이 알고 있는 이상(理想) 세계라고 한다.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335-395)는 창세기 1:26 이하 말씀에 근거해 인간의 이중(二重) 창조를 말한다. 플라톤주의자들 말을 빌리면 처음 창조된 인간은 성(性)의 구별이 없는 혹은 양성(兩性)을 온전히 갖춘 완전한 인간이었는데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범할 걸 미리 아시고 남녀로 나누셨다는 것이다.  

안디옥 전통에서는 철학적 사변이 좀 덜한 편이었다.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9-407)은 아담이 하나님 형상을 지녔다는 것은 아담이 여자를 포함 다른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 소유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리스 교부들은 인간 자유의지(自由意志)는 상실되지 않았다고 하며 그것이 곧 실제적 범죄의 근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서방 교부들보다 인간을 더 낙관적으로 보았다. 즉 동방에서는 원죄설을 배제하는 조짐이 보였다. 갑바도기아의 교부들 즉 닛사의 그레고리 및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와 크리소스톰 모두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죄에서 면제된다고 가르쳤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구원이 우리 자신과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하며 선을 행하는 데 하나님 도움이 필요하다 한다. 그리고 선한 의지가 하나님에게서 온다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선한 일을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크리소톰은 하나님 도움 없이는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은혜가 먼저 있어야 하지만 자유의지와 함께 역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4. 어거스틴 이전 서방교회 인간론

인간의 초기 상태는 초자연적 축복 상태였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였다. 힐라리우스는 사람이 영생하도록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 자신의 축복을 누리도록 정해졌다고 한다. 암브로스는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이 죄를 범하게 했다고 한다. 죄를 범한 것은 그의 영혼이었으나 범죄 행위가 육체도 부패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죄가 그 안에 거하게 되었으며 몸을 ‘죄의 몸’이라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류의 죄는 아담과의 연합에서 성립하는 것이라고 본다.  

암브로스의 무명의 제자에 따르면 첫 사람 아담 안에서 우리 모두 죄를 범했으며 그 성품의 유전으로 죄책(罪責)의 유전이 한 사람으로부터 모든 사람에게로 전수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담은 우리 각 사람 안에 있으니 그 안에서 인간성 자체가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로마서 5:12의 ‘이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매’라는 말씀에서 구 라틴어 번역을 따라 ‘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매’로 이해한다.

암브로스는 하나님 은혜가 공로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다만 주시는 이의 뜻을 따라 주어지는 것이며 기독 신자가 되겠다는 결정은 하나님에 의하여 미리 준비된 것이다. 우리의 모든 거룩한 생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빅토리아누스 역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까지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한다. 이같이 은혜에 관한 서방의 교리는 일찍이 어거스틴 이전부터 동방 교부들의 이해와는 차이를 보였다. 따라서 ‘은혜 교리’에 대한 어거스틴의 이해가 서방의 전통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동방과 서방의 이런 차이점은 서방의 전통이 그리스 철학이나 동방의 신비 종교 및 율법주의 유대교의 영향에서 더 멀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방이 형이상학적 사색에 관심을 보였지만 서방은 실제 문제에 더 관심을 두었기에 인간과 구원에 대한 교리에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어거스틴 당시에 바울 서신의 연구가 활발했으며 인간론 중심의 은혜 교리가 발전하게 되었다.(*) 글쓴 이 / 김영재 교수(서울대 종교학과, 영국 Clifton Theological College 수학, 독일 Wuppertal Kirchliche Hochschule 수학, 총신신대원 편목, 독일 Phi1ipps Universitat zu Marburg에서 신학박사, 독일 포이딩겐 독일인교회, 미국의 미네소타와 아틀란타의 한인교회 목회, 서울대 강사,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역임, 저서: Der Protestantismus in Korea und die calvinistische Tradition, Peter D Lang, Frankfurt am Maln, 1981.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 출처: 김영재 저 ‘기독교 교리사’ (서울, 합신대학원 출판부), 2009. < 다음에 계속 >